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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몫에 태인 십자가
2005-09-08 19:55:34   read : 1839



내 몫에 태인 십자가


토마스 보스톤 지음 / SFC
위대한 청교도인 토마스 보스톤 목사님께서는 이 책을 통하여 우리의 삶에 들어 있는 구부러진 것들, 시험들게 하는 상황이 어떠한지를 먼저 보여준다. 그리고 그 구부러진 것들을 ‘바로 펴는’ 것을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어떻게 구해야 할 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그러한 것들이 우리를 겸비하게 만들며, 계속 우리를 따라 다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함도 가르쳐 준다. 최종적으로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높여주심’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는 방식을 설명해 준다.

Ⅰ. 인간의 고통 속에 녹아 있는 하나님의 주권과 지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그리스도인이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들을 바른 관점을 가지고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바른 관점은 지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그 괴롭게 하는 일들을 바르게 비추어내어 그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발견하고, 그에 따라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합당한 의도들을 드러나게 하는 것은 오직 말씀의 빛뿐이기 때문이다. 괴롭게 하는 일들을 믿음의 눈으로 응시하고 그것들을 숙고할 때에 그것들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지게 된다. 언뜻 보기에 참담해 보이는 것들이 격하게 요동치며 봉기하려는 부패한 정서를 평정할 수도 있다. 전도서 7장 앞부분에서 솔로몬은 바로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역설적인 논리를 전개한다. 그 논리들은, 육신의 눈으로 볼 때 우울하고 끔찍하게 보여 일반적으로 슬프고 충격적인 일들로 여겨지는 어떤 일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놀라운 결심들이다. 솔로몬은 사람이 태어난 날보다 죽는 날이 좋다고 선언한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친구가 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삶을 영위하고 자기 세대 사람들을 섬기고, 그럼으로써 자신을 보배로운 향 기름보다 더 선하고 풍미 있는 이름으로 드높인 삶을 살았다 치자. 그런 사람은 죽는 날이 그의 태어난 날보다 낫다는 것이다(1절). 같은 방식으로 솔로몬은 애통하는 자의 집에 가는 것이 잔치하는 집에 가는 것보다 낫고, 슬픔이 웃음보다 낫고, 지혜자의 책망이 어리석은 자의 노래보다 낫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대비에서 뒤에 나오는 것이 사실상 훨씬 더 즐겁기는 하지만 유익의 면에서는 앞에 나오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2-6절).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 보면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위기에 처하는지 알 수 있다.
세상은 눈살을 찌푸리며 푸대접을 하여 지혜로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압박을 가한다. 또 세상은 미소를 띠며 유혹하는 일을 통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무너지게도 한다. 그러므로 세상 어떤 길로 나간다 할지라도 위험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모든 세상사의 시작보다 결말이 더 낫다고 솔로몬은 선언하는 것이다(7, 8절). 그리고 솔로몬은 전체적인 입장에서 볼 때 고통당하는 시절에는 분노하는 것보다 겸손하고 인내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겸손하고 인내하는 경우에는 가장 최선의 것에 지혜롭게 복종하는 것이 되며, 거만하고 참지 못하는 경우에는 최선의 것에 대항하여 싸우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8절). 그는 우리에게 떨어진 몫을 보고 분내지 말라고 설득한다. 왜냐하면 그러다가 위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9절). 또한 이전의 때와 지금의 때를 비교하는 가증한 일을 저지르며 말라고 경고한다. 그럴 경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온당치 못한 불만을 은근히 가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10절). 그리고 불평을 잘하고 성미가 급한 성품을 치료하는 일반적인 처방, 곧 거룩한 지혜를 먼저 지시한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에서 최선의 유익을 얻게 하고, 우리를 죽이는 환경 속에서 생명을 주는 처방이다(11, 12절). 그런 다음 구체적인 치료법을 하나 제시하는데, 합당한 관점을 가지기 위해 지혜를 온당하게 적용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치료법이다.
아래의 제안을 통해 치료법 자체와 더불어 그 치료법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자.

1. 치료법 자체란, 우리가 보기에 어려움을 느끼게 하는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선을 지혜롭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대의 몫에 들어 있는 구부러지고 거칠고 어긋나 보이는 부분들’ 속에서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행하심 속에서 자기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십자가 자체만을 바라보기를 매우 잘한다. 십자가 자체만 이러저리 돌리며 생각하고 그 십자가를 사방으로 살펴보기를 좋아한다. 그와 함께 그 십자가의 제2차 원인을 찾아내려 한다. 그래서 결국 혼돈에 빠지고 초조해진다. 그러나 그 문제에 있어서 고요하고 만족할만한 심령 상태를 얻고자 한다면,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하고, 그 문제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과 하나님 손의 작용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점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의 몫에 들어 있는 그 구부러진 것의 첫 번째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그래서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행하심인지 알아보라.

2. 우리의 몫에 들어 있는 그 구부러진 것을 바로 보는 이 관점은 마음의 부당한 봉기를 잠잠케 하고, 그 관점 아래 잠잠하도록 만들어 주기에 아주 적합하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아무도 없도다). 우리의 몫인 그 구부러진 것을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그리 하실 동안에는 그 구부러진 것이 여러분의 몫으로 계속 남이 있을 것이다. 그 굽은 것을 펴거나 곧게 하려고 온갖 힘을 다 써보지만 다 허사일 것이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기울여 그 목적을 이루려 한다 할지라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게 하신 분만이 그 구부러진 것을 고치거나 곧게 펴실 수 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문제에 다가가야 마음 속의 소란이 잠잠케 될 것이다. 그래서 그 관점은 사람들을 인도하는 방편이 되어 자기들 몫 속에 굽은 것을 여전히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분께 마땅하게 복종하게 한다. 우리는 이 본문의 의도를 다음의 세 가지 명제(命題) 속에서 거론하려 한다.

1) 그 사람의 몫에 어떠한 굽은 것이 들어 있다 할지라도 그리 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2) 하나님 보시기에 흠집 내는 것이 합당하다 여기셔서 그리되게 하신 것이니, 어느 누구도 자기 몫에 들어 있는 그 굽은 것을 능히 고치게 못할 것이다.
3) 그 사람 몫에 들어 있는 그 굽은 것이 하나님의 행사요 하나님의 지으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그런 굽은 갖고서도 그리스도인다운 성품을 견지하게 유도하는 고유한 방편일 것이다.

(글 김재윤)

 


거룩한 몸부림


구대일 / 멘토
‘영성’ (spirituality) 이란 단어 만큼 혼란을 주는 단어는 없다. 본서는 영성을 깊이있게 연구하고 있다. 무엇이 영성인가? 저자에 의하면, 영성은 ‘이미 거듭나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기 위한 거룩한 몸부림’이다.
“나는 영성을 ‘거듭나서 이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더욱 가까이 가기 위한 거룩한 몸부림’ 이라고 나름대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구원 받은 자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우리는 그분을 더욱 알기 위해 부지런히 영혼의 날개 짓을 한다. 이것이 바로 ‘영성 추구’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자라가기 위해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고 있다. 때로는 기도와 금식을 통해 하나님에게 나아가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이 일종의 ‘영성 수련’이다. 신앙의 선배들은 나름대로 그분에게 가까이 가려고, 그분의 임재 앞에 서려고 각양의 방법으로 영성을 추구해 왔고, 또한 이 영성 수련들을 전수해 주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영성으로 가는 길을 다루었다.
영성은 믿음과 삶과 인격과 성품과 태도 따위를 총괄하는 통합체이다. 그러므로 ‘누구의 영성’이란 말은 그 사람의 모든 삶의 결정체를 가리키는 말로 보아야 한다. 바울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를 얻으려 한데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 인격체적인 영성을 발견코자 함이었다 (빌 3:7-16을 참조하라.) 그것은 새로운 자아이며,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며, 새로운 신분의 회복이다.
영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남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만남이 없으면, 그리스도를 얻지 못하며, 그리스도를 얻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어 버림이 아니라 배설물을 얻는 결과가 되어 버린다. 옛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몸부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
개신교에서는 ‘영성’이란 단어를 지금까지 회의적 시각에서 바라보아 왔던 것이 사실이다.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이 내건 슬로건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구원에 호소하는 그들의 눈에 ‘영성’은 인간의 공로를 주장하는 사악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영성’은 종교개혁의 큰 틀 안에서 당연히 배제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성’은 공로주의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영성’ 이란 단어는 생활의 거룩, 경건한 생활로 탈바꿈하여 사용하게 된다. 그들은 참 경건이란 세상을 떠나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바로 수도원이며, 세상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종교 개혁 시대와 아주 다른 상황이 되었다. 종교 개혁자들이 중세 기독교의 여러 심각한 잘못된 교리들을 버리고 나오면서 ‘영성’도 함께 곁들여 버려졌다는 사실을 최근에 이르러 깨닫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영성’의 진가를 캐내기 위한 시도가 개신교 안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환영해야 할 점이다.
개신교 내의 몇몇 영성주의자들이 최근에 영성을 소개하면서, 영성에 대한 바른 이해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선두에서 일하고 있는 영성주의자들 가운데는 한국에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리차드 포스터 (Richard Foster), 달라스 윌러드, 피터 쿤 (Peter Coon) 등이 있다. 유진 피터슨 (Eugene Peterson)과 덴버 신학교의 브루스 데마리스트 (Bruce Demarest) 교수는 영성 신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데마리스트 박사는 학생들의 영성을 위해 ‘영성 형성 (Spiritual Formation)’이라는 교과목을 책임지고 있으며, 엘리스터 맥그레쓰 (Alister McGrath)는 영성의 방향에 대한 혜안을 제공해 주고 있다. 그 외에도 게리 토마스 (Gary Thomas)를 위시한 많은 영성 작가들이 기독교 고전에서 영성을 소개하고 있다. 이 외에도 영성은 많이 세분화되어 영성과 목회. 영성과 상담, 영성 순례 (영적 사이클을 점검하는 작업), 영적 지도 및 인도 (spiritual director, spiritual mentor) 등의 방향에서의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일각에서는 영성이 로마 카톨릭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편협된 인식도 여전히 남아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개신교 내에서 바울과 어거스틴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지만, 어거스틴을 위시한 신앙의 선배들은 어느 특정된 교파에 소속된 사람들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들은 위대한 믿음의 선배 그리스도인이지 어느 특정 교파에 속해있는 분들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영성은 초대 기독교 시대부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신앙 활동이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보화를 전수 받아 더욱 새롭게 영성을 쌓아나가 한다.
저자는 영성을 ‘지식적 영성’과 ‘체험적 영성’으로 분류하였다. ‘지식적 영성’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knowledge of God) 이요, ‘체험적 영성’은 하나님을 아는 체험 (experience of God)이다. 그러나 이 두 영성이 상반된 것은 아니다.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편으로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말씀을 통해서고 능히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으며,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확증해 나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통합은 사도 바울 안에서 엿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당대의 최고였다. 그는 구원에 이르는 과정에서부터 교회의 구성, 성령의 은사 및 목회 지침에 이르는 방대한 신학을 저술한 신학자였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상으로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있었다.
저자에 의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체험하는 일은 영성에 이르는 두 가지 방편이 된다. 그런데 두 가지 다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지식적 영성’은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오도되는 위험이 있는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더 존중하는 인본주의가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알 수 있는 잘못된 신론, 기독론, 성령론을 들고 나온 여러 이단들은 성경의 지식을 오용한 잘못에서 나왔다. 반대로 ‘체험적 영성’은 신비주의로 빠지는 위험성과 지나친 영의 세계를 풀려고 하다가 이단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모든 영적 체험은 반드시 신앙의 표준인 성경에게 반드시 물어 보아야 한다. 올바른 체험적 영성은 성경을 기준으로 삼는다. 고전 영성 수련가들은 철저하게 성경 중심적이었다. 만약 신비적 체험을 했을 때에는 반드시 성경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영성은 교회의 전승에 맞아야 한다. 초대 교부들은 성경은 물론 사도들의 전승에 유의하여 이단들과 맞섰다. 예를 들어, 사도신경은 초대교회에서 각종 이단들과 싸워 얻어낸 의미 있고 뿌리 깊은 믿음의 고백이다. 선배 신앙인들이 쌓아 나온 영성의 기틀을 무시하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기 쉽다. 더 알기 원하는 것이 있거나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영성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야 한다. 교회사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성과 은사주의는 다르다. 미국에서는 영성 신학을 표방하는 학교 중에서 은사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학교가 더러 있다. 영성과 은사주의는 다르다. 은사를 받기 위해 영성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영성을 은사의 시녀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면 저절로 주어지게 되어 있다.
영성은 신비주의와 다르다. 영성 생활이 깊어지면 신비 (mystery)를 체험하는 일이 반드시 온다. 하나님을 아는 것 자체가 이미 신비에 속한다. 바울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도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바울은 삼층천에도 갔다 왔다. 어떤 교회에서는 꿈에 대한 얘기만 하여도 펄쩍 뛴다. 성령에 대해 설교하는 교회가 드문 것도 사실이다. 신비를 너무 두려워하면 안 된다. 그러나 신비주의 (mysticism) 는 다르다. 이것은 영적 체험 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잘못하면 사탄이 주는 영적 조화를 잘못 받을 가능성이 크며, 그렇게 해서 이단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적 영성에 기초해 있어야 사탄의 장난을 막을 수가 있다.
영성과 영적 분위기를 혼동하면 안 된다. 영적 느낌이 영성을 이끌어 가서는 안 된다. 막연한 느낌에 의존해서 영성 생활을 이끌어 가면, 주관적 판단이나 주의의 분위기에 영성이 좌우되기 쉽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어서도 분위기나 느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항상 초점은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느낌과는 상반되는 결과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영적 분위기에 의존하면 올바른 영성이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사 속에 숨쉬고 있는 영성을 살피는 것은 필수적인 작업이다. 기독교 영성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정도를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영성을 분간할 수 있는 안목도 얻게 된다.
이 책은 영적 지도자에 관한 자세한 지침도 제공하고 있다. 영성 지도자는 지도를 받는 자들의 사역에 따라 지도를 해야 함은 물론, 그들의 영적 사이클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지도를 영성 지도자가 먼저 받아야 한다. 영적 혜안이 없었던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의 영성을 잘못 판단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일리는 사무엘에게도, 그의 두 아들들에게도 아니 백성에게도 조차 그의 영성 지도는 밑 바닥 수준이었다.
영성 지도는 개인의 영혼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도하는 자는 지도를 받는 자의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맞추어 지도해야 한다. 그저 “기도해 보세요.” 라던가 “성경을 읽으세요.” 혹은 “예배나 모임에 부지런히 참석하세요” 따위의 일반적 또는 일방적 지시의 시대는 지나갔다. 그러므로 영성 지도자는 그들의 영적 형편을 잘 파악하여 구체적으로 지도를 해 주어야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영성 지도자는 그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획이 그들의 삶 속에서 활짝 펼쳐질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에 닮아가도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야 한다.
헨리 나우웬은, “영성 지도자는 상담자나 심리 치유자나 분석자가 아니라 성숙한 동료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그를 믿고 우리의 영적 삶을 이야기 할 수 있으며, 삶 속에서 하나의 능동적인 임재를 분별하기 위해 끈임 없이 몸부림치는 우리에게, 기도에서 우러나오는 지시를 그로부터 기대할 수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성의 지도를 받는 사람은 지도자를 믿고 따라야 한다. 자기 생각과 고집을 앞세우면 두 사람의 관계는 형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토마스 아켐피스는, “현명하고 양심적인 사람과 늘 의논하여, 당신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고 따르는 것보다는 당신보다 나은 사람의 의견을 묻고 그의 지시를 따르도록 하십시오.”라고 충고한다.
영성을 지도하는 자는 처음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도 있듯이 자기가 받은 고통과 아픔이 하나님 앞에서 승화되어 나오면 훌륭하게 남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싸매어 줄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고난의 길을 걸어본 사람은, 같은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 더욱 효과적으로 도와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적 지도자는 은혜의 통로로서의 전달자이다. 자신이 먼저 기도로 영력이 뒷바침 되어 있어야 하며, 영혼의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경험이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영혼 하나하나에 대한 진실어린 애정이 늘 내면에 깔려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자신의 영성만을 고집하여 상대방에게 무리한 강요를 할 수도 있다.
물론, 진정한 영성 지도자는 성령이시다. 영성 지도자는 다른 사람의 영혼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지켜보며, 이를 기뻐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영안을 갖고서 그 사람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작업을 간파할 의무가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권고에 민감함은 물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시고자 하는 계획이 무엇인지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영성 지도자는 상대방의 말을 듣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모든 일에는 과정이 필요하고 순서가 있는 법이다. 성령은 그 누구보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영성 지도자가 마음대로 조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가장 알맞은 시간 속에서 각자의 영성을 지도하신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영성 신학이 모든 신학의 결정체라고 말한다. 성경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은 물론이고 인간학, 상담학, 지도자학이 총망라되는 종합적인 신학이 요구된다. 독자는 본서에서 영성의 참뜻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필독서로 추천한다.

(글 송광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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