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때 절해도 되나요?
절은 우상숭배의 또 다른 모습
제사에 있어서 드릴 것이냐, 말 것이냐, 드렸는가 말았는가를 가늠하는 잣대로 절을 많이 생각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절은 단지 선조에 대한 효성을 표시하는 의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어른에 대한 공경심의 발로로 절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단죄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배타성에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기독교는 우상숭배라고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문제는 유교와 그 의식인 제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달려있습니다. 유교가 종교인가 사상인가를 두고 논쟁이 있습니다. 그만큼 유교 자체가 양면성이 다 있나 봅니다. 만일 유교가 인간의 윤리와 국가의 통치 철학으로 국한한다면, 제사와 절은 우상숭배가 아닐 겁니다. 그러나 서구적 의미의 종교와는 다르더라도, 효의 실천으로 축소하기에는 ‘하늘’ 등의 개념은 도덕의 범주를 벗어나 종교로 확대됩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김경일은 제사의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조상은 조상신이라고 합니다.
현재 상황은 유교가 종교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려 후기로부터 지금까지 600년 동안을 한국인의 내면세계를 지배한 유교가 쉽사리 물러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국인의 무의식을 좌우하는 가치 규범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와 불교 등과 같은 지위와 역할, 영향력을 차지하지는 어려울 것입니다.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교가 종교보다 윤리라고 생각합니다.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
이런 상황은 제사를 하나의 풍습일 따름이라는 결론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듯이 보입니다. 종교인지 철학인지 애매하고 종교적 특성을 많이 잃어버린 상황에서 오랜 전통이라고 대놓고 반대하는 것이 부당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논리에 기댄 제사와 절의 요구는 과도하거나 빈약해 보입니다. 도리어 그렇다면 집착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모든 전통이 늘 갱신되듯이 제사의 본령을 복원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조상이 전쟁·농사·날씨·질병 등을 관장하는 전천후적 존재이고 당대의 수많은 신들 중에 유독 조상신만을 숭배하게 되었다는 김경일의 말이 옳다면, 그 종교성이 많이 약화되었다고 하나 한갓 조상에 대한 공경이라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제사상에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드는 것과 그 형상에 절하는 것을 단호하게 금지하는 것은 성서의 정신이자, 역사적 전통입니다. 십계명의 명령,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왕의 형상을 신격화한 것에 대한 저항, 일제 때 주기철 목사님 등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개신교는 제사를 금합니다.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후에 입장을 변경합니다만,) 모두 초창기부터 제사를 금지했습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여호수아의 선택이 성서 저변에, 교회의 물결 속에, 내 몸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는 이들입니다. 하여, 정중하게 제사를 드릴 때 사양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제사를 드릴 때마다 여호와와 하나님 사람, 여호수아를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