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홈     교회안내     예배안내     담임목사목회     신구약66권장절전체설교(가입후열람)     교회학교     전도부     교육부     남전도회     여전도회     청년부     봉사부     선교부     예배자료     신앙자료     생활정보     시,수필,컬럼     기도실     이단자료     운영자자료실     가  

  일반교회시사
  이쁜글.좋은글
  각 기관 부서
  교육자료실
  성경공부 방
  오늘의 Q.T
  은혜의 간증
  절기(추수.맥추)
  여름성경학교
  주일학교설교
  고난(사순절)부활절
  5월가정의 달
  성령 강림절자료
  찬송 및 복음송
  기독교영상플레시
  기독교자료
  기독교동영상
  덕천교회 약도
  시사 예화
  유머 예화
  상식건강자료
  고려수지침강의
  가정상담
  한자 사전
  아름다운이야기
  다양한 이미지
  성경말씀 듣기
  기도는어떻게하나?
  선 교 학
  신간도서기독교
  자주묻는질문 답변
  예화자료
  목회설교돕는 정보
  기도원 소식
  북한 탈북자 등
  명언 격언실
  역사신학실
  실천신학실
  현대신학실
  철학이야기
   서양고대사
   서양중세사
   서양근대사
   서양현대사
   동양사자료
  히브리 헬라어사전
  비교이단자료
  창조와진화론
  1907년 대부흥사
  강해설교
  컴퓨터 배우기
  평신도신학
  유익한 정보
  특선.다큐멘타리
 



성경공부

생활정보

사전사이트


> 철학이야기(전체리스트) > 서양현대사(전체리스트)

세계 7 대 불가사의
2007-10-26 18:43:11   read : 3944

세계 7 대 불가사의

 

필론의 세계 7대 불가사의

 

 1633년 루이 13세가 임명한 뵈시우스 대사가 교황 우르반 8세의 허락 하에 교황청에 있는 도서관의 책을 열람하고 있었다. 뵈시우스는 3백20장이나 되는 지리에 관한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의 눈이 얼어붙었다. 비잔틴의 필론이라는 저자가 쓴 ‘세계의 7대 불가사의’라는 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원고는 겨우 여섯장에 지나지 않는 짧은 글인데다 마지막 부분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까지 세계의 불가사의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단편적으로는 거론했지만 필론의 세계 7대 불가사의처럼 종합적으로 설명한 것은 없었다. 필론은 많은 책을 저술한 작가로서 언어학의 대가로 알려졌지만 원래는 기계기술자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1. 쿠푸왕의 피라미드

   

 

 

 

 

 

 

 

 

 

 

 

 

 

일반적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포함되는 피라미드는 이집트 기자의 3대 피라미드를 의미하지만, 이 중 가장 큰 쿠프왕의 대피라미드 하나만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칭하기도 한다. 여기서도 대피라미드만을 거론한다.

 

대피라미드의 규모에 관한 모든 수치는 이집트 정부가 1925년 최종적으로 내놓은 보고서를 따른다. 남쪽면 2백30.4 5m, 동쪽 2백30.39m, 서쪽 2백30.36m, 북쪽 2백30.2 4m였다. 대피라미드의 높이는 1백46.60m로 확인됐고 기울기는 51°52′였다. 2.5t의 돌덩어리가 2백30만개나 사용됐으며 무게가 거의 7백만t에 달한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참여했던 수학자 몽즈는 대피라미드의 체적이 2백60만m3나 되며, 이것만 갖고도 프랑스의 국경을 3m의 높이에 0.3m의 폭으로 둘러 쌀 수 있다고 계산했다.

이 모든 돌을 연마하기 위해 사용된 도구는 돌과 구리로 된 연장이 고작이었고, 당시에는 철이 발견되기 이전이었다. 운반을 위한 썰매, 끌기 위한 밧줄과 도르레, 미끌어져 내리기 쉬운 진흙과 경사로를 만들기 위한 벽돌이 사용된 도구와 재료 전체에도 이런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면, 피라미드를 불가사의 중 불가사의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2. 바빌론(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

 

 

공중정원은 실제로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에 풀과 꽃, 수목을 심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계단식 아파트의 발코니에 꽃과 커다란 나무들을 심은 것과 유사하다. 공중정원이 있었다는 바빌론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도다. 바빌론은 수많은 정복자들에 의해 정복을 당했는데 그것은 이 지역을 차지하는 민족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지나간 유명한 왕들은 수없이 많으며, 그 중에서도 바빌론을 재건하고 공중정원을 직접 건설했다는 아시리아의 정복자 세미라미스가 매우 유명하다.

놀랍게도 세미라미스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세미라미스에 대한 전설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학자들은 세미라미스를 기원전 8백23년에서 8백10년까지 바빌론을 통치했던 삼시 아다드 5세의 왕비인 ‘사무-라마’로 여긴다. 삼시 아다드 5세는 유명한 아슈르나시르팔왕(기원전 883-859)의 손자다. 세미라미스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 중 한명으로 거론되는 것은 바빌론을 재건축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는 님루드가 수도였는데 그녀는 수도를 바빌론으로 옮겼다. 수도를 옮기기 위해 재건한 바빌론은 고대의 바빌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성곽을 가진 도시였다.

고대에서 가장 넓은 성곽이라고 해도 폭이 8m에 지나지 않았으나 바빌론의 성곽은 무려 17.7m가 됐다는 것이 근래의 발굴에 의해 알려졌다. 외부 성곽은 11.3km이며, 내부 성곽은 6km다. 성곽 옆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강을 건널 수 있는 커다란 기둥으로 된 다리가 놓여졌는데, 기둥들의 간격은 3.6m, 다리의 폭은 9m였으며 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폭이 넓었다. 이 성채는 1백개의 문을 갖고 있었다. 성벽이 어찌나 거대하고 방문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현재의 세계 7대 불가사의가 확정되기 전부터 세계의 불가사의에 단골로 들어간 기념물이었다. 사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명명자라고도 볼 수 있는 필론도 자신이 선정한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파로스섬의 등대 대신 바빌론의 성벽을 선정했다. 바빌론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거대한 성벽과 공중정원 등 두개가 포함됐다는 뜻이다.

 

1) 설계자는 누구인가

한편 공중정원은 기원전 5백년경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타스를 위해 수도인 바빌론에 건설한 정원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성경에서는 느브갓셀 2세라고도 함)는 바빌론의 왕이 되자 메디아왕국 키약사레스왕의 딸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산이 많아 과일과 꽃이 풍성한 메디아에서 자란 왕비는 평탄하고 비가 잘 오지 않는 바빌론에 마음을 두지 못한 채 항상 아름다운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했다. 이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긴 왕은 왕비를 위해 메디아에 있는 어떤 정원보다도 아름다운 정원을 바빌론에 만들라고 명령했다. 왕의 명령을 받은 건축가는 곧장 작업에 들어가 왕궁의 광장 중앙에 가로·세로 4백m, 폭 15m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한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일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진짜 공중정원을 건설한 사람은 누구일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경우 공식적인 이름은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공중정원을 건설한 장본인으로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도 거론되기 때문이다. 결국 두사람 모두 공중정원을 건설했다고 보면 의문점이 해결된다. 사실 테라스에 나무나 풀을 심는 것은 메소포타미아의 강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매우 보편적인 것이었다. 즉 도시 주위를 흐르는 강물을 이용해 식물을 재배하는 정원은 매우 오래 전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된 니니브의 소위 ‘나무로 꽉 채워진 장소 아래에서의 향연’으로 유명한 아수르바니팔왕과 왕비가 나무 그늘 아래에서 향연을 베푸는 그림으로도 알 수 있다.

디디오르가 기록한 공중정원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인공정원은 한변이 거의 1백20m의 사각형으로 마치 극장과 같이 계단으로 한단씩 올라가게 설계됐다. 테라스 또는 플랫폼에 재배되는 모든 식물의 무게는 높낮이가 있는 기둥으로 지지되도록 했다. 가장 높은 기둥은 약 25m로, 정원 최상부를 지지하며 벽체의 두께는 6.6m나 된다. 테라스는 돌출부분을 포함해 16×4피에(1 피에 = 0.3m)의 크기로 아스팔트로 많이 칠해진 벽돌(갈대를 포함)로 주의를 구분한 후 다시 구운 벽돌로 치장했다. 이곳에 얇은 납판을 붙여 물이 기초 부분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테라스에서 거대한 나무들의 뿌리가 충분히 자랄 수 있도록 해 준 장치인 것이다. 테라스에는 각종 종류의 크고 작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그 규모나 아름다움이 빼어나다. 기둥의 높낮이도 다르게 만들어 강도가 다른 빛이 들어오도록 유도함으로써 호화롭게 장식된 궁전의 내부 공간에 신비감을 주도록 했다. 단 하나의 기둥이 천장부터 기초까지 내려져 있는데, 이 안에 다량의 강물을 테라스까지 올릴 수 있도록 만드는 수력기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 기계는 밖에서 볼 수 없다.”

 

2)공중정원 발굴

 

학자들은 아직 공중정원의 위치를 확정한 상태는 아니지만, 비교적 예전부터 공중정원의 위치로 알려진 아무란의 언덕으로 추정한다. 바빌론은 내외 이중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공중정원은 내성에 위치하며, ‘텔 아무란 이븐 알리’(Tel-Amuran-ibn-Ali, 추장의 언덕)라고도 불렸다.

바빌론의 폐허는 오늘날까지도 그 모습이 남아 있는데, 이라크 정부는 특히 공중정원을 집중적으로 복원할 계획을 갖고 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다른 불가사의보다 더 유명해진 것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던 바벨탑과 로맨틱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공중정원의 신화가 혼합됐기 때문이다. 또한 공중정원은 다른 불가사의처럼 인간을 압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으로 이뤄진 건물이라는데 더욱 매력이 있다. 천하의 영웅 알렉산더가 자신이 죽을 장소로 바빌론을 지목한 것도 이해가 될 법하다.

 

3, 아르테미스 신전

 

 

아르테미스 신전은 그리스 시대에 가장 큰 신전이자 대리석으로 만든 최초의 신전이기도 하다. 높 이 18m의 기둥 1백27개를 사용했으며 길이 1백20m, 폭 60m의 대형 건축물이다. 현대인에게 위압감을 주는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의 길이가 69m, 폭 30m, 높이 10m 정도이며, 대리석 기둥을 58개 사용했다는 사실을 볼 때 이 신전이 얼마나 큰 규모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신전의 자재는 가장 아름답고 순도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사용했으며, 중앙의 넓은 홀에 네방향으로 대리석 계단을 딛고 올라갈 수 있게 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르테미스는 제우스와 레토의 딸로 아폴론과는 쌍둥이 남매다. 아폴론이 태양의 신인데 반해 아르테미스는 달의 여신이자 처녀 사냥꾼이다. 한편 에페수스 사람들이 추앙하던 아르테미스는 다른 지역의 아르테미스와는 다소 다르다. 우선 외형부터 매우 다르다. 풍부함을 표시하는 듯 살이 찌고 가슴에 무수한 유방을 갖고 있는 등 다소 기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사냥꾼이었기 때문에 주변에는 항상 기묘한 동물들이 따르고 있다

 

1) 아르테미스

아르테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으로 제우스와 레토 사이의 딸이다. 그녀는 쌍둥이 남매인 아폴론보다 조금 먼저 태어나서는 곧바로 어머니의 해산을 도왔다. 이 여신은 아주 어릴 때 이미 아버지인 제우스에게 평생 처녀로 지내게 해 달라고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 여신은 항상 활과 화살통을 지니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항상 많은 요정들을 거느리고 다녔다. 이 요정들 역시 여신과 마찬가지로 순결을 지켜야 했다. 이를 어길 경우 여신은 용서하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강간을 당한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르카디아 지방의 요정 칼리스토의 아름다움에 반한 제우스는 아르테미스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그녀 앞에 나타나 스스럼없이 그녀를 안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칼리스토는 무심코 그 포옹을 받아들였다. 그 순간 제우스는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고 그녀를 겁탈하였다. 이 짧은 사랑에서 아이가 생겼다. 달이 차서 배가 불러오자 아르테미스는 모든 것을 눈치챘다. 여신은 화를 참지 못하고 칼리스토를 활로 쏘아 죽였다. 그러자 다급해진 제우스는 칼리스토를 곰으로 변하게 하여 하늘로 끌어 올렸다. 그녀는 하늘에 올라가서 '곰' 별자리가 되었고, 그녀의 아들 '아르카스'는 '아르카스'족의 조상이 되었다.

미남 사냥꾼 '오리온(Orion)'은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아르테미스의 질투를 불러 일으켜 여신의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일설에는 오리온이 아르테미스와 함께 사냥하다가 갑자기 욕정을 느껴 여신에게 덤벼들자 여신이 전갈을 불러내어 오리온의 발뒤꿈치를 물어 죽게 했다고도 한다. 오리온은 죽은 후에 하늘로 올라가 '오리온' 별자리가 되었다.

아르테미스는 처녀 사냥꾼으로 산과 들에서 사슴을 쫓는 활의 명수라고 하며, 그의 화살은 산욕(産褥)을 치르는 여자를 고통 없이 그 자리에서 죽게 하는 힘을 지녔다고 한다. 또한 처녀의 수호신으로서, 순결 정절의 상징이었다.

그녀는 골짜기에서 활을 메고 수렵을 다니다가 지치면 샘에 와서 반짝이는 물에다 청순한 처녀의 몸을 씻곤 했는데 어느날 그녀가 목욕을 마치고 몸단장을 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악타이온이 이 모습을 보자 그를 사슴으로 만들어 동료 사냥꾼들이 이끌고 왔던 개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목숨이 끊어지게 했다고 전해진다.

아폴론이 태양의 신인 데 반하여 아르테미스는 달의 여신으로 생각되었는데, 이는 월신(月神) 셀레네, 헤카테와 동일화되었기 때문이며, 아르테미스라는 이름도 그리스계(系)가 아니고 옛 선주민족(先住民族)의 신의 이름이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아르테미스는 비록 올림포스의 열두신에 속하지만 생애의 대부분을 올림포스 궁전에 머물기보다는 숲이나 산, 계곡에서 들판에서 사냥을 하며 보냈다.

  

2) 거대한 돌의 운반방법

일반적으로 아르테미스 신전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자라고 알려져 있던 리디아의 왕 크레수스가 자신의 명성에 걸맞게 그리스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가들을 동원해 고대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신전을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알려졌다. 특히 거대한 기둥에도 화려한 조각을 새기도록 했으며, 리디아어와 그리스어로 문장을 쓰게 했다.

그러나 이 건물은 착공된지 무려 1백20년이 지나 완성된다. 신전 건설의 총 책임자는 세르시프론이다. 학자들은 그가 이집트를 방문해 나일강 연변에 있는 거대한 신전들이 수많은 기둥을 갖고 있는 것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믿는다. 신전에 사용되는 대리석은 12km가 떨어진 채석장에서 운반했는데 40t이나 되는 돌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것들을 운반하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단순한 마차로는 이같이 무거운 돌을 운반할 수 없게 되자 세르시프론의 아들인 메타지네스가 대안을 제시했다. 돌의 형태에 따라 두가지의 이동방법이 고안됐는데 장방형의 돌을 운반하는 경우 돌의 양끝에 커다란 원형바퀴를 설치했다. 원형의 돌을 운반하는 경우 돌에 황소가 끌기에 편한 사각대를 설치했다. 마치 거대한 롤러가 굴러가게 한 것이다.(그림) 고대나 현대나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임을 확인시켜 주는 좋은 예다

 

4. 크로이소스 거상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 중 하나인 로도스섬은 예전부터 고대의 격전지로 수많은 정복자들이 탐을 내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섬이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청동거상이 건설된 섬이기 때문이다.

 34m 높이의 청동거상은 바다를 응시하며 두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데 한쪽 다리는 단단한 땅 위, 다른 쪽 다리는 방파제 위에 올려져 있었고 그 사이를 거대한 함선이 지나 다녔다는 전설까지 있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동상의 두다리 사이로 배가 지나갈 수 있기 위해서는 거상의 높이가 최소한 1백20m는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거상의 두다리 사이로 배가 다닌다는 것은 모두 상상의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로도스섬의 거상이 배가 다닐 정도로 규모가 컸다는 환상을 줄 만큼 사람들에게 인상적인 것은 사실이다.

태양신 헬리오스 청동상은 기원전 3백3년에서 2백91년 사이 조각가 샤레 드 린도스에 의해 로도스섬의 항구에 건설됐다. 청동상이 건립된 이유는 기원전 3백6년에서 3백5년 사이에 로도스에서 점령군 시리아와 치열한 전투를 벌려 그들을 완전히 축출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1) 거상을 만드는 네가지 방법

거상을 만드는 방법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서로 다른 재료를 사용해 거상을 여러 조각으로 나눠서 제작한 후 조립하는 방법이다. 거상의 얼굴, 손과 다리는 대리석으로 만들고, 몸체는 청동으로 만들거나 일부분을 나무로 만들어 각 부분을 조립한 후 매끈하게 마무리한다는 것. 두번째 방법은 보통 조각가들이 청동상을 만드는 것처럼 규모가 다소 크더라도 한번에 주물하는 것이다.

세번째 방법은 주물을 한번에 부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청동상을 만들 때 사용하는 것으로, 몇단계로 나눠 주물한 후 하나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로도스섬의 거상과 같은 청동상을 단 하나로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청동의 두께를 2.5cm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34m의 높이라면 적어도 2백t 이상의 청동이 필요하다. 마지막 방법은 일부 학자들이 제기하는 것으로, 로도스섬의 청동상은 외형만 청동판으로 붙였다는 것이다. 프린느는 부서진 청동상 안에서 돌의 잔해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로도스섬의 청동상 전체를 주물로 하지 않고 어느 부분은 돌로 만든 다음 청동판을 붙였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2) 정확한 위치와 구조에 대한 의문

로도스섬의 청동상이 유명하기는 하지만 거상이 실제로 어디에 설치됐는가 조차 아직 확실하지 않아 학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이와 같이 거상에 대한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우선 거상이 건설된 지 겨우 66년 후에 무릎 부분이 파괴돼 전복됐기 때문이다.

로도스인들은 곧바로 청동상을 재건하기 위해 델피의 신전에 ‘청동상을 재건해야 하는가’라는 질의를 했다. 그러나 델피 신전의 신탁은 놀랍게도 청동상 복원에 대해 부정적인 답을 줬다. 예상치 못한 답변을 델피 신탁으로부터 들었지만, 로도스인들은 신탁의 말을 그대로 존중했다. 그들은 로도스섬의 거상이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가는 역작임에도 더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복원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했다.

그렇다면 로도스의 거상은 어디에 세워졌을까. 학자들은 실무적인 면을 고려할 때 만드라키와 항구의 입구를 보호하고 있는 셍니콜라스라고 불리는 원형으로 된 작은 교회를 거상이 세워졌던 곳으로 제시한다. 이 지역은 방파제가 있을 만큼 넓은 지역이었는데, 중세 시대의 자료에도 이곳에 로도스섬의 거상이 있다고 알려진 장소다. 더구나 이 지역의 바위는 로도스 거인상의 무게를 지탱할 수도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일반적으로 거상의 얼굴은 알렉산더 대왕을 묘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서 평소에 듣고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자주 발견하자 스스로 구세대를 탈피해 새로운 세대를 만드는데 힘썼다. 새로운 세대의 아이디어를 자신이 정복한 모든 지역에 알리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해 주민들에게 새로운 사상을 불러일으키도록 하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로도스, 밀레, 에페스, 페르감 등에서 새로운 도시가 세워진 이유다. 새로운 도시의 주인공은 당연히 알렉산더 대왕이었고 조각가들은 수많은 알렉산더 대왕을 조각했다. 로도스섬에 있었던 청동상의 얼굴 모습이 알렉산더 대왕을 묘사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여기에서 나온다.

현실적으로 거상에 대한 흔적이 전혀 나오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고대에 청동의 가격이 금과 같을 정도로 매우 비쌌기 때문이다. 653년 아랍의 칼리프 우트만의 지시로 현장에 방치돼 있던 거상은 잘게 잘려서 시리아로 옮겨진 후 경매에 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유대인 에데스가 청동 조각을 모두 구입한 후 9백개의 청동 낙타를 만들었다.

  

5. 파로스의 등대

 

 

       

 

 

 

 

 

 

 

 

 

 

 

 

 

 

 

예로부터 지중해 사람들은 선원들을 인도할 수 있는 거대한 기념물을 항구에 세웠다. 주로 엄청난 규모의 거상이나 먼곳에서도 보이는 신전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그러한 건물이나 거상이 항해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배들이 낮에만 도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밤에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선박들의 선원이 항구를 볼 수 있는 장치를 고안했다. 이것이 바로 기원전 2백80년경에 파로스섬에 고대 역사상 가장 높은 등대를 건설하게 된 요인이다.

이집트를 정복한 알렉산더는 전략상 이집트에 커다란 도시를 세울 생각을 한다. 그것은 나일강 계곡이 예로부터 농산물이 풍부한 지역인데다가 아랍과 리비아, 그리고 아시아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파로스섬에서 멀지 않은 마레오티드가 새로운 도시를 세울 적절한 장소라고 여겨 이 섬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다. 건축가 디노크라테스는 도시를 북남과 동서로 나눴는데 스트라본은 길이가 5.32km, 폭이 1.42km가 된다고 적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로마시대를 걸쳐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서 건설된 지 2세기가 지났을 때 주민의 숫자는 무려 30만명이나 됐고, 오거스트 황제 시대에는 1백만명에 이르렀다. 등대는 피라미드를 제외한 다른 불가사의와 달리 비교적 후대까지 잘 운영됐다. 기원전 3세기에 세워져 14세기까지 운영됐으며, 796년에 3층 부분이 파괴되자 술탄 이븐 툴런이 돔식의 모스크를 세웠다. 956년의 지진으로 높이가 22m 정도 줄어들었고, 1100년 또 다시 강력한 지진이 일어나 많은 부분이 손실됐다. 이때 파로스 등대의 유명한 반사경이 파괴됐다는 전설도 있다. 당시에 등대를 관리하던 아랍인들의 과학기술은 매우 발달해 이 등대에 설치한 반사경으로 비치는 타오르는 불길은 50km 밖에서도 보였으며, 맑은 날에 햇빛을 반사시키면 1백60km 정도 떨어진 배도 태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어떤 원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 높이 1백m로 추정

1261년 다시 지진이 강타해 거의 모든 부분이 파괴됐지만, 1272년 유명한 이집트의 술탄 살라딘이 재건을 명령해 겨우 등대로서의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1303년 8월 8일에 일어난 강력한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된다. 이 지진은 그리스는 물론 전 이집트의 델타 지역을 강타했다. 그 후 등대의 운명은 급격히 추락한다. 마그레브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알렉산드리아를 두번 방문했는데 1329년에는 등대의 램프에 올라 탑의 문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1346년 두번째 방문했을 때는 파로스 등대가 완전한 폐허로 변했다고 했다.

여러 자료에 의해 등대는 3개층으로, 상부로 올라갈수록 적어지고 4각형, 8각형, 원형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대의 형태는 완전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등대가 철저히 파괴됐고 워낙 높기 때문에 꼭대기까지 직접 올라가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1백m나 되는 건물을 묘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등대는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데, 이는 현대에도 사용되는 방법으로 바다에 있는 선박에서 가장 찾기 쉬운 모습이며 가장 멀리에서도 보인다. 학자들은 야간에 거의 50km 지점에서도 등대가 보였다는 전설을 사실로 믿는다.

1477년 술탄 카이트-베이가 파로스섬의 북동쪽에 요새를 세우라고 명령했고, 이것이 현재의 카이트-베이성이다. 학자들은 카이트-베이성의 소탑이야말로 파로스 등대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고 추정한다. 특히 소탑은 사각형인데 한 변의 길이가 거의 31m로 파로스 등대 한변의 길이와 거의 같은 값이다.

파로스의 등대가 세계의 불가사의로 뽑힌 것은 기원전 3세기에 30층이나 되는 거대한 건물을 세웠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류가 고층 건물을 본격적으로 세우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말부터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시대를 걸쳐 과학기술이 발전하자 고대에서 가장 높다는 건물을 어떻게 건설했을까 하는 호기심이 절로 일어난다. 파로스 등대를 건설할 때 1백m나 되는 건물을 건설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2) 파로스 등대의 위치

1477년에 술탄 카이트-베이가 파로스 섬의 북동쪽에 요새를 세우라고 명령했고 이것이 현재의 카이트-베이 성이다. 학자들은 카이트-베이 성의 소탑이야말로 파로스 등대의 기초 위에 세웠다고 추정한다. 특히 소탑은 사각형인데 한 변의 길이가 거의 31미터(100피에)로 파로스 등대의 한 변의 길이와 거의 같은 값이다.

카이트-베이가 요새를 건설하라고 명령한 지 2년 후에 현장을 들렸던 독일의 여행가인 투처(Tucher)의 여행기를 근거로 1909년에 독일의 고고학자 레르만 티에르쉬가 파로스 등대를 복원했다. 그것이 가장 잘 알려진 파로스 등대의 모습으로 모형으로도 만들어져 전시되어 있다.그러나 프랑스의 수중 발굴팀에 의하면 파로스 등대는 독일인 티에르쉬의 복원도와는 다소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파로스 등대가 전적으로 그리스 스타일을 답습한 것은 아니고 이집트의 전통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에 많은 신전을 건설했으므로 그들은 이집트의 특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특히 파로스 등대는 석회석과 대리석뿐만 아니라 아스완에서 화강석을 운반하여 시공할 만큼 시공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것은 그리스인들의 건축 기술뿐만 아니라 이집트인들의 석조기술도 여러 곳에서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수중 발굴팀의 조사에 따라 새로운 모습의 등대를 보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파로스의 등대가 바빌론의 성벽을 밀어내고 세계의 불가사의로 뽑힌 것은 기원전 3세기에 30층이나 되는 거대한 건물을 세웠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류가 고층 건물을 본격적으로 세우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말부터이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시대를 걸쳐 과학기술이 발전하자 고대에서 가장 높다는 건물을 어떻게 건설했을까하는 호기심이 절로 일어났다. 결론을 말하면 파로스 등대를 건설할 때 100미터나 되는 건물을 건설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이 있었다.

 

3) 파로스 등대의 발굴

 

1994년 가을에 프랑스의 고고학 발굴팀이 알렉산드리아 앞 바다 깊이 7미터 정도의 바다 속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파로스 등대의 잔해 수백 점을 건지는데 성공했다. 발굴팀은 화강암으로 된 높이 4.55미터, 무게 12톤의 여신상을 기중기로 끌어올렸으며 5헥타르에 달하는 거대한 면적에 거상들의 토르소, 목이 떨어진 스핑크스들이 수없이 수장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최소한 3천 개가 넘는 건축용 돌들이 카페트와 같이 깔려 있으며 원형기둥들의 파편들도 수백 개가 된다는 것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스탄블과 다르다엘 사이의 프린스 섬에서 채석되는 백색 대리석들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이 채석장에서 대리석을 수출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다. 1998년에는 클레오파트라의 궁전 터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로 추정되는 스핑크스를 인양했다. 이 대리석 스핑크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얼굴에 사자 몸통을 결합한 모양으로 고대 알렉산드리아 항구 수중유적 중에서 여왕 궁전과 전용부두가 있었던 안티로도스 섬 지역에서 발견했다. 이시스 신전 대사제상과 당시 침몰됐던 선박도 인양됐다. 2,000여 년 전의 고대 알렉산드리아 항구 및 파로스 섬, 안티로도스 섬 등이 지진과 조류에 의해서 고스란히 가라 않았다는 뜻으로 발굴팀은 전차가 달렸던 도로는 지금도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말끔하다고 했다.

 

6. 제우스신상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최고의 신 제우스가 비바람은 물론 천둥과 벼락을 만드는 신이라고 믿었다. 벼락은 하늘에서 내린 신의 징벌로 생각했기 때문에 제우스신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도시마다 제우스신을 모신 신전을 짓고 성대한 제사를 지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아무래도 그리스 반도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 중 하나인 올림피아(올림피아는 도시가 아니고 신전과 경기장이 세워진 장소다)에 안치된 제우스 신상이었다.

 

1) 제우스 신상의 건설

그리스인들은 가장 먼저 올림피아의 주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우스를 위해 거대한 제우스 신전을 건축했다. 기원전 4백70년의 일이다. 이 건물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석회석으로 건설됐는데 하얀색의 치장 회반죽을 건물 외벽에 바랐다.

제우스 신전의 놀라운 점은 인간의 착시 현상을 고려해 건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의 아테네에 보존돼 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얼핏보기에 동일한 굵기의 기둥이 동일한 간격으로 배치된 직사각형의 ‘반듯한’ 건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지어진 건물은 이와 매우 다르다. 우선 가장자리 기둥은 가운데 있는 기둥보다 좁은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이와 같이 불균형하게 건설한 것은 만일 동일한 굵기로 만든 기둥을 동일한 간격으로 세웠다면 건물의 모양은 직사각형이 아니라 위나 옆으로 퍼져 보이기 때문이다. 대들보의 가운데도 위로 볼록하게 휘어져 있으며, 가장자리의 기둥은 안쪽으로 약간 휘어져 있다. 기둥은 위로 갈수록 가늘어진다. 수치적으로 정확하게 그려진 수평선은 실제로는 중앙 부분이 처진 듯이 보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거대한 돌들을 맞춰 나가면서 중앙부를 약간 들어올렸다.

제우스 신상은 신전이 건설된 후 40년이 지났을 때 피디아스에게 주문됐다. 피디아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가로 기원전 4백70년에 피라테에서 8m나 되는 대형 아테나 신상을 만들었고,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나 여신을 조각했다. 그는 크리세레환틴 방식(나무에 상아와 금을 입히는 장식)을 사용해 10m 크기의 아테나 여신상을 완성했으며, 아테나 신상 덕분에 피디아스는 그리스가 배출한 최고의 조각가로 자리매김했다. 피디아스는 8년여의 작업 끝에 기원전 4백47년 제우스상을 완성했다. 이것이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나 여신상과 함께 피디아스의 2대 걸작품으로 꼽힌다. 제우스 신상도 아테나 여신상과 마찬가지로 크리세레환틴 방식으로 제작한 것이다. 13m나 되는 제우스상은 높이가 90cm, 길이 10m, 폭 6.65m 크기의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옥좌에 앉아 있는데 천장에 거의 맞닿을 정도였다. 제우스를 서있는 형태로 조각했다면 거의 18m나 달하는 거인이었다. 이와 같이 거대한 신상임에도 불구하고 피디아스는 제우스의 신성한 위엄과 너그러움을 완벽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들었다.

 

7. 모솔레옴의 영묘

 

모솔레움이란 페르시아 제국 카리아의 태수 모솔왕을 위해 그리스의 할리카르나소스(현재 보드륌)에 건조된 무덤을 뜻한다. 가로·세로의 길이는 32×38m, 총 높이는 거의 50m로, 당시까지 세워진 무덤으로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제외하고 규모가 가장 컸다. 모솔왕의 생전에 착공돼 그가 죽은 뒤 왕비 아르테미스가 계속 진행했으며, 실제로 완성된 시기는 그녀가 사망한 후인 기원전 3백50년경으로 추측된다. 모솔왕의 누이동생이자 부인인 아르테미스 여왕이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슬퍼하면서 포도주에 모솔왕을 화장한 재를 넣어 마신 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겠다고 맹세했다. 이 전설은 그 후 중세시대에 부부간의 애정과 미덕으로 여겨졌고 수많은 자수에 새겨진다.

모솔레움은 다른 불가사의(피라미드는 제외)와는 달리 중세시대까지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돼 있었지만, 십자군이 전략 요충지로 삼으면서 수난이 시작된다. 할리카르나소스에 주둔하고 있던 십자군들은 할리카르나소스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모솔 궁전의 폐허 위에 커다란 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당연히 커다란 돌과 모르타르가 필요했다. 그들은 도시의 중심부에 우뚝 솟은 모솔레움에 눈독을 들였다. 커다랗고 잘 절단돼 상태가 양호한 돌은 즉시 건축용 자재로 재사용될 수 있고, 손상이 심한 것은 모르타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벽돌이나 돌을 접착시키기 위해 처음에는 진흙, 점토, 역청 등을 사용했는데 로마인들은 새로운 모르타르를 발명했다. 바로 석회석을 용광로 속에서 가열해 석회를 얻은 후 모래와 물을 섞은 것이다. 이 방법은 사용이 편리하고 견고하기 때문에 현재도 많은 건축현장에서 사용된다.

그러면 모솔레움이 세계 7대 불가사의가 될 정도로 고대인들을 찬탄하게 만든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보편적인 설명은 모솔레움이 무덤으로서 당시에 가장 큰 규모인데다(피라미드 제외) 사자의 영원함을 보장하기 위해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과장된 용기를 유감없이 보였기 때문이다. 우선 무덤의 규모가 당시 소아시아에서 건설됐던 어떤 것보다 매우 거대했다. 특히 그리스에서 ‘거대하다’라는 말의 ‘colossal’은 바로 이 건물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모솔레움이 당대에 있어서조차 무덤이라는 특성을 제외하면 가장 큰 건물이거나 가장 잘 건축된 것은 아니면서도 불가사의에서 제외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바로 1층의 36개 기둥 안에 설치돼 있던 놀라운 조각들 때문이다. 1521년 세사리아노는 이 조각을 일컬어 당시의 조각가들이 자신의 재주를 마음껏 발휘한 보석이라고 적었다. 이 무덤을 그렇게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무덤을 장식하기 위해 외부에 설치돼 있던 조각상들이었다. 조각들은 알바트르 돌로 만들어졌는데, 현재는 뉴턴이 발견한 남녀 한쌍의 조각상만 남아 있다. 남자상은 건장하고 수염이 있으며 머리는 매우 섬세하게 조각돼 영국 대영박물관의 최대 수장품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가 입은 옷도 매우 정교하며 조각기술이 눈부실 정도로 탁월하다.

 

한국어문학부.95301022.신현호




독자 한마디

의견쓰기
이 름 E-mail
제 목



프린트하기 기사메일보내기 독자한마디


이전으로
서양현대사
ⅱ. 위임 통치령의 실시
서양 현대사 연대표
서양 현대사 연구의 새 흐름
해체주의 건축
西洋의 私生活
일러스트레이션의 역사
영문학에 대하여
미학이란 무엇인가
화장의 어원과 기원
서양 음악의 역사
세계 7 대 불가사의
히틀러와 인종차별
청바지의 역사
서양문명의 음악사
 | Home | 사이트구조 | 내용검색 | 전체내용보기 | 내용올리기 |
경남 하동군 금남면 덕천리 1431-5 (전화055-883-4843)   Contact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