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6: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행 26: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행 26: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바라 (행 26: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세상 모든 사람의 최대 관심사인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자기도 그렇게 실천하지 못하면서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이상적인 말로 미화하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은 어떤 사람의 것일까요?
서상훈의 칼럼에 행복에 대해 몇 가지 예를 드는 중에 “행복한 사람은 ”밥을 먹다가 돌이 씹혀도, 이가 안상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돌보다는 밥이 많다며 껄껄껄 웃는 사람이며, 밥이 타거나 질어 아내가 미안해 할 때 누룽지도 먹고 죽도 먹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대범하게 말하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인격적으로 성숙되지 못한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화부터 낼 일이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한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라면 세상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마음의 여유를 갖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먼저 환경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환경을 대하는 마음을 바꿀 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가 자기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세상에서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오직 사람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받는 가장 큰 축복 중에 하나가 바로 마음을 바꾸어주시는 축복입니다.
사람이 마음이 바뀌게 되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게 되면 언어가 바뀌고 언어가 바뀌게 되면 생활이 바뀌고 생활이 바뀌게 되면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행복을 나누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축복을 하나님께 받은 사람이 바로 오늘 성경의 말씀의 주인공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 어디서, 누구 앞에서나 행복한 모습으로 살았음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바울과 같이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서 깨닫고 본받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행복한 전도인
타락한 인간은 누구나 다 탐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버린 것과 같은 재물이나 권세나 명예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나름대로 종교에 심취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알고 보면 자기가 기대하는 행복을 쟁취하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흔히 행복의 절대 조건처럼 생각하는 조건들을 고루 갖추어 남의 부러움을 사던 사람이었으나 오직 예수 믿는 것 하나 때문에 모두 다 잃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울해 하거나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그러한 조건들을 오히려 해로 여기고, 오물로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물론 그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예수를 믿음으로 불행해진 사람처럼 보이지만 정작 바울 자신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였을 때보다 더 기쁘고 행복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런 죄가 없이 오직 부활의 주님을 사람들에게 전했다는 죄목으로 이미 벨릭스에게 재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년 여 세월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가, 신임 총독 베스도에게 재판을 받고, 이제는 아그립바 왕 앞에 또 심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억울함에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변론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어떻게 하든지 아그립바 왕에게 좋게 보이려고 하는 노력대신 뜻밖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행 26: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여기서 ‘다행히(makavrion)’라는 말은 최고의 축복, 행운, 축복된, 행복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바울은 지금 자기가 죄 없는 몸으로 손이 묶인 채로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무죄함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행복하게 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느 것 하나도 감사하거나 행복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어떻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일 오늘 우리들이 바울과 같은 마음의 자세로 살아간다면 행복하지 않을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 바울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내어 주었고,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복음 전도의 고난을 겪으면서, 왜 우리가 맛보지 못하는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행복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마시는 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보람된 일을 하며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복음 전도의 사명을 맡은 사도로서 왕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왔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호하게 된 것을 최대의 축복으로 행복으로 기쁨으로 여기는 까닭은 아무리 복음을 전하려고 해도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을 그러한 기회를 통해서 대제사장, 종교 지도자들, 로마의 총독들에 이어 유대의 왕에게 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고난중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고 행복해 한 것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예수를 믿고 늘 행복하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주님이 말씀하신 팔복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은 바울과 같은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벧전 3: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들이며, 축복받은 사람들이며, 자유 함을 얻고, 너무 기쁘고 감사하여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산다면 오늘 우리도 바울처럼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행복한 증인
사도 바울은 세상에 어느 누구보다 뛰어난 최고의 전도자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지식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전도했는가를 주목하여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전도자로 어느 누구보다 수준 높은 철학이나 신학을 논리적으로 변증하여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의 전도는 그 상대방이 누구이든지 일관된 전도방식을 고집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대제사장이나 로마의 총독이나 심지어 유대 왕 아그립바 앞에서도 동일하게 예수 믿기 전의 자신과, 예수를 믿게 된 동기와 과정과, 예수를 믿고 난 후의 변화를 간증 형식을 통한 전도방식이었습니다.
1) 그리스도를 대적하던 과거
사람이 변화를 받게 되면 누구에게나 부끄러운 과거가 있는 법입니다. 바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과거 자기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적하였는가를 간증하였습니다.
(행 26: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행 26: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바울의 그같은 간증은 아그립바 왕이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의 간증을 듣고 현재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깨우쳐 주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2)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
사도 바울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만나주신 체험을 간증하였습니다.
(행 26:13)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행 26: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메섹 길에서 해보다 더 밝은 빛 가운데서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자신의 잘못된 삶을 깨우쳐 주신 것을 간증하였습니다.
3) 그리스도를 만난 후 변화
예수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대적하며 살아온 자기에게 찾아오셔서 만나 주신 예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간증하였습니다.
(행 26:16)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행 26: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행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바울은 영적인 소경이었던 자신을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셔서 보여주시고 들려주신 목적은 자신의 체험을 뭍사람들에게 증거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간증이 사도행전에 세 번 반복하여 증거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 앞에서든지 가장 신이 날 때가 바로 자기가 주님을 만나게 된 영적 체험의 사실을 간증할 때였습니다.
1) (행 9: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2) (행 22: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3) (행 26:13)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이는 신앙은 바리새인과 같은 차디찬 이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을 읽다가 연구하다가 묵상하다가 말씀을 통해서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영적인 체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와 같은 영적 체험을 하기 위해 사전에 무슨 준비를 하였습니까? 알고 보면 그가 기도를 하거나 회개를 하거나 사전에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님이 일방적으로 나타나셔서 빛으로 보여주시고 음성으로 들려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이 예수님을 만나는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할 수 있었고,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고, 자신이 해야 할 새로운 사명을 깨닫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첫째, 바울의 인식이 변화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전의 자신의 생각이 매우 어리석었음을 깨닫고 돌이켰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 명백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둘째, 바울의 감성이 변화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포악했었음을 깨닫고 온유 겸손한 자가 되었습니다.
셋째,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가 열심히 기독교를 핍박하던 것과 정반대로 도리어 핍박을 받으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증거하는 삶으로 180도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학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사도 바울처럼 내가 만난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1) 신구약을 막론하고 앞서 믿은 신실한 성도들을 가리켜 증인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교회 안에 직분자들을 가리켜 증인이라고 하였으며, 그 증인들에게 가르쳐 또한 그들이 증인이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딤후 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3)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전도는 바로 그와 같이 변화되기 전의 과거, 변화의 과정, 변화이후의 결과에 대해서 자기가 경험한대로 다른 사람에게 확신을 가지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체험과 간증이 있을 때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3. 행복한 죄인
사람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다른 사람에 의해 피소를 당하게 될 때 기분 좋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설령 그렇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재판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억울한 혐의를 받고 싶은 것이 최대의 소망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과자만 아니라 정치인이고, 재벌이고, 학자를 막론하고 법정에 출두하는 것을 제일 두려워하며,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든지 자신의 혐의를 벗거나 아니면 형량을 가볍게 하려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공통된 심정입니다.
그렇다면 바울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이년이라는 기나긴 기간을 아무런 죄도 없이 가이사랴 감옥에 수감되어 고난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관심은 사뭇 달랐음을 그의 변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은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의 무죄함을 변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무죄함을 변호한 것이 아니라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벨릭스 때처럼 자주 오랫동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이고, 이제 그만 듣겠다고 하면 그 순간 멈추어야 하는 절박한 순간이었습니다.
바울은 언제 아그립바 왕의 마음이 변할지 모르는 제한된 시간 안에 복음의 가장 중요한 엑기스 부분을 빠뜨리지 말고 효율적으로 전하였습니다.
1) 회개의 복음
(행 26: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행 26:20)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2)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행 26: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예수님이 계실 때나, 사도 시절이나, 지금이나 공통점은 어느 누궁에게 복음이 전해지든지 그 반응은 세 가지 중에 하나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적극적인 반대요, 둘째는 적극적인 찬성이요, 셋째는 반대도 찬성도 아닌 중립 상태로 대세만을 보는 무리 들입니다.
1) 부정적인 베스도
베스도 총독은 그와 같은 바울에게 네가 미쳤다고 소리쳤습니다. 정말 미친 사람이 아니고는 자신이 풀려나는데 유리한 말은 변호할 생각은 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예수 십자가와 부활만 증거 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행 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전혀 기분나빠하지 않고 도리어 베스도 총독만이 아니라 아그립바 왕마저 자기처럼 예수님께 미치기를 원하였습니다.
(행 26: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그 이유는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만나 전도자가 된 후에 진정한 행복을 찾았고 또한 그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일에 미친 사람처럼 열정을 다 쏟았기 때문입니다.
2) 소극적인 아그립바 왕
아그립바 왕의 반응은 베스도 총독과 달랐습니다. 바울을 미쳤다고 하지 않고 도리어 바울의 간증에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조금만 더 하였으면 자기도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였을지 모른다고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행 26: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이는 바울이 기대했던 것처럼 아그립바 왕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겠다고 적극적인 변화는 보여주지 못했지만 베스도에 비하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3) 무죄를 선언한 왕과 총독
사도 바울이 자기의 무죄함을 위해 변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오히려 회개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하는 기회로 활용하였을 때 바울에게는 어떤 결과가 있었습니까?
바울이 자신의 무죄를 변명하는 대신 오직 복음을 증거 하는 기회로 삼았을 때 오히려 왕과 총독은 바울의 무죄를 선언하였습니다.
(행 26: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행 26: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이는 마치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의 무죄함을 인정했던 것과 같이 베스도와 아그립바도 바울의 무죄를 선언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처럼 죄없는 죄인으로 오직 복음을 전한 것 때문에 고난을 받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딤후 1: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러므로 바울은 무슨 죄가 있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벨릭스아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한 것처럼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 자유를 포기한 행복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행 26: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물론 사도 바울이 일이삼차 선교에서는 바울의 전도를 듣고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들이 세워지는 열매가 있었으나,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으면서 대 제사장, 공회원, 총독, 황제와 같은 고위층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으나 열매가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부귀권세 때문에 복음을 거부하며 사는 불행한 사람과 복음을 위해 부귀권세를 포기한 행복한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바울이 실패했다고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 또한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행복은 로마 황제에게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대의 행복으로 여긴 사람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는 행복하게 보이지만 불행한 사람, 불행해 보이지만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행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지 본인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행 26: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행복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마음에 탐욕을 버리고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눅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속한 것들을 적게 소유함으로 인해 마음에 느끼는 불안이나 불같이 타오르는 욕심들을 절제케 하며 사람이 어느 때 행복을 느끼게 될까요?
사람이 일상생활 중에서 쉽게 경험하는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어떤 사람은 자기가 먹고 싶었던 음식을 배불리 먹었을 때이며, 어떤 사람은 자기가 꼭 갖고 싶었던 것을 구하게 되었을 때 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행복은 보람된 일을 하였을 때입니다.
영국 일간지인 런던 타임즈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정의를 현상 공모하였습니다. 사람들마다 생각이 제 각기 달랐는데 많은 사람들이 응모한 가운데 행복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등수가 나왔습니다. 1위...모래성을 막 완성한 아이, 2위...아기의 목욕을 다 시키고 난 어머니, 3위...세밀한 공예장식장을 다 짜고 나서 휘파람을 부는 목공, 4위...어려운 수술을 성공하고 이제 막 생명을 구한 의사
그렇다면 오늘 사는 ‘가장 행복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를 공모한다면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1위...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은 그리스도인
2위...바울처럼 인생길에서 주님을 체험한 그리스도인
3위...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며 사는 그리스도인
4위...바울처럼 복음에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그리스도인
그렇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거나 크고 화려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가장 가까이에 있습니다. 행복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입니다. 행복은 혼자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입니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은 물질만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고 복음을 나누며 사는 것을 가장 보람된 삶으로 여기고 실천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