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수용과정에 나타난 무교의 영향
김민철, 김경희, 윤재형, 정소영
Ⅰ들어가며
문화의 중심에는 종교가 있다. 우리의 민족문화의 중심에 서있다고 볼 수 있는 종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물음에 우리 고유의 무교라고 간단하게 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 민족은 오랜 기간동안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우세한 중국의 이웃에서 살아와야만 했다. 이 중국을 통하여 우세한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종교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5세기경부터 불교와 도교, 그리고 유교가 들어와 우리의 문화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종교들을 고려하지 않고서 우리의 민족문화를 언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된 것이다. 혹자는 오히려 우리의 문화에 더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은 무교가 아니라 오히려 유교 내지는 불교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러한 주장에도 상당히 일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소한 5세기 경까지 우리민족의 유일한 종교는 무교라고 할 수 있다. 무교는 바로 우리 민족 고유의 토착신앙인 것이다. 무교가 새롭게 들어온 종교들과 깊은 교섭관계를 가졌던 것이고, 이로인해 종교의 혼합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문화의 중심에 서 있는 종교는 어느 한 종교라기 보다는 이들 모든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교를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무교가 우리 민족문화의 근원이기 때문이며 외래 문화인 불교나 유교는 이 무교의 바탕위에서 수용되고 우리의 문화로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조가 처음 관심을 가졌던 문제는 종교와 종교가 서로 만나면 어떠한 반응을 보이게 되는가 였다. 종교가 문화를 대표한다면 종교의 만남은 문화와 문화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문화와 문화의 만남으로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가가 우리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 민족문화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무교와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불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무교의 특성과 전개, 그리고 불교등 외래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결과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지를 살펴보고, 우리의 토착문화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민중은 외래종교인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기존 토착문화인 무교를 그 속에 어떻게 담아내고 있는가를 고찰해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착신앙의 영향으로 어떠한 차이가 나타나는지를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국과 일본의 불교수용 형태를 가람배치를 통해서 비교해 보고자 하였다.
Ⅱ민족문화로서의 무교
우리는 먼저 무교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한 종교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종교의 현황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전개도 함께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이제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에 나타난 특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1.무교의 개념
논의에 들어가기 앞서서 우리는 먼저 용어의 개념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고 한다. 흔히들 사람들은 무교와 무속, 그리고 민간신앙과 같은 용어를 별 구별없이 사용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많은 혼란과 오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의의 정확성을 위해서 이들 세 개념을 구별하고자 한다. 학자들마다 이에 대한 개념정의를 조금씩 다르게 하고 있지만 우리 조는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먼저 무교란 선사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으로 나타났던 샤머니즘적인 종교 현상 전체에 대한 총칭으로 사용한다. 이에 반해 무속이란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민간 신앙 가운데 이른바 샤머니즘이라고 말하는 현상에 대한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용어에는 무속이란 부정적이고 미개한 것이라는 선입견이 들어 있다. 결국 무속은 무교의 일부요, 고대 무교의 잔류 현상인 것이며, 오늘날 존재하는 많은 민간신앙 중 가장 중요한 형태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논의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한국의 무교인 것이다.
2.무교의 원형으로서의 고대신앙 의례(儀禮)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무교의 원형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이것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무교의 역사적 전개와 현황, 그리고 특성을 살피기에 알아두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선조의 종교 생활에 관한 첫 기록은 3세기 진나라에서 편찬한 삼국지 가운데 <위지 동이전>에 있다. 그 기록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신앙 생활의 특징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느님(天神)을 섬기고 이에 제사를 지냈다. 때로는 산신(産神)이나 귀신도 함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즉, 이 세상을 지배하고 주관하는 지고신인 하느님과 함께 각종 기능적인 신령들고 믿고 있었다. 둘째, 제사는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음주가무는 사람들을 탈아경 또는 활홀경으로 이끌어 갔는데 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신령과의 직접적인 교제인 입신경을 경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제사드리는 때는 농사 전후인 5월이나 10월, 그리고 전시(戰時)였다. 즉 신령의 힘을 빌어서 풍요한 생산과 평안을 비는 것이 제사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넷째, 천군과 같은 사제자, 곧 무당이 각 고을마다 존재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통해 우리는 무교원형의 대강을 살펴볼 수 있다. 즉 무교란 가무를 통해 신령과 직접교제를 가지며, 신령의 힘을 빌어 인간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종교현상이었다.
3.무교의 전개와 그 역사적 개관
무교는 하나의 종교현상이다. 그런데 한국의 무교는 5세기경부터 외래의 종교들과의 교섭관계 속에서 전개되어 왔다. 이는 우리가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우월했던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을 통해 들어와 한국 문화에 오랫동안 많은 영향을 주고 오늘날에도 그 영향이 계속되고 있는 유교와 불교, 그리고 불교와 혼합되어서 들어온 도교와의 관계 속에서 무교는 존속되었다. 즉 우리가 현재보고 있는 무속은 다분히 이들 세 종교의 요소들이 상당 부분 혼합되어 있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영향 속에서 무교는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는지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무교는 5세기 경 부터 중국에서 전해온 유교, 불교, 도교 등과 교섭 관계를 갖게되며, 이를 통해 무교의 전승 또는 전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방향으로 흘러갔다.
첫째는 무교의 단순전승이다. 외래 종교문화에 거의 구애됨이 없이 옛 무교의 모습이 그대로 전승되어 간 흐름이 있다. 물론 문화적으로 우세한 다른 종교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기에, 그 종교의 용어나 개념등을 받아들이는 등 다소의 영향은 있었으나 대체로 원형 그대로를 유지한체 전승되어 온 것이다. 그 잔류 현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오늘의 민간 신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무속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종교습합적(宗敎習合的)인 전승이다. 무교와 다른 종교 사이의 습합이지만. 대체로 다른 종교의 형태를 취하면서 그 실제 내용은 무교를 담은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가 지배하던 신라나 고려 시대의 팔관회, 연등회와 같은 것이다. 이들은 외형적으로는 불교의 법회에 속하는 행사들이다. 그런데 원래 불교의 법회는 금욕적인 제회(齊會)나 등공양(燈供養)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실천된 팔관회와 연등회는 주연을 베푼 축제(祝祭)였다. 말하자면 이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던 무교적인 제천의례의 전승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기성종교의 저변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현상이다. 다른 예로는 다음에 좀더 자세하게 살펴볼 사찰에 있는 삼신신앙등이 그 전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는 승화적(昇華的)인 전승이다. 외래 종교를 매개로 무교가 승화된 새 형태의 종교 사상으로 전개되는 흐름이다. 이러한 예로는 신라시대의 화랑도나 조선말기의 동학을 들 수 있다. 화랑도의 경우는 산과들을 돌아다니며 하느님과 사귀되 노래와 춤으로써 서로 즐기는 풍류도를 몸에 지니고 민중을 교화하고 나라를 지키는 도의를 몸에 터득하고자 하였다. 물론 화랑도에 불교등 다른 종교의 영향도 상당히 컸던 것도 사실이지만, 가무로써 하느님과 교제하여 인간문제를 해결하려는 무교가 화랑도에서 높은 문화적 차원으로 승화된 것이라고 한다. 인내천사상을 가지고 세상을 구하려던 동학 역시 그 주요한 부분에서 신인융합(神人融合)에 근거를 둔 옛 신앙의 승화된 종교 현상이리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오늘날에도 한국의 신흥종교운동 속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현상이다.
4.무교의 특성
1)한국무교 구조와 역사에서 살펴본 특성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 무교의 원형과 전개를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제 무교의 구조와 역사에서 나타나는 특성을 몇 가지로 요약하기로 한다.
첫째, 한국 무교는 고대의 신화와 제례(祭禮)로부터 현대의 무속에 이르기까지 일관해서 한국문화사속을 흘러 온 역사적 종교 현상이다. 물론 무교는 오랜 역사를 흘러 오면서 외래종교문화와의 혼합을 겪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들 무속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개의 결과적인 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발전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무교의 기본구조는 여전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외래의 종교문화는 종교적 표상을 풍부히 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무교의 외형적인 특성은 가무(歌舞)로서 신을 섬긴다는 데 있다. 이러한 특성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가무는 신령과 만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며, 이는 신령의 영력(靈力)을 빌어 재난을 물리치고 복을 초래하자는데 있다.
셋째, 무교의 종교적 구조는 부정을 매개로 새로운 세계와 인생을 창조하자는 데 있다. 인간이 자유롭게 신령과 교제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원초적인 신화적 세계로 퇴행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세계가 부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죽음이 요구되는 것인데 이 죽음의 기술을 무교는 음주가무에서 터득하였다.
2)종교 혼합의 유형에서 살펴본 특성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무교의 원형과 그것이 흘러오면서 다른 종교들과 어떻게 영향을 받으면서 전개해 왔는지를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한국의 무교가 고등종교들과 깊은 교섭을 가지면서 그들의 강한 영향 속에서도 나름대로 그 정체성을 보존하면서 존속해 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앞에서 살펴본 무교의 전개를 통해서 종교혼합의 유형과 한국무교의 특성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첫째, 단순전승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 경우는 포섭적 혼합(包攝的 混合)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의 특징은 외래 종교의 각종 요소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무교의 내용을 풍부히 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무교 자체가 어느 정도 조직을 갖추게 되는데 ,이는 결국 풍부한 내용과 그 조직을 통한 문화성을 높이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이 풍부해지고 조직성을 갖추었다고 해서 무교가 지닌 가치관이나 세계관에는 변화를 격지 않았다. 이것은 다만 다른 종교들로부터 각종 요소들을 자유롭게 차용하고 섭취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교가 처음부터 일정하게 율문화된 교리나 조직을 가진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그 성격이 다른 종교에 비해 개방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무제한의 포용성을 가진 종교가 무교라는 의미이다
둘째, 습합전승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 경우는 내재적 습합(內在的 習合)형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불교가 한국의 지배적인 종교로 있었던 신라, 고려 두 왕조 시대에 연등회와 팔관회라는 행사가 있었다. 이것의 명칭과 외형은 불교적인 것이었으나 그 내용면에서는 나라의 태평과 풍년을 비는 고대의 제천의례를 계승한 것이다. 이처럼 왕조가 몇번을 바뀌고 지도적인 이념이 바뀌는 우리의 역사속에서 무교만이 한국의 역사속을 일관되게 흘러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떠한 이유에서 일까? 물론 단순전승의 경우도 있었으나 지배층의 지도 이념을 구성했던 불교나 유교의 저변에서 그들과의 습합을 통해서 존속해 온 것이다. 말하자면 무교는 강한 적응성을 가지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습합된 상태로 존속해온 것이다. 여기서 무교의 적응성을 알 수 있다.
셋째, 승화적 전개를 살펴보자. 이 경우는 승화적 융합과 창조형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무교의 성격중에는 자기 부정을 매개로한 승화라는 것이 있었다. 이러한 승화의 성격이 무교의 전체의 한 존재 양식으로 전용되었던 것이 승화적 전개의 경우이다. 곧 다른 종교문화를 매개로 무교가 자기를 승화시킴으로써 새로운 형태로 종교문화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무교가 지니는 창조성을 발견할 수 있다.
Ⅲ한국의 불교 수용
1.불교의 전래와 수용
우리나라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해진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때이다. 전진으로 부터 온 사신 순도에 의해서였다.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으로 부터였다. 신라는 후에 이 두나라로 부터 받아들여 법흥왕(527)때 공식적으로 불교를 승인하고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그 이후 조선시대에 유교적 정치이념에 의해 억압되기 전까지는 통일신라 고려시대 전체를 통틀어 불교는 국교로서 신앙되었다.
그러나 소수 지배층의 불교 수용형태를 가지고 한국적 불교수용의 특징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수용과정은 외래문화로서의 불교를 토착문화의 기반위에서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지배층의 지배과정에서 삼국이 부족적인 관념에서 탈피하여 분립정신을 청산하고 사상적 통일이나 사회안정에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무속 신앙 대신으로 새로운 고대국가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요청되던 정치적인 목적이 더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학자나 승려와 같은 지도층은 대체로 전달된 외래 종교 자체에 충실하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한국적 불교수용이 나타날 리가 없다. 민족문화의 담지자는 일부의 지배층이 아닌 대다수의 기층민이므로 우리 민족이 불교를 어떻게 수용하여 지금에까지 이어져 내려오는가에 대해서는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중의 불교수용형태를 고찰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2.무교와 한국인의 종교의식구조
앞장에서 토착신앙으로서의 무교의 특성과 역사적 전개를 살펴보았다. 토착신앙은 외래 종교들이 전래되어 오기 이전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서 한국인 전체의 종교의식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민중의 불교 수용형태를 논하기에 앞서 무교에 의한 한국인 일반의 종교의식구조를 찾아봄으로써 한국인이 불교를 받아들인 바탕을 규명해 볼 필요가 있다. 이에 여기서는 무교의 원형으로서의 우리의 대표적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와 고대 의례를 중심으로 그 가치체계를 구하고자 한다.
1)단군신화의 구조
이 신화가 지닌 구조는 다음과 같다.
첫째, 환인(천신)의 아들, 환웅이 강림하여 시조인 단군을 낳고 그로 하여금 나라를 세우고 문화를 창조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또 천신은 그 강림한 곳-태백산에서 산신이 된다. 즉, 산신신앙은 천신신앙과 결부되어 한국인의 기본 신앙 형태를 이루고 있다.
둘째, 단군신화에는 천신에 대응하는 지모신인 웅녀가 나타나는데 웅녀는 천신과 결합하기 위해 자기의 존재양식을 승화해야만 했다. 이 승화과정은 땅속에서 일단 죽었다가 재생하여 결실을 맺는 곡령(穀靈)과 같다. 즉 승화사상의 근저에는 한국인의 기본 신앙 형태의 하나로서 穀神신앙이 있는 것이다.
셋째, 강림한 천신과 승화된 지모의 결합에서 시조가 창조되었고 문화를 창조하게 했다는 신화의 전체적인 구조는 모든 창조와 생산은 신과 인간의 결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고대인의 기본적인 신앙의 표현이다.
2)고대 의례의 구조
고대 의례는 生死福樂을 주재하는 천신에 대한 신앙에서 온 제천의례 였으며, 추수가 끝난 10월에 생산신(곡신)에게도 제를 지낸 농경의례였다. 그리고 그 방식은 연일주야 음주가무로 이루어졌다.
3)한국인의 종교의식구조
단군신화와 고대 의례에 나타난 한국인의 종교적 가치체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생사복락을 주재하는 천신,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바로 수명과 현세의 복락의 추구이며, 추수를 끝내고 생산을 담당하는 곡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바로 부귀의 추구인 것이다. 즉 한국인의 토착신앙인 무교는 현세기복적인 것이다. 그 핵심내용은 오늘날 굿에서 보듯이 祈福과 治病, 祖靈이라는 인생문제의 해결인 것이다.
3.민중의 불교수용형태
한국 불교는 1500년의 긴 역사를 이어오면서 그에 관한 많은 문헌을 남겼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헌은 민중에 관한 기록이기보다는 지도층들의 활동과 사상에 관한 기록이다. 그럴 것이 그 문헌들의 집필자가 학자나 승려계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민중의 불교수용양상을 문헌위주로 고찰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일부 역사적 현상에 주목하여 민중의 불교수용형태를 고찰하기로 한다. 그리고 사찰을 관찰함으로써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민중의 불교신앙을 이해하고자 한다.
1)팔관회에 보이는 불교수용형태
한국 불교의 양상을 가장 뚜렷이 볼 수 있는 때는 고려시대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가 완전히 토착화하여 불교가 국교로서 숭상되었으며 그에 따라 교리사상의 비약적인 발전과 다양한 종교행사가 국가적으로 열렸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다양하게 열린 종교의례를 통해 민중들의 불교 수용 형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학자나 승려가 주도하는 어려운 교리사상보다는 종교의례는 민중에게까지 보편성을 띠게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고려시대의 각종의 종교행사 중에서 가장 성행되었던 팔관회를 중심으로 한국적 불교 수용 형태를 보기로 한다.
⸁팔관회
고려 시대의 최고 속절이라고 하던 팔관회는 신라 진흥왕 때에 시작된 것이며 고려조말까지 전후 800년 동안이나 계속된 일종의 민족적 불교행사였다. 팔관회란 그 명칭으로 보아 분명히 불교적 수법회의 하나이다. 즉, 부처님의 교훈을 따라 一日一夜를 기해 팔계(八戒)를 엄수한다는 在家 불교신도들의 한 법회이다. 그 팔계의 내용을 보면, 不殺生, 不與取, 不邪淫, 不妄語, 不飮酒 등이다. 그런데, 고려조에서 행한 팔관회는 그 내용에 있어 이러한 불교적 수행법회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금욕적이 아니라, 오히려 남녀가 어울린 가운데 음주가무가 동반된 축제와 같았다. 태조 왕건도 훈요 10조 가운데서 팔관회개설의 목적은 천신·용신·산신·수신등 제신을 섬기는 것이라 하여, 고래부터 있었던 민족제전의 계승과도 같은 것이었다.
⸂팔관회의 성격
첫째, 기복제(祈福祭)-태조의 팔관회에 대한 고려사의 내용을 봐도 재래적인 가무에 의한 기복제가 팔관회임이 드러난다.
둘째, 수호제(守護祭)-팔관회는 일종의 국가수호제였다. 성종때 유교주의적 정책과 경제적 이유로 일시 중지되었다가도 무신란이나 몽고침입 등으로 불안했던 시대에 더욱 성행한 경향이 있었다.
셋째, 위령제(慰靈祭)-팔관회는 10월 추수제로 농경의례를 겸한 고대제의의 계승의 성격을 띤 법회였다. 농경의례의 중심에는 죽고 다시 사는 재생의 곡신에 대한 신앙이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곡신신앙은 죽은 영이 되돌아온다는 관념과 결부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추석 때의 조상제의를 하는것과도 같이 농경의레는 언제나 조령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일반현상이다. 진흥왕 때에 전사 사졸들의 위령제로 팔관회를 베풀었다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처럼 팔관회는 외형상 불교적 법회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불교의 법회가 아니라 고래의 토착종교행사에 불과했다. 외래적인 것을 통하여 자기를 그대로 실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 제천행사에서 가졌던 수호와 축복을 위한 국가적 민족제전을 이제는 불교법회의 이름 아래 계속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 팔관회였다.
2)사찰에 반영된 민중의 불교수용형태
절은 불교 신도들의 신심의 대상이며 동시에 그 신앙이 반영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찰을 관찰함으로써 신도들의 신앙 형태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신도 즉 민중이 받아들인 불교와 그 수용형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요법당과 주요의례행사
한국의 각 사찰에 공통된 주요법당으로는 대웅전과 명부전 그리고 삼성각이 있다. 불, 보살을 모신 본당인 대웅전이 사찰의 중요한 요소인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한국 사찰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바로 모든 사찰에 칠성, 산신, 독성을 모신 삼성각이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한국 사찰의 주요 의례행사를 보면 첫째는 부처님의 연일, 출가, 성도를 기념하는 명절과, 부처님에게 드리는 예배, 즉 예불 그리고 법회 등의 불사가 있다. 그리고 둘째로는 사자의 명복을 비는 49제나 100일제, 도귀의 위령제인 수릉제, 그리고 생시의 49제인 예수제 등 사령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현세복락을 위한 소원성취를 기도하는 각종 기도회들이 있다. 그리고 민중의 사찰 출입의 대부분이 이러한 기도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주요행사와 주요법당의 성격과를 결부시켜 본다면, 대웅전은 불사를 상징하는 것이며, 명부전은 제를 상징하고, 삼성각은 기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법당 구성에 있어 삼성각은 모든 절이 가진 반면, 제를 상징하는 명부전을 갖추지 않은 절도 많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신도대중의 종교적 관심이 현세복락을 위한 기도에 치중되어 있으며, 내세명복에 대한 관심도는 비교적 낮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불상
한국 사찰에서 종파를 넘어서서 가장 보편적인 신앙 대상으로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이다. 무량수, 무량광, 무변재의 아미타불은 현재불이며, 자비불이다. 현재도 서방정토에 있어 48보원에 의해 대비를 베풀어 염불자를 구하여 왕생케하는 분이다. 이 아미타불의 보살인 관세음보살 역시 대자대비의 구세대토이다. 이런 이유로 민중의 신심이 주로 이 두 불에 쏠려있는 것이다. 한편,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이외에도 흔히 모시고 있는 부처님이 악사여래인데 그는 중생의 질병치료, 수명의 연장, 재화소멸, 의식충족 등 극히 현세복락을 위한 것들을 수행중에 대원으로 세웠다고 한다. 따라서 자연히 민중들의 신앙의 한 중심 대상이 되었다.
요컨대, 위의 세 부처님은 현세에서의 소원성취를 위한 민중의 신앙대상이며, 기도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비해 미래불인 미륵불은 의외로 적다. 이것은 민중의 관심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복락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의 반영이라고 생각된다.
⸃삼성각과 삼신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한국 사찰에 특유한 존재는 칠성, 산신, 독성을 신령으로 모신 삼성각이다. 어떤 절은 제신을 대웅전 안에 불상과 함께 모시고 있기도 하다. 그만큼 한국 불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삼성각에서 모시고 있는 칠성, 산신, 독성이 신에 대한 숭배를 금지하는 불교본래의 신앙대상은 아님은 분명하다. 여기서 각 신의 기능에 주목하여 보면, 칠성신은 인간의 수명을 좌우하고 자식의 생산을 관장하며, 산신은 수호와 생산과 사업의 성취를 관장하며, 독성은 그 기능이 일정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기원을 달성해주는 기능을 한다. 바로 이 세 신의 기능이 토착신앙의 중심 가치체계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민중은 외래종교의 신명을 빌어서 재래의 토착적인 삼신을 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팔관회가 국가적 규모의 법회였다면, 그것이 개인적 신앙행사로 잔류된 것이 오늘날 절에서 이루어지는 민중의 각종 기도들이다. 팔관회, 연등회의 성격은 기복제/수호제/조령제였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관음, 삼신에게 비는 소원성취의 기복이며, 신중에게 기도하는 치병이며, 지장보살에게 망자의 명복을 기도하는 것으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기도의 내용은 고래 토착신앙(무)의 기원 내용이었다. 앞에서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토착신앙의 기본 목적은 기복, 치병, 조령에 있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사찰에서 이루어지는 민중들의 기도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찰에서 칠성, 산신, 독성의 삼성을 삼성각에서 모시고 있는 것도 고대의 삼신을 계승한 것이다.
이러한 한국불교사의 일면과 현대 사찰에서 보이는 여러 모습들은 승려들의 불교 이해에서가 아니라 민중의 신앙의 반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민중의 중요한 관심은 불교본연의 해탈이나 각(깨달음)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자기의 종교적 욕구와 가치실현에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자신의 종교의식구조와 가치체계 즉 무교에 맞추어 불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민중의 불교수용형태였다. 즉 민중은 후기에 전래한 외래의 불교를 재래의 무교적 토착신앙의 문화기층위에서 받아들였으며, 불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는 그들 제신이 불교에서 말하는 호법적 선신이라는 성격에 그치지 않고 그 신들이 지니는 본래의 신격이 특히 강조되면서 각기 그 기능에 따라 독립적인 신앙형태를 나타나게 되었다.
3)오늘날의 불교신앙
현재 한국에 불교 신자의 수는 정확한 수치로 조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종교를 가진 사람의 약 절반정도가 불교 신자라고 한다. 물론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처럼 불교가 번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우리 나라에서는 불교의 영향이 적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우리는 무교가 불교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과거 민중의 경우에는 습합전승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즉, 외형은 불교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실제 민중이 믿고 있던 것은 무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에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오늘날 민중, 정확히 말하자면 평신도들은 어떠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실제 절에 불공을 드리러 다니는 몇 사람의 신자와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불교 신도들과의 면접은 다음의 두 가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절에 가서는 주로 어떠한 법당을 가게 되는지, 그리고 불공을 드리는 목적은 무엇인가였다.
신자들이 사찰에 가서 들르게 되는 법당은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으며 그 주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대부분의 신자들이 반드시 거치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대웅전이었다. 이는 대웅전에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대웅전에서 법회를 개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특히 도시내부의 사찰은 규모가 작기에 오직 대웅전만을 가지고 있는 사찰도 존재하였다. 그 외에 신자들은 자신이 특별히 모시는 부처가 있는 법당을 주로 찾는다고 하였으며, 어떠한 곳을 특히 많이 가는지는 설문자의 수가 적었기에 일반화 할 수 없었다. 설문의 과정에서 특이한 점은 앞서 분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던 삼신각 등이 사찰 내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신도들은 어떠한 법당에 간다는 의식보다는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간다는 의식이 더욱 강하다고 생각된다.
불공을 드리러 오게된 목적은 가정의 평화, 사업 성공, 자식의 출세 등 다양했고 올 때마다 다른 이유를 갖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목적은 결국 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다.
Ⅳ.한*일 불교수용형태의 비교
-伽籃(가람)배치를 중심으로-
수용이란 외래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측의 주체적 행위의 한 개념이다. 종교수용에 있어서는 수용하는 주체자의 기존토착신앙이 문제된다. 수용자가 이미 지니고 있는 종교의식구조가 수용형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즉 외래종교의 수용형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수용자의 종교의식구조이며 그 의식구조의 핵심을 그 민족의 토착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불교 수용형태의 비교도 이러한 관점에서 양국가의 토착신앙의 영향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巫敎(무교)와 神道(신도)의 성격비교
한국의 토착신앙을 무교라고 한다. 기록상으로는 기원전후의 고대 부족국가시대부터 있었던 종교현상으로 고대 연맹국가의 제천의례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굿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는 조금씩 달리하지만 반드시 음주가무로써 의식이 진행되며 신령을 받들고 현세기복적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일본의 토착신앙은 신도이다 신도는 크게 신사신도, 교파신도, 국가신도 등으로 나누어지지만 그 중심이 되는 것은 神社神道(신사신도)이다. 신사신도의 중심성격은 "氏神(씨신)"으로 이 신은 조상신이며 인간신으로 한 씨족집단의 수호신으로서 소씨족집단의 내적통일과 단결을 유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무교와 신도의 특성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첫째, 무교의 주신이 초월적 천신(三神과 山神)인 데 비해 신도의 주신은 씨신(조상신)이다.
둘째, 무교의 歌舞際禮(가무제례)가 광활한 포괄성과 개방성을 초래하는 데 비해 신도의 제사의례는 내적 통합과 대외적 배타성을 초래한다.
셋째, 무교가 개인적 성격이 강한 신앙 형태인 데 비해 신도는 지역적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신앙 형태이다.
넷째, 무교도 신도도 다 같이 신령에 의존하여 除災招福(제재초복)하려는 현실주의적 신앙이다.
2.불교적 수용의 삼단계
1)불교전래의 단계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372년경 고구려에서부터였으며,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538년 백제로부터였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왕권강화의 측면에서 수용된 불교의 도입과정에서 지배층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한국은 불을 신을 중심으로 하는 치병, 구복의 종교로 일본은 복덕을 가져오는 또 하나의 외래신으로 신을 수용했다. 즉 두 국가모두 재래 토착신앙의 연장선상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무교적 영험을 불에서 기대했고, 일본은 신도적 전통을 따라 불을 씨신으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2)불교해석의 단계
불교가 전래된 지 두 세기가 지날 무렵에는 불교의 진리를 이해하고 해석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에는 7세기 이후의 신라불교시대에 일본의 경우에는 8,9세기의 헤이안(平安) 시대가 해당된다. 토착신앙이 형성한 종교의식구조의 차이를 따라 불교사상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 신인융합을 이상으로 하는 무교적 세계관하에서 원효, 의상의 노력으로 원융회통의 범불론적 사상인 화엄경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에 더불어 신비적 직관에 의한 불심자각을 강조하던 선종을 받아들이게 된다. 일본은 소집단적 폐쇄성과 단결성에 바탕을 둔 씨신을 중심으로 하는 신도적 특성에서 대중적이며 투쟁적인 성격의 천태 법화종을 받아들이고, 이에 더불어 주문(진언)과 비밀스런 의식을 통한 기도불교로서의 성격을 띤 진언밀교가 탄생하게 된다. 이 때부터 화엄종과 선종은 한국불교의 초석을 법화경과 밀교는 일본 불교의 초석을 이루게 된다.
3)불교 토착화의 단계
불교의 해석에 의한 진수이해의 단계를 넘어선 토착화의 단계로서 12세기 이후의 고려불교와 가마쿠라(嶴倉) 불교의 시대가 해당된다. 고려시대의 한 특성은 巫佛仙 혼합사상에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한 裨補사찰의 건립이며, 팔관회나 연등회의 성행등이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입증한다. 이러한 종교혼합현상의 기저에는 무교적 포괄성이 깔려 있다. 이러한 포괄성은 불교 교리의 통합에도 이어져 원효에 의해 시발된 敎禪양종 혼합운동은 의천을 거쳐 보조국사 지눌에 이르러 선교융합의 조계종의 창시를 가져왔으며, 조계종은 오늘날까지 한국의 불교의 중심종파를 형성하게 된다. 일본의 경우는 한국의 융합사상과는 달리 배타적 선택과 현실긍정적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신도적 세계관 하에서 각각 교종의 수행방법을 핵심으로 하는 정토종과 선종적 수행을 강조하는 임제종, 배타적인 법화경 숭배의 법화종이 창시되었다.
3.伽藍구조를 통해 본 불교수용형태
가람이란 僧伽藍摩(승가람마)의 준말로 스님이 기거하며 불도를 닦는 곳을 말한다. 쉽게 풀이하면 일반 사찰을 일컫는 말이다. 가람은 불화와 함께 신앙을 객관적으로 조형화한 것으로 불교사찰의 배치 즉 가람구조는 일정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가람구조는 각각 토착신앙인 무교와 신도의 영향을 받아서 가람배치의 기준이 되었던 중국의 가람과는 다른 구조를 보인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의 가람배치의 차이를 불교수용단계마다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불교전래단계의 가람배치
불교전래단계는 삼국시대 불교(5-7세기)와 일본의 나라(奈良) 시대(6-8세기)를 두고 말한다. 이 시기는 외형상으로 중국불교양식을 그대로 수입 모방하던 시대이며 따라서 가람배치도 한국과 일본 모두 중국의 六朝시대의 형식을 띤 一塔식가람배치이다. 고구려의 평양 청암리의 금강사지(A.D 498)와 일본의 飛鳥寺(6세기)가 대표적이다.
2)불교해석단계의 가람배치
불교수용사의 제 2단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고승들을 배출한 삼국통일이후의 신라시대(7-10세기)와 일본에 있어서는 헤이안(平安) 시대(8-12세기)이다. 이 시기의 특색을 요약하면 당나라의 불교敎學의 발달과 관련되어 한국과 일본에 수준 높은 고승들이 나와 불교의 진수를 터득하여 불교를 이론적으로 깊이 있게 깨우치려 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불교이념을 추구한 제 2단계의 가람배치에서는 석가여래의 유골을 상징하는 塔硹(탑파)중심의 가람배치로부터 불교의 이념을 상징하는 불타와 보살상을 모신 佛堂중심의 배치로 변해갔다. 대표적인 한국의 가람배치는 신라의 사천왕사(679)를 들 수 있고 일본의 대표적인 가람배치로는 7세기의 樂師寺를 들 수 있다.
3)불교토착화 단계의 가람배치
불교가 토착화하던 이 단계는 한국에서는 12세기 고려중엽 이후, 일본에서는 같은 시기인 가마쿠라(嶴昌)시대 이후의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불교는 해석의 단계를 넘어서 일반 민중속에 흡수되고 한국과 일본의 토착신앙인 무교와 신도를 불교의 내용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하던 시기이다. 따라서 가람의 배치도 이전의 단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중국의 영향하에서 일정한 형식을 고수하던 것과는 달리 금당중심의 여러 토착신앙을 고려한 自由伽藍배치를 이루게 되었다.
4)한국과 일본의 가람배치의 고유한 특징의 대비
한국과 일본은 불교수용단계의 1,2기에서는 중국의 가람배치를 거의 그대로 적용하여 실제 가람배치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나 제3기의 토착단계에 이르러 각각의 고유한 토착신앙과 접목된 불교의 수용형태를 가람배치를 통해 보여준다. 그 중 몇가지의 가람배치의 구성요소를 간단히 서술해보면 다음과 같다.
⸁應眞殿(응진전)과 御影堂(어영당)
응진전은 석가여래의 제자 16나한을 모신 곳으로 초월적인 신관을 가지고 있던 무교적 바탕에서 수용한것이라 할수 있다. 반면 어영당은 祖師堂으로서 종파의 開組를 모신 것으로 일본 신도의 씨신 숭배적 특징을 드러내며 사찰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山神閣(산신각)과 辯財天(변재천)
산신은 七星(칠성), 獨聖(독성)과 더불어 三聖을 이루고 있는 무교의 신앙대상으로 산신각의 가람배치에서의 수용은 무교의 적극적인 영향을 대변한다. 변재천은 불교에 도입된 인도교의 제신의 하나로써 Saravati강을 신격화한 것으로서 수호신적인 성격을 띠며 이 역시 일본 신도의 영향을 반영한다.
⸃冥府殿(명부전)과 墓地(묘지)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십왕을 모심으로써 망자의 명복을 비는 전당이다. 이는 한국 무교의 굿에서 보이는 망자와의 接神을 통한 명복 달래기와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묘지는 일본 불교의 장식 불교로서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신도적 祖靈숭배사상과 현세적 인신관념을 살펴볼 수 있다.
Ⅴ나가며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민족문화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무교와 외래종교의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불교를 중심으로 종교와 종교의 만남으로 어떠한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살펴보았다. 무교의 경우에는 고등의 외래종교를 만나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 형태, 즉 단순전승, 습합전승, 승화적 전승의 형태로 나타났다. 외래의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이는 우리 민중의 입장은 습합전승의 경우와 관계가 있다. 지배층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서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민중은 불교의 수용함에 있어서 외형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 실제적인 내용에서는 무교의 가치체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서 무교가 우리의 민족문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좀더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일본의 불교수용과 우리나라의 불교 수용에는 어떠한 차이가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토착화 과정에서 토착신앙이 중요한 영향을 주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