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고대사 개관 2 (강의노트)
◎그리스문명의 성립과 발전
그리스 문명은 서구문명의 근원적 발전적 토대이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받고, 특히 예술, 문학, 자연과학, 철학, 역사학 등의 학문적 기초를 제공하엿다. (탈레스) 철학과 과학은 동시에 발생하였다.
*문자는 이집트에서 B.C. 4000년 경 처음으로 나타났고 이후 바빌론에서도 발생하였다. 초기에 문자는 그림으로 유형화된 표의문자(오늘날 중국문자)로 사용되었다. 이는 수천년 후 알파베트 문자의 초석이 되었다.
1.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문명 개요
*양대문명은 유목민의 정착에 의한 농업문명. 이후 해상을 통한 상업활동, 철에 대한 약탈과 독점 등이 이루어졌다. 나일, 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 유역에 농경을 통한 정주가 시작되고 신과 같은 동격의 왕이 군림하게 되었다.
에집트의 종교는 다신교이며, 최고의 신은 왕과 친교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사제계급과 귀족계급이 상류층이다. 죽은자의 영혼은 육신으로 되 돌아온다는 사상를 굳게 믿고 있다. 따라서 시체를 미이라로 보존한다. 기원전 4000-3000초 셈족에 의한 정복의 역사. BC 1800년 팔레스타인 시리아지역으로 에집트문명이 전파되었다.
바빌론은 호전적 민족으로 설형문자를 사용하고 셈족에 의해 계승되었다. 종교는 풍년을 기원하는 사상에 기인하며 땅과 태양(여,남)등의 다신교 형태로 나타났다. BC 2100년 경 함무라비법전은 왕이 마르덕(신)에게서 받은 것으로 고대종교는 도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바빌로니아는 이집트와는 다른 내세보다는 현세의 행복에 초점을 두어 점성술, 마술, 점술은 물론 과학이 발달되었다. (1일=24시간, 원=360도 분할, 일식과 월식의 주기성을 발견 함) 후에 탈레스의 일식예언에 근거를 제공( BC. 585년)
2. 크레타 (미노아)문명 개요
서양최초의 문명인 미노아문명은 BC 2500년부터 1400년까지 11세기동안 독자적 예술을 만개하였다. 에게문명의 발견은 19세기 고고학의 성과로 혁명적인 결과이다.
Schliessmann(1822-1890)
슐리히만이전 그리스 고전문명은 완전히 베일에 가려졌다. 그는 청소년기 호메로스에 심취하여 트로이전쟁의 실체파악에 관심을 두었다. 그의 트로이 유작지 발굴로 B.C 14세기 그리스인의 크레타침공이 시적허구가 아님이 증명되었다. 1873년 트로이에 원정한 그리스인의 발자취를 추적하여 금은보화가 가득한 유적지 발굴한 이래 계속적인 미케네문명을 추적하고 펠로포네수스 반도의 유적지를 탐사함. 미노아문명은 BC. 14세기 그리스인의 침입으로 멸망함.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크레타의 유물은 에집트에 영향을 받았음이 입증됨. 크레타의 종교는 동물의 여신을 숭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문자 판독에는 다양한 이론이 많다. 성은 성벽이 없어 해상방위의 문제점이 제기된다.
이반스 경
크노소스 궁전의 유적탐사를 통해 왕국의 규모(부와 권력)를 짐작하였다. B.C. 1500-900년까지 미노아문명의 전통은 그리스에 남아 있었다고 판단됨. 궁전은 지진에 의한 3차례 파괴되고 재차 중건되었다. 미노아 문명은 BC. 1500년 최고조에 달함. 크노소스(Knosos) 궁전는 미노아 문명의 중심지로 파악됨. 고대 그리스의 전통은 화려하였다. 이는 오리엔트 선진문명의 세례를 받은 해상문명이었다. 초기에는 오리엔트와 유사한 청동기 문명의 증거가 나타난다. 인종 문화면에서 아시아적 특징이 두드러진다. 예술, 특히 미술은 이집트적인 독창성이 강조되었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사실성과 역동성은 해상문화와 상업적 감각을 잘 표현하고 있다.
벤트리스
영국건축가 1952년 미노아문명 및 미케네의 최대유적지 크노소스궁전의 선상문자 B의 암호해독 (미케네문명 연구에 박차). 그리스어의 초기형태는 상형문자와 표음문자의 중간형태였음을 입증하게 되었다.
3. 미케네문명 개요
미노아문명의 쇠퇴는 BC 1400년 경부터.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인(도리아계통)이 크노소스 궁전을 점령한 이후 미노아 문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특징
미케네문명은 미노아문명울 계승하여 독창적 그리스문화의 성격을 완성하였다. 경고한 거석의 성벽문화는 군주권을 상징하며 벽화와 도기는 크레타문명보다 뒤지나 문화의 양상은 상무적이고 역동적이다. 왕의 무덤, 요새, 성곽을 통해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에 영향을 받았고 개방보다는 폐쇄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그들은 이방인의 침입에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호모의 서사시를 통해 알려졌다. 그리스어 사용은 점토판의 선상 B문자의 해독으로 오리엔트문명의 세례를 확인케 함.
미케네인은 그리스어를 최초로 사용한 주민으로 확인됨. 추측컨대 피라밋 구조의 사회였을 가능성이 있고 공납제(동의 공납)가 쇠퇴한 암흑시대가 도래하였다. BC 1100경부터 8세기까지 내란과 대외전쟁으로 그리스문화의 쇠퇴기를 맞는다. 이시기는 철이 동보다 더 중요하게 사용된 철기시대였다. 당시 지중해의 재해권은 미케네인과 페니키아인과 양분하였던 점에 주목하라.
미케네인은 말기 농경정착을 벗어나 지중해의 도서로 이탈리아의 연안으로 해상활동을 시작하고 약탈과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이집트, 페니키아해안, 시칠리아, 남부이탈리아등과 교역활동) 당시 국왕은 군사권, 사법권을 장악하였고 성직자는 제사장 역할을 담당함. 자유민은 농민 목축민, 수공업자 등이며 노예는 전쟁포로 하층계급이었다.
과연 미케네인이 최초의 희랍인인가? BC. 2000년 경부터 남하하여 3차례에 걸친 침입으로 그리스에 정착함. 그리스인의 해상활동을 통한 결과는 우선 문자의 습득에 있다. B.C 1000까지 문자 사용이 미확인되었다. 페니키아인(시리아인과 마찬가지)은 이집트와 바빌론에 영향 받았고 해상무역의 주도권(지중해의 도시국가이전)을 장악하였다. BC 969-936 투르의 그리스인은 알파벳문자를 사용함.(이집트와 페니키아 문자에서 발달) 그리스 문자는 페니키아문자를 개발한 것으로 판명됨.
◎ 그리스문명의 성립
1.그리스인의 이주
미케네시대의 도리아인은 인도 게르만의 일파로 BC 1200-900년 미케네문명을 파괴하고 이오니아인과 대치함. 양대세력의 대치로 지중해 교역은 중단되고 문화의 쇠퇴기(암흑시대)를 맞는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상업을 통해 오리엔트문화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감. (예; 페니키아인으로부터 알파벳 전수받음)
2. 폴리스의 성립 (B.C.8-6세기)
BC. 800년 경 그리스에는 지역마다 소규모의 정치조직이 형성되면서 그리스적인 국가, 사회, 종교의 기본적인 윤곽이 나타났다. 집주의 형성(Synoikismos)은 군사적 공동체 역할을 통해 외적에 침입에 공동대처하는 목적에 기인함. 따라서 집주에 의한 그리스적 정치조직은 그리스 전역으로 확대되고 200여개의 도시국가(Polis)가 생성됨.
그리스의 지리적 조건: 험준한 산악과 해안선의 발달하여 영토국가보다는 소규모의 정치공동체가 용이함. 자연적조건: 산악보다 바다로의 진출이 용이하여 해상국가의 면모가 강화됨. 폴리스는 골짜기마다 작은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농경을 통한 정착문화가 형성되었고 식민지 확보를 위한 해상활동이 강화됨.
그리스의 사회
폴리스의 사회구성: 자유민, 외국거류민, 노예로 구성. 시민권은 성년의 남녀 자유민에게 부여 (부녀자 제외). 그리스의 대외팽창의 결과로 외국 거류민이 증가(병역에 종사). 피정복지의 노예제가 정착되었지만 인권, 재산권 모두 박탈됨. 사회제도와 계층은 공동체마다 다양하게 나타남. 일반적으로 노예제 도입, 자영농, 자유민이 등장함. 이오니아인의 정복을 통한 전쟁포로로 노예제가 정착됨. 인구증가, 생산력증대, 토지부족현상으로 폴리스 체제가 강화됨.
그리스 초기: 원시사회이며 혈연중심의 씨족사회는 다수씨족이 모여 대씨족(형제단)사회를 구성. 후기: 부족사회이며 인구의 증가와 농축기술이 발달됨. 토지의 사유화는 대토지 소유제로 변질됨. 부족계급의 구성: 사회적 양상이 복잡하여 부족간의 교류가 활발해 짐.
3. 폴리스의 구조
도시중심 및 농촌과의 결합이 필수적.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폴리스의 당위적 목표는 “농업생산을 통한 자급자족”이라 주장함. 인구 1만의 독립된 정치기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성벽의 중심지와 성외곽의 농경지로 구분됨. 폴리스의 성내 중심부의 언덕은 아크로폴리스(Akorpolis)로 수호신을 모시는 신전. 그 아래에는 아고라 (Agora: 광장)로 시민생활의 중심무대이며 정치적, 종교적 행사 및 물건교환의 시장 역할을 함.
폴리스의 구성원: 성년시민들이 민회를 구성하여 정치적 권리를 행사함. 부녀자, 외국인, 노예는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박탈됨. Hellenes는 그리스인(Hellas: 그리스 땅)이며 Barbaros(이웃)와 철저히 구별됨. 그리스인은 여럿의 폴리스로 분열되었으나 공통의 언어와 문화유산을 통해 공동체의 민족유대의식이 강화되었고 올림픽경기나 동맹을 통해 잘 나타남. 새로운 해외 폴리스의 건설: 시칠리아, 소아시아, 흑해연안, 에게 일대로 팽창됨. 식민도시는 오리엔트문화의 영향을 받아 본토보다 더 자유로운 활동이 전개됨. 따라서 오리엔트지역과의 상업 및 문화교류가 활발해짐. BC. 8세기 중엽이후 귀족과 성장한 시민계급간의 갈등대립에서 시민세력은 경제적, 조직력을 갖고 해외로 진출함.
4. 아테네와 스파르타
ㄱ. 아테네
이오니아계 그리스인의 폴리스. 초기: 자연적으로 비옥하지 못함, 원시적인 왕정의 형태. 폴리스의 성립이후 토지소유의 귀족에 의한 귀족회의가 구성됨. Areopagos는 최고의 사법기관이며 (국가를 대표하는 민회는 의결 및 입법기관) 임기 1년의 9명의 집정관도 선출한다. (귀족만으로 구성) BC 7세기 이후 해상무역을 통해 눈부신 성장을 하여 황금기를 맞는다. 이오니아인은 BC 7세기경 리디아로부터 화폐가 도입되면서 경제가 활성화됨.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함. 모국과 식민지역간의 교역은 아테네의 은화가 국제적 통화로 자리잡음. 금은광산업을 통한 은의 축적은 화폐제도의 정착에 크게 기여함. 귀족 외에 상공인(자유인)의 정치, 사회적 발언권이 점진적으로 크게 향상됨.
적극적 식민 활동의 전개와 성패는 신분상승 및 몰락(노예화)을 유발함. 귀족에 대한 시민의 반항은 커져감. 농촌의 위기와 군대의 전술 변화로 BC 6세기이후 폴리스는 중무장보병의 밀집대형을 새로운 전술로 채택함. 애국심은 새로운 의식의 자각. (귀족정에서 참주정으로 변화) 즉 중소농민=중무장보병=능동적 시민의식이 강화됨. 폴리스의 정체: 군주정에서 귀족정, 폭군참주정, 민주정의 순서로 발전됨. 국왕은 이집트와 바빌론과 달리 절대권력자가 아닌 원로원의 자문을 중시함 (관례를 존중). 당시 폭군은 상속받지 않은 통치자를 의미함.
Drakon, Solon 집정관의 입법개혁: BC 621, 594-공동체의 분열에 대비함. (내란) 재산에 따른 시민을 4계급으로 등분하여 권리와 의무를 구분함. 부유한 시민층은 귀족과 동등한 지위를 보장. 금권정치(Tomocarcy) 실시이후 내분은 극심하여 솔론의 개혁은 실패함.
BC 561년 Peisistratos 의 참주정치(Tyranny): 대중의 지지로 귀족의 재산몰수와 토지분배가 성사됨. '비합법적인 권력 장악' 이었지만 아테네의 정치 및 문화안정에 크게 이바지함.
BC 508년 Cleithenes (클레이테네스: 반참주운동의 선봉장)는 아테네 민주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여 참주정치는 종말을 고함. (계층간의 분열이 원인) 평민과 연계하여 귀족의 권력기반을 약화시키고 민주혁명적인 개혁을 단행함. 행정구역 10개로 개편(10부족제), 500인 협의회를 창설하고 종래의 공동체적 혈연적 규제를 해체함. 170여개의 demos(행정구)가 성립됨. Democracy (민중: 시민에 의한 지배): 502년의 민주개혁. 당시 노예제는 민주정의 필수요인. 능동적인 정치참여를 제약하는 제도.
페리클레스의 전성시대: 정치적, 경제적, 정신문화적 전성기, 황금기. BC 492년에 귀족회의는 정치적 권한 상실.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의 실시(민회는 1년에 40회 집회: 전쟁의 포고, 조약의 비준, 세출 등 국정을 논의). 시민적 애국주의가 발전하여 동질사회의 성격이 강화됨. 그러나 부녀자, 노예, 비자유인은 정치참여를 배제됨. 중우정치의 폐단도 노출: 서민대중을 통한 직접정치의 한계. 펠리클레스 시민권법: 수당제의 재원은 제국주의와 구조적 결합됨. 비 그리스계 주민들(Barboroi: 스키타이인, 트라키아인, 프리기아인). 포로, 유괴, 매매가 성행함. 노예의 수는 전인구의 3분의 1로 상품화됨. -500명의 평의회(Boule: 행정을 감독하는 민회의 대행기관). 모든 관직은 추첨하여 결정함.
ㄴ. 스파르타
BC 8세기 메네시아 평원을 정복한 도리아인의 폴리스 (발칸남부에 침입). 선주민 아케아인을 정벌하고 이웃도시까지 세력 확장함. 7세기 초 스파르타시민단의 체제변화: 리쿠르코스(Lykurgos)법은 정치적 목적으로 지배를 강화함. 스파르타인 상호간의 토지소유의 평등을 유지함. *군사적 귀족정치: 정복민과 도리아인간의 불평등원칙. 지배계급에게는 엄격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실시. 피정복민을 다루기 위한 국가정책은 쇄국주의와 보수주의. 후에 스파르타 폴리스는 보다 민주화되지만 폐쇄적인 면은 강화됨.
스파르타체제의 핵심요인인 homoioi (호모이오이:동등자들): 민회 구성원의 동등권, 균등한 경제권 토지의 할당을 보장함. agoge( 아고게:훈련제도): 직업적 전사를 위한 훈련제도. 출생 시 적격심사이후 60평생의 군사적, 사회적 교육을 12-20세에 받음. 명령복종의 예비 군사훈련 (20-30세에 받음). 병영생활은 30세 이상에 해당됨. 15인 이상의 공동식사제(시민자격요건): 동등의식의 강화목적. 헤일로타이제도는 아테네의 노예제와 유사하지만 스파르타체제의 필수적 요소이다. (아테네의 노예는 사유재산: 헤일로타이는 시민에게 할당된 국가의 재산) 노예와 자유민 사이의 집단: 2명의 국왕(군 최고사령관), 보좌기구인 장로회의(Gerusia): 60세 이상의 장로로 구성된 원로원의 기능. 민회는 입법기관으로 30세 이상의 남자로 구성됨. 감독관은 5인의 민회에서 선출되고 정사를 담당함.
◎ 그리스 세계의 발전
1. 페르시아 전쟁(BC 492-479)과 아테네의 발전
( 국제적질서의 개편무대) BC 6세기 중엽: 그리스인의 대외팽창기에 페르시아에 의한 오리엔트세계의 통일로 지중해의 페니키아세력을 제압함. 페르샤왕 다리우스는 해상권 장악 이후 소아시아, 이오니아 식민지(밀레토스)에 압력을 행사함.(세금을 요구) 이는 밀레토스 반란 원인, 그러나 실패함. 아테네의 후원하에 소아시아의 그리스계가 결속하자다리우스는 아테네를 응징코자 원정군 파견함. 페르시아 전쟁의 발발-1차 원정(492) 폭풍우로 실패, 2차 원정(490) 에게해를 넘어 마라톤에 상륙후 아테네군에 패배함. 3차 원정(480-479)은 다리우스의 후계자 Xerxes(크세르크세스)가 감행함.
결과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결속으로 스파르타군 격파하여 그리스 중부지역을 석권함. 그리스연합군은 스파르타의 지휘하에 페르시아 육해군을 패퇴시킴. 그리스인의 결속: 외국의 지배에서 해방 후에 자유와 번영의 기반을 조성함. 전쟁으로 농민출신의 중방보병과 하층민의 수병 역할로 신분적 상승되고 시민대중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화됨.
2. 아테네의 황금기
3대 특징-제국주의, 노예제, 민주주의.
당시 노예제는 보편적 현상. 민주정은 급진화됨. 해군력의 성장을 통한 하층시민의 군사화는 제국주의적 경향이 지배적. 페르시아 전쟁 후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해군동맹(Delos동맹)체결함. 참가국에 할당량이 정해짐: 군함, 자금, 인원 등. 아테네의 압력으로 동맹은 델로스 섬에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본부를 옮김. 이후 아테네의 독주는 동맹국의 반감을 삼. 아테네의 경제적 번영으로 문화와 예술의 발전(도자기, 공예품에서 확인).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페리클레스의 전성시대가 열림.
3. 펠로폰네소스전쟁( BC 451-405)
결과는 그리스 폴리스체제의 종말원인을 제공함, 전쟁 원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그리스세계를 재패하기 위한 쟁탈전. 스파르타의 승리에 따른 아테네의 해체. 델로스 동맹이후 아테네의 번영은 다른 도시국가와 반목케한 직접적 요인. 아테네의 다른 폴리스에 대한 강압적, 제국주의적인 면이 반영됨. 스파르타는 인근지역의 직접지배를 통해 시민단의 군사화를 통한 경제적 기초가 마련된 반면 아테네는 해외의 다른 폴리스에 대한 간접지배와 착취를 통한 시민단을 군사력으로 이용함.
폴리스내부에서 진행된 민주화의 수준과 범위의 차이점: 아테네는 정치적 법적 평등, 스파르타는 경제적 평준화에 성공함.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델로스 동맹의 반목이 전쟁의 직접적 원인. 코린트(펠로폰네소스 소속: 아테네의 경제침투에 위기감을 느김). 459년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교전상태: 페리클레스에 의한 화해. 431년 스파르타의 전쟁 재개: 아테네의 해군에 의한 스파르타 포위에 성공하지만 피해는 극심. 아테네 인구의 3분의 1이 페스트에 감염되고 병사, 펠리클레스도 희생. 이는 아테네의 몰락원인이 됨. 405년 아테네의 패배와 함락, 댈로스동맹의 해체, 스파르타의 패권이 확립됨.
4. 폴리스의 쇠퇴와 종말
스파르타의 불안정: 그리스 주도권은 Thebes로 이행되면서 무정부 상태에 빠짐. 스파르타에 의한 각 도시국가 통제: 감독관파견, 군대진주. 전쟁시 페르시아는 스파르타를 지원, 후에 테베 Thebes (반스파르타전선:코린트동맹)를 지원함. 371년 페르시아의 반격으로 스파르타는 패배함. 테베는 아테네, 스파르타에 이어 그리스를 재패하지만 국력은 쇠퇴되고 마케도니아 전제군주에 패배함. ( BC. 338년)
그리스 도시국가의 몰락원인
ㄱ. 정치적 원인 -그리스 도시국가는 폴리스간의 투쟁대립의 연속 정치체계는 붕괴-그리스 문화권 밖의 마케도니아세력에 의해 몰락-그리스 세계는 분립주의와 패권주의: 폴리스의 자치와 그리스의 통일의 2대원리에서 힘을 소모
ㄴ. 그리스몰락의 경제적 원인(정복과 제국주의적인 요인의 감소)-자급자족은 불가: 지역의 80%가 산악: 식량은 수입(소아시아, 이집트등으로부터): 곡물, 광물, 노예-수출품: 과실:포도, 올리브 수공업제품: 모직물, 도자기, 금속세공품, 유리제조-수공업의 발달: 해상 상업활동의 활기. 금융업, 은행(예금과 어음교환)이 발달-경제적활동은 그리스 문화에 결정적 역할-그리스 경제는 노예제도에 기초(전쟁포로는 모든 경제활동에 주역)-B.C 4세기 이후 폴리스간의 내분으로 노예제도는 쇠퇴
5. 그리스의 문화
고대세계의 통일사상은 정치적, 군사적 통일이념이 아니라, 항상 문화적 영역내에서 가능하였다. 헬레니즘은 실질적으로 기독교문화의 정신적인 길라잡이 역할을 함. 유럽문명의 개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착안된 점을 주목하라. 예술, 특히 미술, 건축, 도예분야, 문학(희극과 비극의 드라마), 역사서술, 이오니아인들에 의한 초기 서양 철학 등. 그리스 문화창조의 원동력인 폴리스체제와 민족주의적 융합: 엄연한 정치적 독립국가, 종교공동체이며 혈연적 전사공동체-진취성과 개방성-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조화와 균형의 덕(예술에 반영)
그리스 문화의 특징
도시국가의 자유민 중심의 문화(다른 문명의 군주의 지배와는 무관). 창의성존중(독창적인 개성의 발휘의 문화업적은 지속적으로 서양문명에 큰 영향). 한계: 폴리스의 생활은 문화와 사상을 제약하여 폴리스적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마케도니아시대에 보다 세계적인 그리스문화로 발전함. (헬레니즘) 인간이 만물의 척도, 우주의 중심(인문주의를 중시함). 그리스인의 종교: 초월적인 신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 신(인간과 공존). 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시대로 전환함 (BC, 6세기이후). 인간중심주의: 합리주의 정신의 터전으로 발전됨. ( 대립과 투쟁이 아닌 균형과 조화). 그리스 예술문화양식은 바로 서양문명의 미적 전통이다. 개인중심주의, 이성에 바탕을 준 계몽사상을 보라. 미신, 관습, 권위로부터 인간해방을 모색한 인본사상이 그 중심이다.
신화와 종교
그리스 신화
11-12세기 이후 그리스 반도에 거주한 이오니아, 도리아인등과 그 자손이 소유한 신화.
특징
미노아문명의 영향을 받아 모계적 색조가 강함 (여신, 모신의 숭배). 신화는 종교와의 융합을 뜻함. 예: 아테네 여신-지리적인 영향으로 인한 이민족의 신화를 수용(셈, 힛타이드인등): 아프로디테, 아도니스신화-종합적인 국민적 신화체계를 이룸(예: 올림프스신)-종류: 우주창성신화(카오스-에로스의 원리), 신통신화(다신교적 영향) 인류창생신화, 홍수신화(제우스신등)
그리스종교
모든 문화예술의 상징적인 면을 포괄적으로 수용ㅎ마. 일반적 의미의 종교가 아닌 인간적인 것을 중시함. 그리스 비극은 종교와 깊은 연관을 맺음.(문학과 연극)-초기 그리스 종교: 자연숭배의 다신교(지중해 고대문명의 영향) 후에 점차적으로 신의 계보가 형성되면서 Olympus의 12신으로 확정됨 (호메로스의 서사시 Illias, Odysseia(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 Hesiodos의 신통기에 나타남.
그리스문명의 첫 열매 호머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
호머는 개인이 아닌 당시의 시인들이란 견해도 있다. 눈먼 시인 또는 다수의 시인으로 해석된다. 작품은 200년간에 걸쳐 완성됐을 가능성이 크다.( BC 750-550-서사시의 저자 연대 소재는 논란 ). 현존하는 호머의 시는 페이시스트라투스가 아테네 및 그리스전역에 확산시켜 사용함. (통치기간: B.C. 560-527). 미케네인의 트로이전쟁 에피소드: 일리아스-아킬레스와 트로이왕가의 싸움: 영웅의 분노와 사랑, 헥토르의 죽음을 묘사
오딧세이아-희랍전사 오딧세이아의 공상적 무용담, 모험(10년간 트로이 함락지를 유랑하다 고향의 아내 곁으로 돌아간 이야기) 무대: 올림프스 산의 신을 배경으로 한 신의 이야기: 신= 초인적 도덕적 인간상( 종교적인 면 약함) -종교를 대표하는 올림프스 신에 대한 주제가 당시에 통용된 것은 아님. 등장인물: 포세이돈, 제우스: 신과 인간의 반반요소를 접목
호머의 종교는 일반적 의미의 종교가 아닌 인간적인 것. 그에게서 신은 귀족계급의 신이다. 농부를 위한 신은 아니다. 상류사회의 합리적 인간상을 그림.
그리스 철학과 정치사상
BC 6 세기경의 이오니아인의 문화: 철학, 과학, 수학, 역사학 등이 생성되는 시기. 소아시아의 서안지역 이오니아 식민지에 밀레토스학파가 성립됨/ 자연철학적 바탕). 오리엔트의 문물을 전수받음. 그리스 정치사상에 영향을 끼침. 신화적, 시정적인 면에서 결정적으로 탈피한 철학자의 노력의 결정체. Thales: 신화적인 세계관탈피, 우주만물의 근본원리를 과학화에 시도. 만물의 근원은 물 Anaximandros: 아낙시만드로스: 원소Herakleitos 헤라클레이토스 불.Empedokles 엠페도클레스 4원소: 지.수.화.풍Demokritos 원소 및 원자의 기계적 결합 .Pytagoras 수와 수를 통한 조화
Sophist: BC. 5세기 중엽 아테네 민주정치의 번성기에 성행. 새로운 교양인이 요청됨. 정치, 사회적인 처세술: 수사학, 변론, 웅변술등이 성행함. 프로타고라스 (BC 481-411) : 주관적 절대성, 단순한 회의론자: 인간은 만물의 척도. Hippias는 상대주의자
관념론의 발전
Socrates(470-399)
회의론적 상대주의의 극복함(대화법). 인간의 독자적 절대가치를 기준으로 절대적 진리를 인식함. 도덕적 선의 개념을 파악함: 지덕합일설을 주장하여 인간과 우주의 원리를 밝힘. 개인과 도덕의 각성을 강조하여 정치와 윤리에 큰 영향을 미침.
Platon(427-347)
아카데미아를 창설함. 참다운 실제는관념(idea), 현상은 관념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관념론을 수립함. 정치사상의 확립은 플라톤의 노력의 성과. 펠로폰네수스전쟁과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목격. 아테네정치와 도덕의 타락을 경고함. Republic 정의로운 국가란? 인습과 전통이나, 권력의 논리로 성립될 수 없다. 보편타당한 개인의 도덕적 토대위에서만 존제한다고 역설. 중우정치의 폐단을 지적, 철학자에 의한 도덕정치를 강조함.
Aristoteles(384-322)
알렉산더대왕의 스승. 이데아는 개개의 사물에 존재함. 경험주의의 창시자-논리학, 형이상학, 예술론, 정치학, 윤리학, 자연과학의 철학적 체계를 수립함. 만학의 아버지-개인의 올바른 삶은 개인의 정치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행동할 때만 성사된다는 판단. 법률에 의한 통치를 강조: 철저한 준법정신만이 혁명과 변란을 방지한다고 역설함. *Anaxagoras: 자연철학, 자연의 탐구: 천문학Hippokrates: 의학*미술가는 과학자( 해부학적 지식, 기하학, 물리학 등 응용)
역사학
Herodotos(484-425): 페르시아 전쟁사(사료비판의 영역을 개발)-Thucydides(460-400):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인과관계)-Xenophon 그리스사, 소크라테스의 변명
그리스문학
신화와 결부된 서사시가 시초. Homer: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그리스인의 생활과 전설을 묘사: 유럽문학에 시초). 헤이오도스의 <신통기>는 올림프스 신의 계보를 정리. <노동의 나날>을 통해 노동의 신성함과 귀족의 부정을 고발함. Sappho는 여류시인으로 인간의 내면세계의 서사시(연애고백)을 그림. 호메로스의 서사문학는 종교,윤리적 철학적 교훈시가 성행 (비극, 희극시인)-펠로폰네수스전쟁이후-미카도니아시대-헬레니즘시대는 산문의 전성시대: 소크라테스-플라톤시대: 수사학과 시학 등 문학이론 및 역사학이 발전
그리스 연극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네의 민중적 기반의 연극이 성행함. 연극의 기원: 534년 페이시스트라투스: 디오니소스 제전을 위한 연극제의 입상자들은 찬양, 노래와 춤, 인물에 대한 이야기 등을 묘사함. 酒신: 포도와 샘물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를 찬양함. 3대 비극시인인 Aischylos(아이스킬로스)는 기원전 5세기 말 합창대를 배경으로 합창대장외 2명의 배우를 등장시켜 그 역할을 강조하였다는 설. Sophokles <안티고네>에서 호언장당하는 자는 천벌을 받으리라! Euripides 전설속의 인간과 신의 모습을 연극을 통해 형상화시킴.
주제와 연출방식 및 목적은 종교적성격: 반사실주의적, 상징적인 면을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