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홈     교회안내     예배안내     담임목사목회     신구약66권장절전체설교(가입후열람)     교회학교     전도부     교육부     남전도회     여전도회     청년부     봉사부     선교부     예배자료     신앙자료     생활정보     시,수필,컬럼     기도실     이단자료     운영자자료실     가  

  일반교회시사
  이쁜글.좋은글
  각 기관 부서
  교육자료실
  성경공부 방
  오늘의 Q.T
  은혜의 간증
  절기(추수.맥추)
  여름성경학교
  주일학교설교
  고난(사순절)부활절
  5월가정의 달
  성령 강림절자료
  찬송 및 복음송
  기독교영상플레시
  기독교자료
  기독교동영상
  덕천교회 약도
  시사 예화
  유머 예화
  상식건강자료
  고려수지침강의
  가정상담
  한자 사전
  아름다운이야기
  다양한 이미지
  성경말씀 듣기
  기도는어떻게하나?
  선 교 학
  신간도서기독교
  자주묻는질문 답변
  예화자료
  목회설교돕는 정보
  기도원 소식
  북한 탈북자 등
  명언 격언실
  역사신학실
  실천신학실
  현대신학실
  철학이야기
  히브리 헬라어사전
  비교이단자료
  창조와진화론
  1907년 대부흥사
  강해설교
  컴퓨터 배우기
  평신도신학
  유익한 정보
  특선.다큐멘타리
 



성경공부

생활정보

사전사이트



중세사 개관
2007-10-25 19:02:56   read : 2924

중세사 개관  

 

기독교문명의 형성과 발전

 

중세문화의 성격

중세문화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운동의 비판적 대상이다. 이로써 중세적 종교관과 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당시 종교개혁자는 중세종교를 부정하는 측면이 강하고,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중세문화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종교적, 민족적 편견을 갖고 '저급한 예속적 중세문화”로 평하였지만 중세의 전통은 살아있는 풍부한 문화적 유산으로 후세사가는 평가함을 주목하라. 특히 근대문화 및 과학에 대한 접근은 중세문화의 전통(예. 스콜라신학)을 전제로 한다.

 

중세교회의 역할

중세교회는 독자적인 정부형태로 법률과 구성원을 소유한 자율적, 보편적 조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는 정치사회적으로 유럽을 기독교화한 원동력으로 기독교적 유럽공동체의 핵심적 골격을 뜻한다. 즉 유럽 중세인에게 카톨릭 공동체는 바로 중세사회를 의미한다. (유럽중세사의 전 과정에서 볼 때 교회는 사회와 일치한다). 특히 중세교회는 라틴적 보편성과 게르만적 민족성의 융합으로 카톨릭 조직이라는 제도적 기초를 성립시켰다.

 

중세 종교와 문화

카톨릭교회는 유럽사회의 일부가 아닌 그 자체이며, 중세 역사의 핵심적 토대이다. 카톨릭적 중세 제도와 사상의 규명은 유럽문명의 고유한 토대와 특성을 분석하는 것을 뜻한다. 독일의 역사학자 Ullmann의 평: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이에 따른 모든 표현들은 중세교회학의 토대 없이 이해 할 수 없다.”Karl Bosl의 평가: 중세시대의 유럽는 통합과 권력투쟁 속에서 사회형태를 발전시켰다. 이는 유럽인에게 커다란 유산으로 남아있다.  


1. 카톨릭교회의 성장

교회는 공식적 사회종교적 조직이며, 사적인 신조공동체는 수도원을 통해 점진적으로 흡수되고 유지되었다. 4세기 기독교의의 로마화에 성공한 이래 라틴어 성서보급을 통한 기독교의 국교화가 확립되었다.

 

교회조직과 교리의 정비

5세기 이후 주교의 입법, 행정, 중제적 기능은 점차로 강화되었다. 따라서 이전 교회의 사적 기능은 국가의 영역에 속하는 공공기능으로 변화되었고, 교황중심적 카톨릭적 조직이 가능케 되었다. 교황 레오 1세(440-461)는 성 베드로의 후예로써 로마교황이 교회의 관리권을 계승함을 주장하였다. (교회수장권)

 

교회수장권과 황제교권주의의 대립

비잔틴황제 아나스타시우스(491-518)는 황제교권주의를 강화한다. (교황은 황제가 임명하는 제사장으로 로마 지방장관 및 주교로 해석됨.)이에 대한 교황 겔라시우스(492-496)의 해석“두 칼의 이론': 기독교사회는 2개의 중심이 있다. 즉 황제의 속권(imperium)과 교황의 교권(sacredotium)이다. 황제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아들이다. 따라서 교황과 황제는 협력의 관계에 있어야 한다. 이후 이러한 대립은 카톨릭적 서유럽과 비잔티움이 분립되는 이유로 발전한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590-604)

최초의 수도승 출신 교황으로 교회정비를 통한 교황권의 강화에 노력함. (수도원의 정비작업도 교황의 관활권으로 정착됨.) 그는 동로마 콘스탄티노플 황제의 보편적 주교권을 거부하고 서유럽 사제에 대한 배타적 행정, 사법권을 확립한다. 즉 로마중심적 카톨릭교회의 확장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고자 노력하고  Patrimonium Petri(교황령국가)의 실질적 토대를 마련한다. 케르만족의 카톨릭 개종에 힘씀.  영국에 켄터베리 대주교를 파견하여 영국의 기독교화에 성공함. 프랑크왕국의 교회개혁에 주력함. 이로써 서구 기독교는 그리스적, 로마적 전통이 아닌, 라틴적, 게르만적으로 사회제도를 정비함.

 

교부철학

4세기 이후 기독교가 라틴화되면서 초기 아리우스파의 종파주의를 극복한다. 성 아우구스틴 (Augustine of Hippo 354-430)의 등장으로 서유럽사회의 카톨릭적 자기인식의 토대가 제공된다. 성 아우구스틴은 다양한 역사와 사회경험을  통합한 교부철학을 완성시킴: 인간이란 오직 신의 은총으로 구원된다는 예정설로 선민적 정체감을 유지하고자 했다. 페라기우스(인간은 자유의지와 본성적 능력을 통해 구원된다는 이론를 주장함)과의 논쟁은 유명하다. 아우구스틴의 논지: 현세적, 제도적 교회만이 유일하고 정당한 교회이며, 카톨릭교회 조직 밖에서는 기독교적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이론을 펼침. 그의 사상은 신의 은총 및 예정의 교리와 카톨릭의 보편적 유일성의 교리를 양립시킴. 이는 기독교사회의 기본특징인 이원적 긴장구조의 논리적 기초가 됨. 즉 그의 철학은 초월적인 종교적 규범과  교회의 카톨릭 조직을 통한 사회지배를 전제로 함.


2. 수도원 운동

교회조직의 정비는 로마교회의 보편적인 사회제도로서 전환하는 주요 동인으로 공동체의식, 교회의 대중화를 성공시키기 위한 기능개발이 필요했다. 따라서 수도원의 역할은 중세사회의 농경조직과 활발한 경제단위의 역할을 담당한 셈이다.

 

특징

성 베네딕트 (480-550)의 저술서 “규칙”에 잘 명시되었다. 즉 기도와 노동과 독서를 통한 수도승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7시간의 육체노동과 3시간의 독서는 수도승의 필수요건으로 금욕주의, 주지주의를 핵심적인 덕목으로 숭상하였다.  신앙공동체적 성격은 수도원의 확산에 따라 강화되었다. 지방농촌사회가 기독교를 수용하는 점진적인 과정은 수도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즉 수도원은 획일적인 교구조직체의 역할이 아닌 다양한 지방민의 관습과의 접목에 노력하였다.

 

수도원 도서관

수도원 중심의 학문과 사상연구의 요람으로 12세기이전 가장 활발하게 교육과 지적 활동을 하는 유일한 사회제도였다. (하지만 중세의 지적수준은 결코 그리스적인 것과 비교되지 못하였다). 수도원 교육에서 인문학은 점진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함. 성 어거스틴은 플라톤주의를 교리에 접목시켜 그리스 로마적 고전전통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수도원 학문의 기초로 계승되었다. 5세기 인문학: 문법, 수사학, 논리학, 3과 (TRIVIUM.)  산수, 기하학, 천문학, 음악 4과 (quadrium)이 중심이되고, 6세기 인문학은 문법과 수사학을 위주로 한 수도원 중심의 학문이었다.

 

수도원의 문화사적 역할

수도원의 역사적 의미는 고전전통과 카톨릭주의의 융합에 있다.  고전문명의 합리성와 이성에 대한 신뢰는 구 로마제국에서 수도원으로 이전되고 카톨릭시즘의 새로운 세례를 받았다는 평가이다. 이는 중세사상의 성장, 발전 요인이 되었다. 즉 수도원을 통한 고전에 대한 관심은 후에 르네상스의 기초로 작용되고 이성과 신앙의 카톨릭적 종합이라는 스콜라 사상을 형성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신의 군단(scola) 수도원

로마교회의 현실적 기반이며, 노동을 통한 금욕주의, 독서를 통한 주지주의에 대한 관심을 통해 고전문명과 카톨릭시즘의 융합하여 라틴적 카톨릭적 유럽문명을 잉태한 제도적 요람의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서양 중세사상


철학사상

교부철학에서 스콜라철학으로의 전환시기 12세기부터( 성.알젤름 1109년사망이후)-12세기말 /13세기 대학의 창설과 성장까지. 중세의 교육은 수도원 중심의 궁정학교, 성당 및 주교자 학교등에서 이루어 졌다. 중세대학의 역할로 스콜라사상이 확립됨. 13세기 사회구조의 변화: 인구의 증가, 도시의 성장, 교권과 황권의 제도적 정비, 공공질서의 회복, 도시상인, 군주 및 교회의 지적인 욕구가 증가된다. 초기의 대학은 고등교육기관이 아닌 사회조직의 통합체, 지적 조합의 성격을 띄엇지만 이후 배움의 공동체 studium Universitas으로 자율적 운용원리와 권리를 제도화시켰다: 법학부,의학부, 신학부 (대학원에 해당) 인문학부의 7개 자유학과 등  

 

13-14세기 스콜라사상은 중세철학을 대표한다. 중세 철학의 과제는 기독교의 교리와 가치를 인간의 이성적 추론과의 접목에 있었다. 이는 플라톤이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으로 전환함을 뜻한다.

 

스콜라철학의 성장배경

12세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서구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교부철학의 모색자인 성 안젤름은 베네딕트 수도승으로 플라톤주의와 기독교 교리를 결합을 중시하고 있다. 그는 “신은 왜 인간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아우구스틴 이후 삼위일체설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 믿기 위해서 이해한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신학의 시녀로써 철학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스콜라인식은 교부철학에 수용된 인문주의적 전통의 누적물을 재평가하였다. (이는 12세기 이후 법률학자와 인문학자의 연구활동이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12세기의 인문주의

9~10세기에 이미 (초기 르네상스운동의 일원으로) 귀족중심의 라틴고전 보존운동이 전개됨. (라틴-그리스고전을 기초로 한 지적, 철학적 성장배경으로 인간 이성의 재발견에 관심을 둠.) 11세기 이후 십자군을 통한 재정복사업의 산물: (10-12세기 에스파니아의 석학) 아비세나, 아베로이스의  학문적 성과를 통해 이슬람 세계가 보존해온 그리스 고전의 사상을 전수받게 됨. 이후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중세인문학의 역점은 논리학중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논리학을 바탕으로) 이슬람의 신논리학은 범주론, 해석론. 분석론, 변 증론, 반박론 등을 발전시켰다. 이로서 12세기는 중세 변증법적 논리학을 확립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로마법의 재발견

12세기이후 사회적 정신적 변화의 산물(특히 십자군 원정으로 동로마제국의 로마법이 재발견으)로 로마법 계수운동은 정치권력의 현실화, 체계화, 관료화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한다. 즉 관습법(중세 농경사회에 효과적 기능 발휘한 규범)과 중세인정법(Human Law)의 성문화되었다. 로마법 대전의 3부분인 “개요, 법령, 신법”의 원형을 수집, 복원, 해석을 통해 볼로냐 대학의 주석학파가 성장발전한다.  Accursius (1185-1163)는 '대주석서' 저술을 통해 로마법을 집대성한다. 후기 주석학파는 로마법원리의 중세적 해석과 실제적 적용 및 법규화에 노력하여 교회법의 정비와 교황주권론의 법규화를 시도한다.

 

결론

13세기 스콜라철학의 직접적인 토양은 12세기 인문주의와 로마법의 재발견에 있다. 파리대학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영혼론 등이 소개되면서 중세 철학사상은 기독교교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의 접목을 가능케했다. 즉 스콜라사상은 계시적 신앙과 자연이성의 조화을 바탕으로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통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변증법적 해석으로 스콜라 철학이 완성 가능해진 셈이다. (아퀴나스는 중세 후기의 “유일한 철학자”로 등극하였다.)

 

Thomas Aquinas (1224-1274)

그는 신의 계시와 이성의 상호보완적 균형이 진리에 이르는 길(온건실제론)을 주장한다. “인간이성은 완전한 신의 본질은 아니지만, 물질적 사물의 본질을 규명할 수있다.

따라서 신의 존재 역시 현실사물의 제일 원인으로써 규명할 수 있다.“ 이러한 아퀴나스의 논리는 “신의 존재증명은 증명이 아니라 계시”라고 주장한 성 안젤름의 실제론과 구별된다. 아퀴나스의 위대한 저서 Summa Theologie(신학대전)은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스콜라적 종합이며 카톨릭신앙에 대한 이성적 추론이다.

 

신학과 철학의 분리

이슬람학자 아벨로이스의 영향으로 이중진리설이 정립된다. (신학은 신성한 계시의 산물이고 철학은 자연이성의 산물로 간주함.) “철학적 진리만이 절대적 진리”라는 주장이 가능해 짐. 13세기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한 유명론 (아벨로이스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이 등장함. William Occam (1285-1349-) “오직 개체만이 실제 한다'고 주장한 대표적 유명론자이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기원은 중세 실제론과 유명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론적 보편자 개념은 유물론의 원형)

 

스콜라사상의 역사적 의미

'그리스-로마의 철학적 유산을 최초로 서구문화에 구조적, 본격적으로 접목함으로써, 고전철학은 서구문화에 고유하고 불가결한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근대유럽의 성립배경

14/15세기에 걸쳐 중세사회는 중추적인  경제적 기반(장원제도)이 동요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중앙집권적 국민국가가 에스파니아, 프랑스와 영국에 성립되었다. 이시기 정신적으로는 중세적 세계관이 붕괴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여 교황중심의 카톨릭세계는 쇠퇴하였다. 즉 중세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근대요인이 과도기적 형태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다.

 

◎ 봉건제의 위기

 

A. 14/15세기의 경제, 사회적 변동의 원인

 

13세기는 경제사회적인  쇠퇴기이다.  전체적으로 인구증가에 따른 토지부족으로 인한 낮은 토지의 생산성의 한계와  농민의 빈곤화와  경작지축소를 유발하였다. 또한 전쟁과 천재지변에 따른 극심한  기아와 질병은  인구감소에 따른 노동력부족으로 상황은 악순환되었다. 게다가  귀족의 사치와  수입초과를 통한  국가의 재정적 위기는 14세기 초에 발생한  위기 상황을 대변하는 악조건들이었다.   14세기 초 (1315-17)의 위기는 천재지변 -특히 가뭄과 홍수-에 따른 재앙의 결과였다.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인한  기아와 전염병은 급기야 유럽인구의 10%가 희생되었다.  이러한 위기에 따라 소득분배의 문제는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의 대립양상으로 나타나  중세사회는 일종의 농민반란의 조짐을 보였다.  흑사병의 창궐 (1348/49 콘스탄티노플에서 전파)은  지중해 전지역과 영국까지 미쳐 유럽인구의 30%이상이  감소되고 -일부지역은 도시의 50%가 사망하였다, 이러한 비극은 이후에 간헐적이지만 지속되어 전유럽은 흑사병의 공포에  휘말렸다.(14세기 말, 15세기 초까지)

 

B. 14/15세기 경제, 사회변동의 결과

 

계급투쟁으로 나타나  14세기 말/ 15세기 초 전 유럽적 농촌 및 도시에서의 반란이 지속되었다. 특히  빈민층에 대한 과대한 인두세 요구는 직접적인 봉기의 도화선이되었다.(예: 카탈로니아,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   농민반란에 따라  노동력은 심각하게 부족하였기 때문에  농장 경영방식의 변화가 요구되었다. 따라서  현물지대를 받고 직영지를 임대하는등 장원제가 곧 붕괴될 것을  예고하였다. 종합적으로  인구감소와 노동력감소는  장원탈출이라는 농노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예) 영국남부에서는  식량수요의 감소에 따라 곡가는 40%이상 하락하고  임금은 2배나  상승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농민층의 봉기와 마찬가지로  도시지역에서도 피지배층의  반란은 계속되었다. 도시의 시민층은  도시귀족들 만이  행정권을  독점하는등 이에  반발하였고,  특히  신분 상승을 목표로  도시빈민층의 반란이 일어나   수공업 길드의 자율권 및 도시행정의 참여와  독자적인 사법권등을 요구하였다.

 

C. 장원제의 붕괴와 중앙집권적 국민국가의 형성 

절대주의 국가의 발전. 특징: 관료제, 상비군, 공통된 법체계, 국민적 조세제도등 근대적 요인을 바탕으로 함. 초기 자본주의(15세기말/16세기 초)시대에서 16/17세기 중앙집권적 국민국가시대: 절대주의는 봉건세력의 특권과 재산을 보호하는 장치의 역할을 담당함. 이후 혁명을 통해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고  부르주아지, 시민계급의 성장을 촉진하는 계기가 마련됨. F. Engels는 절대왕정의 기반은 봉건귀족과 부르주아지의 힘의 균형에 있다고 해석하면서, 국왕은 양대세력의 균형추에 해당하며, 따라서 공권력을 강화해 나갈 수 있었다고 주장함.


D. 기독교세계의 변화

 

종교개혁의 배경

 

1. 스콜라인식에 대한 반발

스콜라철학은 중세 모든 사조의 통일체 역할: 자연과 신의 은총, 이성과 신앙, 지식과 신비, 자유와 권위 등이 이퀴나스의 사상체계에 종합된 셈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무조건적인 권위의 승인과 신앙과 이성에 대한 변증법적인 태도에 반발한 것이다. 이러한 교리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학자 Occam의 유명론에 잘 나타난다. 종교개혁자들은 신의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형식적인 논리나 이성이 아닌 신앙자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교황권, 황제지상권은 역사적 산물이며, 참다운 진리는 성서에 있다는 주장을 피력하였다. 이는 과거의 신학에 대한 회의 및 비판정신이며 프로테스탄티즘의 새로운 전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2. 교황권의 쇠퇴와 교회의 대분열

교회와 군주 및 제후간의 대립은 교회에 대한 근본문제를 제기한다. (교의의 핵심 및 성직권의 근본문제 등) 14-15세기 교황과 교회에 대한 적극적 비판과 저항운동이 나타남. 위클리프, 후스 등). 16세기 유럽은 스스로 각성하고 깨우치는 자각의 시대를 마지한다.

 

14세기 교회의 대분열

십자군운동의 여파, 이로 인한 교황과 교회 내부의 대립 등 교황권이 추락되고 통일된 신앙공동체는 균열된다. 각국의 국민국가적 토대가 형성된다. 프랑스의 필립4세는 국왕의 성직임명권을 주장하고 로마교황 보니피치우스와 충돌함. 교황은 Unam Sanctam을 통해 교황이 국왕보다 우위를 주장한 바 있다. 필립 4세에 의해 교황은 교황청에서 미려나고, 이후 교황청은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김(국왕의 승리). 이후 70년간 아비뇽의 유수가 벌어진다. 1376년 그레고리 9세 때 비로서 로마로 귀환함. 교황선거의 무효를 선언하는 반대진영으로 나뉜 반대교황이 등장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1409년 피사의 종교회의는 양대진영의 교황을 무시하고  제 3의 교황을 선출한 바 있다. (알렉산더 5세) 교황청의 세속화는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었다.

 

3.기독교 세계의 위축

13세기 초-15세기 말에 이르는 3세기 동안 기독교는 크게 동요하였다. 13-15세기 몽고 및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의 서진하면서 몽고계의 유목민 (터키족 포함)의 전성기가 구가된다. 그들은 광할한 대룩을 지배하였다: 중국, 한국, 인도, 페르시아, 에집트 및 북아프리카, 발칸 및 동유럽, 러시아.  또한 오스만 터키는 발칸 및 지중해의 재해권을 쥐면서 1492년 동로마 제국의 몰락(콘스탄티노플 함락)시킨다. 나아가 1529년 비인이 포위되고, 신성로마제국은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할 대 까지 위기에 처한다.

 



독자 한마디

의견쓰기
이 름 E-mail
제 목



프린트하기 기사메일보내기 독자한마디


이전으로
서양중세사
백년전쟁(百年戰爭) (1337~1453)
중세 유럽 흑사병의 재앙
십자군 원정에 대해...(1096-1272)
중세미술
서양 중세 미술사
오스만 제국 (Ottoman Empire)]
장미전쟁(薔薇戰爭, Wars of the Roses)]
[비잔틴제국 (Byzantine Empire)]
신성로마제국 (Heiliges Römisches Reich)
봉건제 개관
중세철학사상(2)
중세 철학사상
중세 대학의 성립과 발전
중세 기독교 문화 개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 (동유럽과 서유럽의 차이)
 | Home | 사이트구조 | 내용검색 | 전체내용보기 | 내용올리기 |
경남 하동군 금남면 덕천리 1431-5 (전화055-883-4843)   Contact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