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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대사 개관 3 (강의노트)
2007-10-25 10:03:26   read : 3954

서양고대사 개관 3 (강의노트)

  

 

◎ 로마제국의 흥망사


1.  로마공화정의 발전


a. 로마공동체CIVITAS의 탄생과 왕정기(753-509):

귀족이지배한 도시공동체-3000년경 인도-게르만의 일파: 이탈리아인이 정주시작-기원전 8세기 티베르강 유역 라틴의 작은 촌락 로마가 건설(라틴인)-초기 에트루리아Etrurians에 지배이후 독립도시국가의 형태를 유지 510년경부터:  이후 1000년의 세계제국의 수도로 변모-그리스문명의 영향(종교, 제도, 건축, 도로건설, 도예)-부족국가: 씨족Gens, 종족Curia 부족Tribus으로 구성.  사회적 신분: 혈통귀족Patricii 평민Plebs 예민Clientes 노예Servus


b. 공화정 초기와 중기(509-2세기초) 

-초기로마: 로마공화정은 6세기이후-귀족(대토지소유)이 실권장악-통치와 군사권은 임기 1년의 2명의 통령Consul-전권은 귀족대표기관인 원로원Senatus이 장악-평민: 중소농민이 주축, 참정권이 박탈


2. 로마공화정의 성립


-상공업을 통한 평민계층의 부의 축척(귀족수준을 능가) 및 일부는 군대(중장보병)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  -신분상승을 통한 귀족정의 변질-B.C. 5세기 귀족과 평민간의 신분투쟁(평민의 새로운 도시건설을 통한 이주문제: 성산사건)-원로원의 타협안: 2명의 평민대표에게 호민관 Tribunus Plebis 권한 허용-평민대표기관 평민회구성 Concilium Plebis-평민의 권리신장에 크게 기여:  451년 12표법의 제정: 관습법에 의한 귀족의 폐단을 방지 및 평민보호책 .367년 Licinius(리키니우스법): 토지소유의 상한을 정함(125만 평방m)2명의 통령 중 1명은 평민대표. 평민과 귀족의 실질적 신분차이가 거의 폐지-287 Hortensius(호르텐시우스법): 평민회의 결의가 원로원을 거치지 않아도 효력발생.  로마 공화정의 신분제 문제는 완전 해소


3. 로마의 반도 통일

초기 로마의 정복사업이후 정복지주민은 로마 시민화(평민과 동맹관계에 편입)-로마 주변의 라틴도시국가의 라틴동맹(396)  -주변부:에트루리아인, 갈리아인을 완전 복속-280년경 거의 반도를 통일: 남부경략 삼니움족Samnium: 중부석권 이후, 남부 그리스식민지공략*모든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와 각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망 건설(군사, 수송도로)-각 지역의 로마화작업(군사, 상업, 문화교류에 영향)-이탈리아에 대한 로마의 통치: 지방자치제를 통한 협력관계를 구축(군대진주를 위한 요새구축)-이후 지중해 및 해외 진출을 통한 대제국 건설의 원동력* 로마시민권의 확대과정: 로마지배하의 이탈리아인 로마군사력의 절반이상차지


4. 로마의 발전 

로마시민공동체의 해체(공화정후기: B.C2세기-A.D. 1세기)

포에니전쟁: 반도통일이후 (지중해진출모색)-지중해의 세계는 당시 군웅활거시대 .알렉산더사후 중동, 이집트,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페니키아의 카르타고로 분열 

카르타고: 서지중해의 맹주(강대한 해군력과 경제력):   로마의 지중해 진출의 결정적 방해요인

 

 

 

지중해의 세계 개관

-지중해 동쪽: 알렉산더의 정복사업에 따른 변화 . 서쪽: 제해권 장악한 북아프리카의 해양대국 카르타고와 이탈리아반도를 석권한 육상국가 로마와의 대결(포에니 전쟁: 이는 그리스세계와 오리엔트 대결의 연장)-카르타고: 기원전 6-8세기 해상왕국 페니키아인 (라틴말 새로운 도시)-포에니: 로마인이 페니키아인을 일컫는 말*기원전 3세기 한니발전쟁의 승리는 로마가 해상왕국으로 급부상  -동지중해의 헬레니즘 강대국과의 긴장, 갈등관계로 발전-기원전 146 로마가 지중해 대국을 건설하는 과정의 분수령-카르타고 격파, 그를 속주로 편입(서지중해에서의 승리)-마케도니아 병합 (196년 2차 마케도니아전쟁이후 속주화) 그리스 자유정신을 존중

 

로마의 대외정책

헬레니즘왕국에 대한 기본전략-직접적인 지배: 로마의 지배(imperium romanorum)과정-기원전 31-30 악티움해전에서 마지막 왕국(헬레니즘) 이집트 격파: 속령화거의 모든 지중해지역을 통일-기원전 27년 로마제정: 황제에 의한 제국통치체제의 수립이후 200년 팽창: 북부 갈리아, 라인-다뉴브강, 영국의 일부등 영토편입-평화의 시대(정복보다는) Pax Romana: 경제적 번영(해운업, 무역, 도시건설)최고의 고대문명의 절정기: 물질문명을 기반

 

*포에니 전쟁(Punic War 264-146 B.C)

-페르시아전쟁이후 최대의 동.서충돌(유럽대 오리엔트)

 

1차 포에니전쟁: 264-241B.C. 

원인: 시칠리아의 내란에 양측이 간섭 군대파견-경과: 로마의 육군과 해군력 총집결로 승리: 시칠리아의 지배권확보(배상금 요구) 이후 Sardinia, Corsica를 확보: 로마제국의 형성에 초석을 마련

 

2차 포에니 전쟁: 218-201B.C

원인: 카르카고의 에스파니아 개발문제에 주력. 한니발Hannibla 에스파니아의 개발을 통한 부의 축척과 군대를 동원  .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원정 216년. 8만의 로마대군을 격파(Canne전투: 이태리 중부)로마의 함락위기: 이탈리아 동맹군의 일부(남부지역)이 카르타고와 동맹. 로마의 재기: Scipio를 중심으로한 신규평성로마군의 카르타고 본토공략. 한니발의 철수: 북아프리카의 전투에서 카르타고의 패배, 휴전이 성사: 201 B.C.-결과: 로마의 스페인 지배, 카르타고 50년 상환의 배상금, 카르타고의 군선인도서지중해의 재해권확보

 

 

3차 포에니전쟁: 149-146B.C.

원인: 카르타고의 재기방지책(카르타고 자체분쟁에 개입)  -목표와 결과: 카르타고의 초토화, 주민을 노예화: 로마속주에 편입* 지중해의 재해권문제-2차 포에니 전쟁이후: 마케도니아정벌작업-목표: 카르타고와 그리스세력의 동맹할 가능성을 사전봉쇄. 4차에 걸친 로마의 마케도니아 간섭: 군대파견을 통한 군사적 개입-소아시아, 이집트, 중동지역으로 확대(로마의 군사적 절대 우위): 속주에 편입


5. 로마공화정의 변질

 

로마사회의 변질

대외적 팽창의 결과: 평민출신의 기사계급(Equites)의 성장(공헌)-군수품조달, 공공건물 건설, 속주의 세금관리 과정에서 경제적 부의 축척*새로운 관료제도의 요구: 토지제도 및 사회적 신분지위. 로마는 부의 집중을 통한 사치와 향락문화 풍조가 확대-건축, 장식, 요리, 사교, 의상 등 전통사회의 가치 및 소비문화가 변질

 

전쟁의 결과: 정복지 주민의 로마노예화.  하층평민 및 자영농의 신분하락. 전쟁을 통한 생산저하 및 부체의 상승. 대토지소유의 농장경영(노예를 통한): 속주를 통한 값싼 농산물 유입

 

 

 

Latifundium  라티푼디움의 실시: 곡물재배가 아닌 올리브, 포도의 상품생산의 대토지소유제로 전환  -결과: 중소농민의 무산자로 전락, 새로운 귀족층이 정착 (사회의 양극화 현상)*사회적 모순: 무산자와 유산자계급의 갈등이 심화-유산자: 전통귀족, 신흥귀족: 관직 및 경제력을 독점.  원로원의원: 대토지 소유자-무산자: 가혹한 대우: 특히 노예의 반란이 반복. Spartacus 73-71B.C.의 반란은 대규모-결과: 로마 내부적인 혼란이 가중은 내란의 수렁에 빠트림. 로마공동체의 시민의식의 사라지고 개인 및 물질주의가 팽배-로마는 무력에 의한 헬레니즘세계를 재패, 반면 헬레니즘의 개인, 물질주의에 패배

 

 

 

개혁과 군벌의 대두(평민파의 개혁요구)Tiberius Graccus 163-133 B.C. 형제  -133 형 그락쿠스의 호민관: 자유농민의 몰락: 귀족의 사병화에 반대. 토지개혁를 주장 (니키니우스법을 부활: 귀족의 토지소유제한)반대파로부터 살해-123 동생 Gaius Graccus의 로마하층민의 지지로 호민관 선출: 형의 계획을 계승. 로마시민권의 확대, 토지분배문제로 원로원과 대립.  내란으로 확대될 위기에 그는 자살로 마감, 실패-이후 혼란이 가중 내란의 유혈사태가 속출-로마의 공화정체제는 대제국의 통치체계를 대신할 수 없었다 .속주의 반란과 이민족의 침입이 결과적으로 나타남

 

*군벌의 등장-혼란속에서 시민군은 귀족의 사병화(용병화)-귀족(속주지사)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군벌독재화.  원로원과 정치적 대립 -대표인물: Marius (마리우스: 평민출신 원로원을 대변)   Sulla (술라:귀족출신 평민회를 지지)-대립 후 술라의 승리: 원로원의 과두제를 개혁함

 

6. 로마의 새로운 질서

 

3두정치

군벌간의 정치적, 군사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 원로원이 기능상실이 원인-술라의 사후 그의 참모장 Pompeius106-48B.C와 Carccus 114-54B.C. 의 등장-원로원의 요청으로 이베리아반도에 남은 마리우스파를  완전 분쇄-크락쿠스는 스파르타쿠스의난을 평정 후 대부호로 정치적 야심-케사르 Caesar 100-44B.C.의 등장: 평민의 지지 

 

 

 

제1회 삼두정치

원로원과 대립 (케사르가 최고 실력자로 부상)-케사르: B.C. 59년 갈리아군단의 사령관(군사적 지위의 중요성을 의식)8년간의 갈리아지방 정복사업에 몰두(라인이서지방평정)라틴문화의 프랑스, 독일지역 전수자-크락크스: 시리아 총독부임후 파르티아전투에서 사망

 

폼페이우스와 시저의 대결구도-원로원은 시저의 군사적 성공에 경계: 정치적 대권과 직결. 시저를 군사령관직에서 파면: 그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넘었다-결과: 이탈리아와 속주는 전쟁상태, 강력한 군대의 승리는 예고. 봄페이우스는 원로원의 지지자와 동방으로 피신.  케사르의 에스파니아 점령이후 B.C. 48년 봄페이우스군을 격파, 살해.  그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여왕에 임용한뒤ㅡ B.C. 45년 로마에 귀환. 그는 원로원의 추천으로 10년 임기의 통령이 됨

 

 

 

케사르의 개혁

새로운 질서의 모색-행정개혁:혼란, 무질서, 부패방지의 원인: 세제를 개혁, 중앙집권제 (속주의 총독을 중앙에서 통제)시민권의 확대, 빈민층구제사업(도로, 항만 등 공공사업), 토지재분배(하층민대상)  -문화사업: 46년B.C. 율리우스력(태양력의 기초)의 제정. 44년 B.C. 종신통령(원로원은 로마공화정의 종말로 간주: 그를 암살)

 

제 2차 삼두정치

안토니우스(Antonius: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케사르의 암살: 로마공화정의 혼란을 재현양자: 옥타비아누스와 케사르의 참모 안토니우스와 레피투스(Sepitus)* 3두체제는 부루투스 Brutus(시저의 암살자)의 군대를 마케도니아에서 격파.  반대파의 재산몰수와 숙청 *로마제국의 영토분할-레피투스: 아프리카 (후에 탈락 로마는 동서로 양분)  -안토니우스: 이탈리아 이서지역  -옥타비아누스: 그리스 이동지역 

 

악티움해전 Actium 31 B.C 

로마 실권장악을 위한 분할통치를 둘러싼 내분.옥타비아누스의 승리: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연합함대를 격파.  이집트왕국의 멸망(프톨레미왕조): 로마의 영토에 편입. 일인지배체제(제국영토의 효율적지배)가 필요: 제정이 요구. 공화정은 로마제정으로 전환하는 계기 



7. 로마제정의 발전

서기 1-2세기(제정전기): 시민공동체적 요인이 쇠퇴

 

*아우구스투스 시대(옥타비아누스)

내란과 무정부적 혼란방지를 위한 Princeps(원수정)수립Princepatus: 19세기 몸젠이 명명한 정치체제-원로원과의 타협  대권장악: imperator: 군통수권자. Augustus(존엄,지존)의 칭호: 로마   황제에 등극-그는 독재자가 아닌 로마시민의 원수 

 

Principatum(지배체제): 로마공화정의 변질. 귀족정이 아닌 일인지배 (원로원의 기능쇠퇴)속주의 총독의 사병화 금지(연금제실시, 감독관파견)상비군과 친위대창설: 국내질서유지. 도시정비: 상수, 신전, 목욕탕, 도로 정비-45년간의 치세: 혼란과 무질서를 추방한 로마의 평화시대가 열림-아우구스투스는 고대신앙을 복구하는 노력: 진리탐구에는 등한시-로마의 세계는 점점 더 판에 박힌 틀만 유지-그는 정치적 도전자에 냉혹(원로원등)-A.D. 18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죽음까지 같은 시기

 

 

*로마의 평화 (Pax Romana)

아우구스투스이후 4황제시대: 정치체제의 제도적 정비와 전문화작업이 확대-Nero의 기독교박해, 로마방화, 화산폭발(봄베이)에도 불구: 평화와 안정은 유지됨-원로원과의 타협: 군벌의 대립으로 인한 내란위협 방지 :황제권한의 강화-네로이후 5현재시대(96-180): 로마의 전성시대 로마제국의 영토 확장, 내치정비-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Marcus Aurelius(121-180): 원로원을 통해 선출  -빈민구제사업: 대규모의 토목공사  -대외정책: 무력으로 루마니아, 헝가리지방 아르메니아 진출, 속주의 반란진압. 소아시아, 유럽(이베리아반도, 베네룩스, 영국 서유럽라인좌변)   아프리카에 광할한 영토를 넓힘-철인황제: 아우렐리우스(외침과 내분의 연속: 전쟁으로 인한 인구감소 및 게르만의 이동-비단길: 중국 후한에 사신파견 (로마제국을 대태국으로 명명)

 

 

8. 제정시대의 사회

라인,도나우강의 국경유지: 법에 의한 통치, 경제력을 강화-도로, 항만, 습지개발: 무역의 증대(각국의 특산물 교역: 식민지)중국, 인도까지-교역을 통한 도시의 발달: 헬레니즘문화의 계승: 그리스-로마문명의 열매를 맺음-정복지에 지중해 고전문화을 전수시킴(프랑스, 영국,남독일, 스페인 포함)-로마시민권의 확대: 신분제사회, 귀족과 기사계급, 일반평민, 노예-노예제를 통한 경제력 증가: 신분유지를  위한 연속적 대외원정 : 막대한 군사비지출-상업의 발전을 통한 화폐경제의 일상화-대외팽창만이 새로운 재원을 창출한다는 정책: 로마사회의 내부붕괴는 팽창의 중지를 의미


9. 로마문화와 기독교

-지중해 그리스의 도시문명을 인수-로마제국의 발전과정에서 이민족의 문화를 융합하고 그리스-로마적 전통을 전수함-고전고대를 유럽중세세계에 전달하는 역할

-헬레니즘화된 그리스문화를 계승: 그리스의 독창적인 면을 수용  -로마인은 실용적인 정신으로 계승 발전-로마문명은 그리스문화의 모방에 충실: 조성이 부족: 학문, 예술분야:   건축, 도로, 수도 등 토목공사: 웅장함.  제국의 창조력의 원동력: 정치, 군사, 행정, 법률제도의 우수성확인

 

 

◎로마법의 기원과 벌전

 

로마법

-로마제국의 최고의 문화유산-그리스: 예술, 철학  로마: 법-초기: 기원전 8세기 도시국가 civitas- 6세기말 유스티아누스 법전의 집대성-최초의 성문법: B.C 450년 12표법(귀족과 평민의 대립이후 평등을 보장):-시민의 권리와 관습을 법으로 제정(시민법)-농촌사회를 규율하는 법 (엄격한 형식주의)-가부장권을 인정   -자유민, 반자유민, 노예, 가축, 물품에 대한 소송의 당사자: 가장만 인정-정복지 이민족과의 통제 및 교섭을 위한 만민법의 체계

 

 

만민법은 스토아철학의 자연법과 동일시:(제정초기 2-3세기 통용)법은 자연의 합리적인 원칙과 일치되어야 한다: 세계성, 보편타당성.-자연법: 개별성과 특수성을 초월한 자연계의 이치처럼 영혼불멸하고 보편적인 법-보편적 규범, 인간의 공통된 합리성을 강조하는 스토아의 자연법사상을 토대로  세계제패를 위한 법, 행정체계를 유지하고자 함

 

 

*정복사업-만민법과 시민법: 기원 전 3세기 포에니전쟁이후 로마가 헬레니즘세계와의 접촉. 로마시민법: 로마시민에게만 적용하는 관습 및 12표법(민회의 법률) 엄격한 형식주의(법률소송제도를 채택)로마 시민의 거래법(시민법)거래행위: 매매, 금전소비대차, 조합, 저당 등에 대한 법적 보호책-자유로운 거래법은 외국인에도 통용되는 원칙을 채택(만민법으로 통용):(외국과의 소송문제에 외국인 법무관 1명)

 

시민법과 명예법: 민회에 의한 고유한 시민법과 법무관에 의한 명예법(만민법)으로 구별. 법무관은 공화정의 명예로운 관직이라는 의미-귀족의 법률학자:원로원의 구성원들: 1년 임기의 법무관임용에 자문기관 역할.  법무관 임용에 따른 승인방식서, 소송진행표를 재편집한 법전형태가 성장(영구 고시록: 변경이 금지 ) 법률의 체계화: 

 

 

공화정시대

법무관과 명예법시대-원수정시대: 황제의 칙령(제정시대)*pax romana 고전시대:(A.D. 1-2세기)-그리스 철학의 영향 (로마 법률학이 소제, 추상, 귀납의 개념을 체계화)-가이우스: 법학제요: (사람의 법, 물건의 법, 소송의 법) 시민법을 3부분으로 분류. 나폴레옹의 프랑스 민법전의 초석, 법학입문서의 역할  -해설서 저작( 해답집, 문제집, 서간집): 개별적 문제해결에 초점-사법고시의 주해역할, 법제도와 법학의 기초학설을 마련-유스티아누스의 학설집에 40명중 35인이 고전시대의 저자가 해당-지금 5%만 현존: 920페이지상당(법률 해석집)

 

 

고전시대

원수정시대(관료제도의 정비)-법학이 발전 성장하는 이유: 관료제 내에서의 법학자의 위치 지대한 것(모든 공직분야에 진출: praefectus 속주의 총독)-Princeps에 의해 위임된 재판관으로서의 법학자의 권위: 그의 해답만 인정-법무관에 자문하던 때와 다른 공인(월급)*황제의 칙령칙법(칙령)-카라칼라황제 212 로마시민권을 제국의 모든 주민에게 준 칙령-최상급심으로서의 재심원칙-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재판제도(상소제도):  -황제의 재판권은 많은 새로운 법을 발전-황제의 법률해답의 발령( 실질적으로 법학자가 기초한 것)  -법학자의 자유로운 법해석은 많은 제약을 받음-이후 모든 법의 체계는 황제의 이름으로 제도화(고전법학의 쇠퇴)

 

제정후기

3세기말 4세기 초 이후-서로마제국의 멸망   -법학의 체계화에 성공(서책)-법률학교를 통한 법학서적이 다량으로 복제됨( 개념이 일반화)-법학의 비속화: 라틴화하는 경향-콘스탄틴대제 이후의 법률은 비속법이라 함예: 테오도시우스 법전: 438 소유와 점유의 구별이 애매하고 혼동됨-서로마제국의 멸망이후 로마의 비속법은 게르만족의 관습법과 혼제하는 현상-중세에 다시 재발견

 

 

동로마 법률학교와 고전주의의 부활

서로마제국의 해체과정에서 로마법은 더욱 비속해짐-5세기 동로마는 고전주의적 입장에서 법률학교를 신규개편함 (5년 과정)고전법학자의 저술이 수집되고 해석됨-텍스트의 주해, 색인 등의 연구가 강화: 주석적 연구방법-이후 중세의 주석학파와, 현재 법해석학의 기초*유스티니아누스황제의 법전:-로마볍의 집대성-로마법은 동로마황제 Justianus 527-565 (유스티아누스)에 의해 집대성-동로마 법률학교의 연구덕택으로 단시일에 완성-학설집의 자료는 방대하지만 3년만에 533완성-고대로마법과 다르게 가부장제에 따른 엄격한 형식주의는 완화됨-즉 시민법과 명예법이 통합된 보다 일반화된 로마법체계-고전주의적 입장이 반영: 이후 동로마세계에서 비속적으로 적용됨-11세기 까지 서유럽에서는 로마법이 자취를 감춤

 

 

중세의 로마법 (주석학파)

십자군원정 콘스탄티노플과의 교역하던 피사에서 학설집의 사본발견-이후 12-13세기 볼로냐의 주석학파에 의한 법전연구가 활발-주석학파의 업적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1000년의 신.구법제도를 정리통합)의 역사적 기원 및 모순점 해결  -해석학을 통한 실제 생활에 적용시키면서 볼냐대학은 전유럽에서 몰려는 법학도를  위한 로마법 강의와 연구를 활발이 전개함  -영국은 전통적 법률전통에 따라 이를 배척함(영미법)-후기 주석학파: 주석서에 봉건법, 교회법, 도시행정법를 추가로 소재화함

 

로마법계수운동

나폴레옹법전과 19세기 독일법학이 로마법을 전승-1900년 민법전이 성립: 유스티니아누스계통의 로마법이 현행법-나폴레옹의 법전: 로마법에 강력한 영향-제국주의와 양차대전을 통해 전세계에 로마법 대륙법이 전수됨(독일-일본-한국)



로마제국의 붕괴원인

Spengler, Toynbee 문명사적 흥망고찰의 기본적 틀: 그리스-로마문화 /Gibbon: 로마제국의 몰락의 주요원인-( 야만족의 침입과 기독교의 승리: 대중화, 국교화)

 

정치적 원인/황제의 계승문제 

황제권을 둘러쌓은 궁정음모는 고질적 병폐(5현재시대는 제외)-3세기 군인황제시대: 군대가 개입하는 황제옹립과정에서 내분과 대립-제국의 통합과 황제권에 치명적결과-디오틀레티아누스의 수습책: 전제군주정를 도입 -콘스탄틴누스 이후 악화  -로마의 황제권: 제국통합의 핵심-오랜전통의 기능적 제도가 뒷받침되지 못한, 공화정에 접목된 타협의 산물-황제의 칙법과 강력한 군대의 장악-황제의 계승권문제가 애매: 황제의 신격화 작업은 지배층세력에 역효과로 나타남-군인황제시대: 5현재시대이후 (3세기): 로마의 내분과 이민족의 이동 

 

 

군대의 조직력약화  

235-285: 군사반란과 내란이 연속적으로 일어남.군인황제: 속주의 군대를 배경(26명의 군인황제 Barrack Emperor)가 교체:   자연사는 2명뿐: 모두 권력투쟁의 희생물: 군대의 동요

 

군대의 질적 변화

초기: 자유로운 중산적인 시민으로 구성된 국민병의 성격. 공화정말기: 3두정치시부터 용병대의 성격이 첨가되고 사병화함.  제정후기-말기: 속주민과 야만족 출신의 비중이 커짐: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약화. 제정후기(3-5세기)전제주의 정부형태: 3세기: 부패와 타락(금권정치): 군부의 등장: 황제의 등극을 좌우:  동서의 야만인의 침입, 혼란: 군사비의 증가, 질병이 만연

 

 

 

정치적 변화

두황제의 노력: Diocletianus 284-305, Constantinus 306-337/ Augustinus: 혼합정부체제(원수정)를 마감, 절대권력체제:   제국의 통합유지를 위한 중앙집권적 권력국가(관료제적 통제강화)-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4-305) 제국개편-강력한 황제권력을 유지: 관료제, 군제를 강화. 공화정적인 요인을 일소, 통일적 군현재도를 개편.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에서 전제적 군주정(Dominatum)으로 변질  -그는 소아시아에 군대와 함께 체류: 시리아, 이집트를 직접통치  -공동황제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밀라노에 체류: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북아프리카지역 통치  -2명의 황제 2명의 부황제: 제국은 4분 분할통치

 

 

콘스탄티누스Constantiuns 306-337:-비잔티움으로 수도이전: 콘스탄티노플으로 명명.  4개의 대관구 Presfectura 14개의 관구 Doicesis 117개의 주 Provincia로 분류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를 정비: 175군단으로 개편-그리스도교를 공인(민간신앙의 확대를 피할 수 없었다)-테오도시우스Theodosius 379-395 동서로 제국이 분열. 서로마제국: Odoacer 476멸망(게르만 용병대장)


게르만의 이동

-외몽골의 훈족이 유럽 침임: 이에 따른 유럽, 인도어족의 3차례 민족 이동-1차 이동: 4말-5세기 초-375년 다뉴브강을 넘은 서고트족,   -406년 라인강을 넘어선 반달, 알란, 수예브족. 이후 슬라브, 동고트, 프랑크족의 민족이동. 이에 따른 로마제국의 국경과 정치조직의 붕괴-2차이동: 유스티아누스대제 527-565의 타계이후(비잔틴 내부의 동요)-아바르족의 발칸침입, 롬바르족의 북부이탈리아 정복,   앙글로섹슨족의 잉글랜드정복, 프랑크족의 지배지역 확대(라인지방)

 

3차 민족이동: 카로링왕조의 종말-9세기 초~10세기 초: 노르만족의 프랑스와 잉글란드 및 전유럽지역에 대한 침입  -이시기: 이슬람세력의 지중해장악: 에스파니아, 사르디니아, 코르시카, 시칠리, 남부이태리(비잔틴제국이 쇠퇴)-서유럽지역: 두 세력의 침입에서 분열되고, 황폐화-카롤링조: 독일 911년까지, 프랑스, 987까지 명맥이 유지-훈족의 침입: 이에 따른 고트족이 도나우강을 넘음: 4세기. 로마황제는 군대를 동원 전투에서 패배, Valens황제

 

 

게르만의 침입

게르만의 일부는 로마의 용병화-국고의 고갈 , 신분제의 동요(군제, 조세, 토지제도)-로마인의 정신적, 도덕적 무기력이 원인-게르만의 이동(라인-도나우 지역에서 월경)동: 고트족 (소아시아와 그리스지역 침입)   서북부: 게르만(갈리아, 에스파니아, 이탈리아에 깊게 침투)동부국경: 사산조 페르시아의 흥기로 크게 위협*결과:-국경을 넘어 도시는 약탈, 방화, 파괴되기 시작,  -군사적으로 물, 인적 동원이 어려움: 강제 징병, 징세, 노동의 악순환

 

 

게르만의 이동에 따른 정치경제적 변화

로마가 그리스 도시국가의 제도를 흡수한 면도 원인: 제국의 발전은 시민공동체의식이 무력해짐 (공화정의 변질: 제정)-로마의 평등이념은 경제, 사회 구조적으로 비현실적인 면에서 나타남.-중앙집권적 관료제의 붕괴는 지방분권적 귀족정치로 이동(고대세계의 종말)-중세사회로의 과도기에 접어듬; 경제의 중심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행정의 중심은  중앙집권에서 지방의 유력귀족으로

 

 

경제적원인 (근본적 원인)

로마의 번영은 바로 제국의 영토확장과 전리품 및 공납의 산물을 의미한다 -기술개발이나 혁신이 수반된 생산적인 경제발전의 혜택이 아님-정복의 한계=경제적 쇠퇴=황제권이 동요=제국의 해체과정을 겪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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