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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철학의 흐름: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
2007-10-25 19:11:27   read : 2754

중세 철학의 흐름: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

 

들어가며 1. 중세의 시기 결정 2. 중세철학과 기독교 3. 교부철학 4. 아우구스티누스 (Aurelius Augustinus) 5. 스콜라철학 6.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7. 중세철학의 두 가지 흐름  / 참고문헌

 

들어가며

'철학과 신학' 생각해 보면 비슷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실상 철학과 신학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운 분야이다. 하지만 중세 이러한 철학과 신학의 조화를 위한 두 가지 흐름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이다. 중세를 대표하는 이 두 철학은 신앙을 이성으로서 설명하고자한 철학이다.

이러한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은 중세의 사상체계에 미친 영향이 너무나 크다. 두 흐름을 알아봄으로써 중세사상에 대한 접근을 해보고자 한다.

1. 중세의 시기 결정

서양 철학사의 흐름을 정리할 때 크게 여섯 단계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시대,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 중세, 근대, 근대 후기, 현대의 여섯 단계가 바로 그것이다. 각 단계마다 여러 사상들이 등장하고 발전하고 쇠퇴하는 단계를 밟으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특정 종교로 제한하여 생각할 수 있는 한 시대가 있으니, 그 것은 바로 중세시대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종종 연구 재료를 다루기에 편리한 대로 중세의 시기를 결정할 수 있음을 발견하고, 때때로 중세를 테오도시우스의 사망 때, 제국이 그 아들들에게 분할된 395년부터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족에게 점령당한 1453년까지의 시기로 규정하곤 한다.

물론 395년은 고대 세계의 활력이 쇠퇴한 것을 표시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의 종언과 출발이 두부를 자르는 것과 같이 단절과 출발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마치 이어달리기의 바톤터치를 떠오르게 한다. 일정한 구간을 바톤을 주는 선수와 받는 선수가 같이 뛰어가 속도가 붙은 후 건네주게 되는 것처럼, 한쪽으로는 서서히 고대가 끝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중세기가 시작되다가, 마침내는 고대가 사라지고 중세기가 완전히 역사의 무대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중세철학은 그 시대구분에 있어 기독교가 활발하게 전개되던 150년경부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인 1500년경까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 중세철학과 기독교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중세철학은 그리스 ·로마 초기의 고대 철학과는 당연히 이질적인 관심과 요구에서 출발하였다. 그 발단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복음의 선포, 사도들의 선교활동, 초대교회의 형성이라는 종교적 사건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중세철학의 근본 주체는 기독교와 그 모태가 핀 유대교의 종교적 세계관 속에서 그 싹을 볼 수 있다. 이 세계관은 이미 구약성서의 <창세기> 가운데 신화적인 표현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신은 唯一의 절대자요, 세계와 그 안의 만물은 '無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하고 인간에게 '신의 모습(imago Dei)'으로서의 특별한 지위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세계관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그리스적 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명확히 자각되면서 처음에는 '이 세상의 지혜'인 그리스적 자연관이나 합리주의와의 대립으로서 나타났다. 이 자각은 그의 논리적 심화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그리스 철학을 방법으로서 채용하게 되고, 신앙적 세계의 이해는 점차 신학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교부철학에서 스콜라철학에 이르는 중세철학의 걸음은 이러한 신앙적 세계관의 논리화, 체계화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중세철학의 커다란 두 개의 흐름,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을 살펴보고, 각 철학을 대표하는 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를 살펴보기로 한다.

3. 교부철학

고대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교회의 정통교리를 저술로써 설명하고, 성스러운 생활을 함으로써 신도의 모범이 된 사람들을 교부라는 이름으로 존중하였다. 교부철학은 이러한 고대 그리스도 교부들의 철학 ·사상 등을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는 학문을 말한다. 이러한 교부시대는 아무리 편협한 해석을 따르더라도 그리스도의 시대로부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망 때(430년)까지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처음,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단일성 때문에 고대 이교문명과는 전혀 이질적인 원천에서 나온 종교로 등장하였지만, 차차 고대 이교세계까지 교세를 넓힘에 따라 고대문명, 특히 그리스 철학사상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킨 사람들이 교부들이다.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궁극적으로는 이성으로써는 해명될 수 없는 신비이기는 하지만,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교리 그 자체도 이성적인 構造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그리스도 사상이 하나의 종합적인 세계관으로 형성되고, 그 위에 중세 그리스도교의 신학체계가 세워진 것이다. 교부시대는 2-7세기 또는 8세기까지에 이른다. 그리스도교적 요소와 그리스 ·로마의 철학적 전통에서 비롯된 요소를 결합한 교부 철학은 스콜라주의 시대 동안 달성된 중세적 종합의 재료를 공급했으며, 그리하여 중세 서유럽 문명의 양상을 결정했다.

이러한 교부철학을 대표할 수 있는 지도적 학자를 세 사람 꼽을 수 있는데, 바로 암브로시우스(Ambrose), 제롬(Jerome),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이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카톨릭 교회가 로마 제국에 승리를 얻은 후, 야만인들이 침입할 때까지 짧은 기간 동안 활동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죽은 후 문명은 수 세기 동안 쇠퇴했고, 그리스도교가 학문과 교양에 있어 이들에 비견할 만한 인물을 다시 배출하기까지는 1000년 이상을 더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암흑시대와 중세를 통해 이들의 권위는 언제나 존중되어 왔다. 교회의 확고한 틀을 확립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이들의 공적이었다. 대체로 보아, 암브로시우스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있어 교회의 입장을 확립했고, 제롬은 서방 교회에서 라틴어 성경과 수도원 생활의 기초를 닦아 놓았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종교개혁 때까지 교회의 신학을 확립했다. 그리고 종교개혁 후에도 루터와 칼뱅 교리 중에서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의 것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친부 철학의 대표적 학자,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4. 아우구스티누스 (Aurelius Augustinus)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는 그의 주요저서라고 할 수 있는 <告白錄: Confessions)>에 기술되어 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의 하급관리였고 이머니 모니카는 열성적인 그리스도교도였다. 카르타고 등지로 유학하고 修辭學 등을 공부하여,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로마제국 말기 청년시절을 보내며 한때 타락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세때 M.T 키케로의 <철학의 권유 : Hortensius>를 읽고 지적 탐구에 강렬한 관심이 쏠려 마침내 善惡 二元論과, 체계화하기 시작한 宇宙論을 주장하는 마니교로 기울어졌다.

그 후 그는 회의기를 보내며 新 플라톤주의에서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편력을 하였다. 그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384년에 만난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였다, 그는 개종에 앞서 친한 사람들과 밀라노 교외에서 수개월을 보내면서 토론을 벌였는데, 그 내용들이 초기의 저작으로 편찬되었다.

388년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으나 司祭의 직책을 맡게 되었고, 395년에는 Hippo의 주교가 되여 그곳에서 바쁜 직무를 수행하는 한편, 많은 저작을 발표하였다. <고백록>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대작으로서는 <삼위일체론)> <신국론> 등이 널리 알려졌다. 蠻族 침입의 위험을 직접 당하면서 죽어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이었으며, 동시에 중세의 새로운 만화를 탄생하게 한 선구자였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참된 행복을 찾고자 하는 활기 있는 탐구를 위한 것으로서, 그가 살아온 생애에서 그것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그 체험을 통해 찾아낸 결론은 <고백록>의 유명한 구절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 안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을 사랑하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려면 신을 알아야 함은 물론, 신이 잠재해 있다는 우리의 영혼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의 대상으로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신과 영혼이었다. 신은 우리 영혼에 내재하는 진리의 근원이의로, 신을 찾고자 한다면 굳이 외계로 눈을 돌리려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 속으로 통찰의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5. 스콜라철학

430년 아우구스티누스의 죽음 이후에는 로마의 멸망, 이민족의 침입, 회교의 번영 등 완전히 혼란의 시대와 사회로 변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정신적 지도력과 여러 국민들에 대한 안식처를 제공하는 역할을 감퇴하지 않았다. 로마적인 것은 모두가 폐허로 돌아갔으나, 기독교 정신은 계속 그 생명력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9세기경 샤를(칼) 대제는 유럽 각지에 神學원을 설립하고 학문육성에 진력하였다. 스콜라학의 명칭은 이 러한 신학원 교수(doctores scholastici)애서 유래하며, 그 후 중세의 신학원과 대학에서 연구되는 학문널리 스콜라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그 가운데 한 부분인 철학 분야이다.

신의 말은 먼저 신앙에 의하여 인간에게 받아들여지지만 '신앙'은 인간이 거기에 내포되는 신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새 사람으로 재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신앙의 이해'라는 것이 스콜라학이 지향하는 목표였다. 이 때 신앙과 이해(또는 이성)는 서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요구하면서도 한쪽이 다른 한쪽에 용해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긴장관계에 있으며 이것은 바로 중세철학을 구성하는 두 요인이다.

따라서 중세철학을 '신학의 하녀'라 하여 한편에 대한 예속관계로서만 보는 것은 일면적이다. 스콜라철학은 한쪽이 다른 한쪽에 예속되는 곳에서는 상실되며, 긴장관계에 있는 양자의 종합에 의해서만 스콜라학이 성립된다. 스콜라학의 다양성은 이종합의 다양성에 있다.

이러한 스콜라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로는 안셀무스(Anselmus)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말할 수 있다. 신앙과 이성(요싻)의 관계를 명확히 한정시키고 스콜라학의 방법을 확립하여 '스콜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켄터베리 대주교인 안셀무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교회의 정통적인 견해와 잘 융합시켜 큰 체계를 세운 스콜라 철학의 제1인자 토마스 아퀴나스,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6.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와 나폴리 중간에 있는 로카세카에서 태어났다. 城主의 아들로 처음에 나폴리대학에 입학했으나 설교 및 학문연구를 사명으로 하는 도미니카 수도회에 들어가 파리와 쾰른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게 사사하였으며, 그 동안에 사제가 되었다.

1252년 파리대학 신학부의 조수로 연구를 심화시키는 한편, 성서 및 <命題집>의 주해에 종사하였고, 57년 신학교수가 되었다. 59년 이후 약 10년간 이탈리아 각지에서 교수 및 저작에 종사, 68-72년 재차 파리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후 나폴리로 옮겼다. 74년 리옹 公議회에 가던 도중 포사노바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일생을 한마디로 표현할 말을 찾는다면 '끊임없는 예지의 탐구' 바로 그것이다. 그에게 있어 예지의 탐구란 신학·철학의 어떤 말로 불리든 간에, 주체 외부에 체계 혹은 작품을 쌓아올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궁극목적을 향하여 전진하는 全人格的인 자기실현의 발걸음이었다. 거기에 토마스 철학의 '실존적' 성격이 있다.

그는 기의 모든 학문영역에서 비길 데 없는 종합화를 이룩함으로써 중세사상의 완성자가 되었지만, 동시에 그가 신 중심의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상대적 자율을 확립한 일은 곧 신앙과 신학을 배제하는 인간중심적 세속적인 근대사상을 낳는 운동의 기점이 되었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의 近代人이며, 그 영향은 그의 이름을 붙인 학파를 훨씬 초월하여 천대 사상 전역에 미치고 있다.

7. 중세철학의 두 가지 흐름

지금까지 중세의 철학을 이끌었던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중세철학이 서구사상에 미친 영향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스콜라사상은 그리스 ·로마의 철학적 유산을 최초로 서구 문화에 구조적 ·본격적으로 접목시켰으며, 고전철학은 이 과정을 통해 서구 문화의 고유하고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또한 중세 지식인에 의해, 이 시기의 유산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영속적인 가치를 가진 제도로 보이는 대학이 형성되었다.

끝으로 '중세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초월적 원리에 대한 신념, 이성과 계시를 도구로 한 진리와 완전의 추구 역시 중세철학이 남긴 의미있는 유산으로 생각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철학에 많은 관심이 있지만 이 중세철학은 너무도 접근하기가 힘이 들었다. 신이라는 개념을 철학으로 증명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의 의문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이성과 신앙이라는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개념에 관한 중세철학의 탐구는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어쩌면 영원히 진행되어질 탐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참고문헌

서양문명의 역사 <소나무 1997> E. M. 번즈

서양사강의 <한울아카데미 1992> 배영수

서양철학사. B. Rus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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