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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2007-10-25 10:15:42   read : 3892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다음에는 한때 지배자 사이에서 정쟁이 벌어졌으나 최후의 승리를 획득한 콘스탄티누스가 제위에 올랐다. 그는 제위를 콘스탄티누스 가문이 세습해야 함을 주장하고, 동방적인 전제주의를 확립하였다. 황실은 초월적인 가계로서, 제위나 제국은 가장인 황제의 소유물이 되어 버렸다. 즉 왕조가 성립된 것이다. 이 왕조는 군대의 충성과 기독교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통치의 원리가 달라졌을 뿐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서 그 중심이 동방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황제도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에 상주하고 있었다. 기원전 325년에는 비잔티움으로 천도하였다. 이곳은 게르만 민족의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동방식의 전제정치를 하기위해서는 공화주의의 구세력이 잔존한 로마시를 떠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경제적으로 동서의 요충지대라는 것 등이 그 주요 이유였다. 그 명칭도 헬레니즘 식으로 황제의 이름을 붙여 콘스탄티노플이라 개칭하였다(330).

 

그러나 제국의 통일과 평화는 실현될 수 없었다. 동방에서의 페르시아의 위협, 서방에서의 게르만 민족의 이동이 끊이지 않았다. 이 같은 시기에 데오도시우스(379-395)가 즉위하였는데, 위기의 해결책으로 제국을 2분하여, 장남 아르카디우스에게는 비잔티움을 수도로 한 동로마제국을, 차남 호노리우스에게는 로마를 수도로 한 서로마제국을 각각 통치케 하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서로마제국의 황제보다 우위에 서게 하였다.

 

이 분할 통치는 처음에는 편의상 위기의 해결책이었으나 결국에는 영원한 것이 되고 말았다. 분할된 이래 서로마제국은 약 80년 동안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476년에 그 제권을 상실하였다. 이제 통일적 고전 고대세계의 통일성이 지배구조상에서는 와해되었다. 고전 고대 문화는 로마제국의 유민과 이동민으로서의 게르만 족에 의해 계속 유지되면서 복합적인 성격을 형성하였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유럽 중세를 통해 존속했다(1453년 멸망).

 

4. 로마의 문화

로마문화의 개요


19세기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는 로마 문화를 호수로 비교하면서 고대의 모든 역사가로마라는 호수로 흘러 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역사로부터 다시 흘러 나왔다고 하였다. 또한 예링은 <로마법의 정신) 제 1권 제 1면의 첫머리에서 '로마는 정치제도, 법률, 기독교로 세계를 세 번 정복하였다고 갈파한 바 있었다.


  이처럼 로마는 서양 고대사의 집약적 대성을 이룸으로써 지중해 연안의 세계 문화를 완성한 문화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종전에는 로마의 문화를 그리스 문화의 단순한 모방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지금은 로마 문화에 보다 더 넓은 문화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로마 문차의 전체적 특성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절충적 성격인데, 로마인들은 선진문화권이던 에트루리아인의 문화에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이는 등 선행하는 모든 문화를 거의 다 흡수하여 폭과 깊이를 부여하였다.


  둘째, 실용적, 실제적인 성격을 들 수 있다. 로마인들은 추상적이고 명상적인 면보다는 실용적인 토목 공법이나 의학을, 창작과 미학적인 면보다는 현실적인 과학 기술과 법률을 발달시켰다. 예컨대, 로마의 외과의들은 정교한 핀셋과 수술용 기구를 사용하고, 갑상선 종양, 편도선, 결석 등의 치료에 상당한 성과를 보였으며, 제왕절개 수술도 개발하였다.


  세 번째는 로마 문화의 교량적 역할을 들 수 있다. 로마에 의해 그리스 및 그 이전의 고전문명의 '유럽화'가 달성되었다 철학은 그리스철학을 보존하였으며, 법 개념은 오늘날까지 통용된다. 또한 라틴어는 많은 유럽 언어의 모태가 되었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앵그로 색슨어에서 유래된 영어도 라틴어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예컨대 영어 language는 혀를 의미하는 라틴어 lingua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의 문화유산 가운데서도, 로마의 정치제도와 로마법은 오늘날의 유럽의 정치체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회계 연도, 상원제도, 시민권, 지방자치, 국세조사와도 같은 용어는 물론재산(property), 계약(contract), 대리인(agent), 유언(testament), 재판관(judge), 배심(jury),범죄(crime) 등 경제, 법률, 사법상의 많은 용어들이 로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사회계약설, 인민 주권 개념 및 견제와 균형을 내용으로 하는 삼권 분립의 원리 , 법치주의 등 후세에 확립된 정치사상의 기저는 로마의 유산이다. 특히 로마의 법률은 미, 영국을 제외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일본, 스코틀랜드, 남아메리카 제국등 그리고 우리나라 등 여러 근대 국가의 법률적 근거가 되었다.


로마법

 

로마법의 발전단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불문법의 단계인데, 이는 종교적 관습과 혼합된 매우 엄격한 신법의 시대를 말한다. 그 다음이 12표법이다. 그리스인의 교과서가 호메로스라면, 로마인의 것은 12표법이라 할 정도로 이것은 중요하다. 이는 신법이 시민법으로 바뀌는 법의 세속화 현상과 법과 관습의 성문화의 시작을 의미한다. 재산의 사유권과 노예제도, 계약, 동업 및 구매와 판매의 원칙 등의 민법과 약간의 공법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 따라 로마의 법률 기관이 확장되고 법무관(Praetor)직이 창설 된다. 시민법은 근본적으로 로마와 로마 시민들의 법으로서 성문법과 불문법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는 원로원과 민회의 결정, 황제의 칙령, 법무관의 훈령, 일반 법관의 판례, 고대 관습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 후 로마는 영토를 확대해가면서 이민족의 관습을 법체계 속에 섭렵하기 시작했다. 독자적인시민법의 범위를 벗어나서 인간의 법률관계를 보편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발생하게 된 것이 만민법이다.


  만민법은 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지역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법으로서, 재산의 사유권, 노예 제도와 계약, 상거래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법은 시민법보다 우위에 있지는 않으나, 로마제국 내 이민족들에게 적용되어 시민법을 보충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활약한 법학자인 라베오와 카피토,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율리아누스, 폼포니우스, 가이우스, 알렉산더 세베루스 치세하에 활약한 울피아누스 등의 영향하에 로마법은 더욱 발달하게 된다. 마침내 제정 초기의 몇 세기를 경과하는 동안에 각 지역의 법률사조와 학문의 경향을 흡수하여 자연법이 발달한다.


  자연법은 모든 개별성과 특수성을 초월한 자연계의 이치와도 같이 영원불변한 보편적 법률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법률이 유래한다. 자연법은 사법적 관행의 산물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의 산물이며 스토아 철학에 그 근원을 둔다.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며, 국가가 침해할 수 없는 근본적인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론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로마 자연법의 아버지는 황제로서, 그는 진실한 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과 일치하는 올바른 이성이라고 정의한다. 이 법은 국가보다 우위에 있어서, 이를 무시한 통치자는 자연히 독재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어쨌든 법적 원리로서의 자연법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발전은 로마법의 탁월한 업적에 속한다. 자연법은실정법보다 우월한 만고불변의 자연권에 연결된 고정법이다 현실적으로는 원로원 등 전통기득권층의 특권을 초월하여 황제의 명령권, 입법권 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능을 가졌다. 이 같은 과정으로 발달한 로마법은 시민법, 만민법, 자연법 등의 3개의 커다란 줄기로 한다. 로마법은 6세기 전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대에 이르러 법학자 트리보리아누스(?-545) 등에 의해 학설집, 법학제요, 칙령집 등으로 이루어진 로마법 대전으로 집대성된다.


로마의 건축

 

로마 문화의 특색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분야는 건축이다. 로마의 건축은 국가 생활의 표현으로서 확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로마는 정복자로서 그리스와 소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수많은 조각, 구조물, 대리석 기둥 등을 약탈하여 그들의 호화스러운 저택을 장식하였다. 원수정 초기에 제국을 에워싸고 있던 국가적 영광의 분위기 속에서, 건축 분야는 비약적인 성장과 함께 라틴적인 특징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로마의 권력과 영광을 기념하기 위한 거대한 구조물들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로마인들이 대규모의 토목 건축, 예컨대 도로, 교량, 댐, 저수지, 항만, 상하수도 시설 등을 축조하게 된 동기는 광범한 제국의 통치깅에 필요한 실용성 때문이었다. 건축 양식은 그리스, 에트루리아 혹은 메소포타미아 등의 양식들을모 방하였으나, 그 구조가 견고하며 착상의 규모가 크며 장식적인 특색이 있다.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로부터 배운 원형 아취를, 기둥에는 그리스의 세 양식을 사용하고, 로마인 독자적인 것으로는 도옴, 특히 궁륭을 독특한 교차형으로 발전시켰다.


  건축의 주재료는 석재, 콘크리트, 벽돌, 대리석 등이었다. 로마인이 처음 시작한 콘크리트법(이탈리아 지질이 화산질 지형으로 주위에 흔한 화산재와 석회석을 혼합)은 건축물을 매우 견고하게 하는 공법이었으며, 근세에 부활되었다 로마인이 만든 교량이나 도로는 전대의 어떠한 민족도 능가하는 것이었는데, 예를 들면 스페인의 세고비아의 수도라든지 로마의 아피아 로는 오늘날까지도 아직 사용되고 있다. 그 외 신전, 포룸, 극장, 투기장, 경마장, 욕탕, 기념 건조물, 바실리카와 같은 대규모 공공 건물이 있다.


로마의 대표적인 신전은 돔 양식의 판테온 신전(아그리파 건축, 하드리아누스 개축)인데, 직경 43.2미터의 거대한 원형 신전으로 북쪽 입구 부분에 코린트 양식의 기둥을 붙박은 돌출부를 갖추었다. 내부는 천장에 있는 직경 9미터의 천공에서 원형의 공간에 쏟아지는 빛이 대리석 바닥의 구석구석까지 비추고 있으며, 주위에는 일곱개의 커다란 벽감이 있어, 마르스, 비너스 등의 신상이 세워져 있다. 그 외 목욕탕과 경기장등이 유명 하다.


로마의 복식

 

마지막으로 로마인들의 의복생활을 살펴보도록 하자. 로마의 복식은 그리스와 에트루리아양식을 그대로 수용하여, 로마의 시대 상황에 맞게 변화되었다. 영토가 확장되면서, 복식의 재료와 형태도 다양해졌다 로마인들이 의복을 입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였는데,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사회계급을 나타내고,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로마인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 부, 나이 등을 자신들의 의복으로 나타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토가는 시민의 유니폼 같은 것이었는데, 점차 의례용의 관복이 되면서 색과 장식선, 입는 방법 등이 엄격해졌다. 대개 표백하지 않는 양모(후일 실크가 수입되면서 실크도 사용)로 된 키의 세배(약 8.3제곱미터 가량)나 되는 타원형의 긴 천으로 어깨에서 발끝까지 감싸게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로마인들의 회합에는 보통 베이지나 갈색의토가의 물결을 이루었는데, 다만 입후보한 사람들만이 눈에 두드러지게 새하얀 토가를 입었으므로, 횐 색깔을 의미하는 'candidus'라는 라틴어에서 후보자 'candid'라는 말이 나타났다. 원로원 의원이나 집정관들은 진홍색 혹은 자주색의 띠로 장식하여, 서열에 따라 휘장을 달리하여 신분을 구별하였다.


  지붕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지는 토가는 공공 생활에서 덮어주고 감싸주고 점잔을 떠는 옷이었으나, 그리 편리하지는 못하였다. 여름에는 무겁고 겨울에는 추웠는데다가, 무엇보다도 왼손으로는 토가의 왼쪽 자락 끝을 잡고 있어야 하였으므로 오른 손만이 자유로왔던 것이다. 이는 즉 평화시의 옷이라는 의미로서 전쟁시의 병사들의 옷과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인들처럼 육체를 자랑하지 않았고 드러내지 않았는데, 토가를 입었을 경우 머리와 손만 노출되게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로마 인들은 '머리와 토가와 오른 손'의 세가지로 대표되어 졌다. 그 외 토가 아래 입는 튜니카 등이 대표적인 의상이었는데, 남녀 어느 계급에서나 보편적으로 착용되었다.


  튜니카는 길이가 무릎에 미치는 셔어츠로서, 초기에는 넉넉한 실루엣에 소매 없이 허리띠를 맨 형태에서, 후기에는 간단한 T자형의 원피스형태가 되고, 신분에 따라 지위나 계급을 상징하기 위해 끌라비라는 수직선 장식을 하였다. 일을 할 때나 걸어 다닐 때는 남자는 튜니카만을 입으면 되었는데, 잠옷으로도 사용되었다. 떼베나는 프릴이 달린 소형의 숄로 튜니카 위에 걸쳐 입는 상류 계급의 복식이었다. 형태는 만원형, 장방형, 원형 등이 있었다. 그 외 팔루다멘툼은 귀족 계급이 착용하는 일종의 망토형의 군복으로 제정시대 중기부터 착용되었으며, 울이나 실크가 주로 쓰여 졌다. 여자들은 스톨라라는 긴 겉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이를 튜니카 위에 입고 허리께를 벨트로 묶었다. 귀부인들은 파라솔과 부채를 아울러 갖고 다녔다.


로마의 교육

 

로마와 그리스 문화는 소수의 폐쇄적인 집단 내부에서만 계승이 되었다. 기초교육을 담당할 학교는 있었지만, 공적인 혹은 사적인 보조금이 체계적으로 지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수가 매우 적었다. 따라서 극소수의 로마인들만이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BC 2세기경까지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인구는 5%를 넘지 않았다. 기원 초에도 자유시민 남성 중 10분의 1만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13세기경 유럽 제국에 비견할 만한 이 정도의 수치를 보고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 로마에서 글을 러고 쓸 수 있는 인구는 사회, 경제 부문의 엘리트들이었으며, 그 외에 몇몇 장인들, 소수의 귀부인들(아마 전체의 10%에 못 미치는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행정일을 담당하는 노예와 자유노예들(이들의 수는 가변적이었다)이 있었다. 이처럼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계층은 대부분 도시에 집중되었다. 학교교육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로마시대에 공교육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교육은 가장과 가족들의 몫이었다. 학교의 교사는 회랑이나 상점의 뒷방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가르쳤다. 학생들은 부유한 가문의 아들이거나(가정교사가 없는 경우) 주인이 행정적인 일을 시키기 위해 맡겨놓은 노예들이었고, 이따금 예외적으로 장인의 아들들이나 젊은 여자들이 끼여 있는 경우도 있었다. 엄밑한 의미의 문화와 문법, 수사학(그리스 말고 문자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것) 등은 보다 세심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가르쳤는데, 극소수의 엘리트들 말을 대상으로 공공장소에서, 예를 들면 로마의 트라야누스 포룸이나 그리스 지역의 팔라이스트라(고대 그리스의 레슬링 경기장)에서수업을 했다.


  철학이나 법률 같은 과목은 몇몇 도시(로마, 아테네, 베이루트)에서만 교육이 이루어졌다. 시민들은 전문가들이 자신의 직무(집정관, 사제, 군인, 법률가)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말해 주는 것을 들음으로써 실용적인 지식을 습득했다. 좋은 가문의 젊은이들은 어느 정도 성숙하면 아버지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공공의 문제나 법률적인 논쟁, 군대에서 취해야할 행동 등 실생활에 필요한 교육을 받았다. 4세기경부터는 점차로 기독교의 교리가 이런 상류층 문화의 내용 속에 더해지게 된다.


로마의 문학


  BC 2세기에서 기원 초에 이르는 200여 년간, 당시 문화의 절대적인 모델이었던 그리스 문학의 한켠에 로마 문학이 자리를 잡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기원 초에 이르러 절정을 맞는다. 그리스 세계의 풍속을 본떠 수많은 롬의 지식인들이 재미삼아, 혹은 거의 '직업적으로'책을 썼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의 내전이 일어날 무렵 마르쿠스 테렌티우스바로의 저택이 약탈당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그의 서재에는 490여 권에 달하는 위대한 석학들의 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라틴어 문학이 부흥했다고 해서 로마 제정기에 꽃을 피운 헬레니즘의 제2차 부흥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


  한동안 침체와 쇠퇴기를 맞았던 그리스의 웅장한 예술은 서기 2세기경에 이르러 다시 황금기를 맞는다. 이것이 '제2차 소피스트 운동'이다. 그리스의 철학은 더 이상 침묵을 지키지 않았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에피쿠로스)뿐만이 아니라 키케로에 의해 재발견된 플라톤의 사상들까지, 지중해 문명전체를 지배함으로써 후대에 되살아난 것이다. 플루타르크의 수많은 걸작들이 도미티우스황제(81~96)와 트라야누스 황제(98~l17) 시대에 간행되었고,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와 의사 갈리아누스, 감미로운 풍자시인 루키아누스가 2세기 중반 경 그리스어로 책을 집필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문학을 오늘날 유럽 문학과 같은 관점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 당시에는 문학도 역시 소수의 집단 내부에서, 문자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진 제한적인 행위였다. 그러니 작품은 널리 읽히게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문학 행위의 한 부분일 뿐이었고, 그것도 소수의 사본에 의해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친구에게 빌려주어서 베끼게 하거나, 또는 아예 기증하는 방식으로 책이 전파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도서관의 역할을 하는 곳이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나마 소수에 불과했다.


볼루멘과 코덱스


  책이란 사치스럽고 비싸고 보관하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에 창작 행위는 그다지 확산되지 않았다. BC 2세기경의 책이란 것은 3미터가 넘는 길이에 높이가 30센티미터에 이르는 파피루스의 두루마리(V0lumen)였기 때문이다. 잉크를 사용하여 일반적으로는 대문자로 쓰여졌던 당시의 책은 두루마리의 옆면을 아래로 하여 보관했다. 오른손으로 무릎을 받치고 왼손으로 두루마리를 풀어 펼치며 읽는 모습이 그리 흔했던 건 아니다.


  대개 혼자 책을 읽을 때도 크게 소리내어 읽었다. 또 비서가 읽어주거나 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따로 두는 일이 많았다. 극장이나 공중목욕탕 등에서는 많은 수의 청중을 위한 낭송이 열리기도 했다. 이런 두루마리 말고도 로마인들은 일상생활이나 행정적인 업무에 밀랍 칠을 하고 간혹 책처럼 제본한 얇은 판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를 코덱스(Codex)라 불렀다.


  3~4세기경부터 야피지를 사용하여 제작한 이런 형태의 책은 놀랍게도 오늘날까지도 변형되지 않고 전해지고 있다. 보관도 편리하고 경제적이며 공간을 적게 차지했던 넓은 의미의 독서에서 텍스트에 의한 좁은 의미의 독서로 빠르고도 용이한 변화를 의미하는 지표였다. 다시 말해서 코덱스의 출현은 지식에 변모를 불러일으킨 것이며, 이로써 지식은 보다 더 분석력을 키워갈 수 있었다. 문화가 기독교화 되었던 것도 분명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로마의 헬레니즘 예술


  문학과 마찬가지로 로마 예술은 그리스의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스의 전통은 오래전부터 로마 제국의 동부 지중해 지역과 이탈리아에 형식과 내용을 제공했고, 로마 제국과 전혀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는 지역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다. 남부 갈리아의 가난한 도기공들은 여전히 켈트식의 이름을 썼고, 라틴어는 거의 할 줄 몰랐지만, 인장무의가 새겨진 도자기에 그리스 신화의 장면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이를 널리 퍼뜨렸다. 신인동형론과 신에게 형체를 부여하려는 움직임에 거세게 저항했던 민족들조차 고대 말기에 이르면 거의 이 이론을 받아들이는데, 유태교회당의 모자이크를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가령 베트 알파의 모자이크를 보면 이삭의 희생과 천체의 황도, 그리고 4절기를 연결시키고 있다.


  로마가 그 위세와 부로 전 세계에 일정한 색채를 부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솜씨 좋은 장인들이 어디에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같은 주제, 예를 들어 2세기 초반 오늘날의 루마니아인 다키아 지역의 정복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로마 트라야누스 기념비의 조각과 루마니아 도브루자 지방에 있는 아담 클리시의 조각은 그 양식이 아주 다른데, 사실 아담 클리시의 조각은 매우 어설퍼 보인다. 어떤 지역에서는 그 지방의 장인들을 신분의 구속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갈로로맹의 도기공이나 동방과 아프리카의 모자이크 세공인들이 그러한 경우로, 이들은 이탈리아의 작품들을 압도할 만한 작품을 만들어낸다.


  로마는 예술의 주요한 흐름과 동떨어져 있기도 했다. 예술이 주류는 오히려 멀리 떨어진 지역의 예술과 직접 접함으로써 형성되기도 했다. 그래서 소아시아 카리아에 있는 아프로디시아스이 조각가들은 트리폴리텐의 레프키스 마그나를 위해 작업했으며, 그리스인 제노도루스는 오랜 기간 동안 퓌드돔의 메르쿠리우스 신전에서 헌신적으로 일을 했다.


  결국 전형적인 이탈리아 양식 가운데 일부는 세계를 정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흑과 백을 주로 한 로마의 모자이크 양식은 널리 퍼져나가지 못했다. 오리려 화려한 색채의 모자이크가 세계적인 주류였다 이 부문에서 로마는 오히려 변두리였던 셈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지방에서 모델로 삼는 작품이 생산되는 곳은 역시 수도-작업실, 행정관청, 궁전 등-였다.


  이전파의 경로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논란이 있다 복사본이나 스케치 노트만 봤던 것인지, 아니면 영감을 얻기 위해 장인들이 직접 로마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편 공공 예술작품 다른 경로를 통해서 전파되었다. 황제의 초상을 새긴 동전과 화려한 조상들, 왕조의 신전 양식 등이 그 주된 경로였는데, 로마 아폴론 신전의 경우에는 님의 메종 카레에 재현되었다. 예술은 또한 일상생활 영역에도 영향을 끼쳤다. 개인 가옥의 벽화들은 공공예술에서 형태를 빌려 온 것이다.


  서유럽 제국은 공식 예술이 잘 확산된 예를 보여준다. 황제를 칭송하고자 세운 종교건물들이 그 예인데, 지방의 후원자들이 건설하긴 했지만, 황제가 파견한 관리가 통제를 했다.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세워진 파리 센강의 뱃사람 기념물은 보면, 고전적인 위대한 신들(주피터, 불카누스)뿐만 아니라, 켈트족의 신들(에누스, 머리사 세 개인 타우루스)도 등장시키고 있다. 또 1세기를 지나서 네로 황제 시대에 마이엔스의 군대 주둔지 주변의 상인들이 주피터 신에게 바쳤던 원기둥을 보면 거기에 새겨진 초상화들은 더 이상 토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결국 '지역적인 색채'란 묘비 같은 개인적인 예술에서나 극히 미미하게 통용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부조는, 특별한 경우에 지역적인 신을 나타내기 위해 로마의 전통적인 초상에 의존하는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이시스 여신이나 갈리아의 로스메르타 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로마 여신의 형상을 빌려오기도 했다)


로마제국 후기의 예술 혁신


  4~5세기경 로마 제국의 도시와 기념물과 가옥의 형태에서는 당시 전반적으로 퍼지던 쇠퇴나 체념의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다. 410년 서고트족의 알라리크가 로마를 약탈했을 때도 로마의 문명까지 파괴하지는 못했다. 아치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바실리크 성당, 론스탄티노플과 트리에르의 궁전, 거대한 조상들, 황제의 석관묘 등, 로마 예술의 중요한 유산을 만들어낸 것은 오히려 제국 후기였다. 이 시대에도 다양한 색채를 사용한 모자이크가 유행했으며, 엷은 인장무의를 새긴 도자기가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물론 기독교 세력이 커짐에 따라 많은 예술 형식들이 나타났다. 건축 분야에서는 사원 밖에 제단을 설치하고 장례식을 거행하던 과거의 형식과는 달리, 건물 내부에 추모행렬이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당이 등장했다. 크고 작은 바실리크 성당들이 세워지면서 마을의 모습이 달라졌고 지도도 다시 그려야 했다. 조형예술 부문에서는 장식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회화 분야에서는 카타콤의 벽화가 점차 수수해지기 시작한 반면, 성서나 복음서의장면을 그린 그림이 부자들의 석관묘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 역시 로마 예술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공화정하에서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 이들은 형편이 보다 열악했으며, 이 점 때문에 훗날 역사가들은 이들의 예술을 '서민예술'이라 부른다 - 표현력이 풍부한 조형예술에 많이 의존했다. 로마의 엘리트들은 공공주도의 헬레니즘 예술을 존중했지만 새로운 예술 경향은 헬레니즘 시대의 특징인, 이상화된 자연주의의 형식이나 자연스러운 비율을 따르지 않았다. 3세기경부터 이러한 예술 경향에 혁신이 일어나면서 점차 기독교화 된 로마의 주요 예술양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는 몇 가지 새로운 기준에 따라 만들어진 장면이 있는데, 이는 헬레니즘의 자연주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부조와는 상당한 대조를 이룬다.


  '서민 예술'에서 시작된 이 표현력이 풍부한 예술은 5세기경에 로마 예술과 비잔틴 예술을 탄생시킨다.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의 바실리크 성당은 로마의 모든 건축술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에도 불구하고 고전적인 형식은 모든 영역에서 그대로 남아서 필사본의 세밀한 삽화에서까지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기독교는 특히 조형예술에 새로운 종교적인 내용을 도입했지만, 그 내용을 담은 형식은 여전히 과거의 틀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 제국에 의해 전승된 로마 문화


  이렇듯 새로운 기독교 문화는 전통 문화와 단절은 선언하지 않았다. 기독교도들이 극장과 원형경기장과 공중목욕탕의 집단적 유희를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이교도의 예술과 문학과 사고방식의 유산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로마에 있는 비아라티나 카타콤이나 영국의 힌턴 세인트 메리의 저택 장식을 보면 신화적인 주제(헤라클레스, 벨레로폰)와 성서의 장면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그리스도이 얼굴에까지 고전 미학에서나 나타나는 생동감이 표현되어 있었다.


  4세기경부터 시작된 '새로운 제국'에서도 로마의 전통 문화는 계속 이어졌다. 더 이상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그 생명력만은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 예로, 이시기에 전개된 활발한 지적 활동을 꼽을 수 있다. 성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성직자들의 책 이외에도 많은 저술들이 간행되었다. 백과사전(마크로비우스 테오도시우스의<사투르날리아>이 편찬되었고, 고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주석집(세르비우스가 쓴 베르길리우스의 주석과 같은)이 발간되었다.


  문헌학 분야의 작업이나 문학작품과 성서의 복제작업이 이루어져서, 그 덕분에 수많은 작품들이 사라질 뻔한 위기를 넘겼다. 히브리어나 아랍어(고대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언어), 그리스어로 쓰여 있던 성서와 복음서는 성 제롬이 라틴어로 번역했다(불가타). 학자들은 종교 분야의 갖가지 내용을 성문화했으며(탈무드).이런 작업은 법률분야에서도 이루어졌다 로마 황제들이 공포했던 법률들이 테오도시우스법전 속으로 흡수, 편입되었으며, 이는 훗날 근대 시민법의 바탕을 이룬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그리스 로마 세계의 문화에 대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이 시대의 저술과 정비작업덕분에 오늘날가지 전해지고 있다


문자문화의 퇴조


  후기 제국 문화의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4세기경부터 문자문화는 퇴조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제국의 엘리트들은 더 이상 과거의 제국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된 학교를 세우는 문제를 두고 고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식층은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기독교가 교양이 부족하다거나 순진하지만 어리석은 이들에 대해 동정적인 정서를 지니고 있었는데도 성직자와 승려는 당연히 글을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인식이 더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기독교에서 서적이 중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서구에서는 라틴어의 영향력이 커졌으며, 이집트의 콥트어(변형된 그리스 알파벳으로 쓰여진 고대 이집트어)와동방의 고대 시리아어가 교양어로 대접받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지방에서는 도시화의 정도와 군사, 경제적인 여건에 따라, 엘리트 계층을 제외하고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또 이와는 반대로 이집트, 아프리카의 로마 점령 지역, 갈리아와 몇몇 그리스어권의 지역에서는 6세기 이전까지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하지만 5세기경에는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더 이상 약점이 되지 못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문자가 관청과 수도원에서 빠져나와 일상으로 들어오기까지는 다시 또 한 세기를 기다려한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로마의 시민이다'(클로드 니콜레)


로마의 언어

 

로마는 우리에게 어떤 유산을 남겼는가? 그들은 유럽의 교양어 중 하나인 라틴어를 우리에게 전해 주었고 수많은 로망어를 남겨주었다. 또 로마의 법률과 공화정 체제, 그리스 문화, 지중해 지역의 두 종교-유대교와 기독교-를 중세와 근대 세계로 넘겨주었다. 이 모든 로마의 유산은 로마의 정복활동과 세계통일에 힘입어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유산들이 전해진 방식 또한 로마 문화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유럽인은 모두 로마의 시민이다 그들 모두는 로마가 고대 세계로부터 전승하여 고르고 개선하여 후대로 넘겨준 다양한 문화유산의 수혜자인 것이다.


로마의 가부장 제도


  로마인들은 작은 언덕마을에서 시작해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때까지 변함없이 가부장제를 지켰다. 처음부터 다양한 문명권과 접촉함에 따라 정치와 문화, 사회구조는 수시로 달라졌는데, 유독 가부장제만 보존된 이유는 로마 사회의 고유한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가부장제는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아주 흔한 제도였다. 하지만 로마의 경우 그리스나 중세유럽 국가들의 그것과 다른 면이 있었다. 영어 패밀리(family)의 어원인 라틴어 파밀리아(familia)는 오늘날의 가족과는 다른 개념이다. 로마에서 가족은 혈연이나 결혼으로 맺어진 집단 뿐 아니라 한 집안에서 생활하는 모든 구성원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부모 형제 외에도 부계 혈족과 노예, 피해방민, 심지어 조상들의 혼령까지 망라했다. 가부장의 개념도 달랐다. 가부장은 반드시 혈육상의 아버지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가족의수장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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