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자료]] 기독교 세계관
2007-05-11 07:52:18 read :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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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양승훈 (벵쿠버 기독교 세계관 대학원 Director)
1. 서론
하나님께서 세상을 생각하시고 창조하셨듯이 하나님의 본질의 연장인 인간도 생각하고 행동한다.
비록 그의 사고의 깊이의 심도와는 무관 하더라도. 그런데 인간의 사고활동은, 언제나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이루어진 세계관에 근거하지 않고는 행해질 수 없다. 세계관이란 철학자나 심호한 사상가에 국한된 호사품이 아니라, 그가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존재 그 자체를 뒷바침하고 있는 세계관이란 과연 무엇인가? 제임스 사이어는 '세계관이란 우리 세계(세상)의 기본적인 구성에 대해 우리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견지하는 바 일련의 전제들 (혹은 가정들)이다.' 라고 설명한다. 또한 세계관이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근본적 해답을 포함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즉 (1) 참된 최고의 실재(reality)는 무엇인가? (2) 인간은 무엇인가? (3) 인간의 사후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4)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 (5)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이 그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이와같은 질문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입각해서 이 세상과 인생과 문화전체를 인식하고, 그에 따라 삶의 자세를 확립하는 기독교적 안목을 말한다. 다음 장에서 왜 이러한 다소 난해해보이는 것들을 고찰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2. 기독교적 세계관을 견지해야 하는 이유
우리는 냉랭한 지식만의 기독교를 원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우리에게 있는 깊은 문제 - 우리들을 오류로 이끄는 몇가지를 살펴봄으로써 기독교적 세계관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먼저
(1)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함에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主님으로 인정하는데 있어서, 개인의 시간 및 재물사용, 앞길의 계획의뢰함 따위에만 국한시켜 왔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주(主)되심은 교회, 사회 심지어 우주 전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임은 성경에서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요 1:3, 골 1:20, 마 28:18, 행 2:36)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 신앙의 영역에만 국한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한편으로 우리가 '예수님은 나의 주인(主人) 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한국과 같은 비기독교적인 문화 사회 속에서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다운 행동과 생활 양식을 개발하여 좀 더 완벽히 융화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에 대한 답으로써 기독교 세계관은 반드시 필요하다.
(2) 이원론(二元論)적 행습의 탈피를 위하여서이다.
우리 자신을 포함한 피조세계를 관찰, 인식함에 있어서 일관성 있는 사고의 틀의 부재 혹은 거부로 말미암아 사고가 이분되거나 그릇된(지나친 혹은 소홀한) 강조를 하거나 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되는 분열 증세를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이원론'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원론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심각한 분리를 야기시켜 신앙과 생활 모두에 해를 끼치게 되는데, 이제 우리 주변에서 그 구체적인 원인들을 살펴보자.
첫째로 동양종교(특히 불교)의 탈세속적 자세 및 유교의 형식주의와 민간 토속신앙의 귀신, 요행, 맹목적 열심 등에 의하여 우리의 종교심은 깊은 영향을 받아왔고 결과적으로 신앙과 초자연적인 것과의 결부로 인하여 신앙과 생활의 분리가 야기되었다.
둘째, 한국교회의 짧은 역사에 비해 숱한 고난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현재적 책임보다는 미래의 천국의 모습에 편중되는 모순을 낳았다.
세째로는 실생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펼쳐나가기가 어려우므로 이 가운데 상존하는 긴장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원론적 경향이 스며들었다. 이것은 전임 사역자보다도 실생활의 많은 부분을 직장에서 보내야 하는 일반 신도들 사이에 명백히 드러난다.
이러한 긴장을 해소하는 대표적 패턴에는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포기하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타협형, 갈등을 견디기 힘들어 이런 생활에서 도피하는 분리형, 그리고 이중적인 가치관, 이중적인 행동을 하는 이원론형이 있다. 특히 이원론형은 자기의 이중적인 면 때문에 갈등도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는 교회의 몰인식과 이원론을 지양하는 이런 방향에의 교육이 부재한데 기인한다. 기성교회의 다분히 공리적인 목회방침이나, 여러 복음주의 선교 단체들(특히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이 일반 전공과목에 대한 올바른 안목과 인간 및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지 않는 것들을 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3) 풍성한 삶으로 회복을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인은 너나 할것없이 모두다 풍성한 삶(요 10:10)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흔히들 이 풍성한 삶을 '영적생명', '중생', '새로운 피조물' 등등의 개념으로 혹은 현제적 축복(건강회복, 사업의 발전 등)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풍성한 삶이란 훨씬 넓은 창조의 전 영역과 창조의 본질적 성격, 인간에게 부여된 창조적 잠재력(성, 예술, 학문, 사회) 등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올바른 안목이 없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좁고 왜곡된 생각 속에서 자위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몇가지 이유를 들어 보았다. 이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위의 것들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제 기독교 세계관을 살펴봄으로써 과연 우리는 어떠한 안목을 가지는 것이 성경적인가를 고찰해 보기로 하자.
3. 기독교 유신론(唯神論) - 기독교 세계관
17세기 말까지 서양의 세계관을 지배해왔고, 그 뒤에 발전된 여러 세계관의 기본이 되는 기독교 유신론은 그 세계관의 기본명제가 하나님의 본질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본질에 근거한 명제들을 숙고함으로써 앞서 제시된 필요성에 근거한 명제들을 숙고함으로써 앞서 제시된 필요성에 어떤 해답을 줄 수 있는가를 알아 본다.
첫째 '하나님은 무한하고, (삼위의) 인격이시며, 초월하시고 내재하시며, 주권자이시며, 善하시다' 라는 명제에서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 - 자존(自存) - 과 그의 속성의 정수인 선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출 3:14)라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다른 모든 실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최고의 실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선은 거룩과 사랑이라는 두가지 방법으로 표현되고, 여기에서 우리는 의의 절대적 표준(하나님의 속성에서 발견되는, 요일 1:5)과 그래도 인간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사실(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요일 4:16)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또다른 명제, '윤리는 초월적이고, 그것은 선(거룩한 사랑)으로서의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고 있다.'의 가르침을 통해서, 윤리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며, 도덕의 기준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그 표준이 되심을 알 수 있다.
세째 명제로는 '하나님은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개방체계(open system)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체(Uniformify)로 운행하도록 하셨다.' 이 명제에서 하나님은 어떠한 '선재하는 물질'이 없는 상태 - 시간, 공간 물질까지도 - 에서 우주를 창조하셨고, 이 우주는 질서가 있으며, 또한 하나님과 사람의 재조정에 의하여 변경이 가능하葡도록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미래의 우주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지 숙고하는 책임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네째 명제로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인격, 자기초월성, 지성, 도덕성, 사회성, 창조성 등을 지닌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창 1:26, 27) 지음을 받았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인격의 속성을 갖고 있으며, 참다운 창조를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인간창조라는 명제와 더불어 다음의 명제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은, 비록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훼손되었다. 한편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구속하시고 선을 회복시키는 과정을 시작하셨다. 물론 인간은 이 구속의 사실을 접하고도 그 구속을 거부하는 길은 택할 수도 있다' 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창조-타락-구속-영화'의 네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다른 모든 피조물과 같이 인간도 선하게 창조된 자로서 매일의 생활에서 그 성품을 드러내는 것에서 벗어난 존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 참여하므로써, 이제 원래의 창조된 의도대로 되는 영화(glorified)의 과정에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구속받은 그 순간부터 개인의 삶은 천국으로의 연속 시간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의 명제 '역사는 직선적인 것이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섭취시켜가는 의미있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라는 것에 접근한다. 비록 인간의 행위가 혼란하게 보일지라도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으며, 그것은 창조-타락-구속-영화의 길을 가는 것이다.
여섯째 명제로는 '인간은 죽음은 하나님 및 그의 백성과 함께 누리는 생명의 문이든지, 인간의 갈망을 궁극적으로 채워주실 유일하신 분과 영원히 갈라서는 문이든지 둘 중 하나이다' 에서 영화된 존재로 변화된 자들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천국과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된 지옥이 있음을 분명히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교통하고 있다'는 명제에서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의 교통하심은 '계시'라고 표현되는 자연을 통한 일반계시와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한 특별계시로 이루어진다. 특별계시의 정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따라서 사람들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창조주이시자, 지지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자요 친구가 되신 우주의 주님이신 하나님은 바로 사람과 교통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들고 싶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할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과 순종과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된다.
참고서적 : 1) 제임스 사이어 지음, 김헌수 옮김,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IVP. 1985. 2) 송인규, '죄많은 이세상으로 충분한가',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85.
자료출처 : 양승훈 (벵쿠버 기독교 세계관 대학원 Director) |
기독교 세계관 원동연 (한국에너지연구소 선임연구원, 재료공학h.D)
1. 서론
현재 우리의 사회전반을 살펴보면 무신론과 인본주의가 이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러한 분위기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오염되고 회의와 불신 속에 빠지기도 한다. 이로 인해 배금주의, 인본주의, 윤리적 타락 등이 기독교 내에까지 은밀하게 침투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방해하고 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서 과학주의, 기술주의, 경제주의가 현대문화의 특징을 형성하며 우상화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학혁명과 대규모의 기술개방은 인간에게 힘을 부여했고, 인간은 스스로 과학기술을 통해 자연세계를 정복함으로써 낙원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과학을 절대적 위치에 끌어올렸는데 이것이 바로 과학주의이다. 과학주의는 자연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 정복하기 위한 기술지배를 필연적으로 잉태시켰고,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물질적 부요라는 경제주의의 가속적 발달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인간의 사고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 중에 하나는 실생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관과 사고 방식대로 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 경우 세상과의 갈등과 긴장상태를 회피하려고 이원론적 사살이 도입되었다. 쪼들리는 시간문제, 직책에 따르는 여러 가지 섭외활동, 학교에서의 경쟁, 승진시 거쳐야 할 복잡한 인간관계, 단순한 흑백논리로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도덕적 회색지대 등등이 엄청난 중압감을 가지고 들이닥칠 때 대부분의 기독학생이나 사회인들은 오래 견디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행동패턴을 정하게 된다. 이때 대표적인 행동패턴으로 타협, 분리, 이원론적 태도로 대별된다. 타협형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관을 포기하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한다. 분리형은 갈등과 싸움을 견디기 힘들어 하나님에 대한 이상적 친화 상태를 유발하여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한다. 이원론적 태도는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채택하는 것으로 이중적인 가치관, 행동양식, 목표를 가지기 때문에, 갈등도, 문제의식도 없이 둔화되어 버린 '신앙적 지킬박사와 하이드' 라고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여 '이건 신앙과 무관한 일이니 나도 남들처럼 적당히 하자' 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신자들에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크게 두가지 지상명령을 하고 있다. 첫째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져있는 전도하라는 명령이다 (마 9:28, 28:19, 행 1:8, 딤후 4:2). 둘째는 문화적 명령으로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창 1:28). 이 두명령을 두고 어느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하다고 얘기하긴 어렵다. 이두가지 명령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분리하여 생각한다는 것도 어색하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 때문에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전도명령에 비해 문화적 명령은 인간타락 이전에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점에서 좀더 본래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전 존재와 인식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며 전 인격적 변화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고후 5: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수많은 신분이나 자격에 추가된 또 하나의 신분이나 자격이 될 수 없다.
Kenneth Herman의 표현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성경적 견해는 우리가 인간이 된다는 말과 동등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자신의 전 존재와 행하는 모든 일을 대표하고 규정하며 특징지워야한다. 자신의 인간됨이 자신의 모든 일을 특정짓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행위를 특징짓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됨을 특징짓는 행위는 성경공부, 예배, 전도, 헌금, 설교등의 영역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직장생활, 취미생활, 가정생활, 학문활동 등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 그런즉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고전 10:31)고 권면한다.
2. 학문과 신앙
사단의 궤계를 대적할 뿐 아니라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그의 의를 구하는 일에 있어서 시급한 일은 복음에 대한 깊고 폭넓은 이해와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사명에 대한 체계적 정립이라고 생각된다. 이 일을 위해서는 성경에 기초한 올바른 교육과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초한 학문연구는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학문세계의 인본주의화는 우려의 단계를 넘어서고 있다. 무신론과 인본주의적 경향이 학문연구의 본래적 특징인양 간주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풍토가 되었다. 학문연구의 탈가치 ( value-free)를 주장하면서 새로운 인본주의적 가치를 학문체계에 도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유물주의, 행동주의, 과학주의 등). 학문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제거하는 것이 학문을 학문답게 한다는 의도적 반역이 오늘날 당연시되고 있다. 학문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이처럼 위축된 것은 학문은 세상에 속한 것이고 우리는 신앙만 시키면 된다는 이방 종교적 이원론이 우리의 뇌리속에 뿌리깊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왜 기독교적 학문연구를 해야 하는가?
첫째,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다른 신을 섬긴다. 이것은 Augustine이 말한 소위 '종교적 집중 (religious concetration)'윈리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자신을 초월한 어떤 것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 사도 바울도 인간의 경배대상은 창조주가 아니면 창조의 어떤 측면(피조물)이라고 말했다 (롬 8:18-22). 따라서 모든 인간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어떤 견해 즉, 세계관(world view)을 가지고 자신의 주위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잘못된 신앙은 피조물을 창조주의 자리까지 격상시키는데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합리주의로부터 marxism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의 절대화의 기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세상에서 이런 우상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올바른 학문적 조망을 위한 선결문제이다. 둘째, 사람은 자기들이 섬기는 대상의 형상에 따라 자기를 형성해간다. 즉, 인간은 자기가 경배하는 대상을 닮아간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자기를 형성해 나가는 일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학문에 대한 견해도 그들이 섬기며 경배하는 대상을 따라 형성되어간다. 한 예로 철학을 생각해보자. 철학자체의 뿌리는 철학이 아님을 유의해야한다.
철학도 보다 근본적인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철학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면 어떤 피조물을 향한 신앙적 결단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실용주의 철학, Kant 철학이 있고 하나님께 근거한 기독교 철학이 있는 것이다. 셋째, 학문연구를 창조의 다양한 측면들을 연구하는 활동으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근본에 있어서 창조의 질서를 연구하지 않는 학문 연구를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는 물리, 화학, 생물, 지학 등의 자연과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문과학, 사회과학도 여기에 포함된다. 인문과학, 사회과학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사회적 기구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의 또 다른 의미를 창조속에는 사실을 추구하는 자연과학과, 가치를 추구하는 인문과학 사이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 구분은 연구대상이 창조속의 사물들인가 추상적 개념인가에 따른 것이데,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자연세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논리의 세계까지 만드셨기 때문이다 (골 1:15-16).
기독교적 학문연구는 학문세계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이 시대에 뿌리깊게 스며들어 있는 이방사상의 추방과 배교적인 시대정신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피조세계를 연구함으로 피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발견케 한다 (롬 1: 19-20)는 측면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연구한 결과를 인류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기독교적 학문연구가 효과적으로 수행되면, 학문과 신앙은 전통적인 반목관계를 청산하고 피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것들을 종합해 볼 때 학문적 연구에 있어서 궁극적 한계는 연구의 주제나 형태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학문분야의 조망을 형성하는 개개인의 세계관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학문적으로 기독교적이 되게 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3. 기독교적 세게관
세계관은 그 정의부터 사람마다 의견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세계관의 범주에 어떤 것이 포함되어야 하는 가에도 사람마다 상당한 견해차이가 있다. 본고에서는 J.Sire 교수의 세계관에 관한 견해가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비교적 포괄적이면서도 체계적이라 생각되어 간단히 소개한다. Sire 교수는 그의 저서 (The Universe Next Door)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IVP)에서 세계관이란 '이세상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나 가정들'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이 세상의 근본적 구상요소란 다음 다섯가지 질문에 대한 답으로 구성되어있다. (1)참된 최고의 실제는 무엇인가? (2) 인간이란 무엇인가? (3) 인간이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4)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 (5) 인간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해 기독교 세계관은 자연주의, 이신론, 허무주의 , 실존주의, 동양 범신론 등의 세계관과는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
(1) 우주의 참된 최고의 실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혹자는 물질, 여러 신들, 사물들속에 깃들어 있는 사상등 다양한 대답을 할지 모르나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이 하나님은 여러 신들 가운데 있는 또 하나의 신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시고 인격적, 초원적, 내재적, 주권적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셨고 또한 유지하시는 유일하신 분이다.
(2)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인간관의 질문에 대해 유물론적 세계관에서는 매우 정교한 전기 화학적 기계라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 그래서 인격과 자기초월성, 지성, 도덕성, 사회성, 창조성 등을 가진 존재라고 본다. 비록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이 형상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통해 회복가능한 존재라고 본다.
(3) 인간이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사망관의 질문에 대해 혹자는 개체성과 인격의 소멸, 다른형태로 탄생하기 위해 잠시 쉬는 단계등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은 죽음이란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누리는 생명의 문이든지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는 사망의 문이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본다.
(4)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혹자는 문화적, 육체적 생존을 향한 동력, 혹은 인간에 대한 긍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도덕은 초월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선한 속성이 세상의 모든 도덕 기준들의 기준이 되므로 상황윤리를 부정한다.
(5)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하는 역사관의 질문에 대해 혹자는 지상낙원을 이룩해 나가는 과정, 신들의 계획을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 끝없이 순환하는 수레바퀴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역사는 직선적인 것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켜 나가는 의미있는 사건들의 연속이라고 본다. 즉, 역사는 인간의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과 관심의 기록이며 하나님의 신적인 계획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 다음에는 이런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초하며 기독교 신앙과 가장 문제시되는 것 중에의 하나인 자연과학의 문제를 조망해 봄으로써 현 시대에 있어서 과학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검토하였다.
4. 과학과 과학주의
16, 17세기, Newton과 Galileo 등의 역학을 중심으로 일어난 과학혁명 이래 과학에 대한 인간의 신뢰는 급격히 증가해 왔다. 그리스 관념론적 철학으로부터, F.Bacon의 경험주의 철학으로의 전환으로 특징지을수 있는 과학혁명은 그후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체계적인 과학적 지식을 축적하게 하였고 18세기 Lavoise, Dalton 등의 화학혁명, 산업혁명, 19세기 생물학 혁명, 20세기 현대물리학의 탄생을 거치면서 인류의 미래에 대한 장미빛의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듯 했다. 그러나 20세기 비극적인 양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전 인류를 일시에 파멸시킬 수 있는 가공할 핵무기의 개발과 끊임없는 군비경쟁 등은 종래 과학문명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과학에 대한 인간의 순진한 기대는 많이 변했지만, 과학의 위력에 대한 인간의 경외감은 끊임없이 증대되어 왔다. 컴퓨터와 유전공학의 무한한 가능성, 가정, 사무실, 공장의 자동화, 이 모든 것들을 역동적으로 연결해 주는 고도 정보화 사회의 도래 등 현대 과학 문명을 특징짓는 대표적 업적들은 거의 대부분 지나간 반세기 동안에 이룩된 것들이다. 과학적 방법론의 도입으로 인한 폭발적 지식의 증가와 이로 인한 문명의 급속화는 사람들로 과학 그 자체에 대한 어떤 신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부여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곧 과학주의(Scientism)이다. 과학주의의 주장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신념들은 경험이나 실험, 즉 과학적 방법에 의해 검증되어햐 하며 과학적 방법만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깃이다. 둘째, 계량화된 것만 과학에 의해 알려질 수 있으므로 오직 측정 가능한 물리적 실재들만이 알려질 수 있다. 셋째, 과학은 전제가 없으며 객관적이다. 즉, 과학은 주관의 여지가 전혀없는 순수 객관적인 학문이므로 무전제에서 출발한다. 넷째, 모든 우주는 기계적이며 인과율의 사슬(casual chain)로 연결되기 때문에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 다섯째, 과학은 자기의 고유한 방법론을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여섯째, 과학적 방법만이 진리에 이르는 참된 방법이므로 다른 학문도 과학적 방법으로 하여야 한다.
위의 과학주의의 주장들은 외형적으로 보면 탈가치화, 객관화, 계량화 등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가치와 주관이 전혀 섞여지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첫째 주장은 실험주의(experimentalism)이며, 둘째 주장은 유물주의(materialism)이며, 넷째 주장은 결정주의 (determinism)이며, 다섯째 주장은 진보주의(progressism)이며, 여섯 번째 주장은 방법론적 환원주의(methodological reductionism)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근본적으로 과학주의는 존재론이나 인식론에 있어서는 자연주의(naturalism)를 내용에 있어서는 합리주의 (rationalism)를, 정신에 있어서는 휴머니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을 요약해보면 과학주의란 인간이 하나님이 주권과 섭리를 삭감하고 인간 그 자신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이론을 구축하는 데서 나온 자연스런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 과학자는 팽배한 과학주의에 대해 특히 주의를 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과학주의는 과학의 결과가 아닌 과학에 대한 신앙이며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과학의 가치에 대한 하나의 견해이기 때문이다. 다분히 종교적인 색채, 그것도 기독교신앙에 반대되는 종교적인 색채를 갖고 있다. Runner는 '과학주의의 승리는 기독교 신앙의 패배이며 그 역도 사실이다.'고 했다. 과학주의가 성경과 상치되듯 종교적 주장이라한다면 기독교인 과학자는 과학에서 과학주의 대신 성경적 입장을 정립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현상을 설명하는데 매우 효과적이고 성공적인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부정하거나, 또 과학기술이 우리들의 물질세계에 미친 지대한 공헌을 무시하거나 경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문제는 과학적 방법론과 그 한계를 이해하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며 여러 가지 인간활동중 하나에 불과하며 이 세상에는 그것보다도 더 근본적이며 중요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과학적 방법론의 적용대상은 실험과 관찰이 가능하고, 계수화할 수 있는 물질계에 한하며, 행복이 무엇이며 도덕적인 가치와 기준은 무엇인가? 초자연적인 존재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분이신가? 등과 같은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의문에 대해서는 현대과학이 전혀 답을 줄 수 없다.
토아스 아퀴나스 이래 많은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이성과 논리적 방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그리고 자연과학이 결코 신의 존재를 부정할 것이라는 일반 대중의 잘못된 기대가 있었지만, 자연과학적 방법론으로는 신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늘날 현대과학은 증명이 없이는 믿지 않는 것이고, 증명없이 믿는 것이 곧 신앙이다. 기독교 신앙과 자연과학은 적대적 관계가 아니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다.
5. 창조과학과 신앙
창조이론은 만물의 근원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는 이론이다. 한 개인이 창조이론을 받아들이느냐 진화이론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에 대한 조망이 전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기원에 관한 개인의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무에서 천지만물을 만드셨다고 믿는다. 또한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자연만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라면 성경기독과 자연에 나타나있는 증거들 간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고 믿는다.
오늘날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생명체는 성경의 기록대로 창조 주간에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한꺼번에 그 종류대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저절로 오랜 시간동안에 진화한 결과라는 진화론이 생물학, 지질학, 고생물학, 고고인류학 분야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도 진화론을 가장 확실한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진화론을 반대하거나 비평하는 사람은 과학을 알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받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진화론은 이들 몇몇 자연과학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인문과학, 사회과학, 나아가 예술에 이르는 전 학문분야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 이 시대의 시대정신을 g여성하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은 결코 과학활동의 결과가 아니라 과학의 전제고 출발점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진화론은 먼저 그 자체가 뚜렷한 과학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배격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진화론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에 배격되어야 한다. 사실 역사상 나타난 수많은 이단학설 가운데서 진화론 만큼 복음전파에 해를 끼친 이론도 없었다.
소위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이러한 진화론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창조론의 증거를 제시하는데는 신학적 논의만으로 부족하게 느껴진다. 과학시대에 살면서 실증주의 정신에 기초한 교육을 받았거나 받고 있는 세대들에게, 성경 첫장에 나타난 창조의 증거를 과학적으로 제시하는 일을 매우 설득력있는 방법이다. 특히 진화론일색의 교과서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중,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진화론의 허구를 지적하고 창조론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과학에 대한 성경적 견해는 처음부터 기독교 유신론적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다. 주의론적이고 유신론적인 기독교 유신론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연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분명히 나타나 있기 때문에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롬 1:19-20). 오직 어리석은 자만이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시 14:1)고 한다. 성경은 과학이나 과학을 할 수 있는 재능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문화활동의 일부로 과학활동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간주한다 (창 1: 28). 또한 과학의 연구대상이 되는 자연계는 사탄의 세계가 아니고 하나님의 피조세계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연구는 피조세계의 자연과학적 측면을 연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인의 과학적인 사명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과학을 이시대의 새로운 우상으로, 과학자를 이 시대의 새로운 제사장으로 되게 하는 과학주의나 이와 유사한 반 기독적 조류를 비판하므로 과학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확립해야 한다. 둘째, 피조세계의 자연과학적 측면을 연구하므로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능력과 신성을 발견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연구된 결과가 인류의 복리를 위해 사용되어 이웃 사랑이 실천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자료출처 : 원동연 (한국에너지연구소 선임연구원, 재료공학h.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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