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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사 강의노트(각국사 포함)
2007-10-26 05:59:48   read : 4027

종교개혁사 강의노트(각국사 포함)

중세기독교문명

중세 기독교사회의 유럽문명사적 의미 -중세 게르만 왕국의 변화  -중세 게르만 왕국의  특성(11-15세기)

 

◎봉건제의 위기

A. 14/15세기의 경제, 사회적 변동의 원인B. 14/15세기 경제, 사회변동의 결과

 

◎종교개혁이란?  

a. 종교개혁의 역사적 의미

1. 종교개혁의 의미 2. 종교개혁의 배경 i. 종교개혁의 신학적 기틀 ii 교황권의 쇠퇴와 교회의 대분열 iii 기독교 세계의 위축 3. 교회개혁의 선구자 i. 위클리프 (wycliff, 1320-84) ii. 후스 (Huss, -1415+) iii Martin Luther 마르틴 루터:(1483-1546) iv. Calvin (칼벵)의 개혁: (1509-1559) v.Zwingli (쯔빙글리, 1484-1531) * 종교전쟁과 종교회의 * 카톨릭교회의 종교개혁 (반종교개혁)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시대의 유럽

칼 5세의 시대/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발전과 쇠퇴/ 프랑스의 종교개혁 (위그노 전쟁 1562-1598)/영국의 종교개혁 *스위스의 종교개혁/ 쯔빙글리의 종교개혁/ 칼뱅의 종교개혁* 네덜란드의 변화/필리페 2세의 시대의 네덜란드/네덜란드 독립전쟁/ 네덜란드와 30년 종교전쟁/마녀사냥 15-17세기 * Maximilian I세와 강대국 오스트리아/칼 5세의 시대 /종교개혁과 오스트리아 정신적 통일의 균열/종교전쟁과 종교회의 /카톨릭교회의 종교개혁 (반종교개혁)/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발전과 쇠퇴 /오스트리아 가문의 분렬 (1543-1665)/헝거리의 변화와 발전 (1526-1690)/30년 종교전쟁/30년전쟁과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제국/30년 전쟁과 헝거리와 스위스의 변화/30년 전쟁과 네덜란드의 변화 /백년전쟁이후의 프랑스의 발전 /부르군드 전쟁/이탈리아 정복전쟁과 독일제국과의 투쟁(1494-1559)/ 르네상스(La Renaissance)시대의 프랑스

 

 

a. 종교개혁사:  강의노트(각국사 포함)

중세기독교문명

 

중세 기독교사회의 유럽문명사적 의미

 

로마제국의 멸망이후 생성된 분권적인 중세 유럽사회는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정신적 사회였다.  이러한  기독교 공동체사회는   서구 문명사적으로  최초로 종교를 앞세운 지식과 의지의 사회를  성립시켰다. 이로써 기독교 문명은 성장 발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로마제국의 문명체계은 로마시민의  의무를 결속하기위한 강력한 정신적 제도적 장치가 부재하였다.특히 의무에 대한 교육적 조직체가 전혀 없었다. 또한 전체민중의 공동체의식을 조장하기위한 강력한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매개체가 없었다 . 즉 의지의 사회를 넓히기 위한 지식사회의 폭이 협소하였다. 로마의 지배층은  권력과 재산은 물론 지식을  독점하였고,  전체 민중의 지적수준은 혼란하였다. 특히 로마제국 말기 국가를 지탱할 확고한 종교사상이 없었고 미신이 만연하였다. 결국 로마몰락의 교훈으로 기독교는  종교와 교육의 힘의 공동체로서  민중의 의지를 결합시킬 수 있다는 명제를  남겼다.

 

로마카톨릭 교회는 로마제국에서 볼 수 없었던 '계통있는 민중설교의 조직' 역할을 담당하였고, 또한 일종의 수십 개의 종합대학을 갖추고 오늘날의 메스컴 역할을  당당케하였다. 따라서 카톨릭사회는 교육에 의해서 통치되는 사회라는 근본적 인식을 가능케 하였다. 특히  -“만인으로 하여금 알아야 한다”는 공적 기능의 틀을 제시하였다. 특히 카톨릭교회는 일반 대중에게 끝없는 선전과 교육을 통해 (대학과 수도원 학교의 역할  “근대교육 국가의 건설”의 기틀을 제공한 점을 높이 평가 해야 한다.

 

중세 게르만 왕국의 변화

 

카롤링 왕조의 몰락원인은 무었보다도 9세기 초 -10세기 초 이슬람세력의 증대와 노르만족의 침입에 따른  3차 게르만의 민족이동에 기인한다.  노르만족은  프랑스와 잉글란드, 지중해지역등 전유럽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침입을 감행한 반면  이슬람세력은  지중해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하여  에스파니아, 사르디니아, 코르시카, 시칠리, 남부이탈리아 지역에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따라서 서유럽지역은  두 세력의 침입으로  분열되고, 황폐화되었다. 카롤링왕가는  독일에서는  911년까지, 프랑스에서는 987까지 명맥이 유지되었다. 결국  칼대제의 중앙집권적 통일 위업은  사후  50년도 가지 못하고  한계에 부닥치고  실패하게 되었다.  특히 9세기 이후  프랑크왕국이 분열하는 과정에서 지방분권적 요인이 강력히 대두되여 기존의  봉건적 은대지제도는 변모하였고  중앙집권을 위한  가신의 지방파견은 성사되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였다.

 

중세 게르만 왕국의  특성(11-15세기)

 

1. 카톨릭 공동체의 유럽과 봉건사회라는 새로운 사회적 틀이 체계화되었다.  역사학자 M. Bloch는  카로링의 해체이후 10세기-14세기까지의  유럽적 상황을 다음과 같은 특징으로 종합하고 있다: “국가기능의 심각한 쇠약화, 토지의존적 사회로의 전환, 낮은 생산성과 전반적 빈곤화, 커뮤니케이션의 단절, 무력감과 절망감, 장원화된 개인들의  상호의존적 인간관계.” 한편  이시기 기독교 제국으로써의 유럽은  개념적으로 구체화되었다.  역사학자 Karl Bosl의 주장에 따르면,  칼대제의 전략적 목표였던  기독교제국으로서의 유럽이라는 정신적 통일과업은  결국 실패하였다. 특히 11세기이후 황제권과 교황권을 상징하던 서임권 투쟁속에서 그 의미를 상실하였다. 유럽은 이후  지리적 개념으로 남았다. 특히  13세기이후  십자군원정과   마르코폴로의 중국여행이후 유럽은 지리적인 개념화되었다.

 

물론  중세 게르만 왕국은  지역적 왕권( koenigsherrschaft)이 바탕이된 지방영주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  그들은 9세기부터 14세기까지  황제와 교황과의 대립구도안에서  제 3세력의 중심으로 급부상하였다.  그러한  배경은  독일황제 하인리히 4세의 카놋사의 굴욕과   그레고리 교황의  아비뇽의 유수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서유럽이 해체되지 않은 결정적 이유는  중앙집권적  정치에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분권 세력의 덕택에 있었다.  사실상 9세기이후 지방영주의 강력한  대두는  유럽봉건세력의 중추세력을 담당한 셈이엇다. 이러한 지방세력들은   약화된 중앙정부, 정치권위의 사유화, 봉토의 불입권 ( immunitas)을  토대로고립된 농촌공동체를 장악하여  예속적 신분의 경작자계층(농노계층)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2. 분권적 정치질서의 제도화는 주종제(vassalage)의 확립과  농노제에 입각한 장원적 생산체제를 강화하면서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지방영주는 중세유럽의 분권정치와 장원경제의 지배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럽적 현상은  중세 일본에서도 생성되었다. 한편   게르만 왕국의  분권적 봉건제는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급진전되었지만  독일과  이탈리아지역에서는  서서히 형성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봉건제와 근대 중앙집권적 국가의 성립관계를 살펴볼 때 분권화와 예속화만이 중세유럽사회의 특징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3. 보편적 정치공동체의 이념이었던  로마제국의 이념은 명목을 유지하였다.  게르만 왕국은  962년 Otto I 대제 (936-973)의  신성로마제국의 대관으로 로마정신은 형식상 유지되었지만 (나폴레옹이 합스부르크제국을 해체하는 1806까지 존속) 실질적인 정신적, 정치적 통일세계의 목표는 이루지 못하였다.  10세기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구성원은 로마신민으로서의  통일된 국가관으로 무장될 수 없었고, 단지  기독교공화국  또는 기독교 왕국의 정치적인  신민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은  근대적 의미의  중앙집권국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제국의 넓은   영토에는 주민들이 분산되여 엷게 정착하였고, 도시는 서부와 남부에 불과 몇 개만 존재하였다. 지금의 도로의 역할은 미약하였고,  흔히 오솔길인 로마길을 따라 사람들이 이동하였다. 당시의 왕은 일정한 성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13세기 까지는 '방랑하는 왕'으로 제국을 평정하였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행정조직과 공무원제도는 실현될 수 없었고,  다만 봉건적으로 개인적인 유대관계에서 국경의 행정과 재정은 유지되어야 만하였다. 토지는 가장 중요한  권력의 상징이었고,  교육을 포함한 교회의 특권은 포기될 수 없었다.  따라서 황제권를 유지할 근대적의미의 중앙집권적 관료제, 상비군, 조세제도등은 정착되지 못하였다.  다만 중세적 장원제도에 입각한 철저한 지방분권세력에 의존하여 제국은 통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정치적 의미가  결정적으로 상실된 것은 15세기 종교개혁에 따라  유럽사회가  분열된 이후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유럽의 정신적 통합은 어느 누구도 관심 밖이 일이었다.  다만 기독교의 분열과  종교적, 교회적 변화만 가속화되었다. 따라서  황제, 교황 및 교회의 보편주의는 결정적으로 붕괴되었고  지방분권적, 민족적 다양성과 관련된 공통의 문화와 문명의식이 성장하게 되었다.

 

4. 중세유럽의 정치문화의 특징은 보편주의와 지방주의의 대립에 있었다.  교회권력과 국가권력의 대립  또는 교권과 속권의 대립은  유럽중세 전반에 걸쳐 유지된 이원적 구조이다.  이러한 이중적 구도는 그리스도교가 대변한 로마,라틴제국의 이념과 왕실 및 봉건영주를 대변한 지방배타주의에서 그 특징적인 상호관련성을 잘 이해 할 수 있다.  두개의 보편주의인  교권과 속권은 상호 대립과  타협을 통해 중세의 역사적인 흐름을 가늠하였다.  역사학자  Kohn과  J. Huizinga등도 이에 동의 하였다.  '기독교적 유럽의 정치적 전개는 이중적 기초위에서 시작되었다.  즉  보편적인 기독교적 세계공동체 이념을 표방하며, 성격에 있어서는 야만적인 게르만적이며, 전통에 있어서 로마적인 여전히 불안정한 권력체계라는 현실이 그것이다.”

 

근대유럽의 성립배경

 

14/15세기에 걸쳐 중세사회는 중추적인  경제적 기반(장원제도)이 동요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중앙집권적 국민국가가 에스파니아, 프랑스와 영국에 성립되었다. 이시기 정신적으로는 중세적 세계관이 붕괴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여 교황중심의 카톨릭세계는 쇠퇴하였다. 즉 중세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근대요인이 과도기적 형태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다.

 

◎봉건제의 위기

 

A. 14/15세기의 경제, 사회적 변동의 원인

 

13세기는 경제사회적인  쇠퇴기이다.  전체적으로 인구증가에 따른 토지부족으로 인한  낮은 토지의 생산성의 한계와  농민의 빈곤화와   경작지축소를 유발하였다. 또한 전쟁과 천재지변에 따른 극심한  기아와 질병은  인구감소에 따른 노동력부족으로 상황은 악순환되었다. 게다가   귀족의 사치와  수입초과를 통한  국가의 재정적 위기는 14세기 초에 발생한  위기 상황을 대변하는 악조건들이었다.   14세기 초 (1315-17)의 위기는 천재지변 -특히 가뭄과 홍수-에 따른 재앙의 결과였다.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인한  기아와 전염병은 급기야 유럽인구의 10%가 희생되었다.  이러한 위기에 따라 소득분배의 문제는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의 대립양상으로 나타나  중세사회는 일종의 농민반란의 조짐을 보였다.    더욱이  흑사병의 창궐 (1348/49 콘스탄티노플에서 전파)은  지중해 전지역과 영국까지 미쳐 유럽인구의 30%이상이  감소되고 -일부지역은 도시의 50%가 사망하였다, 이러한  비극은 이후에더   간헐적이지만 지속되어 전유럽은 흑사병의 공포에  휘말렸다.(14세기 말, 15세기 초까지)

 

B. 14/15세기 경제, 사회변동의 결과

 

계급투쟁으로 나타나  14세기 말/ 15세기 초 전 유럽적 농촌 및 도시에서의 반란이 지속되었다. 특히  빈민층에 대한 과대한 인두세 요구는 직접적인 봉기의 도화선이되었다.(예: 카탈로니아,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   농민반란에 따라  노동력은 심각하게 부족하였기 때문에  농장 경영방식의 변화가 요구되었다. 따라서  현물지대를 받고 직영지를 임대하는등 장원제가 곧 붕괴될 것을  예고하였다. 종합적으로  인구감소와 노동력감소는  장원탈출이라는 농노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예) 영국남부에서는  식량수요의 감소에 따라 곡가는 40%이상 하락하고  임금은 2배나  상승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농민층의 봉기와 마찬가지로  도시지역에서도 피지배층의  반란은 계속되었다. 도시의 시민층은  도시귀족들 만이  행정권을  독점하는등 이에  반발하였고,  특히  신분 상승을 목표로  도시빈민층의 반란이 일어나   수공업 길드의 자율권 및 도시행정의 참여와  독자적인 사법권등을 요구하였다. 

 

◎ 종교개혁이란?  


16세기에 독일의 마르틴 루터와 스위스의 캘빈과 쯔빙글리를 중심으로 일어나 유럽전역으로 확산된  프로테스탄티즘의 기독교 개혁운동이다.  또한 이러한 변화에 대항하여 가톨릭교회가 자체적으로 추진한 제도의 정비와 새로운 조직을 추진한  반종교개혁도 포함시킬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 운동은   로마 교황을 정점으로 한  카톨릭 교회의 중세적 교리와 현실적 권력을  비판하여 성서제일주의와 만인사제주의를 목표로 참다운 기독교정신을 구현하려던  개혁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의 역사적 의미

 

종교개혁운동으로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사이에는 약 150여년간 크고 작은  종교 전쟁이 계속되었다. 보헤미아 후스당의 반란과 독일 농민전쟁,  네덜란드 캘빈파 신교도의 독립 전쟁,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 독일제국의 30년 전쟁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17세기 30년 종교 전쟁이 종료되었을 때 유럽은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을  의미하였다. 물론 루터와  캘빈등의 노력은 컷다. 종교개혁은 역사적으로 중세로 부터의 진정한 탈출과 근, 현대로의 출발점이다. 즉  중세와의 단절을 통해서  특히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통해서  교황과 황제의 세곡적인 정치권력은 무력화되었다. 합스부르크가의 신성로마제국은 오스트리아제국을 의미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평등한 주권국가의 새로운 원칙이 적용되여  근대국가체계가 유럽에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종교개혁의 원리는 당시 예상치 못한 후세의 개인주의 및 과학적 합리주의의 성장원인이되었다. 또한 봉건제로부터 초기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의 윤리관계를 살펴보면  켈빈파와  청교도파의 노력은 지대하다. 종교개혁은 무엇보다도 개인주의에 뿌리박고 있다. 루터의 ; : 만인 사제주의와  켈빈의 교리인  선민의 교의가 그러하다. 그들이 예상치 못한 역사적 전환점은  계몽사상에 입각한 서구민주주의를 통한 인간해방의 길을 모색케 한점이다.  따라서 개인주의는 광명의 시기와  계몽의 시기를 통해 발전해 나갔다.  또한  종교논의는 민중 속으로 확대되어  민주주의의 길을 열었다.

 

 1. 종교개혁의 의미

 

종교개혁은 르네상스와 서로 영향을 주면서 즉 상호보완적 역할 속에서  근대서구문명의  정신사를 형성케한 실질적 주체로써 역사적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근대시민사회의 성장에 결정적 영향을 주고 특히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을 만들어 커다란 2개의 중심지주이다. 즉 계몽사상을 엮어낸  날줄과 씨줄의  역할을 하였다. 대체적으로 문화사적 측면- 특히  근대사상적 측면에서 보면 종교개혁보다 르네상스에 보다 큰 의미를 줄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종교개혁자들른  중세적 요인이 남아있는 보수주의자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핵심이  정신종교사의 측면에서 당시 고유한 문제에 관한 개혁이었지만, 종교개혁의  원리가 이후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보다 큰 영향을 주었던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즉 종교개혁이 단지 기독교 내부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당시 예상하지 못한  서양 문명의 발전 동인이 되었다는 세계사적인 역할에 보다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

 

2. 종교개혁의 배경

 

i. 종교개혁의 신학적 기틀

 

중세 전체를 떠받쳤던 기독교 신학과 철학사상으로  성 아우구스티누스 신비주의 신학 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변증법적 신학을 탈피하고자 한 시도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종교개혁이전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은  중세 모든 사조의 통일체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의 사상은 자연과 신의 은총, 이성과 신앙, 지식과 신비, 자유와 권위등 2분법적인 요인들을  그의 사상체계에서 변증법적으로  종합한 것이었다. 이러한 교리는 특히  무조건적인 권위의 승인과 신앙과 이성에 대한 변증법적인 태도는 13세기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학자들이 중심이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2중진리설에 입각하여 신학자 Occam는 유명론을 통해 '신의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형식적인 논리나 이성이 아닌 신앙자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논지는 '교황, 황제지상권은 역사적 산물이며, 참다운 진리는 성서에 있다'로 신학자에 의해 해석되었다. 따라서 과거의 신학에 대한 회의 및 비판정신이야말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였다.

 

ii. 교황권의 쇠퇴와 교회의 대분열

 

장기적인 중세 교회와 군주 및 제후간의 대립은 교회에 대한 근본문제에 대한 - 특히 교리와 교의문제 그리고  서임권문제등- 불만과 비판은 증대되었t다. 특히 비판세력은  14-15세기 농민 및 도시 반란에 가담하여 교황권을 약화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14세기 교회의 대분열은 십자군운동의 영향으로 가중되어 교황권은 균열되고 위신이 추락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필립4세는  국왕의 성직임명권을 주장하여 로마교황 보니피치우스와 충돌하였다. Unam Sanctam(우남상탐): 교황이 국왕보다 우위를 주장하였지만 결국 필립에 의해 교황은 교황청에서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교황청은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지고  국왕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70년간 아비뇽의 유수시대를 맞고 1376년에 비로서 교황 그레고리 9세가 로마로 귀환하였다.

 

또한 교회의 대분열에 따라  수차례 교황선거제도 자체가  무효화 되어 교황세력은  양대진영 또는 3파전의 양상으로  나뉜 교황이 출연하였다. 1409년 피사의 종교회의는 양대진영의 교황을 무시하고   제 3의 교황 알렉산더 5세를 선출하였다. 이러한 극심한 혼란속에서 교황청의 세속화는 종교개혁의 주요한  원인중에 하나가 되었다.

 

iii. 기독교 세계의 위축 (300년)13세기 초-15세기 말:  

 

13-15세기에 걸친  몽고 및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의 서진으로 기독교세계는 큰 위협과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몽고계통의 유목민의 전성기에는  거의 전 세계를 지배하였다. (중국, 한국, 인도, 페르시아, 에집트 및 북아프리카, 발칸 및 동유럽, 러시아등)  특히 오스만 터키세력은  동 지중해의 재해권을 거의 장악하여  1492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시켜 동로마제국을 해체하였다. 또한 1529년 오스만세력에 의해 오스트리아  비인이 포위되고, 신성로마제국의 칼 5세가  술탄에게 조공을 바치는 수모를 겪어야 만했다. 1571년 레판토해전에서  승리하여  합스부르크의  명맥을 겨우 유지하였다.

 

3. 교회개혁의 선구자

 

i. 위클리프 wycliff, 1320-84

 

그는 영국 프로테스탄트의 시조 역할을 하였다. 그는 중세 카톨릭교회의 권위를 비판하여  인간과 신의 직접적인 관계를 주장하였고,  특히  성서에 바탕을 둔  신앙만이 유일한 기독교정신임을 강조한  교회개혁의 선구자였다. 또한 위클리프는  성서를 최초로 영어로 번역하였고, 이후 보헤미아 농민반란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한 후스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그의 시신은 화형에 처해졌다.

 

ii. 후스 Huss   (?-1415+)

 

그는 1396년  프라하 대학교수로  1412년  파면당한  '행동하는 양심 있는 자유지성인'' 자유양심의 순교자'로 (위클리프 옹호론자였다. 그는  1415년  산체로 화형당하였지만  종교재판에서 자신의 오류를 결코 인정치 않아 루터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그는 사후에도 농민반란의 성격을 띈 보헤미아 후스당의 반란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1420년이후  교황은 5차에 걸쳐 십자군원정을 통해 후스당의 반란을 진압케 위한  칙령을 발표하였지만  후스당의 저항은 격렬하였다.  당시  십자군은  대다수 범죄자, 부랑아출신의 용병으로 구성되어  잔학무도했고, 일확천금의 전리품에 관심이  많은 오합지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 보헤미아군의 반격에 자멸되었다. 이러한 후스당의 반란은 15세기 농민반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대체적으로 종교적 반란은 특히 14세기 페스트창궐 이후, 봉건제에 대항한  농민전쟁이었다. 따라서  성격은 종교적이었으나, 실질적 원인은 경제적 원인이 더 크다. 1463년  바젤종교회의를 통해 보헤미아 후스당 교회는 카톨릭과 다른 점을 인정받았고, 16세기 독일 종교개혁시까지 자유가 보장되었다. 후스는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iii. Martin Luther 마르틴 루터:(1483-1546)

 

그는 독일 최고의 종교개혁자이며 신학자였다. 그의 논지는  교회나, 종교회의의 과오와  실수를 지적 비판하고  성서의 증거에 의한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농부의 아들, 광부의 아들”( 아버지는 농촌출생 후에 광산촌에서 출생)이었다. 청소년시절  Augustinus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원에서 계율공부를 하여, “오로지 신앙만을” 저서 발표하는 등 낡은 형식을 타파하는 새로운 교의의 발견에 노력하였다.  이후 루터는  신학박사가 되어  비텐부르크대학에  신학교수로 재직하였지만 로마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다.

 

당시  마인쯔대주교 알브레히트는 자신의 성직임명을 위해 교황 Leo 레오 10세에게 막대한 뇌물을 받쳤는데,  이를 위해  Augusburg 아우구스부르크 Hugger 후거가로부터 큰 빚을 졌다.  그는  빚을 갚기 위해 면죄부판매를 단행하였다.  루터는 이에 항의하여 '죄를 용서하는 능력은 교회가 아닌 하느님에게만 있다'는 내용을 포함한  95개조 항의문을 작성하여 교회에 내걸었다. 그날이 10월 31일이었는데  현재의  종교개혁 기념일이 되었다. 또한 그와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은 유명하다. 그의 보름스 종교재판을 살펴보자.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가 열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칼 5세가 루터를 직접 심문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여기 놓인 책이 당신의 저서인가? 이를 취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루터의 대답은 Nein(No)였다.  후세에 Caraleil 카알라일은 '전유럽은 그의 이 말에 떨었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사회학자 Max Weber 막스 베버도 이를 루터의 ' 내면적 권위'라고 평하였다.

 

루터는  칼5세의 칙령에 의해 추방당하지만 신성로마제국황제는 루터를 단죄시키는데  필요한 제국의회의 동의를 구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후 루터는 작센 선제후의 성으로  은신하고, 루터파 제후의 보호아래 종교개혁 작업과 독일어로 된 신약성서 저술에 몰두하였다.  루터파 농민반란(1523-25)은 봉건적 질서에 대항한  생존권 투쟁이었다. 특히 이러한 집단반란은 1524년 독일 동부지역 튜링엔지역으로부터 시작되여 남서부 여러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공동 강령으로 '12개조의 요구서'를 채택하여 강력한 대항을 결의하였지만 반대파 카토릭세력인 슈바벤에 패하고  내부적 분열되어  1525년에 완전히 진압되었다. 한편 농민전쟁을 통해 루터파 기삿이이로써 농민들은 다시 봉건적 지배에 굴복하고 중소 영주의 정치적 세력도 저하되었으며, 독일은 연방 군주에 의한 절대주의 체제가 강화되었다. 루터 스스로는 농민반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결국 1544년  스파이어 종교회의에서 루터파를 승인하였다. 루터는  1546년 고향에서 사망하였다.

 

iv. Calvin (칼벵)의 개혁: (1509-1559)

 

칼벵은 “엄격한사람, 인문주의적 교양인”이었다. 그는 1509년 프랑스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대학교육을 통해 인문주의자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캘빈의 학장 취임연설과 관련  프로테스탄트적인 내용이 문제가 되어 국외로 망명하였다. 그는 1541년 스위스 쥬네브에서의 설교자가 되어 자신의  칼벵주의 복음을 전파에 몰두하였다. 그의 주제는  엄격한 금욕과  청빈생활을 바탕으로한 기독교신앙이었다.  캘빈는 제네바(쥬네브)대학을 설립하여 교육과 신학발전에 노력하였다.

 

그의 교리는 중심주제는  신의 절대권력과 인간의 자유와의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는  십계명의 해석으로부터 출발한다. 또한 그는  신조문제, 삼위일체설 및 부활론등을 해석하였다.  그의 논지는 “선민의 교의”로써   “구원은 신앙에 의해서만 구할수 있다”라는 주장이다.  '기독교강요'를 통해  켈빈 자신의 종교개혁의 신념을 포괄적, 논리적으로 해명하였다. 특히 교회법의 중세적 개념을 수정한 점등은 루터파보다 진보적이며, 창조적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그는 1549년 츠빙끌리파와의 협약에 의한 쮸리히 협정을 맺고 스위스 프로테스탄트의 통일을 이뤄냈다. 또한 캘빈파는 북서부독일(부란텐부르그 지역등)에 확고한 뿌리를 내렸고, 또한 프랑스의 위그노파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영국의 스코틀란드의 장로파에 영향을 미쳤다. 영국에서는  카톨릭에서 분리한 국교파와 칼벵주의의 대립은  이후 청교도주의(퓨리턴이즘)이 생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649년 크롬웰등  퓨리턴혁명에도 칼벵주의적 청교도정신은 녹아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종교전쟁을 거쳐  칼벵주의 국가로 독립 성장하였다.

 

v. Zwingli (쯔빙글리) 1484-1531

 

그는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신학공부를 전공하였고, 루터의 영향으로  카톨릭교리를  부정하고 신약성서에 입각한 교의를 주장하였다. 그가 쮸리히의 목사로 재직하면서  1523년에는 67개의 논제로 600명과의 토론을 통해 성서는 교회와 무관히 존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스위스 종교개혁파을 선도하였다. 쯔빙글리는  루터와 칼벵의 중간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그의  성찬에 관한 해석을 살펴보면,  루터는 신비적 의의를 강조한 반면  그는 단순한 기념행위로 인식하였다. 그는 종교전쟁인  카펠전투에서 전사한다. 후계자 볼링거는 이후 칼벵파는쮸리히 협정:1549을 통해 스위스 개혁파를 통합시킨다.

 

종교전쟁과 종교회의

 

루터파 농민반란(1523-25)과 스파이어 종교회의(1544) 이후  독일영방의 제후들은 양대진영으로 나뉘어 루터파와 카톨릭파 동맹에 가담하였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합스부르크가의  카알 5세는 제국과 로마교회의 정신적,  정치적통일을 목표로 신교세력의 탄압을 강화시켜 나갔지만 신교세력의 저항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한편 카톨릭교회만 참가하는 장기적인 Trient (트리엔트) 종교회의 (1545-63)가 진행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프로테스탄트세력의 확대에 저지키 위한  카톨릭의 자체개혁이었다. 그러나 단지 복음주의에서 탈피한  의미가 있었고, 가협정으로는  부분적으로 프로테스탄트를  인정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Augusburg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회의(1552년)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일종의 신구교의 종교화의를 통한 평화조약을 뜻하였다.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우선적으로 독일제후와 모든 자유도시는 그 통치하에 있는 주민이 카톨릭과 루터파중에 하나룰 믿도롤 택일할 권리를 인정하였다.  즉 '지배자의 신앙이 지배지의 신앙이다'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주민은  그들 제후의 의도대로 카톨릭 또는 신교 둘중 하나를 믿어야만  되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결정은  제후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독일 국민국가의 형성에 절대적인 저해요인이 되었다.  독일 제국은 300여개의 크고 작은  분렬된 영방국가로 자리매김을 확실히 하게 된다. 종교화의 이후 1570년까지 3차에 걸친 종교전쟁은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지역적 제후들의 권력싸움으로 발전하였다. 결과적으로 독일의 중북부지역은 루터파가 중남부지역은 카톨릭이 우세하게 되었다.

 

카톨릭교회의 종교개혁 (반종교개혁)

 

중세 카톨릭 교회의 세속화현상은  재정난등의 이유로  교회의 중앙집권화를 목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인문주의 성직자의 등장으로  교회법의 개정되고 교회개혁위원으로 추기경의 권한은 대폭 강화되었다. 한편  프로테스탄트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과오와 실패는 반종교개혁운동으로 나타났다. 이는  로마카톨릭 교회의 회복현상으로 16세기 전반의 프로테스탄티즘의 높은 파고를 저지한 의미가 있다. 에스파니아와  이탈리아의 수도회를 통한 엄격한 개혁실천운동으로 금욕주의와 주지주의로 무장하였다. 특히 이에따라 칼멜수도회(데레사수녀)에서 이탈한  30개의 수녀원을 창설되었다.

 

대표적인 반종교개혁운동으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예수회가 있다. 그는  예수회 수도원장으로 계율 성직자 수도회를 이끌어 나갔다. (1541-56) 예수회는   군대와 같은 엄격한 조직체로써 선교에 관한한  교황에 절대복종하여야 했다.  주요한 선교의 사명은  설교, 종교교육, 고해등으로  민간신앙의 확대가 목표였다.  트리엔트공의회(1545-63)를  통해 인가되었고 카톨릭 개혁운동의 주도세력이 되어 카톨릭교 쇄신운동을 이끌었다. 1540년 예수회가 창설된 이래 수도회의 슬로건은 '정신의  복종” (속세를 떠나 수도원에서 금욕생활)이었다.

 

또한 예수회의 조직기반은 급진적으로 확대되었다.   수백명의 전도사가  전도사업을 위해   아프리카, 부라질, 인도, 동인도, 일본등  극동으로 떠났다. 그들의 교육영역은  학교설립과 교사양성이었고  특징적으로 고된 훈련과 완전주의를 표방하였다. 이들은 10년간의 훈련기간을 거쳐 철학, 신학, 수학, 라틴어, 그리스어, 헤브리어, 수사학, 고전교육을 이수한  후 교편생활을 하였다. 특히 수많은 시험제도, 감독과 단련을 통한 극기훈련과 인문주의적 방법을 채택하여 17세기 예수회는 전유럽의 실질적 카톨릭 교육을 담당하였다.

 

한편 예수회의 반종교개혁적 역할로 종교전쟁을 통해 카톨릭에서 이탈한  폴란드, 남부독일,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헝가리, 보헤미아가 카톨릭으로 다시 복귀하였다. 또한 예수회의 활동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 전교를 통해  개종사업에 성공하였다. 특히 기독교와 각 지역의 풍습을 접목시키는 방법을 인정하였다. 따라서 힌두교지역에서는  육식이 금지되고, 중국에서는 마테오리치등이  중국옷을 입어야 했고  조상숭배도 허용되었다.  또한 이단과의 투쟁을 위해  카톨릭의  예술가(미술, 건축, 공예)를 동원하여  마리아 우상숭배의 비판한 개신교도를 선교하였다. 예) 엘 그레코의  마리아를  찬양하는 회화. 삼위일체의 교의를 강화하는  미켈란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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