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르네상스
1. 르네상스란 무었인가? 2.르네상스의 역사적 배경 3.페트라르카와 초기 르네상스 4.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5.인문주의 시대 6.르네상스의 변질 7.르네상스를 보는 여러 시각 8.르네상스 스타일 9.르네상스 문학 10 .르네상스 미술 11.르네 상스 연극 12.르네 상스 음악 13.르네상스 철학 <참고 문헌 >
르네상스가 이탈리아(Italia)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배경은 도시국가를 통한 정치경제적 안정과 이에 따른 지적 팽창과 국민문화적 요청에 있었다. 또한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이 되풀이되면서도 그리스-로마적인 전통을 부흥시키려는 그들의 보편적인 권위를 유지하려는 정책에도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르네상스는 13세기 이후 유럽에서의 변화와 이에 따른 문제점가 분출된 중세와 근대의 과도기적 시기이다. 이는 종교개혁의 시대와 깊은 연관을 갖고 진행되었다.
1. 르네상스란 무었인가?
르네상스는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 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프랑스어의 renaissance, 이탈리아어의 rina scenza, rlnasclmento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고대의 그리스,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킴으로써 새 문화를 창출해내려는 운동으로, 그 범위는 사상, 문학, 미술, 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5세기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그때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야만시대,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로 파악하고 고대의 부흥을 통하여 이 야만시대를 극복하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 운동은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이 운동은 곧 프랑스, 독일, 영국 등 북유럽 지역에 전파되어 각각 특색있는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근대 유럽문화 태동의 기반이 되었다. 이때의 르네상스 외에도 문화부흥 현상이 보인 기타의 시대에 대해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 오토 왕조의 르네상스, 12세기의 르네상스, 상업의 르네상스, 로마법의 르네상스 등이 이에 속한다. 르네상스라는 개념 형성은 이미 그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사상의 기본요소는 F.페트라르카가 이미 설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고대를 문화의 절정기로 보는 반면, 증세를 인간의 창조성이 철저히 무시된 '암흑시대' 라고 봄으로써 문명의 재흥과 사회의 개선은 고전학문의 부흥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크나큰 확신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단순한 라틴 학문의 부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지적 힘을 재흥시키려는 신념에 차 있었다.
당시 L.브루니는 자기 시대의 학문의 부활에 대하여 기술하였고, 16세기의 미술가 G.바자리는 저서 [이탈리아의 가장 뛰어난 화가 ,조각가 ,건축가의 생애] 에서 고대 세계의 몰락 이후 쇠퇴한 미술이 조토에 의해 부활했다고 하여 '재생(rinascita)' 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다시 볼테르는 14 ,15세기의 이탈리아에 학문과 예술이 부활했음을 지적했으며, J.미슬레는 17세기의 유럽을 문화적으로 새로운 시대라고 하여 처음으로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 그리고 합리적인 사유와 생활태도의 길을 열어 준 근대문화의 선구라고 보고 이와 같은 해석의 기초를 확고히 닦은 학자는 스위스의 문화사가 부르크하르트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860년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문 화]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시대' 로서의 르네상스라는 사고방식이 정착하여 오늘까지 의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르네상스와 중세를 완전히 대립된 것으로 파악하고, 근세의 시작은 중세로부터가 아닌 고대로부터라는 주장에 이르게 되었으며, 중세를 지극히 정체된 암흑시대라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연구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여 르네상스의 싹을 고대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중세에서 찾아야 하며, 르네상스를 근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
2.르네상스의 역사적 배경
르네상스는 다면적인 복잡한 국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간단히 개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르네상스에 대한 논의는 이탈리아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생하여 다른 곳으로까지 파급된 데에는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 이래 오랜 역사가 축적되어 온 곳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 혜택으로 이슬람세계 및 비잔틴과의 접촉을 항상 유지하여, 이들과 서유럽을 연결시키는 소임을 맡아 왔다. 특히 11, 12세기의 '상업의 부활' 과 십자군 운동의 참여를 통하여 도시가 활성화하기 시작하였고, 12세기에는 중북부의 많은 도시가 자치도시로 조직되었다. 이들 자치도시들은 주위의 농촌지대도 지배하여 도시국가의 형태를 취하였다. 또 기촌 봉건귀족층과 토지소유자계층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도시의 경제활동과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13세기 후반의 경제적 발전기에는 사회계층의 변화도 심하여, 상인의 현실적인 감각이 사회의 모든 면에 침투함으로써 이탈리아 특유 의 시민문화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이탈리아는 지리적인 조건과 상업상 교류의 필요에 따라, 이슬람과 비잔틴문화와의 접촉 능성이 가장 많았고, 또 실제로 그런 교류가 유지되고 있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학문 전통면에서도 스콜라 철학으로 대표되는 서유럽문화의 중심지인 프랑스와는 달리 그들나름의 독자적 전통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이들의 정치는 도시국가의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그리스 로마의 고대문화 역시 도시국가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물론 고대의 도시국가와 이탈리아의 코무네(자치도시)와는 사회적인 기초구조에서 크게 다르지만, 형태 등의 면에는 공통성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대의 법과 정치이론이 코무네에 적용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이와 같이 특수한 사회구조와 독자의 문화유산을 가 지고 있으면서도 비잔틴과 이슬람문화권과의 접촉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 코무네가 르네상스 운동의 진원지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3.페트라르카와 초기 르네상스
고대문화에 대한 동경은 증세를 통하여 계속 이어졌다. 샤를마뉴의 '로마제국' 이나 오토의 '신성로마제국' 이라는 명칭도 사실은 고대 로마황제의 후계자가 되고자 하는 그들의 바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로마의 정통성 계승 의도를 르네상스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르네상스의 특징은 고대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신문화를 만들어내려는 자각적인 태도로서, 고대가 지난 후 암흑시대가 있었고 이제 새로운 재탄생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역사의 3분법(고대 ,중세 ,근세의 시대구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운동의 근거는 고전연구로부터 공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고전은 수사학 , 역사 ,도덕 ,철학 등의 인문학이며, 이와 같은 연구에 종사하는 산람들을 인문주의자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새로운 학문에 휴마니타스(Humanitas)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피렌체의 L.브루니였다. 최초의 인문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시인 F.페트라르카는 리비우스의 역사와 키케로의 도덕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텍스트의 발견과 교정에 전력을 쏟았다. 고대인들의 생각과 생활을 바르게 파악하고 다시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인문주의의 전통은 페트라르카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으며,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14세기 이탈리아에는 또한 새로운 스타일의 회화와 조각이 등장하였는데, 공간과 시간을 다루는 데에 고대의 스타일을 부활시켰으며, 조토는 이 분야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G. 바사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고대의 재탄생이란 고대의 모델을 모방하는 것뿐만 아니 라, 자연을 관찰하고 모방하는 능력까지를 일컬었다. 법률 분야에도 새로운 기운이 일어났는데, 볼로냐대학을 중심으로 부활한 로마법 연구는 바르톨루스에 의하여 새로운 체계화가 이루어 졌다.
4.휴머니즘이 란 무엇인가?
15∼16세기의 유럽에서는 고대의 문예를 부흥시키려는 운동이 일어나, 중세 이래의 신학 중심 학문체계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시대의 학자들 간에 '보다 인간다운 학예를!' 이라는 외침이 일어났다. 즉 고대의 학예를 부활시킴으로써 교회적 권위 아래 질식 되어가는 자연스런 인간성을 회복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스 ,로마 고전이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일' 을 의미하는 후마니오라(humaniora)라는 말로 불리고, 그리스 로마 고전을 연구함으로써 인간다움을 높이고 새 시대의 이상적 인간상을 실현하려는 새로운 교육이념이 대두되었다. 그래서 이 '보다 인간다운' 을 뜻하는 라틴어 후마니오르(Humanior:인간적이라는 뜻인 humanus의 비교급)에서 휴머니즘이라는 말이 생겼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라는 말도 같은 말이다. 예컨대 페트라르카는 젊었을 때부터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 등의 고사본을 열심히 수집하여 고대인을 이해함으로써 인간완성의 이상상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이러한 휴머니즘의 정신은 르네상스의 운동이 확대되면서 이탈리아로부터 알프스를 넘어 유럽 전역에 파급,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 프랑스의 몽테뉴 등에 의해 새로운 인간성의 이상 이 확립되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 자연스런 인간성을 존중하고, 이러한 인간성에 입각하여 지혜를 탐구하려는 것이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휴머니즘은 근대과학의 합리적 정신과 결부된다. R.데카르트는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인간' 의 입장에서 진리를 방법적으로 탐구하였다. 신학자처럼 은총의 빛' 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빛' 에 의해 세계를 인식하려고 노력하였고, 수학적 방법으로 학문의 확실한 기초에 도달한 지점에서 출발하여 인생에 유용한 지혜로서의 철학체계를 완성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생활의 지도, 건강유지, 기술발명에 관하여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사물에 관한 완전한 인식' 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휴머니스트의 지혜의 이념이 새로운 과학이나 기술과 결부됨으로써 근본적으로 변질된 셈이다. 이와 같은 과학과 휴머니즘의 통일이라는 과제는 18세기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계승되었다. 이 시대의 휴머니즘은 과학적 합리성을 단순히 자연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등 각 분야에 걸쳐 추구하여 인간성을 한없이 확충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과제의식이 18세기 계몽사상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진보의 관념' 을 낳게 하였다.
5.인문주의 시대
15세기에 들어서면서 피렌체를 중심으로 인문주의자들의 활동이 일제히 전개되었다. 피렌체공화국의 서기장관 C.살루타티는 키케로의 서간을 발견하여 고전기 라틴어의 수사법을 처음으로 공문서에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소위 '시민적 인문주의(civic humanism)' 의 확립에 크게 공헌했다는 사실이다. 그 어떠한 사람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시민의 자유와 그것을 보호하는 공화정을 중요시 하였다.
이것은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었는데, 공화정은 로마의 귀중한 유산이며 그것을 보존하는 일은 피렌체의 책임이라는 것이었다. 로마공화정시대야말로 인간의 가능성이 가장 크게 열린 시대였으나, 카이사르를 비롯한 독재자들이 국민의 자유를 빼앗아 버렸으므로 피렌체의 이상은 로마공화정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생각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당시 피렌체는 밀라노를 중심으로 북이탈리아를 지배한 비스콘티가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으며, 살루타티는 적 비스콘티를 카이사르에 비유하여 독재자로 규정하고 이로부터의 자유수호를 국민에게 호소하였다.
이와 같은 시민적 인문주의는 역시 서기장관으로 봉직한 살루타티의 후계자 L.브루니 때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 그는 저서 [피렌체국민사] 에서 피렌체의 자유의 역사는 에트루리아 사람들이 자유도시를 세우기 이전부터 이미 투스카니(Tuscany)의 토양에 깊숙이 뿌리박혔다고 주장하고, 평등은 정의의 균등한 기회에서 실현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밀라노 쪽의 인문주의자들은 로마공화정 말기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이를 수습한 것은 카이사르라고 찬미하고 비스콘티를 카이사르에 비유함으로써 그들의 치정을 합리화시켰다. 피렌체와 밀라노 간에 이와 같은 의견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치정의 정통성을 고대에서 구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15세기 이탈리아의 현실이 과거에 투영된 결과, 고대문화의 부흥은 단지 학문상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보다 넓은 사회적 의미를 지니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인문주의자들은 고대의 역사와 학문을 배우고 여기에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정치와 도덕의 원리를 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대인의 생각과 생활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사본을 비교하고 정확한 텍스트를 확정해야 하기 때문에 언어문헌학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인문주의자들에게는 이 방법이 단순히 연구의 보조수단이라기보다 참다운 전체적인 인간성을 추구하여 자기를 자각하려는 본질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중세 교황의 세속적 지배권의 근거로 알려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진장' 을 후세의 위작이라고 밝혀낸 L.발라는 이러한 언어문헌학의 대표적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미술에도 고전주의적 이상주의가 확립된 시기로서 회화의 마사초, F.안젤리코, 그리고 [비너스의 탄생] 으로 유명한 S.보티첼리가 있고, 조각에서는 도나텔로가 뛰어 났으며, 건축분야에서는 F.브루넬레스키 등이 배출되어 르네상스 미술의 황금시대를 구축하였다.
6.르네상스의 변질
15세기의 인문주의자들은 현실을 바꾸는 것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활동도 증시하였다. 그러나 15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분위기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지식인들 간에 현실도피의 경향이 현저히 나타났다. 이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고대문화 부활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코무네 체제가 쇠퇴하고 마키아벨리가 [군추론]에서 주장하고 있던 군주국현상이 발달하였다 피렌체의 경우 명목상 코무네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434년 이후 메디치가의 지배하에 놓임으로써 시민적 인문주의는 크게 쇠퇴하였다.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판도는 비교적 단순하였는데, 북에는 스포르차가의 지배를 받는 밀라노와 귀족지배의 공화국 베네치아가 있었고, 중부에는 피렌체와 교회국가, 남에는 아라곤가의 나폴리 등 강국 간에 일총의 세력 균형이 성립하였다. 비교적 소규모의 도시에서도 각 기 군주국을 형성하고 화려한 궁정생활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공화정의 이상은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으며, 지식인은 궁정에 기식하는 궁정문화인이 되거나, 현세를 도피하는 자세를 택하였다. 또, 비잔틴 학자들의 영향이 더해져서 지식인들은 학문연구 중심의 사변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1453년 비잔틴제국의 몰락을 전후하여 플레톤이나 베사리온과 같은 다수의 뛰어난 그리스인들이 이탈리아에 와서 그들의 학문, 특히 플라톤 철학을 전하였고, 그 영향으로 C.메디치는 피렌체에 '플라톤 아카데미아' 의 창설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때가지의 시민적 인문주의는 도덕철학, 정치학 등에 주된 관심을 두었으나, 1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C.란디노와 같이 명상적인 생활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플라톤 아카데미아의 중심인물인 M.피치노의 학문도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신학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이 상과 같이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걸친 문화는 군주들의 보호 아래 궁정적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카스틸리오네가 쓴 [정신론 Ⅱ Cortegiano] 은 이상적 인물로서의 궁정인을 묘사 하고 있다.
이탈리아 문학도 단순한 고전의 모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현상을 나타냈으며, 중세 기사도에 대한 로맨틱한 관심은 귀족적인 서정시의 경향을 띄게 되었고, 타소와 L.아리스토의 작품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미술분야에서도 이와 같은 변화가 뒤따르게 되었는데, 개성과 활력에 넘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과 같은 거장이 배출된 뒤로는 차차 바로크 미술양식으로의 전환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경제적 지반이 쇠퇴함으로써 르네상스에도 변화가 왔다. 오랫동안 동 서간의 무역을 독점한 이탈리아 상인들은 외국상인, 특히 절대주의 국가들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는데, 영국이나 네덜란드와 같이 국가의 보호를 받는 상인들과의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또 에스파냐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신항로의 발견과 동양과의 직접무역은 이탈리아의 경제적 지위를 떨어뜨렸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정치적 관여로 이탈리아 내 국가간의 세력균형과 타국가간의 관계가 힘에 의해 지배되어 그들의 독립성조차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1494년 프랑스의 사를 8 세는 샤를마뉴의 꿈을 재현해 보려는 듯 나폴리에 침입하였으나, 그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이탈리아는 에스파냐의 관여와 독일 합스부르크 왕가 및 프랑스 발루아 왕가 간의 세력 다툼 속에 끼여 정치적으로 쇠퇴하였다.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간에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 은 1521 년부터 44년까지 네 차례 되풀이되면서 이탈리아의 국토를 유린하였다. 사실상 합스부르크 왕가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에스파냐와의 연결을 위해서도 이탈리아의 지배는 매우 중시되었다. 후기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였던 로마가 1527년 황제군에 의하여 약탈당하면서 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이 시점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말로 보고 있다.
7.르네상스를 보는 여러 시각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가 등장함과 동시에 학문 부활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갔다. 19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고전부활이 서구문명에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상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상 속에서 지적이고 문화적인 관심은 그들 각자의 분야에 따라 이탈리아와 자기 분야와의 관계 탐구에 쏠리게 되었다. 러스킨과 같은 비평가와 더불어 르네상스라는 용어가 보편화하기 시작하였고, 휴머니즘이라는 말도 고전 스타일의 범주를 넘어선 지적 운동을 가리켜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855년 미슐레가 그의 [프랑스사] 의 제7권을 '르네상스' 라고 이름붙 였을 때 그 절정에 달한 감이 있다. 사실 이 책에서 미슐레는 르네상스에 대한 근대적 사상을 거의 모두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 시대를 중세와 정반대되는 시대로 묘사하고, 그 시대의 정신을 '세계의 발견과 인간의 발견' 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르네상스 관은 프랑스 중심적인 데에 문제가 있으며, 아마 이러한 경향은 당시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시대적 배경이 가져온 불가피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보다 보수적이며 초연한 입장에 서려고 노력했던 스위스 문명사가 부르크하르트는 미슐레와 같은 민족주의 성향이나 중세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은 이탈리아적인 것으로서 중세적인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단순히 근대의 시작이라고만 볼 수도 없는 하나의 구분된 시대, 즉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그 자신의 어머니를 가진' 문화 시기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주로 새로운 문명의 정신적인 특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이 배태된 정신과 이탈리아인의 사회 정치적인 경험을 밀접하게 관련시켜 보려고 하였다. 즉 14세기의 시작과 함게 생성된 이탈리아의 정치적 경험은 새로운 정신의 발달을 가져 오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교황과 황제 간에 진행되었던 오랜 갈등이 이 무렵 막바지에 이르렀고, 이러한 장기간의 투쟁은 양편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새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유럽의 어느 곳에서나 봉건주의는 중앙집권적 군주국으로 바뀌어가고 있었고 이탈리아도 예외는 아니어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정치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공화국이든 군주 국이든 간에 이들 국가들의 특징은 '개인주의' 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개인주의는 바로 세계와 인간의 발견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신의 발현에 중대한 소임을 담당한 것이 인문주의자라고 지적하고 있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 개념은 이후 엄청난 양의 연구를 촉진 자극하였고 수많은 논쟁의 근거가 되었다. 일부 저명한 학자들은 부르크하르트의 견해에는 부분적으로 과장과 잘못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의 해석을 벗어날 수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은 물론 부르크하르트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중요한 몇 가지는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 사상에는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이탈리아 중심적인 그의 주장과는 달리 유럽의 다른 지역, 프랑스나 독일, 그리고 북부 제국의 르네상스도 이탈리아의 그것과 평행하게 전개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회경제사의 등장은 사회를 보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였고, 르네상스 사가들에게 새로운 해석으로 도전해왔다. 도시사회와 자본주의가 고대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중세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하는 이들의 주장은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에 대한 재해석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인 사포리는 서유럽의 결정적인 르네상스는 11세기 십자군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그에 따르면 12세기에 이탈리아에 새로운 사회가 등장했는데, 이 때는 도시중심, 상업자본주의, 자치적인 도시국가, 대중의 새로운 문화의 출현으로 특징짓는 시대이다. 레인 또한 르네상스가 12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일어났다고 하는 페거슨의 시대 구분에 동의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르네상스는 재생이나 시작의 국면으로 볼 것이 아니라, 중세의 말기적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추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주장이 부르크하르트적인 해석을 앞지를 것인지의 여부는 아직 예견할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어느 쪽이든 르네상스가 하나의 뚜렷한 구획이 되는 역사적 시대 구분 용어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8.르네상스 스타일
이 시대는 중세의 그리스도교 중심의 사회에서 인간과 자연을 발견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시대 복식의 특징은 남녀의 옷에 슬래시(slash)를 내어 활동하기 쉽고 예쁜 속옷이 보이도록 장식을 하였으며, 외관상 입체적으로 넓이를 증대시켜 위엄을 나타내도록 하였다. 후기에는 후프(hoop)를 넣어 인체의 체형을 무시한, 지나친 과장과 기교를 낳았다.
남자 상의인 더블릿(doublet)은 14세기 중엽부터 착용한, 길이가 짧고 허리가 꼭 끼는 겉옷 상의로서 17세기 전반까지 착용한 기본적인 상의의 일종인데, 프랑스 말로는 푸르푸앵 (pourpoint)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군인의 의복이었으나, 시민화된 것이다. 남자 하의인 트렁 크호스(Trunkhose)는 15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초까지 착용한 반바지의 일총으로, 구성 형태와 길 이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길이가 점점 짧아지다가 말기에는 부푼 모양이 되었다. 짧게 부푼 바지 밑에는 바지와 연결된 스타킹을 신었다. 또 남녀 공용의 칼라인 러프(ruff)는 레이스로 주름잡아 빳빳하게 세워 뒤쪽에는 부채를 벌린 듯한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얼굴이 파묻힐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으며 르네상스 모드를 이끌어 가는 유행을 만들었다.
여자의 대표적인 옷인 로브(robe)는 위에는 리넨코르셋을 입어 몸에 꼭기게 하고, 긴 스커트가 달린 것인데 하체를 과장하기 위하여 스커트 안에 페티코트의 일종인 파딩게일 (farthingale)을 입었다. 소매는 초기에는 꼭 끼었으나 후기에는 란제리(lingerie)가 보이도록 퍼 프형에 슬래시를 넣기도 하였고 소매 끝에는 레이스 등의 커프스를 달았다. 몸통은 몸에 꼭 끼게 하고 스커트는 길이가 바닥가지 길고 및으로 퍼지게 하기 위하여 상의와 하의를 허리 선에서 자르고 따로 재단해 붙인 점이 특징이다.
9.르네상스 문학
르네상스 문학은 중세를 통하여 동로마 제국(1461년 투르크에게 멸망됨)과 접촉을 가졌던 이탈리아에서 우선 일어나, 전 유럽에 파급되었다. 중세는 그리스 ,로마 문학에 대하여 그다지 무지하였던 것은 아니고, 특히 13세기에는 고대를 알고자 하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교를 통하여 본 고대였고, 인간의 육체나 감각을 멸시해온 중세는 고대의 예술미를 인식하는 안목은 지니지 못하였다.
근동무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북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번영과 더불어 고대예술에 대한 안목이 트이고, 그것을 본보기로 하여 창조하려는 의욕이 강해진 것은 14세기 중반부터였다. 단테(1265∼1321)는 그 관념에서는 오히려 중세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이었으나, 교회 공용어인 라틴어 아닌 고국의 언어 토스카나어로써 예술적으로 뛰어난 시문을 창초하려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 뒤를 이어 나타난 인문학자들은 고대문학에서 문학의 규범을 만들었다. 보카치오(1373∼1375)는 [데카메론] 에서 육욕을 가진,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긍정하고 색정으로부터의 해탈을 주장하는 성직자를 마음껏 비웃었다. 그와 시대를 같이하여 나타난 페트라르카(1304∼1374)는 고대 그리스의 시인 핀다로스의 시풍을 모방하여 이탈리아어로 우수한 서정시를 썼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걸쳐 아리오스토(1474∼1533), 타소(1444∼1495) 등 시인이 나타나 [광란의 오를란도] [구원된 예루살렘]등의 현란한 장편시를 가지고 전 유럽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지만 16세기 말이 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유럽의 패권이 이미 에스파냐로 옮겨짐에 따라 급속히 빛을 잃었다.
10 .르네상스 미술
오늘날 통념적인 르네상스 미술의 시기는 피렌체 대성당의 돔(dome)을 착공한 1420년을 상한으로 하고, 하한은 마니에리스모(manierismo)로 옮겨가는 1525∼30년경으로 잡고 있다. 19세기 이후, 15∼16세기에 유럽의 문화현상을 널리 파악하는 개념이 된 르네상스 (Renaissance)라는 말은 '재생' 을 뜻하는데, 이 말의 어원은 역사적으로 보면 이탈리아에 서 미술용어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미 14세기의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 및 역사가 빌라니 등이 잃어버린 고대의 문예 및 예술을 새시대에 재현한다는 뜻으로 이탈리아 어의 '재생'을 의미하는 리나시타(rinascita)라는 어휘를 사용하였다.
다시 15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 기베르티와 알베르티, 필라레테 등의 저술에도 그러한 사관이 계승되어 있었으나, 특히 16세기의 미술가 바사리는 그의 저서 [이탈리아 미술가 열전] (1550년 초판)에서 고대미술이 야만족의 침입과 중세의 우상파괴운동으로 멸망하고, 그 후 거친 고트인에 의하여 '독일양식' , 즉 고딕이나 딱딱한 비잔틴양식이 풍미한 뒤, 13세기 후반 이후 조각가 피사노와 디 캄비오 등이 나와 토스가나 지방에서 뛰어난 고대미술의 전통을 부활시킨 사실을 리나시타라는 말로써 파악하였다. 이 말이 19세기 초엽, 프랑스 학자의 주목을 받아 르네상스라고 프랑스어로 번역되었고, 이어서 영어 ,독일어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이탈리아어로는 리나시멘 토(rinascimento)가 되었다. 따라서 르네상스란 본질적으로 이탈리아어이며, 더욱이 그 개념이 형성된 단서는 그 시기의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역사적 자각과 의욕을 보여준 미술현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
11.르네 상스 연극
이 시기의 연극은 전체적으로 중세연극으로부터 이탈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성질은 각국의 사정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궁정과 그 주변의 귀족을 관객으로 삼았던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는 고대극 부흥의 색채가 농후한 데 비하여, 서민층의 관객이 많았던 에스파냐와 영국에는 중세연극의 형태가 남아 있었다. 연극운동은 어느 시대나 문학운동보다 뒤늦게 나타나는 것이 상례이다. 이탈리아에서 고전극을 바탕으로 한 격조 있는 비극과 희극이 나타난 것은 16세기 들어와서이며, 비극 [소포니스바 : Sofonisba] (1514∼15)의 작자 G.G.트리시노가 최초의 작가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문학이 이미 쇠퇴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극은 무의미한 잔학과 음산한 분위기를 과장할 뿐 별다른 걸작을 낳지 못하였다.
희극은 라틴극을 모방한 운문극과 대본이 없는 즉흥극(코메디아 델 라르테)으로 나뉜다. 운문극으로는 L.아리오스트의 [요술사]와 [뚜쟁이] , 마키아벨리의 [만드라골라] 등이 유명하다. 코메디아 델 라르테는 줄거리만 있고 대사는 없어, 극도의 배우술을 발달 시킴으로써 루찬테, 스칼라 등의 명배우를 낳았다. 이탈리아가 만들어낸 르네상스 시대의 또 하나의 장르는 전원극으로, 타소의 [아민타] , G.구아리니의 [충실한 양치기] 는 전 유럽의 화제가 되었다. 또한 이 시대의 이탈리아가 세운 공적은 직업극단을 성립시킨 것 (이는 각국의 대세였으나 여배우를 최초로 쓴 것은 이탈리아이다)과 프로시니엄스테이지라고 불리는 새로운 극장양식을 낳은 것이다.
12.르네 상스 음악
일반적으로 르네상스란 고대문화의 부흥을 뜻하며, 미술이나 문예에서는 확실히 그와 같은 경향을 정신적 , 기법적인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음악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굳이 그것을 찾는다면 1600년 무렵의 오페라를 부흥의 효시로 들 수 있으나 이는 한낱 공상 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고, 시대적으로도 음악은 이미 바로크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내용을 보다 넓은 뜻으로 다루어 인문주의적인 예술 창작태도, 조화와 비례의 중시, 합리적인 기법의 탐구, 명확한 표현, 그리고 그러한 음악의 배후에 있는 인간상 이라는 점 등에 착안한다면, 15세기 말 16세기의 음악에는 확실히 르네상스적이 라고 할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이 보인다. 이 시대의 음악작품은 음역이 전대의 그것에 비하여 훨씬 넓어지고 새로운 음공간이 개척되어 있다. 이는 회화에서의 원근법의 탐구와 비교가 될 것이며 악보 인쇄술의 발명, 정량기보법의 보급도 르네상스의 과학정신과 무관한 것 은 아닐 것이다.
르네상스음악의 중핵은 성악 폴리포니기법이며, 미사 ,모테토 그리고 각종 세속합창곡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나 기악음악의 발달도 무시 할 수 없다. 즉, 오르간을 비롯한 다른 건반악기, 류트나 소합주 등을 위한 무곡, 성악곡의 편곡, 판타지나 전주곡과 같은 소곡 등 각국 특유의 기악작품을 낳고 있다. 그리고 15세기 말에는 각종 극음악의 시도가 이루어져 17세기 바로크음악의 성립과 발전에 결정적 인 구실을 하였다 르네상스의 합리정신은 음악이론면에서도 그랄레아누스의 [도데카코르 돈] 이나 차를리노의 [화성론] 과 같은 전통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이론을 낳게 하고 또 계몽적인 음악입문서도 만들게 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페스타, 팔레스트리나, 루차스 키 그리고 마렌초, 제수알도, 몬테베르디 등에 의한 마드리갈과 같은 뛰어난 세속음악과 로 마의 팔레스트리나에 의한 미사곡, 모테트 등의 교회음악이 나왔다. 또한 베네치아의 조반니 가브리엘리 등의 악기를 곁들인 2충합창 등도 특기할 만하다.
13.르네상스 철학
중세에서 근세에의 전환기에 해당되는 르네상스기에 유럽은 새로운 시대정신의 진통을 겪었다. 그 선구가 된 것이 이탈리아의 휴머니즘 운동이다. 이 정신운동은 F.페트라르카, G.보카치오를 선구적 지도자로 하여, 신을 중심으로 한 인생관에 대치될 세속적 인간의 이상상을 추구하여 가톨릭적 유럽의 테두리를 부수고 고대의 이교세계에 그 전범을 구하였다. 사르타티와 L.브루니의 활약에 의해서 15세기 초의 피렌체는 진정한 뜻에서 이 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피렌체 시청의 제1서기로서 고대 로마의 이상을 재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한편 페트라르카에 의해 고무되어 그들에게 이어진 고전에 대한 관심은 때마침 개최된 동서 종교합동회의와 동로마제국의 멸망에 따라 빈번하여진 비잔틴 학자들의 이탈리아 이주를 계기로 광범한 그리스 지식욕을 불러일으켜 얼마 후 플라톤 아카데미아의 창설을 보았다. 소위 피렌체-플라토니즘의 이름으로 알려진 그들의 입장은 플라톤이나 플로리노스 등의 고전사상을 부활 섭취함으로써 중세 그리스도교 전통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인간 중심성의 철학이다. 피치노,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그 대표자로 그들이 주장하는 '경건의 철학' 이나 '인간의 존엄성' 사상은 열성적인 공명자나 추종 자들을 찾아냈다. 그 결과 피렌체는 문자 그대로 '꽃의 도시' 로서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유럽이 문화의 중심으로 동경하게 되었다. 그 철학적 독자성은 자칫하면 고전부흥의 눈부신 현상으로 가리워지기 쉬우나, 현대정신의 전환점에 서서 그 후의 유럽 발전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15세기 후반의 피렌체를 정점으로 하여 르네상스는 급격한 쇠퇴현상을 나타내었다. 사보나롤라의 혁명에 이은 외국군대의 침입에 의한 외국세력의 압도적 제압하에서 이탈리아 문화는 중핵상실, 사상적 다원화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경향 속에서 리얼리즘의 우성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N.마키아벨리나 아레티노는 이상주의적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해서 근대 합리주의적 리얼리즘에의 길을 열었다. 한편, 전체 유럽을 포함하는 종교개혁의 폭풍을 배경으로 해서 이탈리아는 휴머니즘적 복음주 의의 관용에서 반종교개혁의 대립과 통일에의 길을 걸었다. 이 기간, 즉 르네상스의 말기 단계에 해당되는 16세기 이탈리아에서 특히 현저한 철학적 현상은 자연철학의 융성이었다.
이 현상은 크게 나누면 과학적 자연관으로 발전하는 방향과 마술적 자연관을 기조로 하는 자연관의 조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북이탈리아의 파도바를 중심으 로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아베로에스주의의 발전이고, 후자는 남이탈리아의 자연철 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범신론적 자연사상이다.
1. 근대과학적 자연관: 이른바 파도바 학파의 계보는 중세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파도바대학은 역사가 가장 오래된 중세대학의 하나로 의학부를 중심으로 한 데서 정통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비하여 이단적인 아베로에스주의의 자연체계를 계승하고 있었다. 이 학풍은 16세기에 이르러 아킬리니나 폼포치지를 거쳐 획기적 혁신을 나타내었다. 즉, 그리스어 원전에 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직접적 이해를 중요시한 것이다. 그들은 문헌실증의 정신을 가지고 철저한 경험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자연연구에 임하였으며, 여기에서 인간영혼의 불사성과 구제를 부정하는 대담한 인간관을 주장하였다. 경험적 합리주의의 입장은 교회로부터 이단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지식의 면에서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자바렐라의 논리적 손질을 거쳐 G.갈릴레이의 근대과학이 되어 그 열매를 맺었다.
2.마술적 자연관; 마찬가지로 자연탐구를 중요시하면서도 자연현상의 메카닉한 구조보다도 자연의 근원적 생산력의 비밀을 파악하는 일에 중점을 둔 사람들이 있다. 카르다노, 텔 레시오, 캄파넬라 등의 자연철학자들이다. 그들은 마술 연금술적 사상의 흐름을 따서 범신론 에 접근하여 직관에 의한 자연의 총체적인 파악을 구사하였다. 이들 사상은 르네상스의 인간과 자연의 고양을 뒤에서 지지하면서 특유한 시대조류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반종교개혁이 우세해지자 이탈리아의 사상적 자유는 억제되고 사상가들의 탄압이 되풀이 되어 오히려 이들 여러 사상은 알프스 너머 프랑스나 영국, 독일에서 그 후계자가 나타나 유럽 근대사상 속에 그 성과가 결실되었다.
참고 문헌
①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 시오노 나나미 지음 ; 김석희 옮김 한길수, 2001
②르네상스 / 폴 포르 지음 ; 주경철 옳김 한길사, 1999
③르네상스 / Hale John R. 저 ; 타임-라이프 북스 편 ; 한국 일보 타임-라이프 편집부 역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79.
④르네상스 /Walter Pater 저 ; 김병익 역_종로서적, 1988.
⑤르네상스 음악의 즐거움 / 김현철 저.대건 인쇄출판사, 1996
⑥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 / 에른스트 카시러 지음 ; 박 지형 옮김- 민음사, 1996.
⑦르네상스의 미술 / Rasa Maria Leff 저 ; 김창규 역_ 예경산업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