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본 영화 중에서 지금도 그 감동이 되새겨지는 영화 중의 하나는 유대인에 대한 학대와 비극적 죽음을 다룬 '쉰들러리스트'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에 대한 히틀러의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 영화는 이러한 때에 '오스카 쉰들러'라는 한 사업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사업가로서 수용된 유태인들을 이용해서 그릇제조 공장을 만들고 엄청난 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돈과 여자를 매우 좋아하는 사업가였습니다. 그런 그가 유태인에 대한 독일인의 만행을 목격하면서 조금씩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죽을 운명에 처한 유태인을 자신의 공장으로 빼내기 위해 조금씩 자신의 돈을 쓰게 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유태인을 구하기 위해 독일군 장교에게 돈을 건넵니다. 이렇게 한 사람, 두 사람 수를 늘리다보니 자신의 공장에 필요한 인력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게됩니다. 결국 1,200명의 유태인을 구하는 대가로 자기의 전 재산을 내놓았습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1,200명의 유태인 생존자들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쉰들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생존자들은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스스로 뽑은 금이빨로 만든 금반지를 쉰들러에게 선물합니다. 이 반지를 받아든 쉰들러는“제가 좀 더 노력했더라면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하면서 감격하여 울었습니다. 쉰들러에 의해 생명을 건진 사람들이 바로, 쉰들러의 명단이라는 의미의 '쉰들러리스트'입니다. 그 때 살아남은 유태인의 후손은 지금 전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 때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게 된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지금도 생존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실존 인물의 실화이기에 더욱 감동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 누구나 한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금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쉰들러는 1,200명만을 구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가족과 후손을 더하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을 살려낸 것입니다. 앞으로 그 수는 더해갈 것입니다. 쉰들러리스트는 우리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감동적인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한 생명은 돈으로 따 질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한 생명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의 가치를 지닙니다. 이 생명의 가치는 잘남과 못남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큰 것, 작은 것으로 나눌 수도 없습니다. 생명은 그 자체만으로 소중합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부터 참 좋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노래의 가사가 참 좋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그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사랑 받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신체적인 조건이나 성숙이 부족하고, 사회적인 공헌이 부족할지라도 존중되어야합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정신입니다. 한 생명은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되어서는 안됩니다. 한 생명은 그 자체만으로 소중한 하나님의 최고의 작품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소중한 사람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한 생명,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0절입니다.“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예수님은 바쁘고, 피곤한 중에서도 삭개오라는 한 인물을 구원하고자 그의 집을 방문하시고 그와 함께 하십니다. 삭개오는 당시 사람들이 무시하고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 단 한 사람을 위해 집중하십니다. 그와 함께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니다. 사람들은 저런 나쁜 사람과 어울린다고 수군거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친절하게 그의 이름을 불어주십니다. 그와 함께 하시고, 그의 집에 머무십니다. 그를 인정하십니다. 그의 말에 귀기울이시고 그와 더불어 함께 식탁을 나누고 삶을 나누십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난 사람이 됩니다.
이 장면은 마치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구하기 위해 가시덤불을 헤치며 양을 찾아 헤매는 선한 목자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한 생명, 한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한 생명의 가치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제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한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고자 합니다. 제게는 소중한 딸 사랑이 있습니다. 저는 매일 사랑이를 만나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사랑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자꾸만 보고 싶습니다. 사랑이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습니다. 여러분! 저는 왜 사랑이를 사랑하는 것일까요? 다른 아이들보다 잘나고 머리가 좋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예쁘고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제 딸은 임신 7개월인 28주만에 920그램으로 태어난 미숙아 중의 초저체중 미숙아입니다. 호흡도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어 인공호흡기와 기도삽관이라는 기계에 의존해야만 숨을 쉴 수가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먹지도 못합니다. 코에서 식도로 연결한 호수로 음식물을 먹습니다. 그야말로 미숙아로 다른 아기들보다 연약하고 부족한 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 딸을 사랑합니다. 오히려 다른 아버지보다 더 기도하고 더 사랑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사랑이는 하나님과 저에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소중한 생명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 생명입니다. 사랑이가 저의 사랑을 받기 위해 갖춰야할 자격이나 조건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랑이가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하다할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사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필요하다면 제가 가진, 아니 가질 모든 것을 내어준다할지라도 아낌없이 사랑이를 사랑할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사랑으로 우리 사랑이는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아버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는 아버지가 되면서 더욱 확실하게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으로 십자가에 달리시는 고난을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이 예수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와도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는 고통의 현장 속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못 자국난 손을 내미십니다. 이 예수님의 손을 잡으면 일어설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음을 깨달아야합니다. 우리 주위의 죽어가는 한 생명, 연약한 한 생명을 생각해야 합니다. 힘겨운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우리의 이웃, 남모르게 죽음의 유혹을 받고 있는 이웃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합니다. 참된 소망을 알지 못한 채 죽어가는 생명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진실한 사랑을 실천해야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분명히 명령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웃의 고통을 모른 체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내 몸이 건강하고 안전하고 편안함을 바란다면 우리의 이웃도 그래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46절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웃은 우리에게 축복과 심판의 기회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