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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국가의 성립 - 은대의 사회와 문화 |
2007-10-28 14:53:37   read : 4518

동아시아 고대국가의 성립 - 은대의 사회와 문화 |
번호 : 6조회수 : 92006.05.16 11:07

[은대의 국가조직과 정치]

 

은 혹은 상이라 불리는 나라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사마천이 쓴 [사기]의 (은본기)에서 잘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보통 전설적인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근래 들어 이러한 은의 역사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는데 바로 은나라 후기의 도읍지인 은허의 유적지에서 갑골문자가 출토되고 이를 연구한 결과에 의해서였다.

 

이러한 은대의 문화는 중기 이후 주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밝혀졌지만 은허로 도읍을 옮기기 전의 은민족의 생활상이나 원주지에 대한 유적의 조사는 아직까지 미흡한 부분이 많다. 다만 흑도문화와의 관계성으로 인해 이들은 산동방면에서 흑도 문화를 이루고 반농반목생활을 하다가 소둔촌부근으로 침입하여 이 지역의 원주민을 정복하고 은을 발전시킨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나 은이 19대 반경 이후 은허에 도읍을 정하면서 보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은허 이전에는 빈번한 천도와 함께 왕위계승역시 형제상속이 많았으나 점차 부자상속이 정착되어 갔다.

 

은의 국가조직에 대해서는 은, 서주시대를 공통으로 묶어 도시국가 혹은 읍제국가의 성격으로 파악하고 있다. 도시국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세계사의 고대국가 발전단계가 은주 국가형태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보고 국가의 발전유형을 씨족사회>도시국가>영토국가>통일제국으로 발전한다는 세계사의 발전 법칙이 중국고대사에도 그대로 적용됨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은대 후기에서 춘추시대까지를 도시국가시대로 전국시대는 영토국가시대 그리고 진한시대를 통일제국의 단계로 보았다. 즉 서양 그리스 로마의 도시국가(폴리스)나 제국의 발전형태와 유사성이 있다고 파안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읍제국가론을 내세우는 학자들은 국가의 발전형태보다 은, 주 사회의 기본단위로서의 사회구조에 초점을 맞추어 춘추전국시는 씨족제적인 읍공동체가 해체되는 시기이며 춘추 전국 이전의 은, 주시대는 읍제국가체제로 보았다. 이는 은대의 읍이 혈연관계로 결합된 씨족 공동체이고 읍의 유형이 은왕이 사는 대읍(왕도)과 대읍에 종속되는 씨족의 족읍이 그 아래에 다시 족읍에 종속된 소읍(속읍)이 종속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아 읍제국가는 속읍>족읍>대읍의 3층구조로 형성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국이나 읍은 은주시대국가구조의 기본이라 할 수 있고 다수의 소읍을 종속시킨 족읍이 바로 읍제국가 혹은 도시국가의 기본단위이며 다수의 읍제국가는 대읍 즉 은왕조에 종속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읍은 다시 서주시대에서 춘추시대로 내려오면서 국, 도, 비라고 하며, 국은 도를 도는 비를 종속하면서 중층적 지배관계를 성립시키고 있다. 이때 국의 지배층을 인이라 하고 피지배층을 민이라 하여 국의 구성원간의 계층적인 구별도 분명히 하였다. 이밖에도 읍에 속하지 않고 산림이나 소택지에 거주하면서 수렵을 행하는 이민족을 동방, 읍방, 토방이라 하였고 이들과 은의 국가와는 자주 충돌을 일으켰다.

 

 

[은대의 정치와 군사]

은대는 아직까지 인간의 지혜에 의한 정치가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점복에 의해 신의 뜻을 묻는 신정정치가 행하여졌다. 예기에 은나라 사람이 신을 존중하고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귀신을 먼저 섬기고 예를 다한 후에 하였다는 기록과 상서에서도 은왕이 정치를 할때 모두 귀신의 뜻을 빌어 결정하였다는 서술에서 알 수 있다. 특히 은허의 출토물인 갑골문자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데 있다. 이러한 신정정치에 있어 은의 왕은 정치와 종교의 주재자였다. 물론 왕이 직접 점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점인 혹은 복인이라 불리우는 이에 의해 행하여지지만 반드시 신의 뜻을 해석할 때에는 왕 한사람만이 점괘를 판단하는 것으로 이런 의미에서 은왕은 신의 세계와 인간세계를 매개하는 유일한 매개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외에도 왕의 사후엔 조상신의 열좌에 올라 현세의 인간을 주재한다 생각하였던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점치는 방법으로는 거북의 등 즉 갑골과 짐승의 뼈[수골]을 이용하였는데, 갑골에 점치는 내용을 문자로 새기고[갑골문자] 밑에서 열을 가하여 갈라지는 현상에 따라 신의 뜻을 점치는 미신적인 방법이었다.

 

은대에는 도시국가의 연맹 조직과 유력한 도시국가가 맹주역할을 하여 그 국가형태가 도시국가 혹은 읍제국가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의 정치와 군사행동은 각 씨족의 대표자가 모여 합의를 통해 결정하였다. 은왕은 자신이 직접 통치하는 직할지를 가지고 있으며, 지방에는 많은 도시국가[읍]를 관할하는 우두머리격인 백[방백]이 있었다. 은나라도 초기에는 지방의 방백이었으나 그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점차 방백의 장으로서 중원을 군림하게 되었다. 이처럼 은의 전국토에는 많은 읍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귀족과 평민이 함께 거주하였고, 지방의 봉군은 후, 백 두 종류가 있었다. 따라서 은왕은 전 국토의 직접통지가 아니라 후, 백을 통해 간접으로 읍제국가를 통치하였다. 이들 읍제국가는 은에 대해 부역과 병역의 의무를 부담하였으며 그 대신 은나라는 이들에게 청동제 무기를 하사하거나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였으며 따라서 은왕조는 다수의 읍제국가 가운데 중앙정부와 같은 성격을 지녔다 할 수 있다.

 

은대의 왕위 계승은 초, 중기까지는 형제상속이었으나 후기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부자상속이 정착되었다. 이는 초중기의 은왕의 권한이 약함을 후기에 들어서면서 왕권이 강화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은대의 왕의 시호제도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며, 왕명을 간지로 표시하고 있다. 이러한 은의 국가행사중 가장 큰 행사는 단연코 제사이다. 그중에서도 조상제사가 으뜸으로 현존하는 큰 규모의 왕묘는 전제군주의 권위나 왕권을 상징한다기보다는 제사의 대상으로서 종교의례를 위해 축조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왕묘에서도 제정일치의 유풍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즉 후대의 제왕들 처럼 강력한 왕권으로 인해 사전에 왕릉이 축조된 것이 아니라 죽은 왕이 선왕의 종묘에 열좌한다는 국가적 종교의식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온 국민이 협동으로 축조한 것이다.

 

은의 왕권과 관련된 것은 군사력으로 강력한 군사력이야말로 이시대의 왕권과 직결된 것이었다. 갑골문에 의하면 한번 출병시 적게는 5천명에서 많을 경우에는 1만 3천명의 병사가 동원되었고, 보병은 물론 마차를 이용한 전차부대도 출동하였고 전차위에는 청동제병기를 갖춘 전사가 있고 왕이 전쟁을 직접 지휘하였다. 군사동원의 대부분은 내부 반란진압이나 대외정벌이 대부분으로 은대에는 특히나 대외정벌이 매우 빈번하여 포로에 대해서는 노예로 삼거나 살해하였다. 어떤 경우 살해된 포로의 수가 수천에 이를 정도라는 것으로 보아 전쟁의 전혹성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은대의 사회와 경제]

 

은대의 사회는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있었다. 지배계층은 국왕을 정점으로 왕족과 여러 계층의 귀족이 있었고 국왕의 직할령인 왕기의 경우에는 백관이 정무를 처리하였고, 이 이외의 지방의 경우에는 제후[후,백]를 분봉해 지방행정을 담당케 하였다. 이러한 관직에 대한 자료가 되는 것은 갑골문에는 은대의 다양한 관직명이 보이고 있어 활용되고 있는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제사를 관장하는 관직과 전쟁과 관계되는 무사직명이 많다는 것이다. 즉 은대의 관직이 국가의 대사인 제사와 군사직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피지배계급으로는 민으로 불리우는 일반서민이 있었고 앞서 전쟁시에 나타나는 포로들이 노예로 존재하였다. 이들 노예가 농업과 수공업에 종사해 생산활동을 주도하여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유지되어 나가 은대를 고대 노예제사회로 규정하게 되었다.

 

앞서 국가조직에서도 보았듯이 은대사회의 기본은 읍이라는 취락으로 혈연관계 중심의 씨족 공동체이다. 이들 읍은 상호간의 종속관계로 맺어져 있고 왕족이 사는 왕도를 대읍, 대읍에 종속된 씨족의 족읍이 있었고, 그 아래 다시 소읍이 예속되어 있어 피라밋형으로 구성되어 중층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들 읍은 지리적으로 농경이 가능한 지역에 고립 분산되어 있었다.

 

은대의 경제생활은 초, 중기에는 반농방목의 공동방식으로 하였으나 후기에들어서면서 농업이 주업으로 발전하였다. 은대에는 청동기시대로 철제농기구의 존재는 없었으며 석기와 목기를 주로 사용하였기에 생산성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다만 은허에서의 출토물로 농기구가운데 반달형으로 된 구멍없는 돌낫[석겸], 돌도끼[석부]가 많은데 이는 옹산물의 수확용연장으로 농업생산성이 이전시대보다 획기적으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갑골문에서도 소와 농기구를 연관시키는 문자가 보여 우경의 가능성 또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은대는 씨족공동체사회였기에 농업은 아직 개별농가를 중심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씨족이 공동경작하는 집단 농경방식이었다. 개별소농층의 형성은 춘추말 전국초에 시작되었다. 이들이 주로 생산한 작물로는 기장, 밀, 조, 쌀을 재배하였고 갑골문에서 양잠을 나타내는 뽕나무 상자와 비단 금, 비단 사자가 확인되어 이미 은대에 누에고치를 이용한 양잠술이 발달하였음을 시사한다. 더불어 귀족사회에서 음주풍습과 제사에 술이 사용되는 것을 보아 양조기술 또한 상당부분에서 발달하였다.

 

농업과 함께 목축업도 발달하여 가축으로는 개, 소, 닭, 양, 돼지, 말 등이 사육되었으며, 은대는 국왕을 비롯한 상류귀족층은 대규모의 수렵을 자주 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복사에 보면 수렵을 나갈때에 점을 친 내용이 많이 보이는데, 갑골문에 있는 전자는 사냥을 하는 구획을 의미하는 것으로 은대의 수렵활동 역시 국가적인 큰 행사이고 사냥품은 식용이외에도 제물 또는 점치는 제료인 복골로 사용되었다.

 

은대는 특히 수공업이 발달하여 청동제품을 비롯한 귀금속제품의 정교함은 은대 청동문화의 특색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청동기와 함께 토기도 대량으로 생산되어 이미 채도와 흑도의 전통과 회색, 백색 등 다양한 채색도자기가  뛰어난 기술자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외에도 귀금속과 함께 많은 공예품이 생산되었고, 그 재료로는 상아, 보석, 옥, 대리석, 골기 등을 사용하고 있다. 은대의 우수 수공업품은 전문적인 기술자[공인]에 의해서 제작되어 이들 기술자는 공인계층을 형성하고 주로 관부에 예속되어 있었다.

 

 

[은대의 문화]

 

은대의 문화유산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 것은 바로 그들이 사용한 문자, 이른바 갑골문자이다. 갑골문자는 짐승의 뼈나 거북의 등에 점칠 내용을 새겨 점을 친 것이다. 갑골문자는 22대 무정시대부터 은의 말기까지 사용한 문자로 주대의 고문자와 진대의 문자통일로 이어져 한대의 한자로 완성을 보았다. 현재까지 해석된 갑골문은 약 1400여자로 문자의 형성과 발달과정에서 볼 때 한자의 구성원칙이 갑골문에 이미 완비되고 있다. 이는 갑골문자가 장기간의 발전을 거쳐 이룩된 것을 의미하며 한자체와 비슷한 글자가 많고 서체도 조화를 갖춘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은대 사람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것은 우주를 주제하는 천신[상제]인데 이들은 천신을 천상의 최고 통치자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 상제의 뜻을 묻는 것이 바로 갑골문에 나타나고 있는 점복이다. 이로 볼 때 이시대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종교관이나 자연관은 아직 원시상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점복방법은 점승(주로 소)의 뼈와 거북등에 점칠 내용을 적어놓고[복사] 불에 구우면 갑골이 파열되면서 무늬가 나타나는데 이를 조라하여 조의 형상에 의해 길흉을 판단하였다. 자연의 변화현상, 수확, 제사, 정벌, 왕비간택 등 국가 대사로부터 질병, 사냥, 그 밖의 일상생활을 광범위하게 신에게 점을 쳐 물어보고 있다. 은대는 천신과 함께 조상신 역시 숭배하였다. 조상제사도 천신에 못지 않게 엄숙하게 거행되었고 의식도 복잡하였다. 이는 조상신의 숭배로 귀신의 힘을 빌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갑골문에는 점복과 관련된 내용이외에도 천문, 역법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다. 즉, 은인은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였고 별을 주기적으로 관찰하여 상당한 천문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농업 생산의 필요에 의해 비교적 완비된 역법을 사용하였다. 이들은 1년을 12개월로 나누고 대월을 30일로 하고 소월은 29일로 하였으며 윤년에는 1개월을 더하였다. 무정시대의 복사 중에 13월이 있는데 이로써 윤달이 연말에 놓여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은 후기인 24대 조갑 때부터 역법을 바꿔 윤달을 연말에 두지 않고 연중으로 옮겼다. 그리고 날자의 기록을 위해 간지를 이용하고 있어 은의 간지는 10간, 12지로 짜여져 있고 갑자에서 계해에 이르기 까지 60일을 일주로 하는 60진법을 채용하고 있는 이는 동양의 역법에 영향을 주었다.

 

은대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아직 원시성을 탈피하지 못한데 반해 그들의 물질문명은 놀랄 정도로 받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청동기 문화로 중국에 있어 청동기 문화의 시작은 은대 초기에서 비롯되고 있다. 청동기 제련과 청동기 제작기술을 통해 은대의 높은 과학기술 수준을 알 수 있다. 청동기는 무기와 제사용 제기, 식기 및 장식품에 주로 이용되었고, 거기에는 여러 종류의 동물 문양이 새겨저 서방의 제품보다 아주 정교하고 세련돼 앞선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청동기의 제작기술상의 최고 절정기는 바로 은대 후기이다. 은 멸망 후 주대에도 청동기가 널리 제작되었으나, 기술상으로는 은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공예품의 경우에는 청동기에 한정되지 않고 옥돌, 뼈, 상아, 귀금속 조각에도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은대의 장식품으로는 특히 옥장식품이 많고, 새, 물고기 문양의 아름다운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이러한 은대의 문화에서는 그 내용의 다양성을 살필 수있는데 우선 청동기는 북방의 영향을, 10간12지에서는 서아시아적인 문화영향을 찾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은대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에서는 의외로 은대의 교역권이 서, 북방은 물론 남방권에까지 확대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은대 사람들은 그 정신적인 측면에서 원시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는 대조적으로 보여지는 높은 수준의 물질문화로 은문화가 가지는 독특한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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