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사
2006-09-02 12:49:53 read : 3726
종교개혁사
들어가면서 1517년마틴루터가비텐베르크대학의교회당정문에 95개조에달하는면죄부반박문을못박을때에교회당안에울려퍼지는소리와더불어중세카톨릭교회는서서히사라지고있었다.지금까지교황의일방적인독재아래미신적인신앙으로시달림을받던자들이자유를얻게되었다.
중세말기에지식인들이교회의부정과부패를풍자하며도덕적인개혁을부르짖었지만이것만으로는역부족이었다.중세인들에게는사람의소리가아닌하늘의소리를듣기원했고,인위적인평안이아닌하나님이직접주시는평안이절실하게요구되었다. 바로이러한요구를루터가충족시켰던것이다.
루터는중세의신비주의적경건과예리한지성으로중세교회의부정과인위적인가면을벗기고서복음의실체를값없이모든사람에게선물했다.
독일에서일기시작한개혁의움직임은스위스를거쳐서프랑스와영국,그리고북부지방에이르기까지전유럽으로번져나갔으며,16세기내내유럽은대변혁을맞이하였다.이사이에국가는점차적으로교회의억압으로부터서서히벗어나기시작했으며,문예부흥과더불어서지금까지의신본주의에서인본주의로변하였으며,신학의시녀로서빛을보지못했던철학이과학적인방법의도입과더불어서독자적인길을걸어가기시작했다. 그리고자연과학의발달과더불어서무조건적인신앙의강요가호소력을잃어가고있었다.신대륙의발견과더불어서교회의확장과박해받던유럽의개신교들에게탈출의기회가마련되었으며,지금까지억압받던노동자와농민들이제몫을찾기위해서조용한시위를일으키는등사회전반에걸친새로운양상의변화가일어났었다.
그리고공격을받은카톨릭내부에서는조용하게자신들에대한반성과더불어서개신교들을반격할수있는철갑을더욱단단히함으로써더욱폐쇄적인모습으로바뀌었으며,다른한쪽에서는개신교들이미처힘을쓰지못하는사이에교황권옹호와해외선교에힘을쏟는교단이시대적필요에부응해서창설되기도하였다.
또다른한쪽에서는독일과스위스,그리고영국등지에서일어나고있는개혁운동에만족하지못하고서더욱철저한개혁을부르짖는목소리가있었다.이들은소위말하는초대교회로의복귀를주장했던재세례파와하나님과의직접적인만남을강조하는신령주의자들과삼위일체를반대하는반삼위일체파들이었다. 이러한혼탁와분열가운데서그래도종교개혁의주류는도도히흘러서근세로연결되어짐을볼수있다.
종교개혁의역사는위에서열거했던내용으로서진행되었다.종교개혁은어떤사상이나제도든지원래의순수하였던이념을상실하고서그이념을유지하기위한제도에메이게되면내부적으로썩는다는것을우리에게말해주고있다.그래서유대교의전통과제도에서썩어버린복음을예수님께서새롭게개혁하셨듯이언제나스스로를개혁함으로서제도속에살면서도제도에메이지않고이념을구현할수있는종교가참다운종교임을우리에게가르쳐주었다.
제 1 장 종교개혁의 요인
종교개혁은카톨릭교회의잘못을고쳐서신약교회의원형으로개조하려는운동이었다.그런데 16세기의종교개혁의모습을보면루터만이아니라그이전사람들이있었다.
위클龼 이나후쓰는사상적인개혁자들이었고사보나롤라같은이는도덕적인개혁자였고버나드나타울러나엑카르트는신비적인개혁자들이었다. 이들에의하여준비된종교개혁은성경의절대권위,이신득의의교리, 모든신자의제사장직을기본원리로하여카톨릭교회의변화를추구하였다.
루터나칼빈은이러한운동을보다더효과있고광범하게전개하였을뿐이다.
일반적으로종교개혁을준비시킨요인은 3가지정도로말할수있을것이다.
1.도덕적요인
만일루터가속죄권판매를정당시한텟젤과의대결이없었다면종교개혁은늦어졌을런지모를일이다. 교회가신령한축복을돈받고파는장사를하면서도그것을합리화시키려할때루터의반발을불러일으켰다.그외에도성직매매가성행했다.그리고신부의문란한생활과사회의지탄을받는생활을했다.
이러한도덕적타락은일부주교들이교회개혁을교황바울 3세에게정식으로건의하기에이르기까지했다.
2. 지적인요인
르네상스는유럽의지적인생활에근본적인변화를가져오게했다.고대문학에로의복귀,개인주의적각성,지리상의발견에따라동서문화의교류,봉건제도의붕괴에뒤따른상업인구의격증,스콜라철학의퇴조와함께득세한옥감주의의득세,이모든것들이중세의사상적기초를흔들었다.
북유럽에서는인문주의가대학가를휩쓸었다.르네상스에뒤따른새로운학문열은교부신학과성서원어인히브리어와헬라어연구를불지르고종교개혁의사상적배경을제공하여주었다. 중세의긴지적인통제는성서적인문주의의세찬도전을받기에이르렀다.
3.사회적요인
십자군이후봉건사회가점차무너지면서상업의발달로농업경제가상업경제로옮겨지는과정에서사회의구조에변화가생겨졌다. 국가주의의등장으로스페인과프랑스에서는교회가국가의지배아래들어오게되고교황청의바벨론포로로인한교황위신의실추는교회개혁을부채질했다.교회가부과하는세금과교황청의사치는백성들의원망을사게했고루터가개혁의봉화를들자독일의농민들은일제히봉기했다.
십자군운동의결과로동방의사치품이수입되고서방사회는사치풍조에휩쓸리게되었고사제주의의횡포로하나님꼐직접적인교제가단절된무리들은영적인해갈을위하여현실도피에신비주의에휩싸이게되었다. 이렇듯교회와백성사이에생겨진괴리에새로운개혁의가교는누군가에의하여놓여져야만했다.
제 2 장 독일의 종교개혁
독일의종교개혁은먼저정치적상황과교회의각종모습을살펴보아야한다왜냐하면루터의외침이독일인들에게호소력이있었던것은복음에의한해방과더불어서로마교회로부터의경제적,정치적,자유를얻는데있었기때문이다.
1.종교개혁이전의독일의정치적상황
종교개혁이전의독일의상황은다른나라들과는차이가있었다.이탈리아는교황청이위치한나라로서십자군전쟁이후로도시의발달과봉건제도에도전하는단계에있었다. 프랑스는십자군전쟁의군대파견으로전쟁이후의세력권에서크게부상하였다. 스페인은 1492년이래로통일스페인시대를맞이해서해상무역권을독차지하고있었다.영국은스페인의위성국가였으며,스코틀랜드는프랑스의위성국가로서힘은발휘하지못했으나지리적인이점을가지고있었다.
이러한상황에서로마교회의가장강력한힘이미칠수있었던곳은독일뿐이었다.그리고독일인들의보수적인기질마저겹쳐져서로마교회의시녀노릇을하였다. 면죄부를구매하고각종세금성헌금을바치는등독일은로마교회의재정적수입의원천이었다.
그러나독일은신성로마제국의황제의통치아래대봉건영주들의총회를두고서제국을통치하였다. 공동의주전법으로화폐를통일시키고관세법을통일시킴으로서하나의의회아래에서통일국가의형태를가지고운영되었다.
이러한상황에서 1486년신성로마제국의황제로선출되었던막시밀리안이 1519년 1월에죽고부르군디의필립의아들이며,스페인의페르디난도와이사벨라의손자인챨스5세가 1519년 6월선재후들의손에의해서새로운황제로선출되었다.찰스5세는독일계스페인사람이었다.
2. 하나님의이름으로자행된로마교회의착취
로마교회는문예부흥과더불어서각종예술의부흥이유럽전역에서일어남과동시에교회도예술적인감각을도입하였다.교황들은취임과더불어서자신의임기동안에아름다운교회당을짓고예술적으로치장하는것을보람과업적으로생각하였다. 이러한사업을감당하기위해서는자금이필요하였다. 그자금원은광활한토지를중심으로각개인의경건한신앙심을가진독일인들이었다. 이들은각종세금성제도에합당한이유만첨가된다면고분고분하게순종하였다. 루터가그의논문 "독일기독교귀족에게보내는글"을통하여독일내에서개혁되어야할폐단 27종류를열거하였는데이것은모두로마교회의수탈과관련되어있었다.그가운데에서대표적인것으로제일폐회가컸던첫수입세,팔리움,보류권,사라젠세등은각종제도와면죄부에관한것들이었다.
이밖에도조달비,공석금,기부금,특별면죄권,등이있었다.그런가하면로마교회는십일조를강요하였는데각교회는수입의1/10을교황청에바쳐야했다. 그리고죽은날을위한미사와개인을위한특별미사, 매일같이지속되는성자의날기념미사와특별헌금----- 개인의호주머니를털어가는흡입기는하나님의이름으로제도화되어있었다.
제 3 장 루터
1.마틴루터의어린시절과회심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독일의광산촌만스펠트지역에속한조그마한아이스레벤에서아버지한스루터와어머니마르가레테지글러사이에서태어났다.그는어려서부터가난을체험하고경건한신앙생활을경험하면서자랐다.그는공부를하면서학비를면제받았지만교회의성가대에서의무적으로노래해야만했다.
루터는 3년간의아이제나하의생활을마치고에르푸르트대학시절을맞이하였다.이대학은후기스콜라학문에속하는스코투스노선을채택하였으며오캄과가브리엘비엘로이어지는유명론의전통에서있었다. 루터는이곳에서출세를보장하는법학을공부하기로하였고또한자격을가졌다.그러던그가주위의부러운눈총에도아랑곳하지않고어느날사라져버렸다.루터가수도원에들어가게된동기에대해서많은전설적인이야기가전해져내려오지만이러한이야기는오히려루터를모독하는내용인지도모른다. 다만그는영혼구원의확신과하나님으로부터죄사면의확신을받기를원했다.그의이런자세가수도원문을두드리게하였다.
2.수도원에서의루터
루터가문을두드린수도원은어거스틴파운둔수도회였다.이수도원은당시에가장신선한수도원으로알려져있었으며,여기에는후기유명론에입각한스승들이있었다.그리고이들은교황의절대성,양심의가책,교황의면죄부의효력등을엄격하게주장하였다. 루터는이런유명론신학에서서혼자성경을읽는것이금지되었고스승들의글을읽도록하였다. 루터는성경읽는것이금지당한채자신의죄를찾아서고백하기시작하였다.루터의고해성사는수도원의가벼운규율을어긴데에이르기까지모든죄를찾아서고백하고또고백하였다.그러나아직까지고백해야할죄를찾지못한듯한자책감속에있었다.
이러한루터의고뇌를알아차린사람은당시교황청대리인으로서교황청을방문했돈요한스타우피츠였다.그는루터의고민을듣고서성경을읽을수있도록허락하였다. 성경을읽으면서그는지금까지의모든것이불가능하다는것을깨달았다.그리고여기서그는성경은성경으로해석해야된다는대명제를발견하게된다. 지금까지는하나님의의와인간의무능이서로상반된것이기때문에사람이의롭게될때에한해서하나님이인간을만나주시는것으로알았다. 그렇지만슈타우피츠는 "하나님의의는예수그리스도안에서그리고예수그리스도를통해서내자신의소유가될수있다.고설명하여주었다.하나님과인간은인격적인신뢰를통해서서로교제할수있으므로믿음이야말로의인이가져야할모든것이었다. 루터가이런영적깨달음을통해서후기유ꉷ론적인참회제도를벗어나는데는무려 2년이란고뇌의기간이필요했다.그렇지만자신의이런깨달음이중세의터를무너뜨리고새로운세대의문을열었으며,종교개혁은이때부터시작되었다고말할수있을것이다.그런가하면이것이비텐베르크대학의부속교회당정문에 95개조의면죄부반박문을못박은소리와함께중세인들의귀에울려퍼져나갔던것이다.
3.비텐베르크의루터
후기중세의사람들은자신의힘을과시하기위한수단으로대학을설립하였다.그래서유능한교수를초빙하고도시의면모를새롭게하였다.선제후프레데릭도챨스 5세의삼촌으로서자신의영지내에대학을세움으로서자신의힘을과시할려고하였다.그래서비텐베르크마을에대학을세우고학생을모집하고교수를모집했다.그러나운영이점점어려워지자프레데릭은새로운교수진을초청하기를원했는데루터는슈타우피츠의추천을받아에르푸르트수도원을떠나비텐베르크로옮겼다.루터는먼저아리스토텔레스를강의했으나매력을느끼지못했다고한다그러자그는신학을공부하기를요청받고어거스틴을공부하기시작했다.그는설교도하였으며 1511년에는교단의업무차로마를방문하였다.
그의공적인업무를마치고거룩한계단에이르러서전통에따라서무릅으로오르다가오직의인은믿음으로말미암아살리라는말씀이떠올라서계단을걸어서내려왔다고한다.그리고그토록거룩했다는로마의부정과부패를보고서중세적인제도를재평가하기시작했다.
1512년신학박사학위를받고신학교수가되었다.그는중세적인스콜라강의에매력을느끼지못하였다. 그는실천적인힘이있는강의를하였다.인간은자신의공로와상관없이구원을받는다.신앙이란스리스도역사적사역과하나님의신실하심을신뢰하는것이다.인간은하나님의은총에의하여죄용서를받고하나님의약속을굳게붙들면새로운피조물이되고이러한사면에대한깨달음이성화의시작이다.
루터는 1515년과 1516년에어거스틴과중세의신비주의를더욱연구하였으며,이때부터중세에대한비판을가하기시작했다.이때부터그의명성은널리알려졌으며,많은학생들이몰려들었고비텐베르크대학은성장하기시작했다.이처럼루터의종교개혁은상호유익을위해서필요했기때문에가능하기도했다.
즉루터는신성로마제국의황제인삼촌인프레데릭의신변보호가필요하였고프레데릭은자신이세운대학을명문대학으로서성장시켜주는명교수이며,명설교자인루터가필요하였다.
4.95개논제를못박기까지
종교개혁의기폭제는면죄부였다.중세의참회제도에의해서사람은완전하게죄를고백할수없으며,사제가부과한보속행위도완전하게행할수없었다.따라서교리적으로누구든지영세를받았으면,지옥에는가지않지만그렇다고천국에도가지못하였다.그래서중세인들은누구든지연옥에갈수밖에없다고생각했지만연옥에서의고통의기간을얼마나단축시키느냐가관심거리였다.그래서오직자신을위해서,연옥에있는자를위해서면죄부를사는것은중세의미덕이었다.
1513년교황의자리에오른레오 10세는전임자율리오스 2세가남겨놓은재산을탕진하였다. 르네상스교황으로서그는베드로성당의건축을계속하기로하였다. 그렇지만교황청의재산을탕진해버린그로서는면죄부를다시금발매하기로결정했다. 레오10세가선포하고브란덴부르크의알버트와마인쯔의대주교가징수를맡고도미니크파수도자요한테첼이판매하였던면죄부는루터를그대로있지못하게만들었다.
이렇게입성한면죄부판매인요한테첼은 "하늘문이열리노라"는제목으로설교를하면서면죄부를판매하였다.다행히비텐베르크는프레데릭의명련에따라서들어오지는못했지만주민들이인근부근에까서면죄부를사오는것을보고루터는참을수가없었다.
매년11월1일모든성자의날을기해서프레데릭은비텐베르크대학의성당에보관중이던유물을무료로개방하였으며그날이되면많은참배객들이찾아오곤하였다. 그래서루터는바로이러한점을이용해서유물에보관되어있는비텐베르크대학의 ꑁ주속교회당정문에 95개에달하는면죄부반박논제를못박아게시하였다.
5. 라이프찌히논쟁
1519년엑크와루터사이에라이프찌히신학논쟁이개최되었다. 이것은루터의 95개조의면죄부반박을게제한후엑크는 "오벨리스크"라는답변서를작성해서발표하고또다시루터는 "아리테리스크"라는답변서를작성하였다.이렇게시작되었던대결이원만하게해결되지않자결국라이프찌히신학논쟁으로가게되었다. 여기에서는노련한논쟁사엑크의승리로끝났다. 루터스스로이단을좋게말하게함으로서스스로이단에속한다고인정케하였다.루터는우울하게비텐베르크로돌아왔지만자신이무엇을해야할것인가를더욱명확하게간파하였다.지금자신이하고있는일은단순하게면죄부에대해서반대하는것이아니라종세교회의존재그자체를흔들고있다는사실을알았다.
루터는힘이있었다.젊은인문주의자들이루터를도와주었으며,도시민들도독일이로마로부터독립해야된다는마음을더욱강하게가지게되었다.이러한상황에서루터는로마교회의존재를뒤엎어버리고동시에종교개혁의대헌장이라고할수있는 3개의논문을발표하였다.
6.종교개혀 3대논문
1519년라이프찌히신학논쟁이후로엑크는로마로돌아가서교황청법원회의를개최하였다. 일련의어려움이있었의나 1520년 6월15일출교교서는완성되었다. 그러닌까루터가독일기독교귀족에게보내는글과때를맞추어서출교교서는완성된셈이다. 그리고이어서루터는같은해 8월에기독인의자유를발표하였으며, 또다시 10월에는교회의바벨론포로를발표하였다. 그리고서루터는 1520년 12월10일교황의출교교서를공개적으로불태움으로서교황청과결별을선언하였던것이다.
1)출교교서 :주여일어나소서
교황청출교교서는시편 74:22절을인용하면서작성되었다.여기서루터는 41개조의정죄문과더불어서루터의모든책을소각할것을명하였으며,모든것이금지되었다.그리고추종한는사람들의동조를취소할것을명하였다.
2)독일기독교귀족에게보내는글
루터는이논문에서먼저교회의 3가지담에대해서이야기했다. 첫째는교회가지닌영적인권한으로인해서세속으로부터벗어나있는특권, 둘째는교황의성경해석권으로서어느누구도성경을통해서교황을비판하지못하도록한특권, 세째는회의소집권을오로지교황에게만국한시킴으로서어느누구도회의로서교황을비판하지못하게한특권.
이상의 3가지담이지금까지로마교회를세속화시켜왔으며,교회를지켜주는특권이었는데이제는교회가부패하고썩었기때문에평신도를통해서교회가새롭게되어야한다고주장하면서종교개혁의대원리가운데하나인 "만인제사직"이론을주창하였다. 루터는사제의중재라는중세의대원칙을무너뜨렸다. 이상과같은루터의만인제사직이론은중세인들을사제의공포와전횡으로부터해방시켰을뿐만아니라신앙의자유와의미를되찾게해주었다.
3)기독교인의자유
독일기독교귀족에게보내는글이개혁되어야할사항들에대한문제제기였다고한다면이러한문제들을해결할수있는이론적배경이있어야한다. 그래서루터는기독인의자유라는논문을통해서종교개혁의신학적부분에해당하는구원론을다룬다.특히중세의공로중심적인율법주의적구원론을반대하면서오로지예수그리스도의의를통한하나님의은총에의한구원을말한다.이것이기도교인들을중세의교리적쇠사슬에서풀어주는자유였다.
여기에서루터는종교개혁의 3대명제인하나님의말씀,은총,그리고신앙을모조리이야기한다. 그리고루터는여기에서또한번만인제사직이론을이야기한다. 그러면서지금제사장이라고부르는사람들과일반교인사이의차이는각각나름대로의고유한기능을가진성직자인을강조하였다.
4)교회의바벨론포로
여기에서루터는자신의수도원시절의악습들을간파하면서중세인들이사제의중재라는쇠사슬에서벗어나기위해서는 7성례전을파기하고성경에근거한세례와성찬두가지만허용해야한다고주장하였다. 중세는 7성례전으로서사람의 70년인생을묶어버린다고해서바벨론포로기 70년에비유해서교회의바벨론포로라는제목을붙였던것이다.
루터는희생설에기초한중세의화체설을부인하고공재설을주장함으로서중세의성례전이론을뒤엎었으며,특히성체성사이론에서일종성찬을베푸는중세의악습은폐지되어야한다고역설하였다. 더나아가서참회제도를극렬하게비판하였다.
5)출교교서의소각.
루터가종교개혁 3대논문을작성하는동안로마교회는루터를출교시키는교서를유럽의여러곳에배포하고루터의손에까지들어왔다.
1520년 12월10일아침 9시에교황청의헌장과스콜라신학서적등을공개적으로소각시킬예정이므로비텐베齺 학생들이증인으로참여해달라는것이다.
루터는교황청의교령들,교회법법전들,그리고엑크와엠저의몇가지글들을화염속에던지면서여호수아 7:25절의말씀을인용해서그대가주님의거룩한자를근심으로괴롭게하였듯이영원한불길이그대를괴롭게하리라고되뇌였다.
이광경을목격하면서많은사람들은교황청법령의장례노래를부르기도하였고교황청을조소하면서스콜라서적과교황청서적들을화염속에던졌다.
이날이후로루터는확고한신념으로개혁을추진하였으며,교황은적그리스도의상징이며,가장악마적인존재로묘사되었다.
7.윔스의회
1520년 12월 10일루터가교황청의출교교서를소각하였다는소식을곧바로독일전역과유럽으로퍼져나갔으며,이제독일인들은루터가독일을대변하는사람처럼받아들이게되었다.이러한즈음에신성로마제국의황제였던막시밀리안이죽고그의손자인챨스 5세를선출했다그의대관식을갖고첫번째로주재한회의가 1521년 1월 22일에개최한윔스의회였다.
교황청에서는정치적인문제를다루기위해서루터의범법성을밝히려고하였다. 루터는윔스의회에두번출두출두하였으며,무오하다고믿는교황과성경에입각한다고주장하는루터사이에간격이좁혀지지않았다.그래서루터를윔스로부터비텐베르크에되돌아가게했다.그러나설교는하지못하도록했다.
그런데갑자기루터가사라졌다. 프레데릭은협상이결렬된이후루터를안전한장소로피신시킬것을슈팔라틴에게명령하였으며,루터는바르크부르트에피신해서융거게오르그라는이름을가진귀공자로변장해있었다.루터는이곳에서고전에속하는교부들을더욱열심히연구했으며,성경을독일어로번역하였다. 이곳에서루터는영적으로무장하였으며,어떤의미에서제2의영적고뇌기간이었다고할수있다.루터의이기간은사도바울이아라비아사막에서 3년여동안영적인고뇌의기간을가졌던것과동일한준비의기간이었다.
크게움츠릴수록더높이뛸수있다는평범한진리를종교개혁에도적용될수있었으며,아마도하나님께서루터에게이기간을허용해주셨는지도모른다.
8.농민소요와루터의좌절
어떠한일에든지돌발적인현상이잠재적으로내재해있다가시간이되면뜻밖의현상인것처럼돌출하기마련이다. 루터개인이윔스의회에참석할때까지만해도죽음을각오하고뒷일을멜랑히톤에게위임했다.그러나루터가바르트부르크에은신해있는사이에비텐베르크의분위기는예상밖에도칼슈타트가주도하면서시위적양상이곁들어들자지금까지의불만세력들이드러나기시작했다.
독일을비롯한유럽전역에는농민들의권리회복을부르짖고있었다.이러한농민들의불만이루터의힘을얻고터져나왔다. 그러나개혁운동에농민들이가담함으로서가장피해를입은사람은루터였다지금까지루터가장강력한지지를입고있는푸레데릭의막강한힘이있었다그러나농민편에서프레데릭은착취자의전형적인모습이었다. 이런상황에서루터는선제후와농민들을동시에만족시켜야했다. 이런상황에서루터는지지자들을잃게되었으며,결과적으로가톨릭측과타협하지않을수없었으며,아우크스부르크협상으로부터시작해서자신의주장이여러동조자들과함께수정되어서제출되는등혼자의힘으로개혁운동을이끌어갈수없게되었다.
1)칼슈타트의개혁운동
중세후반부터등장하기시작한경건주의적신앙운동은여러갈레로나뉘어졌다. 형제회등과결합한운동은학교교육을통한자녀교육,경건서적탐독및구제와봉삭등을가르쳤다그러나후쓰운동의한줄기인타보르파의흐름에서나온사람들은신비적인종말운동으로흐르고있었다.
루터가없는비텐베르크는칼슈타트가주도하는개혁운동이한창무르익고있었다. 도시전체는영적인각성으로정열적으로흐르고있었고칼슈타트는수도원서약,독신제도,성직자의구별된의복착용,미사의대속적인헌신의의미,교회내의화상과성상사용등의구세대적인행습을대대적으로비난하였다.
칼슈타트는개혁의고삐를더욱강하게잡아당겼다. 1522년 1월 24일시당국은법령을공포하였다. 도시의공동금고를설립해서시의모든수입과지출을관리케하였다.
이러한갑작스런변화는프레데릭을위시한루터의지지자들을근심케하였다.선제후는조지공작하게비텐베르크의문제는칼슈타트와쯔빌링이일으킨다고지적할정도였다.멜랑히톤은천성적으로부드러운성격의소유자로서흥분된분위기를가라앉힐수있는힘이없었다. 이제는루터가아니면수습할사람이없었다. 루터는언제잡혀서로마로압송될지도모르는위험을무릅쓰고서바르트부르크를몰래빠져나와서 1522년 3월 7일비텐베르크에무사히도착하였다. 거의일년만에돌아왔으며,해결해야할문제가산적해있었다.
2)농민소요
유럽의농민들은 14세기부터시작해서 16세기의대변혁기에이르기까지곳곳에서소요를끊이지않고일으켰다.그리고이것들은성직자의착취를언제나언급하고있다. 십일조는자발적인헌금이아니라강제적인세금이었다, 그러다보니돈이없는사람은교회에도다닐수가없었다.
이때한스힘의설교는모든소외받은사람들의마음을움직였다.그는사제들에대한욕설과공격으로시작해서황제와제후들과군주들을모조리공격했다. 그리고농민들에게자유를허락해달라고외쳤다. 이것은그가화형당함으로영적각성이끝이났지만농민들에게는새로운동요의불씨를심어준것이었다.
이러한상황에서 1524-1525년사이의독일에서는농민들이소요를일으켰다.이들은전국적으로확산되었으며,이들의신분은신분상농노에가까운취급을받았다.이들의요구사항은 12가지로말할수있다.
첫째:시민당국이나교회당국이그리스도의복음에위배될때에는정당한권리요구를갖는다.
둘째,목회자의청빙의자유와축출의자유
세째:대십일조는의무로서지킬수있으나소십일조는거부한다.
네째:대십일조에서부락사제의급여를감당할것이며,나머지부분은가난한자들을위한구제에사용하라.
다섯째:농노제도를폐지하라
여섯째:적법한명령에는순종하겠지만강압적인명령은거부한다.
일곱째:낚시의권리,사냥의권리를갖는다.
여덟째:삼림,목초지,경작지를지주로부터찾아와야한다.
아홉째:모든유형의강제봉사은폐지되어야한다.
열째:모든형태의노력봉사는정당한임금의지불이있어야한다.
열한째:사망세의명목으로고인의귀중한동산을압수할수없다.
열두째:모든지역에공평한재판소를설치하라.
이상의열두가지는하나님의말씀에입각해서작성된것이기때문에어느것하나라도잘못이있으면기꺼이배제시킬것이라고덧붙였다.
이농민소요는더욱거세게몰아치면서도시의빈민층까지가세하게되었다. 그러나짧은시일내에결성된모임체였기때문에내부적인결속력이없었으며,운동자체나외부의대항세력을지속적으로이끌어갈수없었다. 농민들의소요사태는북독일로부터진압되기시작하였다. 그래서 1526년에거의진압이되었다. 진압과정에서소요군의사망는 100,000-150,000명에이르렀다여기에가장큰피해를입은사람은루터였다. 루터는농민들이잠잠해줌으로서원하는독일의개혁이달성될수있었다. 그래서루터는소요지역을 쁹아다니면서운동을자제해줄것을당부하였다. 이것이실패할경우자신의개혁운동에큰걸림돌이되기때문이었다. 그래서그는설교여행을떠났으며,이기간동안에그토록자신을지지했던프레데릭이사망했다.
루터는비장한각오를하고비텐베르크로돌아와서 "농민들로이루어진살인과도적떼를반대하여"라는소책자를발표했다. 심지어루터는이책자에서제후들에게농민들을무력으로진압할것을말하였다. 물론루터의고민을충분하게이해할수있으나그는자신에게힘이되었던제후들,특히선제후프레드릭에게진빚을갚기위해서선무설교여행까지감행했던것을볼때에손을씻은빌라도를연상케된다.
아무튼농민소요는루터의개혁에치면타를가한것은사실이다.
9.루터의죽음
루터적인개신교를지지하는슈말칼트동맹은헤세의필립이이중결혼으로인해서심각한타격을입기는했어도개신교측은꿋꿋하게버티어나갔다. 그러나챨스황제가 1544년프랑스와의평화를마무리지음으로이제부터는독일문제를원하는대로다룰수있었다. 그래서트렌트에서총회를개최하도록명하였다.그렇지만개신교들은여기에따르지않으려하였으며,총회는생각보다지루하게지속됨으로서황제는무력을사용해서개신교도들을무찌르려하였다.
바로이러한위기상황에서루터는죽음을맞이하였다.
10 루터에대한평가.
루터의종교개혁은우리에게많은것을시사해준다.어떻게가난한벽촌에서태어난한젊은이가가진것도없이엄청난일을감당할수있었을까? 많은사람들이루터의성공에대해서분석해보았다. 그렇지만루터에게는특별한비결이있었던것도아니고오로지하나님한분만을철저하게의지하면서하나님의말씀에충실하고자하는열정이있었다.루터의가장큰꽤는꽤를부리지않아야한다는바로그꽤였다.
루터는말씀의사람이었으며,기도의사람이었으며,경건의사람이었다. 성령의도우심을철저하게믿으면서모든것을기도로써시작하고기도로써끝을맺었던사람이었다. 루터는또한자신의개혁을처음부터이렇게되리라고계획표를짜고서밀고가지않았다. 루터는일이되어지는대로하나씩,하나씩,처리해갔으며,억지로일이되게끔몰고가지는않았다. 어떻게보면자유분방하게움직이는것같으면서도하나님의성령의인도하심에철저하게순종하려는태도를일관되게유지하였다.
루터가단하나머리를써서세밀하게이끌어갔던것은자신이하고싶은말을절대로개인자격으로말하지않았다는점이다. 루터는자신의의견을언제나공중적인전체회의나집회를통해서발표하였다.이러한점에서루터는당시의시대적조류인회의중심적개혁원칙을철저하게지켰다.
루터의개혁은철저하게복음중심적인원칙적인싸움이었지무력이나힘으로이루어지지않았다는데에힘이있으며, 또한동시에지식인들과지도층의지지를확보하였다.루터는개인의인기를편승해서사람을압도하려고하지않았으며,본인이몸소터득한복음의진리를모든사람에게심어줌으로서중세의사슬에서벗어나게해야된다는강한사명감과사랑을가지고있었다.
제 4 장 스위스의 종교개혁
스위스는역사적으로유럽의오지에속하는척박한땅으로서산업이발달할수없는곳이었다.그렇지만자유를원하는농민들이몰려들기시작하면서자주정신을가지게되었다여기에다각종박해받던신앙인들이몰려들게되었고언누구에게도간섭을받지않고 1291년연방체계로발전하였다.
스위스는남쪽으로는이탈리아의영향을받았으며,서쪽의프랑스어사용권지역과북쪽의독일어사용권지역으로나누어져있었다. 종교개혁즈음에이르러서는프랑스의프란시스 1세의박해를피해서많은개신교도들이피난와서슈트라스부르크를중심으로이민사회를형성하기도하였으며,제네바도이들에게안식처를제공하기도하였다.
이처럼산업의발달이거의불가능한지역이었으나,지리적인조건아래에서단련된신체적강인함으로인해서스위스인들은오래전부터교황청의용병으로서재정적수입을충당하였다.이러한전통적인용병제도는프랑스의아비뇬교황청시절에양쪽으로용병이팔려감으로서상호전투를겪는민족적어려움을겪었으며,챨스5세와프란시스 1세사이의전투에다시한번용병으로팔려가서동족끼리살상하는모순을겪었다. 그래서스위스의종교개혁은용병제도의근절이라는재정적수입원의차단으로부터시작된다고해도크게틀렸다고말할수없다.
1.쯔빙글리의개혁
즈빙글리는루터보다 7주늦은 1484년 1월 1일토겐부르크자차주의빌드하우스에서태어났다.그의아버지는대대로부락의촌장을역임해왔으며,외할아버지는사제였다삼촌은베젠의학장으로취임함에따라서쯔빙글리의신학교육을전담하게되었다.삼촌은새로운학문조류인인문주의를받아들여조카에게전수해줌으로서자신의역활을충실하게감당했다,.
10세때에베젤에서바젤로옮겨서라틴어문법,음악,그리고변증학을배웠다.1498년에는베른대학에입학해서스위스종교개혁의기수로알려졌던하인리히뵐플린에게배웠다,1500년부터 2년동안쯔빙글리는비엔나로옮겨황제막시밀리안 1세의보호아래에서학문활동을하였다.
1502년에는다시금바젤로돌아와서성마틴대학에서라틴어를배웠으며, 1506년에는문학석사학위를취득하였다.
1)글라루스의쯔빙글리
쯔빙글리는 1506년에석사학위를받고곧바로사제로임직되었으며,글라루스의목회자가되어부임하였다 10년의목회활동을하면서헬라어를공부했고희랍과로마의철학자,시인, 웅변가,저술가들을공부하였으며,이기간동안에에라스무스와서신교환을하면서우정을쌓았으며,절친한사이가되었다.
그는글라루스목회자로서자연히용병으로싸우는글라루스연대의연대소속목사로두차례나이탈리아로갔었다, 이때부터쯔빙글리는용병제도의위대성을설교하기시작했다.
이러한입장에서그는 "스위스의죄악,악덕,불신앙성,외국숭배와이것이조국의자녀들을집어삼키는데대해서" 와 "황소의우화"을통해서스위스의용병제도를공격하였다. 이것은에라스무스의영향을받아상징적이며,풍자적이었다. 이곳에서쯔빙글리는신학자라기보다는철학자,수사학자,인문주의자,도덕주의자라고말하는것이옳을것이다.
2)아인지델른의쯔빙글리
쯔빙글리는용병제도를반대함으로서교구민들로부터배척을받아서 1516년 4월순례지로이름난아인지델른으로목회지를옮겼다. 그는이곳에서설교가로알려졌으며, 교부들의책을읽었고, 면죄부의해악성을설교하였다.동시에그는주민들에게마리아가아닌그리스도를예배하도록가르쳤으며,교황청의악덕에대해서말하기시작하였다. 이러한점에서일부학자들은 1516년에스위스의종교개혁은시작되었다고말하기도하였다.
3)취리히의쯔빙글리
쯔빙글리는적이많았다. 그것도교리적인면보다는그의자유분방한행동에관한성토가대부분이었다.그렇기때문에만장일치가아님다수에의해서 1518년 12월 27일쯔빙글리는취리히에도착하였다. 취리히에서의그의개혁은노랍게진행되었다.
[1]루터가교회력에따른설교를하는데반해서설교의주제를자유롭게선택하였다. 이것이개혁교회의전통으로서지금까지내려오고있다. 그는마태복음을연속적으로강해하기시작했다.
[2] 교황청의면죄부판매인베르나르딘삼손이도시에서면죄부를판매하지못하도록함과동시에도시밖으로추방시키는데성공하였다.
[3] 쯔빙글리는 1519년 8월취리히에페스트가발생해서많은사람이고생하게되자밤낮쉬지않고환자를돌봄으로서 9월에이르러서는자신이아프게되었다.이것을통해그는인정을받게되었다.
[4] 쯔빙글리는십일조에관한공격적인설교를퍼부음으로서십일조의자발성을강조하였다.
[5] 쯔빙글리는금식기간동안에육식을먹어도괜찮다고선언하였다.
[6] 쯔빙글리는교황청에파송하는용병과교황청으로부터받은연금의잘못을파악하고서본인에게지급되던연금을포기하였다.
[7] 쯔빙글리는공개토론회를통해서교황청의각종악덕을지적하고비난하였다.
[8] 쯔빙글리는안나라인하르트와결혼함으로서지금까지의비난과물의를일소시켰다. 이렇게해서많은사제들이공개적으로결혼하였다.
4)쯔빙글리의최후
쯔빙글리의종교개혁은스위스전역으로퍼져나갔으나, 모든곳에서환영받는것은아니었다. 삼림자치주들은개혁교회스타일의개혁을원하지않았다.그러자개신교자치주에서는산림자치주에생활필수품을공급하지않기로결정했다.그래서삼림자치주는전쟁을통해해결할수밖에없었다.
1531년삼림자치주는샤벨을쳐들어왔다, 쯔빙글리가이끄는취리히군대는 1010월 11일샤펠에서교전하였으며,쯔빙글리를위시한목회자의회의원등다수가전사하였다. 47세의인생의황금기에접어든쯔빙글리는개혁을마무리하지못하고끝내숨지고말았다.
5) 쯔빙글리의평가.
쯔빙글리는독일의개혁자루터와는많은점에서차이가있었다.루터는개인의구원의확신을위한영적투쟁으로부터출발해서복음안에서구원의확신을가진다음에로마가톨릭의부정과부패를발견하는순서를밟았었다.
그러나쯔빙글리는처음부터교회의부정과부패를발견하고서이것들을에라스무스적인풍자와학문적인공격으로서해결하려고하였다.
그럼로쯔빙글리는개인의구원과말씀안에서의구원의확신이처음부터약했다.그렇지만그는나중에목회자로서의경륜이쌓여감에따라서교회와교인들의요구사항이무엇인가를깨닫게되었으며,본인도점차적으로복음의진수를깨닫게되었다. 그러므로그의복음이해는인문주의적인합리적요소가끝까지있었다. 여기에불만을품은재세례파사람들이취리히를중심으로반기를들면서재세례를베푸는불상사가일어났었다. 그렇기때문에쯔빙글리는과격재세례파사람들과도싸워야하는이중고통이있었다.
쯔빙글리의개혁은민족주의적인요소가루터보다훨씬강하였다. 그는용병으로벌여들이는수입보다는한사람의동족의생명을더욱안타까워했다. 그래서그의개혁은재정적수입원의차단이라는고육책으로모범을보이는데서인정을받았다.
쯔빙글리는루터만큼많은저술활동을하지는않았다.그렇지만그의글은개혁교회의기초가될수있는복음이해와성찬이론을확립시켰다.
한마디로말해서쯔빙글리는 47세라는인생의황금기에죽음으로인해서자신이벌여놓았던많은일과사업의뒷마무리를후배인칼빈에게양보하고말았다. 이러한면에서같은인문주의자로출발해서복음주의로바뀌었던칼빈은가장적절한후계자이며,또한완성자였다고말할수있다,.
제 5 장제네바의개혁이이루어지기까지
제네바는 1387년이래로도시의군주로서주교,도시의소유자로서사보이가문의백작,그리고자유시민들로이루어진 3원체제에의해서통치되어오다가 1444년이후로는사보이가문에서주교까지세습적으로계승함으로서자연히자유시민들의반발에부딪히게되었다.이러한상황에서제네바의시민들은스위스의자치주들과동맹관계를유지하기위해서프라이부르크와제휴하였지만베른은이에동의하지않으므로인해서적잖은대결상태를유지했었다.
이렇게변화하는상황에서제네바시는소의회와대의회제도로바뀌었으며, 모든중세사는대의회에서결정하였다. 베른은제네바가개혁되기를바라는눈치였으나,공개적으로하지는못했다. 그러다가그유명한현수막사건이발생했다. "누구든지자신이죄를회개하면그리고예수그리스도의약속을진실하게믿으면모든죄에대한완전면죄부를수여받을수있다"라고쓰여졌다.
이로인해서 1532년가을에제네바에도착해서조용하게가정집에서설교하던파렐,사우니어,올리베탄은추방당하고말았다. 그렇지만파렐은제네바를포기할수가없어서프로망을불어선생의자격으로제네바에잠입시켜서불어교습과더불어서개혁적복음주의를설교케하였다. 그러다가점점숫적으로불어난복음주의자들과가톨릭주의자사이에시민전쟁을방불케하는격렬한몸싸움도있었다. 여기에서윌리라는이름의가톨릭사제가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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