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4:24)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행 24: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행 24: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행 24:27)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가 일에 성공을 원하지만 성공한 사람보다 실패 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계 등산인들의 마지막 표적인 히말라야에는 8,000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14개가 있는데 전 세계에서 14좌를 완등한 사람은 고작 10명 뿐이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 아시아 최초로 완등한 엄홍철씨를 포함해서 한국인이 3명이나 되기 때문에 한국은 골프나 축구만이 아니라 등산에 있어서도 세계에 강국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가운데 엄홍철 대장에게 도전을 주었다는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책의 서문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햇살 뜨거운 어느 여름날 오후 개구리 세 마리가 나뭇잎에 올라탄 채 유유히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나뭇잎이 강의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그 중 한 마리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결심했다는 듯 단호하게 외쳤습니다. “너무 더워, 난 물속으로 뛰어들 테야?” 다른 개구리들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떡였다. 자, 이제 나뭇잎에는 몇 마리의 개구리가 남았을까요? 물론 두 마리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답이 아닙니다. 미안하지만 나뭇잎 위에는 여전히 개구리 세 마리가 남았습니다. 왠지 압니까? 뛰어 들겠다는 결심과 뛰어드는 실천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덥다고 투정하면서 물속에 뛰어드는 결단을 하지 못한 개구리가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사람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똑같은 처지의 사람이지만 자기에게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것을 끝까지 붙잡은 사람과, 그 기회를 놓쳐 버린 차이임을 오늘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변화를 받은 사도 바울
예수 그리스도는 특별한 사람만 믿는 것은 아니라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어느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서는 인종, 문화, 신분, 종교의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어떤 사람은 쉽게 예수를 믿을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라고 스스럼없이 전도를 하는가하면, 정반대로 어떤 사람은 송곳도 들어갈 틈도 보이지 않아 아예 말조차 부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생명을 걸고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도가 되기는 고사하고, 자기 혼자 예수 믿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바로크 화가 카라바조의 1600년 작품 중에 보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그림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사울이라는 바리새인이 다마스쿠스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러 가다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3-9)라는 하나님의 음성과 눈부신 빛에 눈이 멀어 말에서 떨어진 후 기독교로 개종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 그림에서 사울은 다리가 힘없이 벌어져 있고, 팔은 허공을 향하고 있으며, 멀어버린 눈을 그대로 감고 있는 무기력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 한 가운데에 해당하는 밝은 부분은 말이 차지하는데, 말은 갑자기 떨어진 주인을 밟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둠 속에 서 있는 마부는 말에서 떨어진 바울로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고, 말이 괜찮은지 살피는 그림입니다.
물론 그 그림의 주제는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개종 장면입니다. 바울이 과거에 어떤 종교를 믿었었고 어떤 일을 했었고 어떤 성격의 소유자이었는가 하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그러한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을 할 수 있는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평소 예수 그리스도, 교회,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가 일어날 정도로 기독교에 대해 혐오감을 갖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일지라도 그런 사람을 어떻게 설득하여 기독교인으로 개종을 시킬 사람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바울은 자기 혼자 기독교인들을 경멸하는 것으로 만족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자기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 자기가 세상에서 해야 할 최우선적인 일이 기독교를 말살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기독교를 박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인민재판식으로 재판하여 집단적으로 돌팔매질을 하여 죽이는 무자비한 일에 선봉을 섰던 괴수였습니다.
그 때 죽임을 당한 사람이 바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교우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던 스데반 집사였으며 그 일을 사도 바울이 개종하기 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고백하였습니다.
(행 22: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과거에 사도 바울은 틈만 나면 자기 자랑에 급급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틈만 있으면 자기의 부끄러웠던 과거와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그 후 사도 바울은 과거에 자기가 가장 싫어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위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겪으면서도 기뻐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변화가 불가능해 보였던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찾아와 주셨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은 후부터 그 처럼 180도로 역전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은 불행한 삶을 살았나요? 과거처럼 남을 해치고 죽이는 일을 하며 살았나요?
그렇지 않으면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불행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선한 일만 하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나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 가고 오는 역사 속에 위대한 성자요, 위대한 선교사요, 위대한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비록 열두 제자가 아니지만 오히려 열두 제자보다 더 열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설령 오늘 내가 예수가 누구인지 잘 모르고, 설령 잘 안다고 할지라도 적대감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이 시간 바울을 변화시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얼마든지 바울처럼 인생의 대역전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2. 바울을 고소한 사람들
오늘 성경 본문을 보면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변화를 칭찬을 못할지언정 미워하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로마 총독에게 고소를 하였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 천하를 호령하던 시대로 로마 황제 시저에게 파송을 받은 로마 총독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만큼 대단하였습니다.
그 예 중에 하나가 바로 예수님을 유죄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사람이 바로 로마 총독 빌라도였든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벨릭스도 빌라도 못지않은 권세를 가진 로마 총독으로 평소 로마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서슴치 않고 강압정치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세 아내가 있었었는데 그 중에 세 번째 아내인 드루실라는 유대인으로 남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와 같은 벨릭스 총독에 재판을 받게 된 까닭은 로마 시민권자이면서 동시에 동족 유대지도자들의 고소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바울을 고소한 사람들은 과거 바울과 함께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한 팀이었던 유대교의 지도자들로 바울을 유죄로 몰기 위해 많은 돈을 주고 말 잘하는 변사 더둘로를 사서 고소하게 하였습니다.
(행 24:1)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1) 총독에게 아부하는 사람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제국 식민지로 막대한 피해를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둘로는 오로지 사도 바울을 유죄로 몰기 위한 일념으로 벨릭스 총독의 환심을 사기위해 유대민족의 자존심을 짓밟으면서 온갖 아첨의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행 24:3)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
여기서 ‘개량’이라는 말은 완전히 ‘곧추 세우다, 매우 가치 있는 행위’라는 뜻으로 로마 정부 때문에 유대나라가 발전하게 된 것을 무척 감사하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과거 우리나라가 일본 사람들에게 36년간 압제를 당하면 온갖 착취와 수모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들은 오히려 일본을 극찬하는 글을 읽고 분노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현직 대학의 한oo 교수는 일제 강점이 오히려 은혜라고 말하면서 친일파의 주장을 대변하는 발언을 하여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첫째, 일본이 아니면 조선은 러시아에게 먹혔을 것이고, 그랬다면 우리 민족은 스탈린의 분열책에 의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소수 민족으로 전락했을 거라고 하였다. 과연 그랬을까?
둘째, 일본은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앞당기게 한 은인처럼 미화하였습니다. 과연 일본이 강점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근대화되지 못했을까요?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입니까? 일본보다 10년 이상 늦게 출발한 반도체와 컴퓨터, 아이티 산업의 급성장은 지난해 삼성전자가 단일 회사로서 100억불의 순수익을 올렸는데, 이는 일본의 모든 전자회사가 올린 총합보다도 많은 액수라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은 변사 더둘로의 말이 마치 한 교수와 같은 논리였습니다.
이는 오로지 로마 총독의 환심을 사서 바울에게 불리한 판결을 받게 하기 위해 아첨하는 것이지만 이미 민족적 양심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2) 바울을 유죄로 몰기 위한 위증
그 다음 사도 바울의 과거와 현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유대 지도자들이 로마 총독에게 고소한 바울의 죄목은 무엇입니까?
(행 24: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1) 바울이 전파하는 기독교가 염병처럼 급속하게 온 천하에 퍼지게 함으로 유대인들을 선동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염병은 페스트와 같은 치명적인 전염병을 뜻합니다.
2)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는 사람을 구원하는 좋은 종교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이단이며 바울은 그들의 괴수라는 뜻입니다.
3) 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장 거룩하게 여기는 성전을 더럽히려는 것을 잡았다는 합니다. 그러므로 벨릭스 총독이 그 사실을 심문하여 재판해달라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안에는 그와 같은 주장이 위증이며, 당연히 바울은 무죄라는 사실을 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들의 기세에 눌려 어느 한 사람 바울의 무죄를 변호해 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자기를 지켜야만 하는 것을 깨닫고 벨릭스 총독에게 조목조목 자신의 무죄함을 변론하였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 산헤드린 공회에서처럼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부활을 증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행 24:20)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행 24:21)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사도 바울은 자신을 재판하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으며, 아무런 죄가 없이 억울하게 왜 고소를 당하게 되었는지를 조목조목 해명하였습니다.
1)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을 뿐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분명히 살아나셨기 때문임을 되풀이해서 증거 하였습니다.
2) 그것은 바울이 미쳤기 때문이거나, 제자들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구약의 예언이고,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신 약속이고, 바울 자신이 친히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세상에 어느 누구도 부활하신 이가 없고 어느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됨을 바울이 깨달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부활을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3. 벨릭스 총독의 기회
바울의 변론을 들은 벨릭스 총독은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고소한 내용에 대해서 어느 편도 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기독교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지만 금번 기회에 바울을 통해서 좀 더 알고 싶다는 관심을 표명하면서 판결을 미루었습니다.
(행 24:22)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눈으로 보아야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들어야 생겨지는 종교라면 지금 벨릭스는 최고의 전도자에게 복음을 듣고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귀로 듣는 체험을 가진 증인이었습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벨릭스는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자기가 누구보다 사랑하는 유대인 애첩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에게 직접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하게 듣기 위해 자리를 마련할 정도로 매우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습니다.
(행 24:24)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만일 벨릭스가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듣고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면 바울 사도 못지않게 큰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벨릭스에게 예수는 누구이고 어떻게 믿어야하는가 하는 기독교의 초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은 비록 벨릭스가 로마의 총독이지만 예수를 믿고 보다 더 성결한 삶을 위해 지난날 잘못된 죄를 회개하여야만 장차 오는 심판을 면할 수 있음에 대해서 담대하게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벨릭스 총독이 그 같은 바울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만 하였다면 세상에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의 큰 일꾼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으나 안타깝게도 뒤로 미룸으로 그에게 찾아온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행 24: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여기서 강론한다는 말은 계속해서 설교를 하는 것을 뜻하며, 틈이 있으면 이라는 말은 어느 날을 정하지 않고 적당한 때가 되면 부르겠다는 무책임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벨릭스 총독이 바울처럼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린 까닭은 무엇일까요?
1) 자신의 부도덕한 생활로 인한 양심의 가책 때문이며
2) 장차 받을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며
3) 회개하기만 하면 구원 얻을 수 있다는 사죄의 은총을 확신하지 못한 때문이며
4)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많은 헌금을 모아 가지고 왔음을 알고 돈을 뜯어내려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행 24: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5) 벨릭스는 사도 바울의 무죄함을 알면서도 풀어주지 못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으려고 질질 끌며 이년동안 연금 상태로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찾아온 성공의 기회를 벨릭스와 같은 죄와 불신과 불회개와 돈과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고 결단을 못내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세월은 벨릭스를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는 덧없이 흘러가버리고 결국 벨릭스는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소환을 받고, 베스도가 새로운 총독이 되었기 때문에 벨릭스는 좋은 구원의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습니다.
(행 24:27)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그렇다면 바울이 이년 동안 벨릭스를 전도하고자 그렇게 노력한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바울은 또 다시 새로운 후임 총독 베스도에게 재판을 받으면서 또 다시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를 반대하고 핍박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던 바울과 기독교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이었던 벨릭스 총독을 비교하여 봅시다.
과연 두 사람 중에서 어느 누가 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을 가능성이 더 많은 사람이었습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바울보다는 벨릭스라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1)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는 즉시 결단하고 과거의 잘못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돌이켜 새 사람으로 변화를 받아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2) 벨릭스는 그 같은 체험을 가진 사도 바울에게 이년 동안 부활의 복음을 자세히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지만 결단에 옮기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는 동안 좋은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돈과 지식과 권세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고, 못할 것이 없는 것 같은 세상입니다.
세상에는 그 무엇으로도 바꾸거나 사거나 빼앗을 수 없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나의 인생길을 생명의 길로 역전시키는 일입니다.
우리가 알고 보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너 나를 막론하고 이미 죽음으로 가는 열차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차창으로 지나치는 세상 풍경을 보면서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벨릭스처럼 기회를 놓치지 말고, 사도 바울처럼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세상에 어느 누구든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믿고, 지난 날 불신앙의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기만 하면, 사망의 역으로 가는 우리를 영생의 역으로 변환시켜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마음으로 믿는 것을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이 시간 결단을 하고 입술로 주님께 고백하는 일입니다.
단지 나의 과거를 그대로 예수님께 가지고 나아가 내려놓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기듯이 단지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나의 남은 생을 내가 주인이 되지 않고 예수님께 운전대를 맡기는 삶을 살겠노라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기만 하면 더 좋은 미래가 주안에서 준비되어 있음을 믿고 이 시간 주님이 내게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말고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그 결단을 벨릭스처럼 미루지 말고, 바울처럼 즉시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실패를 성공의 기회로 바꾸는 12가지 황금률이라는 책의 저자 윌리 잘리라는 사람은 성공하는 사람에게는 비전(Vision), 결단(Decision), 행동(Action), 열망(Desire) 이라는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주 적절한 지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확고한 결단과 행동 없이는 아무리 비전과 열망이 클지라도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핍박자 바울 같은 사람도 회개하고 예수 믿고 사도가 되었다면 오늘의 나도 그만 못할 것이 없음을 믿고 주님이 내게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말고 사도 바울처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딤전 1: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 예수께서 먼저 나에게 끝없이 참아 주심을 보이셔서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려 하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