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시각으로 본 서양 건축사
Ⅰ. 서론
대부분의 인간은 병원, 학교, 주택, 사무소, 교회와 같은 인간이 창조한 공간에서 태어나서 생활하고 일을 한다. 이렇게 인간이 창조한 공간을 우리는 건축(Architecture)이라 부른다. 우리의 건축은 인간이 어떠한 삶의 형태를 요구하느냐에 따라서 그 요구에 맞는 각기 다른 기능을 지닌 많은 종류의 건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건축은 우리 삶의 다양한 사회?경제?철학적인 면을 긴밀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고고학자와 인류학자들은 오래전에 존재했던 문명들은 그 시대의 건축물의 유적과 출토된 도구, 그릇 등만을 근거로 세부까지 상세히 묘사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 지중해연안, 중북부유럽 문화권은 서로 관계를 지니면서 세계의 건축문화를 선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서양의 고대 문화권중의 서양의 건축문화는 세기를 지나면서 일관성 있는 건축원리, 조형의 규칙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 이러한 특성은 객관성과 합리성을 근거로 주도적으로 나타냈으며 18C 산업혁명을 계기로 전 세계의 건축문화를 주도하는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Ⅱ. 본론
1. 원시시대
①구석기시대
원시시대의 건축은 주거가 가장 중요한 대상이었다. 당시의 구체적인 주거의 형태를 알 수 없으나 대략 바닥이 있었을 뿐 벽이나 천정은 없었다고 보아야한다. 당시 자연의 동굴이 인간의 주거로 이용되기 시작했는데 동굴주거는 유럽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대체로 구설기시대의 동굴주거에서부터 수혈주거로 발전되어 왔다.
②신석기시대
농경문화와 더불어 인간은 자신의 운명이 일정한 섭리와 의도를 지닌 어떤 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의식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관념을 낳게 되고, 마침내 인류문화는 이제 정령신앙과 영혼 숭배의 단계로 접어든다. 종교적인 신앙과 의식의 발전은 종교적인 예술의 발전을 가져오고, 예술은 종교적인 예술과 세속적인 예술로 이분화 된다. 종교적인 예술은 초현실적인 세계가 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경험세계를 담은 세속적인 예술과는 달리 자연히 정신적인 것, 추상적인 것으로 기울면서 양식화 되고 이상화된다.
신석기 시대에 만들어진 많은 고인돌과 선돌들은 이러한 종교적 문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하고 우뚝 솟은 돌로 이루어진 인류 최초의 건축물들은 기원전 5천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서도 영국의 「스톤헨지」(기원전 2천 년경)는 신석기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거대한 돌덩이들을 원형으로 배치한 이 구조물은 수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일종의 묘나 종교적 구조물로 추정된다. 특히 배치구조가 하짓날 해와 달이 뜨고 지는 방향과 나란히 일치한다는 점에서 천체 관측용으로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되기도 하지만, 당시로서는 이렇게 거대한 공사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힘은 종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많은 연구자들은 이 구조물이 태양이나 하늘 숭배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2. 이집트
이시대의 건축은 석기시대의 목조건축에서 시발하여 석구조가 기본이 되었다. 예술가들이 많은 재능을 기울인 분야마다 불멸성에 대한 관념이 중요했던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중시함으로서 미라가 거주할 장소에 대해서도 건축역사상 독특한 분묘형태인 피라미드를 탄생시켰다. 피라미드는 완이 사후에 거주하는 장소로 권력의 규모에 따라서 그 크기가 결정될 만큼 종교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집트 건축의 특징은 그 재료가 나일 강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갈대나 파피루스 종려가지등과 점토를 함께 사용하였으며 목재는 고급건물에서만 사용된 것이 특징이다. 석조는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았으나 피라미드, 스핑크스, 오벨리스크 등 기념비적인 건조물에 다수 사용된 점이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피라미드는 기원전 2770년에 처음 건설되었으나 피라미드 하나를 건설하기 위해 약 20동안 10만 명의 인력이 동원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481피트의 높이에 2.5~15톤의 무게인 200만개 이상의 석회석 덩어리가 사용되었다.오로지 사람의 힘만으로 흙으로 된 경사로로 올려져 제 위치에 쌓아올려졌다.
피라미드는 종교?정치적으로 중요했다. 신성한 파라오들의 무덤이기에 파라오의 권력이 강할수록 무덤 또한 거대해야 했다. 국가를 대표하는 존재이기에 피라미드는 지배자들의 영광을 드높여 주어야 했고 이집트 국가의 힘이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이념을 고양시켜주기도 했던 것이다.역사상 최초로 건축가라고 할 수 있는 임호텝(Imhotep)이라는 사람에 의해 설계된 초기의 피라미드 형태를 잘 보여준 사카라의 계단식 피라미드(B.C 2750년경), 치밀하고 엄격한 통일성을 지닌 기제(Gizeh)의 피라미드(B.C 2700년경), 바위산을 배경으로 자연구조를 잘 이용하여 건축된 핫셉수트 여왕의 분묘신전(B.C 1500년경) 많은 피라미드들은 당시 인간이 지니고 있던 두 가지의 욕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안전과 안정, 자기방어에 대한 욕구와 갈망을 나타낸다. 이러한 의미와 가치에 의해 비록 인간 역사초기의 건물이지만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축은 문화적 업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3. 그리스
서양건축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 건축은 서양합리주의 건축의 기원으로서 역사상 서양의 건축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성지를 장엄하게 꾸미고자 하였다. 범그리스 성지들은 각 도시국가들이 좀더 장대한 것을 기부하려고 경쟁하면서 그 규모가 커지게 되었고, 성지들 사이의 경쟁도 이를 더욱 부추겼다. 또한 도시국가들은 자신들만의 신전이나 보물 창고들을 지었는데, 화려한 신전을 지어 바친다든지 전승 기념물이나 전리품을 전시한 보물창고는 그 자체로 도시국가의 부를 과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전건축은 기원전 8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경이로울 정도로 발전했다. 흙벽돌이나 목재로 지어졌던 신전이 석재로 바뀌고, 편편하던 지붕이 맞배지붕으로 바뀌는가 하면 열주가 들어서면서 그 리스 신전의 기본형식이 갖추어진다. 그리스 예술의 주된 특색 가운데 하나인 신인동형주의는 건물의 인간적 규모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인들은 기둥의 크기나 높이에 인체 비례를 적용시키는가 하면, 신전이 위압감을 주지 않고 무거워 보이지 않으면서도 균형미를 갖도록 여러 가지 배려를 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신상을 보호할 거처를 위해 신전을 건립했는데, 종교적인 의식과 절차들은 신전 정면바깥에 있는 제단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시각적 효과를 고려해 내부보다는 외부에 중점을 두고 건립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신전 주위로 열주를 둘러 세움으로써 신전들이 네 면 모두가 똑같이 인상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열주가 둘러싸는 건축 양식을 '페리스타일(peristyle)'이라고 한다. 그리스 신전 건축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인 이 원주는 이집트에서도 활발하게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그리스에 와서 본격적인 양식으로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원주들은 수평의 엔테블러쳐를 떠받치는데, 원주와 엔테블러쳐는 도리아식(Doric order)이나 이오니아식(Ionic order)으로 설계되었고, 이 양식들은 신전 건축에서 약간의 변형이 가능하기 했지만 반드시 지켜야할 건축적인 '규칙(Oder; 명령)'이 되었다. 도리아식은 힘차고 간결하며 중후하고 견고한 구성이 특징적이고, 소용돌이 모양이 주두를 가진 이오니아식은 우아하고 경쾌한 느낌이 들게 한다. 기원전 5세기말에는 주두를 아칸서스잎 모양으로 장식한 코린트식(Corinthian)이 등장해 헬레니즘시대에 많이 사용되었고, 특히 로마시대에 각광을 받게 되었다. 기원전5세기 그리스 문화의 황금기에 세워진 「파르테논 신전」(기원전 448 ∼ 432년)은 아테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나 여신에게 바쳐진 것이다. 익티노스(Iktinos)가 신전 건설을 주관하고 페이디아스(Pheidias)가 총감독을 한 이 신전은 조화와 균형을 추구했던 그리스인들의 이상이 잘 구현된 건축으로 단순하면서도 장엄하고 전체적인 조화가 돋보이는 고전시대 건축의 정점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 신전은 기하학적 비례를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재조정함으로써 큰 규모에 비해 육중한 느낌이 덜 들게 하고, 착시현상을 이용해 시작적인 안정감을 추구하고 있다.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건축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신전은 오늘날까지도 안정감과 영속성, 권위를 상징하는 건축의 기본 양식을 제공하고 있다.
4. 로마
그리스 예술이 이상주의를 지향했다면 로마 예술은 현실주의에 입각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인들이 사상과 예술에서 추상과 일반화를 즐겨했던 반면, 로마인들은 그들 자신이 현실적이며 실용적이었듯이 실제적인 것을 선호하였다. 로마가 예술사에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 것 가운데 하나는 건축 분야인데, 건축은 실용성을 바탕으로 한 예술형식이다. 신전 건축에서도 이러한 실용성이 엿보인다. 그리스 신전은 3층 기단 위에 세워진데 비해, 로마 신전은 높은 축대 위에 우뚝 솟은 모습으로 세워졌다. 그리스 신전은 동서남북에 모두 계단이 있는 개방된 형식이었고 이 네 측면 모두가 서로 닮은 모양이었지만, 로마 신전에서는 계단과 현관으로 된 정면만이 강조되었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측면이나 후면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로마 건축은 다른 고대건축 양식과는 달리 내부공간을 주요한 건축요소로서 이해했고, 아치와 이를 이용한 둥근 천장(궁륭/볼트 vault)을 미적인 구조 원리로서 받아들였다. 아치는 오리엔트나 그리스에서 문, 복도, 하수도 등 비교적 작은 구조물에서 적절하게 사용되었던 것이나, 로마인들은 이 아치를 본격적으로 도입해 대규모 건축물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치는 공간을 잇거나 구성하는데 안성맞춤이 어서 일반 세속 건물에 많이 이용되었다. 로마의 위대한 건물들은 아치와 볼트의 공학적 원리 이외에도 특히 콘크리트 같은 새로운 건자재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콘크리트의 사용으로 원통형 궁륭의 지붕과 같은 유연한 디자인이 가능하게 되었고, 받침대도 없이 거대한 내부 공간을 덮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건축으로부터 그들이 좋아하는 요소들을 따와서 그들이 필요에 알맞게 적용시켰는데, 그대표적인 예가 「콜로세움 (Colosseum)」이다. 이 원형경기장은 로마 시민들에게 오락을 제공할 목적으로 서기 80년경 티투스 황제 때 건립되었다. 건물의 외벽은 로마식 기본 구조와 그리스적 우아함을 결합시키고 있다.4개의 층으로 구성된 외벽은 로마식 아치에 그리스 신전에서 사용되었던 세 가지 기둥양식을 각 층마다 달리 적용시키고 있다. 이는 그리스적 우아함을 가미하면서, 건물의 엄청난 규모가 보다 축소되어 보이도록 하기 위한 고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는 궁륭과 계단을 이용해 원활한 왕래가 이루어지도록 하였고, 내부는 그리스의 극장을 응용해 튼튼하고 실용적인 구조로 설계되었다. 콜로세움은 이 시기에 아치 기술의 숙달과 콘크리트의 사용으로 인해 점차 대담한 설계가 가능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아치 기술의 발달과 콘크리트의 사용은 토목과 건축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거대한 다리나 수로교의 건설이 가능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이를 이용해 돔(dome)이나 볼트로 된 천장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건물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판테온(Pantheon)」(118 - 125년경)이다. 로마인들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판테온이라는 호화로운 건물 하나에 행성들을 관장하는 일곱 신을 모셔놓는다. 이 고대 신전은 일찍이 기독교 성당으로 전용된 덕분에 로마 건물 중에서 그나마 가장 양호하게 보전 될 수 있었다. 이 건물은 원통형 벽체에 거대한 돔을 얹는 새로운 구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부는 건축 역사상 가장 놀라운 공간적 위업의 하나로 손꼽힌다. 신전의 높이는 내부 직경과 동일하고, 하늘을 상징하는 돔은 정확한 반구형으로 되어있는데, 돔 한 가운데에는 채광을 위한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다. 이 건물은 구조적 안정성과 조화로운 내부공간, 그리고 장엄함에서 후세의 많은 건물들에 영형을 미친다.
5. 기독교(초기기독교시대)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공공이 예배장소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로마의 신전은 우상과 박해에 대한 기억 때문에 기독교의 예배 장소로 적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독교 교회는 고대의 신전과는 그 기능이 전혀 달랐기 때문에 그 구조 역시 달라야 했다. 고대 신전의 내부는 흔히 신상을 모셔놓은 작은 성소로 이루어져 있었고 제사나 의식은 건물 밖에서 행해졌다. 반면 기독교 교회는 사제가 미사를 오리거나 설교를 할 때 모든 신도가 들어갈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시장이나 재판소 등 공공장소로 이용되던 '바실리카(basilica)'라고 하는 커다란 공회당을 빌려 사용했다. 그러다가 바실리카를 개조해 교회로 사용하기도 하고, 이 바실리카 형태를 본 따 새로운 교회를 짓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기독교 건물들은 고대의 신전과 달리 외부의 효과는 전적으로 무시하고 내부의 기능을 강조하는 단순한 형태로 지어졌다.
초대 교회인 옛 「성 베드로 대성당」(330-390)은 바실리카 형식의 전형적인 교회이다. 이 교회는 바실리카를 응용하면서 전체적인 평면이 라틴 십자가의 형태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또 앱스(apse; 내진 또는 후진)를 해가 뜨는 동쪽에 두고, 신자들이 예배를 보는 공간인 신랑(nave)의 높이를 측랑보다 보다 높게 하여 신랑벽 위쪽에 난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도록 설계되었다. 이러한 바실리카 형식의 교회는 후에 기독교 교회의 구조적 기반이 된다.
6. 비잔틴
오늘날 볼 수 있는 초기 비잔틴 양식의 예술은 8세기에 일어난 성상파괴운동의 영향으로 콘스탄티노플이 아닌 주로 동로마의 외각 지역에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 북동부 라벤다에 위치한 비잔틴 성당들은 초기 비잔틴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로마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간 후, 서로마는 게르만족의 위협 때문에 수도를 라벤나로 옮겼는데, 이곳은 얼마 후 동고트족에게 점령된다. 6세기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로마제국의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라벤나를 접수하고 서방 통치의 근거지로 삼으면서 이곳에는 콘스탄티노플 양식의 성당들이 지어졌다.
그 중 「산 비탈레 성당」(526-547년경)은 동방 정교회 성당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이 성당은 팔각형의 벽채 위에 원형의 돔을 얹어 놓은 ahdidd로 건축되었는데 이는 집중식 평면 위에 돔을 얹는 비잔틴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비잔틴건축은 로마의 건축기법과 페르시아의 돔 축조법을 발전시켜 정각형의 다양한 평면 형태에 돔을 얹는 새로운 구조를 고안하였다 정각형의 벽체와 원형의 돔을 잇기 위해 초기에는 '스퀸치(Squinch)'라는 돌 받침대를 설치하였으나 점차 네면의 아치 위에 돔을 얹고 그 사이를 벽돌로 채워 넣는'펜덴티브(Pendentive)'공법을 발전시켰다. 중앙의 돔은 주로 얕은 반구를 사용하는데, 이로 인해 생기는 커다란 횡압력을 분산하기 위해 다시 작은 돔이나 반원 돔을 두고 있다. 이러한 구조로 인해 외관상으로도 집중성이 높아 보이고 유동적인 양감을 느끼게 한다.
6세기에 건립된 「소피아 대성당」(532-537)은 비잔틴 건축의 정수를 보여준다.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성스러운 지혜'라는 의미)로 불리는 이 거대한 성당은 지혜(그리스도 자체를 의미)의 이름으로 봉헌된 것이다 이 건물의 중심적인 특색은 바실리카 양식과 판테온 양식을 결합시킨 '돔 바실리카'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의 커다란 돔을 4개의 큰 아치가 지지하고 있는데, 동서로는 반돔이 횡압력을 분산시키고 있고, 이 반돔 아래로 다시 3개의 반돔이 전개되어 바실리카 풍의 평면을 형성하고 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첨탑과 부속물은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던 15세기의 부가된 것이다.
7. 로마네스크
로마네스크 교회는 기본 형식은 바실리카 교회와 별 차이는 없으나, 전체적인 인상은 매우 다르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가장 특징적인 형태는 아치를 이용한 둥근 천장, 즉 궁륭(보울트 vault)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교회 내부는 가능한 크고 높아 보여야 했고 불에 잘 견뎌야 했기 때문에 목조로 된 평평한 천장 대신 석재로 된 궁륭으로 대체되었다. 초기에는 터널식 원통형 궁륭이 이용되었으나 엄청난 석재가 필요했고, 채광도 잘 안되었기 때문에 곧이어 원통형 궁륭을 직각으로 교차시키는 교차 궁륭으로 발전하였다. 이두 형태의 궁륭은 거의 모든 로마네스크 교회에서 볼 수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육중하고 높은 궁륭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지탱하기 위해 두터운 석조 벽과 거대한 버팀 기둥이 필요했다. 또한 창문은 일정한 크기를 넘지 못했고, 측랑도 천장의 무게를 나눠 갖기 위해 낮고 좁게 설계되었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외관은 두터운 벽과 탑으로 이루어져 견고한 성체를 연상시킨다. 외벽은 둥근 아치로 된 작은 창문을 내거나 연속적이고 중첩적인 '블라인드 아치(blind-arch)'로 장식되고, 그 사이 사이에 버팀기둥이 석조벽을 지탱하고 있어 형태상의 통일과 내부의 기능적 형태가 그대로 외관에 드러나기도 한다. 화려하지 않고 간소하지만 중후하고 위엄이 느껴지는 외관처럼, 내부 또한 숭고한 종교적 분위기를 소박한 수법으로 표현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 내부는 작은 창문이 높직하게 나 있어 어두운 데다 질서정연한 구획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있고, 열주 등의 건축학적 효과로 인해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로마네스크라는 새로운 건축양식이 시작된 11세기에는 기독교라는 구심점에도 불구하고 유럽이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았고 교통수단의 미비로 인해 지역에 따라 다양한 양식의 건축이 이루어졌다. 당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이 독일이었다. 「슈파이어 대성당」(1024-1106)은 초기 궁륭 천장을 지닌 대표적인 건축이다. 이 성당은 중정(atrium)이 없이 바로 길에서 진입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와 같이 중정을 없애는 대신 입구에 탑을 세운다는 점에서 중세 성당은 고대 바실리카 성당과 구별된다. 이 성당의 전체전인 외관은 마치 거대한 집짓기 블록으로 짜 맞춘 듯한 인상을 주는데, 이 또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형적 특징이다. 성당의 내부는 원주가 아닌 굵고 거대한 복합기둥들이 신랑과 측랑을 분리시키고 있고, 이 기둥들이 반원형의 횡단 아치(transverse rib)를 받쳐 주고 있다.
독일 로마네스크를 대표하는 「보름스 대성당」(1110-81)은 건물의 동서양단에 앱스를 두고 있는 독일 특유의 이른바 '이중 내진식'이고 이 때문에 양 측면 중앙부에 출입구를 내고 있다. 또한 이 성당은 신랑과 익랑이 교차점과 각 익랑이 양 끝에 6개의 탑을 나란히 세워 외부공간구성에 다양성을 주고 있고, '늑재 궁륭'(rib-vault)'을 사용함으로써 고딕양식을 선취하고 있다.
11세기 후반 유럽은 기독교의 승리와 함께 종교적 열정이 고조되는데, 이러한 종교적 열정은 성지순례를 대폭적으로 증가시켰고, 이로 인해 문화교류가 활발해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로마네스크 양식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로마니스크 성당의 상당수는 순례를 위한 성당 양식으로 지어졌다. 당시에는 로마, 예루살렘과 더불어 성 야고보의 순교지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가장 인기 있는 순례지였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길목에 순례자들을 위한 로마네스크식 성당들이 많이 건립되었다. 프랑스 남서부툴루즈에 있는 「생 세르냉 성당」(1080-1120)도 그 중의 하나이다. 외관이 육중한 기하학적 블록처럼 보이는 이 성당은 순례자들이 성당을 둘러보면서 교회 구조를 볼 수 있도록 주위에 산책로를 내는 하면, 교회 내부도 순례자들이 성당 안을 쉽게 순회하면서 그 안에 모셔진 유물들을 참배할 수 있도록 회랑과 예배실을 설치하는 등 여러 가지 배려를 하고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들은 영국이나 이탈리아에서도 볼 수 있다. 영국의 로마네스크는 '노르만(Norman)'양식이라고도 불리는데, 독일이나 프랑스 로마네스크에 비해 더욱 장식적이지만 웅장한 규모를 보인다. 「더램 대성당」(1093-1133)은 영국의 노르만 양식을 대표하는 성당으로, 육중한 원통형 기둥과 톱니바퀴 모양의 아치 장식이 인상적이고 고딕 양식에서 보편화된'늑재 궁륭'이라는 새로운 형태가 처음으로 도입되고 있다. '사탑'으로 유명한 「피사 대성당」(1053-1272)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로마네스크 건축이다. 이탈리아 성당은 십자 교차부에 돔을 얹은 본당과 종탑, 세례당을 별개로 구분하는 것이 특징인데, 피사 대성당도 이러한 구조를 따르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의 성당들은 로마 건축의 전통이 많이 남아있어 고대 신전양식을 도입하거나, 바실리카 성당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피사 대성당의 본당 역시 바실리카를 연상시키며, 모든 건물에서 원기둥으로 된 작은 아케이드 장식과 원형아치 장식이 중첩적으로 사용되고 있어 전체 건물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8 - ①. 고딕
고딕 양식은 우선 성당 건축에 있어서의 기술적인 발명에서 시작되어 전예술 분야로 확대된다. 새로운 건축 양식은 1140년대 파리 북쪽 「생 드니 수도원성당」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 수도원의 원장이자 루이 6세의 절친한 고문이었던 쉬제르(Abbot Suger)는 왕권의 신성함을 주장하고 그 권위를 높이려는 상징적 조치로서 프랑스 수호성인의 성묘이자 역대 왕들의 묘가 있는 생 드니 수도원을 프랑스의 정신적 중심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대대적인 확장 공사가 단행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수적인 조화와 빛으로 상징되는 신적인 아름다움을 시각화하고자 하였다. 그는 엄격한 기하학적 설계를 통해 완벽한 조화를 실현하고,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을 통해 성당 내부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는 새로운 건물 양식을 고안하게 된다.
후에 고딕양식이라 불리게 된 이 새로운 양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우선 늑재 궁륭(rib-vault)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늑재궁륭은 '늑재'라고 하는 눈에 드러나는 아치를 갖는다는 점에서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사용되는 교차 궁륭과는 구별된다. 늑재는 궁륭의 주요 표면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돌출된 늑재를 통해 건물의 골격과 내부공간의 구조적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늑재 궁륭은 같은 면적의 교차 궁륭보다 훨씬 가볍고 시각적으로도 아름답다는 이점을 지닌다. 니제 늑재라는 가벼운 아치를 이용해 아름다운 천장을 만들고, 육중한 벽이 아니라 내부의 기둥과 외부의 부벽을 이용해 천장의 아치를 지탱할 수 있게 되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석벽이 아닌 커다란 유리창으로 채움으로써 성당 안을 밝은 빛으로 가득 채울 수 있게 되었다. 또 둥근 아치를 '첨두 아치(pointed arch)'로 바꿈으로써 천장을 더 높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형시킬 수 있었고, 내부공간은 수직선을 부단히 강조함으로써 경쾌한 상승감을 불러일으킨다. 외부에는 '부벽(버팀목; buttress)'과 '부연부벽(벽날개 flying buttress)'을 설치함으로써 전체 구조의 견고성을 유지하도록 하였는데, 기능적인 면뿐만 아니라 심미적인 면도 고려하여 이러한 대담한 설계를 보는 사람이 직접 느끼고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무겁고 엄격한 구조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에서는 신앙을 수호하고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 견고한 성채로서의 힘과 권위가 느껴진다면, 대담하고 장대한 규모의 고딕양식의 성당에서는 기하학적인 질서와 비례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인간적인 모든 것이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기하학적 블록을 짜 맞추듯 공간을 확장해 가는 로마네스크 성당과는 달리 선과 선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연속적인 공간을 창출하는 고딕 성당의 내부는 특히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스며드는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빛으로 인해 또 다른 세계의 신비를 불러일으킨다.
12세기에 일어난 종교부흥운동의 영향으로 유물 숭배를 대신해 성체의식과 같은 새로운 종교 관행이 이루어지고, 보다 온화하고 자비로운 신앙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러한 분위기는 동정녀 마리아 신앙으로 이어져, 이 시기에 그녀의 조상이 많이 만들어지고 새로 건립된 많은 교회가 '노트르담(Notre Dame : 우리의 귀부인)'마리아에게 바쳐졌다. 프랑스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최초의 교회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사르트르 대성당」이나 「랭스 대성당」「파리 대성당」등이 '노트르담'이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다. 그 중에서도 파리대성당(1163-1250)은 그냥 노트르담이라고 불린다. 쉬제르의 의도를 보다 명백하게 반영하고 있는 이 성당은 거대한 규모와 기하학적 질서의 우아한 조화, 그리고 부연부벽의 공법이 처음 도입되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또한 사르트르 대성당은 외부를 장식한 조각들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등 다양성과 포괄성에서 당시에도 고딕건축의 백과사전으로 간주되었다.
8 - ②. 이탈리아 고딕
남유럽 이탈리아에서는 고딕 양식이 다소 영향을 미치기는 하였으나 보편적으로 수용되지는 않았다. 고대 로마의 전통과 기후상의 이유로 거부되기까지 했는데, 이탈리아 중부 이남에서는 끝내 고딕 건축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전통적인 바실리카 형식을 지켜나갔다. 고딕 양식은 주로 북부도시 밀라노를 중심으로 발달 하였는데, 「밀라노 대성당」(1386-1577)은 이탈리아 고딕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그러나 이 건물에서도 후기 고딕의 장식성과 함께 이탈리아의 전통이 혼합되어 있다.
8 - ③. 후기 고딕
13세기에는 위대한 성당들의 시대였고 그 성당들 속에 예술의 모든 분야가 다 망라되어 있었다. 이러한 거창한 규모의 건축은 14세기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지만 이제 장대함보다는 세련미를 추구하였다. 14세기 고딕 건축가들은 더 이상 초기 고딕 성당의 분명하고 장엄한 형태에 만족하지 않았고 풍부한 장식과 복잡한 격자 문양을 통해 자신들의 솜씨를 과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교회 건축은 이제 더 이상 건축가들의 주된 작업이 아니었고, 날이 갈수록 성장하고 번영해 가는 도시를 중심으로 시청이나 궁전, 대학 등 많은 일반 건물들이 세워졌다. 조각도 교회를 위해 만들어진 수많은 석조물들보다는 귀금속이나 장식을 위한 소품들에서 그 시대 장인들의 뛰어난 솜씨가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9 - ①. 초기 르네상스
피렌체의 건축가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는 보다 안락하고 접근을 쉽게 하려는 의도에서 점차 거대한 규모보다는 인간의 크기에 적합한 아담한 교회들을 지었는데, 이것은 신과 인간과의 보다 직접적이고 평등한 관계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는 원주와 벽기둥 및 아치 등의 고전적 건축 형식들을 자기 식대로 결합하여 이전의 건물과는 다른 경쾌하고 우아한 효과를 내는 새로운 건축 방식을 창조해 냈다. 코린트식 원주 위에 경쾌한 아치를 세운 파치예배당(1430년경)에서는 이러한 성격이 잘 드러나고 있다.
산타 크로체 성당에 부속되어 있는 이 작은 건물은 내부와 외부 장식에서 명료성과 단순성이 돋보이는데, 르네상스가 추구하는 질서와 조화의 이상과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훌륭히 재현하고 있다. 르네상스 건축의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의 완벽한 균형은 우주의 조화를 반영한다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건물의 각 부분이 사람의 신체 각 부분과 마찬가지로 건물의 다른 부위 및 전체에 조화롭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르네상스 건축은 중앙집중식 평면을 선호하였는데, 파치예배당은 이러한 개념이 실체화된 르네상스 최초의 건물이다. 이 건물은 평면이 정각형이 아닌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나, 그 위에 돔을 얹어 하부의 중앙 공간을 집중적ㅇ로 강조함으로써 중앙집중식 평면의 개념을 실체화하고 있다. 또한 여러 요소들을 반복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전체 구조를 하나로 통합 완전한 체계를 이루어내고 있다. 나아가 브루넬레스키와 동시대인들은 음악의 화성학을 건축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음악에서 각 음이 모여 균형 잡힌 조화를 이룰 때 화음이 일치하듯이 아무리 큰 건물이라도 여러 수치가 일정한 연관을 이룰 때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던 것이다. 파치예배당의 경우 벽면 구성에서 한 가지 수치를 기준으로 사용 이것을 일정한 비율로 나누어 적용함으로써 짜임새 있는 기하학적 패턴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는 음악을 건축에 이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브루넬레스키 이후 르네상스 건축은 그의 모범을 따라 고대적 요소와 중세적 요소를 복합해 새로운 건축을 창조해 내는 절충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르네상스 건축 방식은 그 후 500년 가까이 유럽과 미국의 건축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고, 르네상스 건축의 전통은 20세기에 들어와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될 때까지 지속된다.
브루넬레스키가 확립한 새로운 건축 이념은 레온 알베르티(Leon B. Alberti; 1404-1472)에 의해 계승된다. 그는 회화 건축 조각 등에 관한 이론서를 출간했고, 피렌체를 떠나 각지로 돌아다니며 활동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르네상스 양식의 전파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는 교회 건물에서 브루넬레스키의 방식을 응용하는 한편, 도시의 일반 주택에서도 벽과 창문이 있는 재래식 집과 고전적인 형식을 절충함으로써 새로운 모습을 부여하였다. 「루첼라이저택」(1460년경)에서 그는 고전적인 기둥양식을 판판한 벽기둥으로 만들어 층마다 달리 적용하고 있고, 벽기둥 사이에 아치를 배치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이는 창문의 고딕식 첨형 아치가 부드럽게 바뀌는 등 고딕식 설계방식을 고전적 형식으로 번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고안을 오래된 전통에 맞도록 조화시키고자 한 알베르티의 이러한 업적은 전형적인 것으로, 새로운 것과 낡은 것, 고딕 전통과 근대적 양식 사이의 절충은 15세기 중엽 모든 예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9 - ②. 전성기 르네상스
전성기 르네상스 건축가들은 건축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들은 건물의 쓰임새와 상관없이 완벽한 비례와 균형의 아름다움, 조화 그 자체가 만들어 내는 장대함을 중시하였다. 도나토 브라만테(Donate Bramante; 1444-1514)가 설계한 템피에토(1502)는 고전문화의 부활을 선언한 르네상스정신을 완벽하게 표현한 건축으로, 고전시대 건축의 이상과 기준을 잘 소화하고 있다. 브라만테는 1506년 베드로대성당의 재건축을 맡아 거대한 그리스 십자형 홀 중심에 사방으로 대칭적인 건물을 배치하는 정방형의 성당을 설계한다. 이 계획은 종교개혁의 발발로 실현되지 못하고, 그 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1546년 미켈란젤로에게 맡겨진다.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의 그리스 십자형을 기본으로 중앙에 우뚝 솟은 돔이 중심이 되는 장대한 건축을 구상하였다. 미켈란젤로 사후 이 성당은 여러 건축가들에 의해 아이디어가 가미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
9 - ③. 북유럽 르네상스
이탈리아와 달리 북유럽은 15C초반까지도 여전히 교회와 궁정이 문화의 중심이었고 따라서 예술 또한 중세적 시대상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건축의 경우 이탈리아에서는 브루넬리스키가 건축물에 고전적인 모티브를 도입해 르네상스적 양식이 시작되고 있었던 반면, 북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15C내내 고딕양식을 계속 고수하면서 더욱 복잡하고 환상적인 장식적 경향을 발전시켜 나갔다.
10 - ①. 이탈리아 바로크
반종교개혁의 선봉장인 예수회의 총 본산이었던 「일 제수 성당」(1575-84년경)은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최초의 건물이다. 이 성당의 정면 현관은 쟈모코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 1541???1604)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쌍을 이루고 있는 기둥들의 강한 엑센트를 통해 르네상스 양식과는 전혀 다른 절도있는 리듬감과 시각적 안정감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건물은 완전히 새로운 양식의 설계라기보다는 고전주의 양식의 여러 요소들을 비고전적인 방식으로 배열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건물의 정면은 기둥이나 반기둥이 모두 이중으로 되어 있어 전체 구조를 보다 호화롭고 다채롭게 보이도록 하고 있고, 중심부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이중 틀로 강조된 대현관을 중심으로 모든 부분들이 세심하게 배치되어 하나의 전체적인 형태로 융합되어 있다 특히 곡선과 나선 형태를 통해 위 아래층을 조화롭게 연결시키고 있는 일종의 소용돌이 모양의 지지대는 건물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부여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성당 내부는 화려하게 장식된 중앙부와 측랑 대신 만들어진 예배실이 특징인데, 특히 신랑측면에서 들어오는 은은한 빛과 동쪽 돔에서 들어오는 풍부한 빛의 효과로 인해 전체적으로 화려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이 성당은 강력한 정서적 체험을 중시했던 반종교개혁의 정신을 건축적으로 구현한 것으로서 17세기 가톨릭 성당건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포르타 이후 건축가들은 다양하고 인상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보다 나은 복잡한 장식과 놀라운 아이디어를 고안해 냄으로써 17세기 중엽 바로크 양식은 절정에 달한다. 교회 건축에서는 바로크 양식의 소용돌이 장식과 굴곡선이 전반적인 설계와 장식적인 세부까지 지배하게 되어 화려함과 움직임이 가득한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가 지은 성당들을 보면 역시 고전적 요소들을 비고전적 방식으로 배열하고 있으나 정교한 곡선과 강한 직선이 연출하는 상호 작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절정기의 이탈리아 바로크 건축을 대변하는 [산 카를로 아레 콰토르 폰타네 성당](1638-67)은 강한 명암대비와 물결치듯 부드러운 정면은 활기찬 율동감으로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중앙의 집중식 돔은 타원형으로 확장되어 벌집모양ㅇ로 장식되어 있고, 내부 역시 하늘의 영광을 구체적으로 연상시키기 위해 호화롭게 치장되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10 - ②. 프랑스 바로크
건축에 있어서도 루브르궁을 완성시키기 위한 계획에서 바로크풍의 베르니니안이 거부당하고 간소하고 엄숙한 고대풍의 양식이 채택되는 등 고전주의가 프랑스 양식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당시에 지어진 베르사이유 궁전은 오히려 바로크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가톨릭교회가 예술을 통해 교회의 승리를 과시하고 교리 전파에 이용하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17세기 유럽의 왕과 제후들 역시그들의 권력을 과시하고, 자신들이 일반 백성들과는 달리 신권에 의해 받들어진 다른 종류의 인간임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예술적 효과를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 중 루이 14세는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의 하나로 베르사이유 궁전을 웅대한 규모로 신축하였는데, 이 거대한 궁전은 고상하고 장엄한 외관과 더불어 화려하고 호사스런 내부 장식 면에서 바로크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궁전은 또한 기하학적으로 잘 다듬어진 광활한 정원과 호수 등을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궁전과 주변 환경이 완전하게 통합되었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바로크 양식의 로마 교회와 더불어 베르사이유 궁전은 그 시대의 상상력에 불을 붙였다. 남부 독일의 작은 공국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베르사이유를 갖고자 했고, 유럽의 수도원들은 서로 인상적인 화려함에서 뒤지지 않는 건물을 짓고자 함으로써 1700년경의시대는 건축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시대가 되었다. 건물뿐만 아니라 정원이나 인공폭포를 건설하고, 금도금된 공예품으로 장식하는 등 모든 예술이 환상적이고 인공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함으로써 유럽의 많은 도시 경관이 그 면모를 일신했다.
11. 로코코
바로크처럼 로코코의 예술 활동 역시 특히 건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회화 조각 공예등 모든 분야가 건축에 종속되고 융합되어 있다. 로코코 양식의 건축은 실내 장식에 있어 눈을 산란하게 하고 상상의 세계를 장식하고자 하는 욕구들이 표현되고 있다. 어디서 벽이 끝나고 어디서 석고 작품이 시작되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고 건물의 전체 구조를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로 모든 것이 빛과 색채로 인해 환영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바로크와 로코코 건축 모두 역동적인 움직임을 강조하지만, 바로크 양식이 힘과 열정을 발산하고 있는데 비해, 로코코양식은 섬세함과 쾌활함을 전달한다. 바로크 건축의 실내가 비교적 어두운 반면 로코코 건축의 실내는 벽과 천장이 흰색, 황금색, 핑크색 등으로 채색되어 밝고 경쾌한 느낌을 자아낸다. 로코코 예술은 바로크 예술이 유동적인 조형요소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로크의 연장 또는 변형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크가 충만한 생동감과 장중한 위압감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남성적이고 의지적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 로코코의 세련미와 화려한 유희적 정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여성적이고 감각적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12. 근대(신고전주의)
건축에서는 바로크 양식의 호화스럼움이나 베르사이유처럼 불합리하고 인공적인 것들은 배격했고, 가능한 한 고대 건축의 법칙을 따르려고 하였다. 건축가들은 르네상스 이래로 성장해 온 건축상의 관례와 전통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들은 르네상스 이래 고전기 건축으로 통용돼 온 것들이 사실은 그리스 건축과는 먼 다소 퇴폐적인 시기의 로마 유적의 일부에서 취해진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에는 그리스 유적들이 활발하게 발굴되었는데, 이 때 발굴된 그리스 유적에 따라 올바른 양식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리스 복고'가 나타났고, 고고학적 정확성에 의거하여 그리스 신전양식에 맞춘 건물들이 지어졌다.
신고전주의는 프랑스 혁명(1789)과 함께 시로운 국면을 맞이하는데, 혁명의 주역들은 그들이 만들어갈 새로운 사회의 이상형을 고대 로마에서 찾고자 하였다. 당시의 경박하고 쾌락 추구적 분위기를 일신하고 시민사회의 삶 속에 고대 로마적 덕성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욕구는 장엄한 애국심, 고결한 시민적 미덕, 영웅주의, 자유, 희생 등의 윤리적 이념을 싹트게 했고, 미술가들은 고결한 이상미의 전형적이었던 그리스 로마의 유물로부터 이런 이념을 표현할 모델을 구했다. 이로써 신고전주의 양식은 정치적 신조가 되었고 이때부터 예술은 사람들을 교화하고 행동을 고무시키는 하나의 모범으로서 통치수단의 차원에서 육성되기 시작하였다. 혁명 후 나폴레옹이 패권을 잡게 되자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은 '앙피르(제정)'양식이 되었고, 파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개선문](1806-36)이나 [판테온](1757-90)등 많은 고전 양식의 건물이 들어서게 된 것이나 고대를 소재로 한 역사화가 교훈과 철학이 담긴 고귀한 미술양식으로서 선호된 것도 이러한 도덕적 합의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신고전주의 건축은 독일과 영국으로 전해져 19세기에 그 꽃을 피우게 되었다. 독일의 신조전주의 건축은 문학과 음악 등의 예술적 황금기와 겹치면서 가장 과학적이고 정확한 고전의 재현을 통해 눈부시게 발전한다. 고대 그리스시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성문을 모델로 도리아식의 기둥을 사용한 [부란덴부르크 문](1789-93), 이오니아식 원주의 정면과 로마 판테온 식의 중앙 돔을 가지고 있는 뮌헨의 [알테스 무제움](1824-47)등이 이 시대 대표적인 건축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신고전주의 건축으로는 그리스신전 양식의 현관에 이오니아식 열주를 가진 [대영박물관](1823-47)과 [내셔널 갤러리](1834-38)등을 들 수 있다. 신고전주의 건물에는 특히 박물관이 많이 눈에 띤다. 박물관은 18세기 이후 대중에게 개방되기 시작되는데 19세기에는 예술의 전당인 박물관 양식으로 고전양식이 채택되었고 신고전주의를 선도하였다.
13. 낭만주의
상상과 무한한 것에 대한 동경을 중시하는 낭만주의는 건축에 있어서 중세 고딕 양식을 재현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또한 당시에 일기 시작한 민족주의적 경향으로 유럽 각 국에서 고딕이야말로 자신들의 정서에 가장 맞는다는 생각이 대두되면서 서유럽 전역에 걸쳐 고딕성당의 복구공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영국에서는 고딕건축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졌고 [국회의사당](1836-52)이 현상설계에 의해 고딕양식으로 건립되었다. 독일에서는 16세기 후반이래 공사가 중단되었던 [쾰른 대성당]의 공사가 재개되어 1880년 준공되면서 고딕 리바이벌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빈의 [보티프 성당](1856-79)은 독창성 없으나 고딕 양식을 완벽하게 재현한 건축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 건축운동은 중세 건축을 동경하고 감상주의로 흐르게 됨으로써 비판을 받게 되자 '신 르네상스'적 경향으로 전환하게 되고, 이후 지난날의 건축 양식에서 어느 것이나 취사선택해 보다 좋은 양식을 얻어야 한다는 이른바 '절충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14. 산업화 시대
19C가 시작되면서 지난 세기에 풍미했던 우아한 건축에 대한 확신은 물거품처럼 사라지며 중산계급의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건축이 설계되었다.산업혁명으로 인해 현수교나 철도역, 공장 같은 실용적인 건물에 주철 같은 새로운 재료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건축 재료와 공학적 방법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일반 건축물에서도 사실주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실용적인 스타일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런던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박람회장 건물인 [수정궁](1850-51)은 마치 온실처럼 주철로 된 거대한 골격 위에 수많은 유리판을 뒤덮는 형태로서 주철로 된 구조물의 미학적 가능성을 보여준 건물이다.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철의 사용이 크게 늘어나 더욱 크고 화재에도 안전한 철재 건물들이 많이 지어졌는데, 이시대의 대표적인 걸작이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상징으로 세워진 [에펠탑](1887-89)이다 300미터 높이의 이 탑은 이 시대 건축공학의 금자탑이자 근대산업사회의 상징이기도 하다.
15. 현대건축
19세기말에 이르기까지 건축은 침체를 거듭하고 있었다. 점차 확장되어 가는 도시들 속에서 아파트, 공장, 관공서 등의 건물들이 잡다한 양식으로 난립했다. 많은 경우 건축은 토목기사들이 건물의 용도에 알맞은 구조를 미리 세워놓은 다음, 건물주의 요구에 따라 겉모습을 장식하기 위해 견본 책에서 따온 그럴싸한 정면형태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건축은 여러 가지 상이한 양식들의 절충과 혼합으로 기형적 양식을 낳게 되었다. 19세기말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유행의 불합리성을 깨닫게 되고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일체의 양식이나 장식의 속박에서 탈피하여 건축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기운이 일어났다. 건축이 일종의 '순수예술'이라는 관념에 집착하지 않는 젊은 건축가들을 중심으로 일체의 장식을 거부하고 건축의 목적에 비추어 새롭게 접근하자는 조짐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나타났다.
건물에서의 모든 장식을 배제함으로써 현대 건축가들은 사실상 수백 년의 전통과 단절했다. 새로운 건축물을 처음 본 사람들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벌거벗은 건물을 보면서 때로는 조소와 반발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현대적 건축 재료를 대담하게 사용하면서 실험을 계속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우하우스'였다. '바우하우스'는 건축가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가 1919년 바이마르에 설립한 종합예술학교이다 바우하우스는 모든 예술적인 원리들을 하나로 통일시켜주는 분야로서의 건축적인 측면을 중시하고 건축을 주축으로 미술과 공학기술의 종합, 각 예술 영역간의 상호교류를 강조하는 일종의 종합예술을 지향하였다. 바우하우스는 기능적인 건축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기능적이고 합목적적인 새로운 미를 추구한다. 단순하고 기능적인 디자인에 대한 기본 원칙이 수립되었고, 새로운 기술과 재료,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숙련된 기술 디자인을 근대 산업기술과 조화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교사](1925-26)는 직육면체의 평평한 지붕에, 불필요한 공간을 제거한 단순한 모양의 것이었는데, 건물 전체가 하나의 공장처럼 설계된 현대 건축의 효시이다. 바우하우스 멤버들은 나치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하는데, 특히 건축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 중 반데어 로에(1886-1969)는 시카고의 [쌍둥이아파트 빌딩](1950) 같은 유리와 철근으로 된 혁신적인 건축을 선보이는가 하면 뉴욕의 [시그램 빌딩](1956-58)과 같은 철근과 유리로 된 우아한 건축을 설계했다. 이 빌딩들은 대량생산과 조립성, 기계의 정확성을 대표하는 20세기 순수 이상주의 건축의 한 전형이 되었다. 바우하우스에서 비롯된 이러한 건축 양식은 경비와 시간, 순수한 추상미 때문에 국제적인 호응을 얻게 되고 세계적으로 적용되어 '국제주의 양식'이 성립한다.
Ⅲ. 결론
종적인 흐름에 의해 서술된 건축문화를 살펴보았다. 창조적인 예술 가운데 유일하게 건축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건축사의 어느 시대나 건축은 공간의 창조와 통제이다. 오늘날 이용 가능한 기술로 인해 과거 어느 때보다도 훨씬 크고 독창적이며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건축공간을 구상하고 경험할 수 있다. 어쩌면 건축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요구도 있겠지만 재료에 대한 이해와 기술, 독창적 형태의 결합을 꿈꾸는 풍부한 상상력으로 훨씬 정교한 기술을 발전시킬 것이다.
하지만 어떤 양식에 열중했든 모든 건축은 인간의 창의력이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키는데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안정?휴식에의 욕망뿐 아니라 그 어떤 다른 방식의 욕망, 美와 永續性, 영원불멸 등에 대한 욕망이 깔려있음을 알 수 있었다. 건축은 시각적이고 형태적인 모습으로 그 시대의 사회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서양건축사 - 서우 - 이강업, 진경돈
서양문명의 역사 Ⅰ~Ⅲ - 소나무 - EM.번즈, R.러너, S.미첨
건축이야기 - 동녘 - Patrick Nuttgens
서양건축 양식론 - 기문당 - 김성곤
인문학적 예술의 이해 - 인하대학교 출판부
(체육교육과.20003102.강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