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자와 인도자이신 성령
2006-09-02 04:27:53 read : 3671
대리자와 인도자이신 성령
레온아르드 라가츠 목회자, 교수, 종교사회주의 운동 중심 지도자, 류장현 박사(베를린 훔볼트대학, 한신대학교 출강. 조직 신학) 옮김.
이 논문은 Leonhard Ragaz, "Paraklet", Z rich (o. J.연도표시없음), S. 1-10의 완역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요14:16).
나는 최근에 사명감을 가지고 특별히 '그리스도의 혁명'에 관해서 말했다. 그리스도의 혁명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근거한 세계 혁명과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신앙이 경험해야만 하는 혁명을 - 이것이 세계 혁명의 확고한 전제이다 - 동시에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대리하는 새로운 방법, 선과 악에 대한 새로운 입장, 십자가와 열린 무덤의 새로운 관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대한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했다. 또한 이미 오랜 전부터 나의 사상과 선포에 속했던 그리스도와 그 안에서 나타났고 구체화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새롭게 이해한 메시지의 어떤 측면들을 강하게 강조했으며 이해시켰다. 나는 이제 과거에서 미래로, 존재하는 것에서 생성하는 것으로, 고정된 것에서 운동하는 것으로, 죽은 것에서 살아 있는 것으로 인도하는 180도 방향 전환, 곧 이 그리스도의 혁명의 핵심, 출발점, 목표에 대하여 할 수만 있다면 더 말하면서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이 그리스도의 혁명을 위한 중요하고 훌륭한 상징이 신약 성서, 특별히 요한 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관습적인 기독교에서 자신의 권리를 얻지 못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위로자'(역자주: 보혜사)라고 부르는 '파라클레트'(Paraklet)이다. 그러나 이 위로자라는 말은 불충분한 번역이며, 정확히 번역하면 문자대로는 '대리자,' 의미적으로는 '인도자'이다. 이 파라클레트의 상징 - 형태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예수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종결된 일이 아니라 전진하고 전진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것은 성공과 결과를 경험해야만 하는 시작이며, 성취되어야만 하는 약속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의 두 극인 '가르침'과 '활동', 다르게 표현하면 그의 '메시지'와 '행위'를 통해서 이 진리를 제시한다.
2 그리스도는 먼저 그의 '메시지'와 '가르침'을 통해서 이 진리를 제시한다.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요한16:12-13).
실제로 자주 인용되는 이 엄청난 말씀은 지금까지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다. 우리는 이제 그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것이다.
첫째, '예수의 진리의 선포는 시작과 끝이 아니라 단지 시작일 뿐이다'. 그것은 그 시간에 계시와 명령으로 예수에게 밀려왔던 하나님의 무한한 진리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파도이다. 그 이상이 결코 아니다. 진리의 무한성은 하나님의 대양의 전망같이 아직 그리스도 앞에 있다. 그의 진리는 체제가 아니라 '운동'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리화와 체계화는 -신학으로서- 이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능욕과 왜곡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항상 새롭고 살아 있는 말씀으로서만 '참되다'.
둘째, 예수의 메시지는 완전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예수의 메시지의 완전성은 상이한 상황을 통해서 저지되었다. 그것은 우선 예수가 말을 한 상황을 통해서 저지되었다. 예수는 모든 시대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추상적 진리를 가르치는 철학자나 조직 신학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말씀은 "실존적"(existentiell)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예수는 상황을 위하여 상황으로부터 말하며, 그는 요한 복음이 카이로스라고 부르는 "순간"을 위하여 -"시간"은 최상의 번역이 아니다- "순간"으로부터, 물론 하나님의 순간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의 순간을 "위하여" 말한다. 그것은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순간을 위해서 순간 속에서 말하는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방식이다.
그러나 메시지가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살아 있는 메시지라면, 그 메시지가 다른 말을 해야만 하는 '다른' 상황과 순간이 올 수 있다. 예수의 상황과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아직 발전되지 않은 형태로 단순히 존재했던 과제와 문제들이 그리스도의 공동체에게 나타날 수 있다. 많이 인용되지만 자주 과장되게 주장되거나 잘못된 결과로 이용되는 예를 든다면, 당시에는 존재할 수 없었던 현재의 사회 문제, 노동과 노동자들의 문제, 임금 문제, 통화 문제, 여성 문제, 전쟁과 군비 문제 등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이 현재의 형태로 복음서에서 역할을 못했기 때문에 -그것들은 사실 다른 형태로 이미 복음서에 있었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오랫동안 크게 만족했다. 그러나 예수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예수의 명령과 약속에 의하면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이 이러한 문제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순간으로부터 찾아져야 하고 발견되어야 한다. 그것은 체제가 아니라 운동이며, 교리나 윤리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메시지의 생명력이다.
그리스도의 분명한 생각에 의하면 이 새로운 말씀은 예수나 모세가 말한 말씀의 학문적, 신학적 해석이 아니라 원천으로부터 창조되어야 한다. 다른 하나님의 현실적 말씀은 없다. 파라클레트는 예수가 말한 것같이 '진리의 영'이다. 그는 진리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 그는 제자들을 "모든 진리로"(잘못된 번역이다)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번역하면 "모든 진리 안에 있는" 제자들을 인도한다. 그것은 성령이 그들의 인도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세상과 그리스도 사건의 발전이 역사의 의사 일정에 따라서 그 때마다 가져오는 모든 문제들 안에 있는 제자들의 인도자이다. 제자들은 그들의 인도자를 신뢰한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고아로 버려 두지 않고," 진리의 영으로 그들에게 오며 그들과 함께 한다(요14:18ff). 제자들을 인도하는 분은 인도자(Paraklet)이신 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 이 진리의 영이다. '성서가 아니다!' 성서가 화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것은 문자가 아니라 영이다. 그리스도는 이 영을 통해서 계속해서 가르치며, 계속해서 활동한다. 그리스도의 가장 의미 심장한 말씀에 의하면 이 영은 그가 '읽은 것'이 아니라 '들은 것'에 관해서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순간을 위해서 하나님의 순간에 하나님에게서 직접 들은 것을 말한다. 성서의 문자가 아니라 그것만이 하나님의 현실적인 말씀이다. 개신교에서 일반화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문자에, 이런 의미에서 성서에 제한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중요하고 놀라운 표현의 심각한 오용이다. '이 그리스도의 말씀은 모든 성서노예근성(Bibelknechtschaft)을 철저하게 폐기한다'. 이 그리스도의 말씀은 모든 종교 개혁자들이 매우 격렬하게 싸웠던 "열광주의자들에게" 완전히 제공되었다.
그렇다면 성서는 더 이상 가치가 없는가? 아니다. '성서는 비로소 자신의 권리를 얻는다'. 성서는 하나님의 순간으로부터 하나님의 순간을 위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올바로 이해된다. 그렇게 해야만 성서는 비로소 '모든' 시대를 위한 책이 된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순간은 살아 있는 "영원"이 되기 때문이다.
특정한 상황을 위한 진리, 즉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상황을 위하여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우리가 잘못된 의미에서 성서를 펴서 읽으며 몇 사람의 신학자를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비방과 일탈은 그것을 통해서 폐지된다. 오히려 모든 진리의 인도자이며, 공동체에게 약속된 분이며, 하나님의 순간을 위해 하나님의 순간으로부터 말하며, 그래서 살아 있고 현실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살아 있는 진리의 영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앞으로 올 일들을 설명한다." -나는 신중하고 책임감 있게 '선포한다' 대신에 '설명한다'(deuten)로 번역한다- 앞으로 올 일들에 대한 항상 새로운 설명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제자들과 공동체의 과제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다양하고 매우 자의적인 해석을 통해서 성서 문자로부터, 다니엘서, 요한 계시록, 마태 24장과 병행구 등의 어떤 것으로부터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말씀하시고, '앞으로 올 일들을 설명하는' 진리의 영으로부터 얻게 된다. 물론 살아 있는 성서가 잘 도울 수 있을 때에! 그렇게 하나님 자신이 그 일을 통해서 우리와 공동체에게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성서의 뒤로 도망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충분히 말할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파라클레트에 대하여 말한 '모든'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을 주목한다. 이 "감당한다"(tragen)는 단순히 "이해한다"(verstehen)가 아니라 원문에 의하면 "견디어 낸다"(ertragen)이다. 그것은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
그것은 나의 생각에는 어떤 혁명적인 것이다. 그것은 '오직 제자들과 공동체의 성숙을 통해서 점점 더 나타나야 하는 대단히 모험적인 것, 대단히 새로운 것, 종교와 세상에서 잘 알려지고 인정된 것에 대립하는 대단히 활동적인 것이 아직도 예수의 메시지에는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손해가 있을 수 있다. "너희가 견디어 낼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처럼 그리스도 자신의 메시지의 풍부함과 성취에 속한다.
그것은 물론 서술될 수 있기보다는 더욱 예감될 수 있는 엄청난 영향력에 관한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그것에 관해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고귀한 모든 것과 가장 위대한 모든 것이, 우선 가장 모험적인 모든 것과 가장 혁명적인 모든 것이, 그리고 그것들 보다 더한 것이 아직도 메시지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과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기독교보다 더 크지만 또한 모든 이교도보다 더 크고,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빈보다 더 위대하지만 또한 노자, 석가, 플라톤, 괴테, 니체, 마르크스보다 한없이 더 위대한 그리스도이다.
그것은 파라클레트가 의미하는 '새로운 계시', '계속적인' 계시, 또한 기록된 성서를 능가하고 역사적 그리스도를 능가하는 계시이다. 그것은 신학자들이 논쟁을 할 수는 있지만, 분명히 '있다'. 그것은 성서 자체와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에 의하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 계시는 "자유의 영"이 가령 입센(히틀러가 아니라!)의 "제 3제국"처럼 확실히 요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완전히 능가할 것인가? 그것은 문제가 없지 않는가!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완전한 계시를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는 그 자신의 고유한 선에 따라서 더 전개되어야 하며, 더 완전히 해명되어야 한다. 도대체 그리스도는 파라클레트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
또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다 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이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하였다(요16:14-15).
그리스도 사역의 전진 운동은 오직 역사 속에 나타났으며 신약 성서가 선포하는 그리스도에 관련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 말씀은 아직 더 육신이 되어야 한다.
3 우리는 육신이 된 말씀을 통해서 파라클레트에 속한 두 번째 의미에 도달했다. 예수의 '활동'의 계속은 그의 가르침의 계속에 속한다. 그의 '행위'의 성취는 그의 메시지의 성취에 속한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말씀이 그것에 대하여 말한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또는 불름하르트가 해석한 것처럼, '내가 말한 것을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 이것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분을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안다. 그것은 그분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14:12-17).
이것은 확실히 요한복음 16장 12-13절 말씀보다 더 혁명적 말씀이며 엄청난 말씀이다. 어떻게 예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수 자신이 행한 일과 동일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인가? 그것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 약한 사람들, 평범한 백성들, 어린이들, 멸시 당하는 사람들, 세리와 창녀들에 대한 예수의 태도, 그의 사랑, 그의 믿음, 그의 복종을 의미하는가? 제자직을 의미하는가? 예수는 물론 제자직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러나 그 일은 확실히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기적"이라고 말하지만, 예수 자신은 복음서처럼 대개 "표적"이라고 말하는 저 예수의 "행위들"을 확실히 의미한다: 예수가 병든 사람들의 치유와 죽은 사람들의 소생, 오천명의 급식과 물위를 걸으심에서 제시한 것처럼 질병과 죽음, 운명과 자연의 힘에 대한 승리. 제자들은 그것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도 또한 제자들로서 그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가 ? 그것을 생각할 수 있으며, 그것을 믿을 수 있는가 ?
나는 대답한다. 그것은 예수의 약속이다. 그것은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예수는 마태복음 10장에 기록된 위대한 파송사에서 제자들에게 말한다.
다니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을 고쳐 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내쫓아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7-8).
그리고 '그가 명령한 것이 일어났다'. 70명의 파송 받은 제자들의 귀환사가 있는 누가복음 10장에 이르기를:
일흔 두 사람이(역자: 다른 본문에는 일흔 사람이) 기쁨에 넘쳐 돌아와 보고하기를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 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눅10:17-20).
이러한 행위들은 또한 예수가 떠난 이후 '사도 시대'에도 일어났다. 베드로와 요한은 "아름다운 문"에서 앉은뱅이를 고쳤다(행3:1-10). 바울은 여러 번 병을 고쳤다. 그는 트로아스에서 이미 죽은 젊은 제자를 소생시켰다. 그는 다치지 않고 손으로 독사를 불 속에 던졌다(행28:1-6). 그는 분명히 예수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그는 자신이 세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통하여 로마 제국에서 구체화된 세상 나라를 붕괴시켰다. 바울과 공동체의 다른 소수의 동료들은 엄청난 기쁨과 전권을 가지고 세상 나라뿐만이 아니라 운명, 죄와 죽음에도 대항했다.
그후에 이러한 행위들은 앗시시의 성 프란시스에게서 불름하르트까지 반복해서 일어났다. 그것은 가능했고, 지금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 되었다. 예수의 제자들이라고 간주하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 예수의 약속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그 약속을 알고 있으며, 제자들은 아니지만 제자들이 되기를 원하는 우리는 예수의 약속의 성취 속에서 극복해야만 하는 권세들과 얼마나 무력하게 대항하는가! 우리는 결핵이나 암에 걸린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특별히 부름 받은 사람의 병상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얼마나 무익하게 서 있었는가!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과 씨름했으며, 우리는 하나님에게 얼마나 강한 기도를 했는가? 도대체 왜 그런가? 왜 이 약속은 성취되지 않는가? 왜 우리는 어떤 경우든지 우리 시대의 무서운 질병과 악령의 힘에 대항하지 않는가? 왜 사도 시대의 제자와 공동체의 권능이 오늘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
그리스도의 가장 충실한 제자들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 씨름했다(우리는 이러한 제자들을 알고 있었고, 오늘날도 알고 있다!). 그러나 불름하르트 부자와 같은 제자는 없었다. 그들은 가장 적합한 대답을 찾았고, 그 수수께끼를 풀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약속의 성취를 어떤 '조건', 즉 '그분에 대한 믿음'과 결부시킨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신학자들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와 그의 신성, 또는 이와 유사한 것에 대한 신앙고백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로 세상을 정복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다. '이 예수의 약속의 성취와 결합되어 있는, 그 나라의 도래에 대한 믿음은 (그러나) 이미 이것이 그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과 해답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사실 완전히 중지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기독교 역사'라고 부르는 전 역사를 통해서 개인적인 담지자들 혹은 모든 운동들 속에서 지하수처럼 반복해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반복해서 후퇴했고, 마침내 땅속으로 침몰했다. 사도 시대가 끝나자마자 '카톨릭적' 선, 곧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대신하는 그러한 변화가 서서히 시작되었다. 교회의 성례전이 하나님 나라의 기적을 대신하며, 교회의 세상 통치가 그리스도의 전권을 대신한다. 그리스도의 활동의 계속이 이곳에서는 없으며, 저 세상에서의 가장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성취만이 있다. '개신교'는 더군다나 그리스도의 현현과 그의 사역을 단순히 과거적인 것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일회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들의 이해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단 한번에 구원을, 즉 죄의 용서를 가져왔다. 제자는 그것을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활동과 이론의 '계속'은 없다. 성서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믿음은 상실되었다. 그것에 대한 마지막 희미한 빛만이 최후의 심판과 저 세상 속에 잔존한다. 그리스도의 약속은 물론 그 성취의 조건과 함께 없어지지 않았지만, 그 성취는 소실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반혁명과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혁명의 근본적이고 철저한 방해이다. 이 반혁명 자체가 언제, 어떻게 다시 지양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혁명을 통해서 지양된다. 그리스도의 혁명은 오늘날 세계 혁명과 내적 결합 속에서 그보다 앞서서 일어나며, 가장 심오하고 지극한 사건이며, "하늘의 구름 속에서" 그리스도의 새로운 도래이다. 그와 함께 저 약속이 돌아오고, 마침내 성취된다.
우리는 그 실례로서 '불름하르트' 부자의 삶에 대한 훌륭한 해석을 가지고 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그 나라에 대한 기다림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혁명이 점차 기독교인을 사로잡은 힘으로 다시 그들에게서 화산처럼 폭발하였다. '보라-약속의 성취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악마들이 뫼틀링(M ttling)과 볼(Boll)에서 정복되었고, 병자들이 마센(Massen)에서 치유되었고, 그리스도의 전권이 다시 실현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약속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앙의 새로운 출현과 그것과 결합된 하나님 나라 자체의 도래를 통하여 크게 성취될 것이며, 세상이 변화될 것이라는 증거가 아닌가?
우리는 여하튼 다시 한번 약속 자체로, 특별히 예수 자신이 행한 것보다 더 큰 행위를 제자들에게 약속한 부분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것이다.
그 약속은 예수의 역사적 활동과 그 의미를 제한한다. 우리는 이제 예수의 "기적"이 의미하는 것을 생각하고 싶다. 예수와 모든 복음서는 기적을 우리가 앞에서 이해한 것처럼 "표적", 즉 하나님 나라가 나타난 표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타난' 것이지 아직 '성취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장해야 하고, 발전해야 하며, 그것을 통하여 성취되어야 한다. 그것이 일어나는 정도에 따라서 표적들은 성취될 수 있고, 성취될 것이다. 그것들은 단순한 암시에서 완전한 현실이 될 수 있다. 몇 개의 예를 든다면, 예수의 치유는 질병의 힘에 대한 강력한 투쟁의 암시가 아닌가? 특히 그리스도에게서 영감 받은 모든 순수 의학의 투쟁은 이러한 성취가 아닌가? 아직도 더 중요하고 포괄적인 성취들을 생각할 수 있지 않는가? 죽은 사람을 소생시킨 예수는 우선 이 개인적 행위들로부터 죽은 사람에 대한 새로운 신분을 얻지 않았는가?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더 많은 성취가 가능하지 않는가? 오천 명의 급식은 사회적 문제 속에서 사회주의와 (공생)공산주의로(우리가 이 단어들을 파당성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확장되지 않았는가? 이 일반적인 성취로 나타난 것은 개인적이고 구체적으로 제자와 공동체의 전권이 되어야 한다.
이 예수의 행위들의 확장은 특별한 의미를 더 가지고 있다. '예수의 생애에 작은 영역에 머물렀던 그의 사역은 아직도 전 세계를 정복해야 하며, 그의 활동은 계속되고 성취되어야 한다'. 그것은 엄청난 투쟁 속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오늘날 평화 사상이 성 프란체스코를 능가한다면- 오직 이것만을 말한다면- 그것은 역사적 예수의 가능성들을 넘어서는 예수의 활동의 계속이 아닌가? 성취가 약속의 완전한 실재성과 현실성 속에서 다시 나타난 것처럼 그리스도의 약속은 이 빛 속에서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것은 물론 '조건들'과 결합되어 있지만 저 근본 조건을,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믿음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가 '약속의 성취처럼 그 약속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살아 계신 그리스도, 즉 죽은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 아버지와의 결합 속에서 아버지의 전권을 가지고 있고, 아버지의 권세와의 결합 속에서 아버지와 하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결합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물론 이 근본 조건을 위한 다른 표현이 있다. 그것은 또한 '올바른' 믿음, 노동과 투쟁 및 협력인 '올바른' 기도와 결합되어 있다. 기도의 '응답'이 보증되어 있다. 그것은 물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는 조건 속에서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는 성서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와의 교의적이며 형식적인 결합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인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를 의미한다. 응답은 이러한 기도에게만 보증되어 있다: 물론 항상 기도자의 생각에 맞는 응답은 아니지만 '확실한' 응답이다.
'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전제된다'. 그 공동체는 마태복음 16장18-19절에 의하면 실제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그 공동체 자신이 지옥의 문들에 정복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필연적으로 지옥의 문들을 정복한다. 제자들은 그 공동체와의 결합 속에서만 '그의' 전권을 가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일이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약속의 성취를 그의 계명의 성취와 연결한다'(요한14:15).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는 그의 '정의'가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질병과 죽음, 자연과 운명에 대한 승리의 약속은, 일반적으로 이해한다면 다른 모든 우상들과 결합된 '폭력'과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성취될 수 없다. '먼저 우상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의 전환, 또는 간단히 말해서, 우상에서 하나님에게로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중요한 일은 하나님 나라의 "표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자체이다. 예수 자신이 그것을 강력하게 강조했으며, 불름하르트 부자도 그의 제자직에서 그것을 강력하게 강조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분명하다: 저 약속이 오늘날 맘몬과 폭력의 세계에서, 우상의 세계에서 큰 형태로 성취된다면(이것이 일반적으로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었을까? 오직 더 많은 감동을! 오직 더 많은 종교적 이기주의의 유혹을! 그러나 하나님에게로의 큰 전향이 일어난다면, 폭풍우처럼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포괄적인 규칙이 이 경우에도 적용된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것은 크게는 공동체와 세상에게, 작게는 개별적인 제자들에게 적용된다. 그렇다면 한가지 사실을 더 말해야 한다. 비록 '성숙'과 '단계'의 법칙이 하나님 나라와 그 약속의 성취에 적용될지라도, 모든 개인들이 그 조건을 성취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들에게 열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혁명과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이해했다면 세상과 죽음의 권세들 및 질병과 죽음, 자연과 운명의 우주적 권세들의 모든 두려운 현상과 전체적이든 개인적이든 더 이상 무력하고 절망적으로 대항하지 않는다. 그 때 우리는 승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자신이 그것을 올바로 원하고, 이해하고, 그 조건을 성취한다면 결코 힘이 없는 것이 아니다!
4 그리스도의 혁명은 과거에서 미래로, 존재하는 것에서 생성하는 것으로, 고정된 것에서 운동하는 것으로, 죽은 것에서 살아 있는 것으로 인도하는 경우에만, 또 예수의 메시지와 활동, 이론과 행위의 계속을 선포하고 실행하는 경우에만 그리스도의 혁명이다. 나는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의 혁명을 '오순절'의 관점에서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순절은 바로 이해한다면 이 혁명의 반석이고, 파라클레트는 바로 이해한다면 '성령'이기 때문이다. 오순절의 성령은 위로자이며, 계시자이며, 창조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