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과 네덜란드의 변화
1639/40년 스페인은 마르마다의 패배와 포르쿠갈의 분리독립, 카칼로니아의 반란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웠다. 결국 1642년 스페인의 도자 구즈만은 네덜란드로부터 스페인 군대를 철수시켜야만 하였다. 1646년 네덜란드는 프랑스와 함께 해적행위의 온상이었던 던커크를 점령하므로써 스페인의 잔재를 털어낼 수 있었다.
30년 전쟁의 결과가 베스트팔렌조약(1648)으로 나타나 스페인 합스부르크가는 결정적인 쇠퇴의 길로 들어서고, 네덜란드의 독립은 공인되었다. 30년 전쟁은 오랜 종교개혁의 투쟁의 종착역이었다. 이제 유럽은 평등한 독립주권국가의 새로운 원칙에 따라 근대적 국민국가가 출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물론 네덜란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1646년부터 시작된 스페인과 네덜란드사이의 평화조약이 1648년 5월 15일 뮨스터에서 조인되므로써 80년간의 독립전쟁도 종료되었다.
사실상 독립전쟁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였고, 이는 네덜란드의 도시에서 부를 축적한 신흥귀족과 부유한 무역상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1647년 헨드릭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빌럼 2세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였다. 그는 네덜란드 7개주중 6개의 총독을 겸하였다. 다만 1650년까지 프리즈란드는 독자적인 총독을 유지하였지만 빌렘의 우위를 인정하였다.) 평화조약은 스페인왕이 네덜란드를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스페인은 네덜란드의 정복지였던 동,서인도지역의 항해가 금지되며, 스페인왕이 독일 황제가 네덜란드의 독립을 승인하도록 노력할 것을 규정하였다.
유럽최초의 국제회의로 불리는 Westpfalen의 강화에는 국가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자연법사상에 근거한 국제법원칙이 크게 반영되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국제법 창시자 그로티우스(Hogo Grotius: 1583-1645)는 1625년 그의 저서 '전쟁과 평화의 법'를 통해 국가적 종교적 대립을 초월한 전시,평시를 막론한 자연법적인 국제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백년전쟁이후의 프랑스의 발전
루이 11세(1461-1483)와 샤를르 8세(1483-1498)와 그의 후계자들은 선왕인 샤를르 7세의 정책을 계승하여 부르군드, 서부의 앙주백령과 남부의 프로방스, 나폴리등으로의 영토확장에 주력하였다. 또한 발로아 왕가는 비교적 쉽게 국민감정에 호소하여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도를 하면서 중앙집권적 권력체계를 강화시켜 나갔다. 루이 11세는 도시의 부르주아 시민세력과 연대하여 전쟁으로 상처입은 봉건 기사세력을 더욱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는 '짐이 프랑스이다.'라고 선언하였다. 루이 11세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이면서도 학예분야에도 커다란 관심을 보여 프랑스적인 문화창달에도 앞장섰다. 또한 그는 영국과 1475년 피퀴니조약을 맺고, 백년전쟁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영국에 호의적인 금품공세도 마다치 않았다.
한편 루이 11세는 1477년 부르고뉴와 피카르디의 일부를 영유하게되는 행운을 얻었다. 욕심많은 그는 부르고뉴 전부를 획득할 마음으로 7세의 왕자를 부르고뉴 공주와 결혼시키려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마리공주는 오스트리아 막스밀리안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접경지역인 로트렝지아의 불안에서 어느정도 해방될 수 있었다. 당시 부르고뉴공국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하게되었다. 1482년 부르고뉴의 마리가 낙마로 사망하자, 아들 필립과 공주 마르가레트만 남게되었다. 루이 11세는 왕세자 (샤를르 8세)를 마르가레트와 결혼시켜 지참금으로 프랑쉬공테와 아르토아를 갖고오도록 합의하였다. 1480년 르네왕과 샤를르 앙주가 사망하자 메느와 앙주지역을 프랑스 왕실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
부르군드 전쟁: 부르고뉴: 부르군드 공국은 필립공(선량공 1419-1467)의 등장으로 저지대의 동프랑스지역을 정복하고 백년전쟁시에는 영국과 영구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항하였다. 후계자인 부르군드의 샤를르 대담공(1467-1477)은 영토확장을 목표로 스위스의 관할지역이었던 알사스-로렝지역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루이 11세는 이에 개입하여 스위스와 동맹을 맺고 부르군드 전쟁(1476-1477)을 승리로 이끌고 샤를르공을 살해하였다. 그러자 후계자가 없던 부르군드공국은 분할되고, 프랑스도 그 일부를 획득하였다. (특히 프랑슈 콩테 Franche Comte는 일시적으로 왕령에 귀속되었다. 또한 샤를르공의 딸 마리는 저지대지역(네덜란드, 벨기에등)을 상속받았다. 그녀은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후에 신성로마황제)과 결혼하였다. 그들의 아들이 유명한 신성로마황제 칼 5세로 프랑스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부르군드의 저지대지역도 스페인령, 독일령과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의 영지가 되었다.
루이 11세는 영주세력과 국민 모두에게 가혹한 왕이었다. 과중한 세금정책은 물론 자신을 반대한 세력은 가차없이 처단되었다. 그는 왕실 재정을 도모하기 위해 불평등한 직접세였던 따이유세를 부과시키고 염세등 각종 세금정책을 통해 관료제와 상비군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물론 그는 국민적 통합을 위한 근대적 개혁정치도 꾸준히 수행하였다. 그는 상업을 장려하면서 도량형을 통일시키고 교통과 우편제도를 개량하였다. 루이 13세의 사부였던 보쉬에 (Bossuet 1627-1704)는 그를 '저열하고 왕자답지 않은 인물'이라 평하였지만, 그의 연대기를 쓴 콤미느는 그를 사려깊은 현실주의자로 기록하고 있다. 결국 그는 장단점을 가지고 프랑스를 강성하게 만든 사업가적인 왕이었다. 그가 죽자 프랑스는 대외적으로 플랑드르문제와 이탈리아문제라는 2가지 커다란 과제를 해결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경주하여야하였다. 영국,독일,프랑스는 각각 플랑드르지역을 자국의 지배영역에 포함시키고자 노리고 있던 지역이었다. 또한 분열상태에 있던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외국과의 동맹을 통한 군대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제노바,피렌체,밀라노등의 은행지점이 있었고, 프랑스귀족과 이탈리아귀족간의 결혼등 교류가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과거 찬란했던 로마제국을 꿈꾸는 유럽군주의 야심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샤를르 8세(1483-1498)는 13세로 왕위에 올랐다. 샤를르 8세가 양육된 앙보아즈성의 성주 피에르 드 보주의 부인 안느 드 보주가 섭정을 맡게되었다. 안느는 샤를르 8세의 친 누나였다. 섭정기간 오를레앙과 부레타뉴의 귀족적 반란이 진압되면서 국왕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한편 부레타뉴공 프랑소아 2세가 사망하자 그의 딸 안느가 상속인이 되었다. 안느 드 보주는 때를 놓지지 않고 샤를르 8세와 안느공주와의 결혼을 4만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로 위협한 끝에 성사시켰다. 누나인 안느는 그 많큼 동생의 프랑스왕권을 지켜주는 커다란 버팀목이었다.
이탈리아 정복전쟁과 독일제국과의 투쟁(1494-1559)
한편 샤를르 8세는 유럽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합스부르크가와 이탈리아 전쟁(1494-1559)을 시작하였다. 이탈리아 5대공국인 로마,베니스,나폴리,밀라노,피렌체는 로디협정에 따라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여러 당파로 분열하여 상호대립을 하였다. 나폴리는 프랑스의 앙쥬가와 교황과 대립된 스페인의 아라곤가(당시 나폴리왕은 아라곤가의 페르디난드)가 왕위을 다투고있었다. 1494년 백년전쟁이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육군국으로 성장한 프랑스는 샤를르 8세가 직접 3만의 병력(스위스 용병포함)을 인솔하고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군기가 문란했던 원정군은 이탈리아를 닥치는 대로 약탈하면서 미움을 사고 있었다. 로마교황 알렉산드로 6세는 처음에는 샤를르 8세의 원정을지지하였지만 그에게 등을 돌리고 터키왕의 구원을 요청하였다. 1495년 샤를르 8세는 나폴리시민의 환영을 받으면서 나폴리의 해방자가 되었다. 프랑스군에 패배한 페르디난드공은 로마교황, 베니스, 밀라노와 동맹을 맺고 대항하자, 마침내 샤를르 8세는 막대한 전리품을 안고 프랑스로 귀환하였다. 그는 1498년 28세의 나이로 급사하였다.
샤를르 8세가 죽자 안느왕비왕의 사이에 후사가 없어 장자상속법에 따라 종형인 36세의 오를레앙가 루이 12세(1498-1515)가 왕권을 계승하였다. 루이 12세는 루이 11세의 공주 쟌느 드 프랑스와 결혼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샤를르 8세의 미망인 안느를 연모하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교황 알렉산드르 6세의 아들인 체사레 보르지아를 매수하여 쟌느와의 결혼은 루이 11세의 강요로 이루어진 것을 이유로 무효화시키고, 선왕의 왕비와 재혼하게되었다. 이들의 금술은 매우 좋았다고 한다. 루이 12세도 밀라노 공국의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제도시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강력히 대항하면서 프랑스군은 대패하고 정복한 밀라노를 다시 상실하게 되었다. 재기를 노리던 루이 12세는 오스트리아 칼 대공에게 자신의 딸을 주면서 지참금으로 부레타뉴와 부르고뉴의 상속권을 주고자 하였지만 삼부회가 이를 반대하여 수포로 돌아갔다.
이탈리아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던 루이 12세는 이번에는 스페인과 연합하여 나폴리를 분할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왕은 배신하고 오히려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한편 로마교황 율리우스 2세는 베니스 공화국을 정벌키위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베니스 함락을 목적에 두고 교황은 이탈리아 제도시세력을 규합하여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결국 1513년 프랑스는 노바라전투에서 대패하고 이탈리아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조약에 서명하고 말았다. 프랑스는 오랜 이탈리아 전쟁에서 아무런 성과 없이 패배하였지만, 샤를르 7세이후 이룩한 봉건세력의 약화로 이룩된 강력한 국민국가의 터전을 유지할 수 있었다.
1514년 왕비 안느가 공주 2명만 남겨놓고 죽자, 루이 12세는 55세의 나이로 영국 헨리 8세의 17세 여동생과 재혼을 하였지만 이듬해 병사하였다. 프랑소아 앙굴렘이 프랑소아 1세(1515-1547)로 프랑스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루이 12세의 사위이며 조카였고, 모친 루이즈 드 사보아의 교육을 받고 꼬냑과 양보아즈지방에서 성장하였다. 또한 그는 탐미주의적 낙천주의자로 모험심과 권력욕의 소유자였다. 1515년 새로운 국왕은 바야르장군을 사령관으로 2만 6천명의 용병( 6천명으로 구성된 최강의 흑색부대 포함)을 모집하여 200문의 신식 대포로 무장하고 밀라노공국을 정벌하면서 스위스와는 평화동맹을 교황과는 화해하는 재전과를 얻어냈다. 특히 프랑소와 1세는 스위스 용병에게는 연금을 지급하기로하고, 이후 스위스 경비대가 프랑스궁을 경비하게 되었다. 또한 1516년 그는 파리고등법원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메디치가 출신이었던 교황 레오 10세와의 협약을 통해 국왕의 주교임명권과 성직자의 급여를 배정하는 권리와 교황의 서임권과 봉납연수(성직자의 최초 연도의 세입취득권)를 상호 인정하는 타결책을 찾았다. 이 협약은 나폴레옹이 들어설 때까지 프랑스에서 유지되었고, 또한 재정적인 이유로 신교의 종교개혁파가 프랑스에서 패배하는 원인으로 작용되었다.
사실상 프랑소아 1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출신 막스밀리안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고 싶었다. 당시 황제는 선제후 7명(3명의 대주교,보헤미아왕,작센(섹슨)공작, 팔라티르 백작, 부란덴부르크 변경후)의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 황제선거는 황제가 죽기전에 궐위을 방지키위해 이루지고 선출된자는 로마왕으로 호칭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왕은 1519년 막스밀리안 황제의 손자이며, 스페인왕 필립의 아들인 샤를르 5세: 칼 5세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위를 다투었지만 실패하였다. 이는 호전적인 프랑소아 1세가 샤를르 5세와 이탈리아 전쟁을 하게되는 이유중의 하나가 되었다.
샤를르 5세는 합스부르크의 영지였던 스페인,홀란드, 오스트리아 대공국, 나폴리의 상속자로써 프랑스를 포위할 수 있는 가장 위협스런 존재였다. 영국의 헨리 8세는 양쪽으로부터 지원을 요청받는 입장이 되었다. 결국 영국은 프랑스를 등지고 샤를르 5세를 선택하였다. 프랑소아 1세는 황제에게 선제공격을 하여 알프스를 넘었지만 파비아에서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샤를르 5세는 그에게 굴욕적인 강화조건을 내걸었다. 즉 영국에게 노르망디와 귀엔느를 반환하고, 스페인에게는 부르고뉴영지를 할양하며, 부르봉 원수에게는 도피느와 프로방스를 양위하라는 조건이었다. 프랑소아 1세는 이를 거절하고 자신은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그의 모친 루이즈 드 사보아의 섭정이 이루어지면서, 프랑스인은 더욱 더 강력한 왕권과 국민적 통합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녀는 헨리 8세를 2백만 파운드에 매수하여 황제와의 동맹을 파기시켰다. 프랑소아 1세는 마침내 부르고뉴를 포기하고 두 아들을 마드리드에 인질로 보내면서 프랑스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소식에 프랑스인은 국왕을 중심으로 더욱 단결하였다. 교황도 스페인세력의 강화된 교회의 역할을 묵인하지 않았다. 이로써 카톨릭의 양대세력은 분열되었다. 프랑소아 1세는 반 합스부르크적인 헝거리, 보헤미아는 물론 터키와 동맹을 맺었다. 로마 교황이 이탈리아를 유린한 스페인세력을 타파시킬 프랑스군대의 파병을 원하였다.
한편 루이즈 드 사보아는 홀란드의 총독부인 마르그리트와 캄브레이 평화조약 (소위 '귀부인의 평화')을 통해 두 왕자를 구출하고 샤를르 5세와 프랑소아 1세는 처남 매부지간이 되었다. 즉 프랑소아 1세는 샤를르의 누님인 포르투갈 왕의 미망인과 결혼하였다. 이로써 프랑스는 스페인과 연합하여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또한 이탈리아 개입으로 카톨릭세력은 분열되었다.
프랑소아 1세는 르네상스의 발전을 위해 문예진흥정책에 크게 힘을 기우렸다. 따라서 프랑스의 국민문화의 꽃이 만개되었다. (라블레의 가르깅튀아도 당시 작품중의 하나이다.) 특히 프랑소아 1세 때 성장한 신흥 부르주아 도시상인들은 지리상의 발견에 따른 가격혁명과 스페인으로부터 유입된 막대한 금과 은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화폐가치의 하락과 물가의 변동에 따라 봉건적 지주의 위치도 불안하였고 새로운 도시의 부르주아세력은 투기를 통해 대토지를 소유하게되었다. 이로써 16세기 프랑스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우 심화되었다.
앙리 2세 (1547-1559)는 짧은 재위에도 불구하고 가장 유능한 프랑스왕의 하나였다. 마드리드의 유인생할을 경험한 그는 샤를르 5세에 대한 증오감으로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국왕은 이탈리아 정복을 단몀하면서 북동지역의 국경을 강화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정책목표로 삼았다. 그는 우선적으로 큰아들 프랑소아를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드와 결혼시켜 카톨릭세력을 규합하였다. 또한 샤를르 5세에 반대하는 독일 신교세력과 연합하였다. 독일이 신교제후들은 지원의 대가로 프랑스에게 메츠,툴르,베르덩의 주교영지를 제공하였다. 이로서 프랑스의 북동국경이 강화되고 로렝지방의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는 듯 하였다. 그러나 독일측은 배반하고 메츠에서 앙리 2세를 포위하였다. (당시 메츠를 구출한 프랑소아 드 기스는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한편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회위에서 통풍으로 고생하던 샤를르 5세는 황제위를 동생인 오스트리아 페르디난드 대공에게 물려주고 아들 필립 2세에겍는 스페인의 영지를 상속케하였다. 그는 스페인의 작은 수도원에서 여생을 마쳤다. 이로써 앙리 2세는 스페인과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프랑소아 드 기스가 계획한 이탈리아 원정을 승인하므로써 불행을 좌초하였다. 프랑스군는 이탈리아 사방에서 포위되고 대패하였다. 스페인 필리페 2세는 여세를 몰아 파리로 진격하였다. 앙리는 파리를 사수하기로 결심하였지만 카레로 후퇴하여 용감히 싸워 승리하였다. 그가 기즈와 함께 파리에 입성하자 프랑스인은 열광적인 환영을 하였다. (이 때 영국은 메리의 후계자로 엘리자베스 1세가 등극하였다. 그녀는 반 스페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1559년 카토 깡브레시 조약으로 스페인과의 강화협상이 타결되어, 프랑스는 메츠,툴르,베르덩의 주교령을 획득하였다. 이로써 앙리 2세의 14세 어린 딸과 필립 2세의 결혼식도 이루어졌다. 앙리 2세는 스페인과 화의를 기념하는 기마경기에 참가하였다가 불의의 사고로 근의대장의 아들 몽고메리의 창에 맞고 9일간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41세로 사망하였다.
르네상스(La Renaissance)시대의 프랑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르네상스는 16세기 프랑스 국민문화의 성장에 결정적이며 지속적인 영향를 주었다. 프랑스의 르네상스 건축은 1530년대 (아재-르-리도(Azay-le-Rideau), 슈농쏘(Chenonceaux)와 같은 루아르(Loire) 강변의 성을 통해 그 특징을 살필 수 있다. 건축물은 특히 망루, 총안, 경사가 급한 지붕을 특징을 띄고 있다. 이후 퐁땐느블로(Fontainebleau)파가 등장하여 보다 세련되고 우아한 장식미술을 발전시켰다. 특히 나무, 화장벽토, 프레스코등을 조화와 균형의 바탕하에 기교적인 수법으로 화단을 지배하였다. 16세기 중엽경에는 그리스-로마의 전통에 따른 고전주의 양식이 발달하여 프랑스의 국민문화의 전통과 결합되었다. (루브르(Louvre) 궁과 뛰일르리(Tuileries)궁)
프랑스의 르네상스 문학은 이탈리아에 갔던 인문학자들이 이탈리아 문학을 들여오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라틴어로 글을 썼지만 F.라블레(1494?∼1553?)가 나타나 프랑스어로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을 써서, 교회와 소르본(파리대학 신학부)의 교조주의 및 위선을 민망할 정도로 조소하였다. 이어 1549년경부터 p.롱사르(1524∼1585)를 맹주로 하는 플레이아드 시파가 페트라르카풍의 서정시를 창작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종교전쟁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문학은 기울기 시작하였으나, 이 어려운 시대를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에 대해서 M.E.몽테뉴(1533∼1592)는 고대의 영지를 밑거름으로 하여 3권의 [수상록]을 집필, 인간성의 본질을 추구하였다.
르네상스음악의 숨결은 14세기 프랑스의 아소, 이탈리아의 란디니 등의 작품의 감미로움 속에서도 느낄 수 있으나, 15세기의 부르고뉴 악파의 음악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뒤파이 등의 궁정 샹송은 중세의 전통을 답습하면서도 그 인간적인 정감은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15세기 말 16세기에 전개되는 플랑드르 악파의 음악으로 르네상스음악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다. 오케겜, 오브레히트 등에 의한 폴리포니기법의 개척에 이어 조스캥 데 프레의 음악, 특히 그의 미사곡에 이르러 르네상스음악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성립된다. 그 일관된 모방양식과 명확한 악절구분, 가사와 음악과의 밀접한 연결, 균형잡힌 악곡구성, 완성된 순환 미사곡의 형태, 미사 각 부에서의 정선율의 유기적인 통일과 변용, 절도 있는 정적인 표출력 등은 음악에서의 르네상스적 요소로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 후에도 플랑드르악파에서 많은 대 작곡가들이 배출되었으며, 특히 16세기 후반 의 데 몽테와 라수스의 작품은 그 강렬한 표출의욕면에서도 중요한 작품이라 하겠다. 이들 16세기 후반의 후기 플랑드르 악파의 음악작품은 뒤에 나오는 제수알도나 몬테베르 디의 마드리갈 작품 등과 더불어, 미술사상에 있어서의 마니에리스모와 비교될 만한 것이다. 플랑드르 악파의 작곡가들은 유럽 전 지역에서 활약하였으며, 그들의 성악 폴리포니기법을 르네상스음악의 국제적 양식으로 삼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파리 등 도시 시민계급의 지위향상과 더불어 샹송이 궁정에서 시민들의 가정에가지 파고들어 잔캥 등의 다성(촌토)샹송과 류트반추를 곁들인 독창샹송이 등장하였다. 또, 구디멜 등의 위그노 시편가도 독일 프로테스탄트들의 코랄과 함게 주목할 만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