평신도가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평신도 설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그 논쟁의 중심에는 공적으로 교회를 가르치고 훈계할 사람을 결정하는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이며, 그러한 능력을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결정할 것이냐에 대한 논쟁이었다. 원시 기독교, 즉 교회의 아주 초창기에는 말씀의 사역은 사도들, 예언자, 복음 전도자, 그리고 교사들에 의해서 수행되어 왔다(엡4:11; 고전12:28). 2세기 초에 기록된 열두 사도 교훈집인 '디다케'는 감독과 집사를 별도로 구분하면서, 예언자와 교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가 보다 조직화되면서 예언적인 설교가 점점 사라지고, 말씀 사역이 감독과 목회자들에게 국한된 가르침의 직분이 되었다. 최초로 평신도 설교에 대해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기록은 454년에 감독 맥시무스(Maximus)에게 보내는 교황 레오 1세의 서신 가운데 나타나 있다. 그 서신에는 안수 받아 세워진 성직자를 제외하고는 수도사나 평신도, 어떤 학문적인 명성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설교하고 가르칠 권한을 요청할 수 없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11-12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영적 각성은 다양한 평신도 설교 운동이 일어나게 했다. 특별히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에서 강하게 일어났다. 당시 설교자의 자격은 교회나 교단이 어떤 권한을 부여했느냐보다는 예수님과 사도들과 같이 얼마나 청빈한 삶을 살면서 가난한 삶을 살았느냐가 설교하도록 파송하는 조건이 되었다. 사도적인 삶의 내용이 설교자의 중요한 자격이 되었고, 청빈과 가난 그리고 거룩한 삶이 설교자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요건이 되었다. 당시 왈도파(Waldensians)로 알려진 분파에서 평신도 설교자들을 많이 파송했다. 그 당시의 교황이었던 인노센트 3세는 로마서 10:15를 근거로 하여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보내심 받았다는 사실을 단순하게 대신할 수 없다고 하면서, 교회의 인준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교황의 시도는 왈도파의 평신도 설교자들을 교회 안에 묶어 두는 데 실패했으며, 그 이후 프란시스파는 더 많은 평신도 설교자들을 낳았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본질적으로 성직자들과 평신도는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만인 제사장설을 내세운 종교 개혁자들의 주장들은 평신도 설교는 플테스탄트 전통에서는 토론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루터나 칼뱅은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파하도록 부름 받았지만, 이 사역을 성취하도록 하는 가장 전형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를 수행할 수 있는 은사를 가지고 있고, 또한 그를 위해서 정규적인 훈련을 받은 개인을 지정하여, 안수하여 세워서 그 사역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라고 제한하고 있다.
18세기에 들어오면서 부흥운동, 특히 웨슬리를 중심으로 생겨난 메소디스트(mehtodist) 운동은 평신도 설교에 있어서 전형적인 발단이 되고 있다. 존 웨슬리는 영국이 산업화 현장에서 배우지 못한 사람들과 미국의 개척 시대 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규적인 신학 교육은 받지 못했거나, 부족하지만 헌신된 평신도 설교자들을 보내어, 적절한 언어를 통해 그들이 만난 하나님과 우주적인 구원의 메시지를 모든 사람에게 전하게 했다.
1983년에 개정된 「교회의 법규집」(Code of Law)에 따르면, 로마 가톨릭 교회도 교회에 설교 사역에 평신도들의 참여를 허용하면서도, 주일 미사에서 행해지는 강론은 반드시 그 미사를 집전하는 감독이나 사제로 국한시키고 있다. 그러나 사제 숫자의 감소로 사제가 없는 가톨릭 교회에서는 평신도가 설교하는 교회가 많아지고 있는 추세이지만, 안수 받은 성직자가 있는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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