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2006-05-02 11:53:07 read : 3880
어린이] 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가치 기준을 심어주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꾸짖는다'는 것은 선과 악 중 한 가지 기준만을 부모의 책임 아래 자녀에게 심어주기 위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포인트! 잘못을 저지른 자녀들을 꾸짖을 때는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해서 판단해야 하며, 절대적인 의미가 내포된 것이 안 된다. 선과 악은 동전의 앞뒤와 같이 언제나 상반된 위치에 놓여 있다. 따라서 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먼저 그것이 어느 쪽에 해당되는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38. 최고의 벌은 침묵이다 '침묵'이 매보다 효과적이다 자녀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떤 벌을 줄 것인가-이것은 가정 교육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자녀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떤 벌을 어떻게 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 예를 들면, 자녀들이 관여해서는 안 될 일에 나섰을 때, '그런 일에 나서지 말라고 했지'라며 말로써 꾸짖는 경우도 있겠고, 조금 심한 경우에는 매질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은 어느 정도 잘못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벌인데, 벌은 미워서가 아니라 예방적인 차원에서 절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칫 이것을 잘못 다스리게 되면 부모의 경고나 꾸중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버릇없는 아이로 자라기 십상이다. 이런 사정은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유태인 어머니들 역시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을 만큼 체벌의 강도가 심하다고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이 학교나 외출에서 돌아와 책가방이나 입었던 코트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지면 큰 소리로 꾸짖는다. 그래도 고쳐지지 않을 경우에는 엉덩이나 뺨을 때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유태인 어머니들은 이런 체벌보다 한 차원 높은 방법을 항상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침묵이라는 무기이다. 언젠가 겨우 세 살밖에 안된 딸아이가 제 친구한테서 받은 유리컵을 들고 다니면서 장난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내가 말했다. "얘야, 깨뜨리기 전에 엄마에게 오렴." "안 깨뜨려요." 그러고는 유리컵을 건네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이내 단념하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랬더니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쨍그렁'소리와 함께 마루에 떨어진 유리컵은 박살이 나고 말았다. 나는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 봐, 엄마가 말했잖니. 너하고는 이제부터 말도 하기 싫으니 너도 엄마한테 말 걸지 마!" 그때부터 30분 동안 나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이처럼 의사 소통의 수단인 대화를 끊는다는 것은 자녀들에게 최대의 벌이 아닐 수 없다. 즉, 자녀들의 존재를 아주 무시하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매질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면서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아무때나 이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말로써 타일러도 안 듣거나, 부모를 모욕하는 언동을 하는 등 가정교육의 근본에서 벗어났을 최악의 경우에만 비상수단으로 써야 하는 '무기'인 것이다.
침묵은 부모에게도 반성의 기회가 된다 한편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부모 자신에게도 매우 가혹한 벌이라고 할 수 있다. 유태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말이 많은 민족이라는 딱지가 붙었으리만큼 대화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탈무드>에는 '입'이나 '말'에 대한 경구가 수없이 많은데, '이스라엘은 누에이다. 유태인은 쉬지 않고 입을 움직인다'라는 말도 그 중의 하나이다. 누에가 항상 뽕잎을 먹고 있는 것처럼 입을 움직이고 있다, 즉 유태인은 언제나 말이 많다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가정 교육에 불충실했던 자신에 대해 반성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녀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도 된다. 이렇든 '침묵'이 보통 벌과 다른 점은, 벌을 주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에게 독특한 심리작용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가정교육에 불충실했던 자신에 대해 반성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녀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도 된다.
39. 협박은 금물이다, 벌을 주든 용서를 하든지 하라 부모의 애매한 태도는 자녀들의 마음의 건강을 해친다 우리 유태인들은 '건강'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깨끗한 코우샤 푸드만을 먹으며,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는 것을 종교적 계율로까지 삼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신체의 건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마음의 건강이다. 마음의 건강이란, 육체적으로 말하자면 찌뿌드드한 상태에 빠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자녀들로 하여금 항상 우울하거나 부모의 눈치만 살피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이처럼 자녀들의 솔직하고 그늘지지 않는 마음씨의 소유자로 키우는 최대의 요점은 자녀들을 억누르지 말고 솔직하고 명쾌한 태도로 대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녀들의 마음을 올바르고 건강하게 만드는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인 것이다. 유태인의 격언에 '자녀들을 협박해서는 안된다. 벌을 주든 용서하든 둘 중에 하나밖에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 격언이야말로 자녀들의 마음에 건강을 심어주는 최상의 조언이라 하겠다. 유태인들은 아이들에게 벌을 주려고 결심한 이상 도중에 우물쭈물하지 않는다. 반면 벌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면 모든 일을 불문에 부치고 용서해 준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일곱 명의 충실한 제자가 있다. 그들은 스승인 프로이트에게 주피터의 머리모양을 조각한 고대 로마의 복제품 반지를 선물로 받고, 합심해서 정신분석학계를 지도해 나가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제자 중 한 사람인 모토 랑크가 프로이트 학파로부터 탈퇴하여 스스로 한 학파를 만들었다. 랑크는 프로이트가 온 정열을 쏟아 정신분석을 훈련시킨, 프로이트에게는 마치 자식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랑크의 배신에 대해서 '나는 모든 것을 용서했다. 이제는 끝이 났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했을 뿐이다. 이 일화는 비록 스승과 제자라는 특수한 관계이긴 하지만, 명쾌한 판단을 내린 훌륭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와 같은 명쾌한 결단이 사제지간이 아닌 부모자식 간에 일어났다면 자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자녀들은 벌을 주든지 용서해 주든지, 한 가지를 선택하는 부모의 명쾌한 태도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고 건전하게 성장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벌을 주는 것인지, 용서해 주는지 분간할 수 없는 흐릿한 태도를 취한다면, 자녀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협박은 자녀들의 마음의 건강을 해친다 비근한 예이지만, 자녀가 그릇을 깨뜨렸을 때,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앞으로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가만 두지 않겠어'라고 위협을 했다면 아이는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분명 잔뜩 겁에 질려 불안한 심리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자녀들에게 협박조로 말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도 벌을 주는 것도 아니다. 단지 자녀들의 마음속에 불안감만 심어줄 뿐 아무 이득도 없다. 부모의 미지근하고 불확실한 태도나 말의 이면에는 은근히 자녀들에 대한 협박이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협박은 부모가 자녀들의 잘못에 대한 명쾌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초조감이 변질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동양 어머니들의 '잔소리'는 자녀들의 행동에 큰 걸림돌이 된다. 물론 나쁜 의도에서 하는 말이 아니겠지만, 언제나 자녀들을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점에서 협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자녀들을 솔직하고 그늘지지 않는 마음씨의 소유자로 키우는 최대의 요점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억누르지 말고 솔직하고 명쾌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미지근하고 불확실한 태도나 끊임없는 잔소리는 자녀들을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점에서 협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0. 자녀들의 잘못은 매로 다스린다 자녀를 때릴 때는 구두끈으로 때려라 우리 유태인들은 자녀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지혜의 근원인 머리를 제외한 다른 신체 부위에 매질을 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외출을 했다가도, 아이들이 남에게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을 경우에는 즉시 집으로 돌아와서 엉덩이나 뺨을 때리며 꾸짖는다. 내가 아는 성미 급한 친구는, 아이가 잘못을 했을 경우 길거리든 식당이든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때리기도 한다. 유태인들은 부모의 손도 입(말로 꾸짖는 거)이나 눈(침묵으로 꾸짖는 것)처럼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하나의 '교육적 도구'라고 생각한다. 특히 손은 눈이나 입과는 달리 실제로 육체적 '고통'을 주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스스로의 행동을 반성하게 하는 효과가 크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매질은 자녀들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고쳐주는 데 절대 필요하며, 동시에 자녀들에게 신체적 고통을 주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구약성서의 잠언 13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어떤 자녀이건 응석을 마냥 받아주며 방임하는 것은 부모된 자의 책임을 다하지 것이 못 될 뿐 아니라, 자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만이 자녀들의 잘못을 매로 다스린다는 뜻이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언 22장 15절)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내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언 29장 15절)
자녀들을 길들이는 데 있어 매는 꼭 필요한 것이고, 나아가서 그것을 통해 지혜까지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한 말들이다. 물론 채찍으로 노예를 때리듯이 자녀들을 다루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상징적인 의미로서, 부모의 손으로 직접 때린다는 것은 미움이 아닌 '사랑의 채찍'임을 강조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스킨쉽인 것이다. 한편 유태인의 격언 중에 '아이들을 때려야 할 때는 구두끈으로 때리라'는 말이 있다. 즉 매를 때리는 목적은 아이들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마음을 바로잡는데 있으므로 아이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심한 매질은 피하라는 뜻이다.
신념이 없는 부모는 자녀들을 때리지 못한다 요즘은 어느 나라에서건 아이들을 때리는 것은 야만적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자녀들이 잘못을 했더라도 매를 들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 것 같다. 그렇지만 매질이 자녀들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때에는 예외이겠지만, 잘못을 저지는 자녀들의 마음을 바로잡는 수단일 때는 결코 야만적이라 할 수 없다. 사용하는 시기와 정도를 분별할 줄만 안다면, 오히려 장려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부모가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서 매를 드는 경우가 아니라면, 매를 맞는 자녀들도 부모의 손길에서 진심 어린 애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편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매를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부모에게 신념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 처하는 자기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가치관이 있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을 부모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면, 이와 같은 매를 포함한 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녀를 옳게 가르치려고 노력할 것이다. 지신의 신념에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자녀들을 어정쩡하게 다스리는 부모가, 자녀들만큼은 신념 있는 확고한 사람으로서 성장해 줄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한 바람이다. 즉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매질을 혐오하는 풍조는 민주주의적 교육 방식과는 무관하다. 자신감을 상실한 부모만이 그저 자녀들을 먼발치서 지켜볼 따름이다.
이것이 포인트! 자녀의 응석을 받아주며 방임하는 것은 부모된 자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못 될 뿐 아니라, 자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매질을 혐오하는 풍조는 민주주의적 교육과는 무관하다. 자신감을 상실한 부모만이 그저 자녀들을 먼발치서 지켜볼 따름이다.
41. 어떤 일이든 제한된 시간 내에 마치는 습관을 길러준다. 시간의 소중함을 깨우쳐준다 유태인 가정의 자녀들은, 가장인 아버지가 귀가하기 전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그 이유인즉 아버지가 귀가해서 샤워를 끝내는 즉시, 가족 모두가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기 위함이다. 가정의 저녁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유태인의 자녀들은 어렸을 때부터 정해진 순서와 정해진 시간 안에 일을 끝마치는 훈련을 철저하게 받으며 자란다. 그것은 비단 샤워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에 그대로 적용된다. 금요일 일몰 때부터 시작되는 안식일 날, 자녀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즉시 숙제 등을 재빨리 마친 다음 목욕을 하고는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모든 일과는 어머니가 일몰과 동시에 양초에 불을 켤 때까지 마치도록 정해져 있다. 이런 까닭으로 자녀들은 매일, 또는 매주 시간과 승부를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간을 엄수함으로써 자녀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한정된 시간 안에 끝내는 습관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혀 가는 것이다. 그 밖에 유태교의 축제행사 때에도 시간의 중요성을 통감하게 하는 시스템이 있다. 예를 들면 봄철에 치르는 가장 큰 축제인 '유월절(Passover)'에는 빵을 못 먹게 되어 있다. 그날에만 먹는 딱딱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샌드위치를 대단히 좋아하는 우리 집 아이들은 이것이 큰 고통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신성한 행사인 만큼, 축제가 계속되는 7일 동안은 참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렇게 해서 유태인 자녀들은 시간의 중요성을 거의 생리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유태인에게 있어서 시간에 대한 규율은 삶의 전부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우리들은 기독교의 영생이나 불교의 윤회 사상을 믿지 않는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부심 한다.
시간관리가 공부의 기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유태인 소년들은 열세 살이 되면 성인식을 치르게 되는데, 이때 주로 손목시계를 선물로 준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다짐을 주기 위해 시계를 선물하는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는 사고방식은 유태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오늘 할 일을 오늘이라는 시간 안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서를 상세하게 짜는 습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계획에 맞춰 일을 확실히 해치웠을 때는 일종이 쾌감마저 느낀다. 흔히 동양의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공부를 하지 않아서 걱정이라고 말하는데, 그러나 나는 그 원인이 자녀들이나 부모가 사전에 시간을 제대로 관리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녀들은 부모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공부 계획표를 짜기는 하지만, 이내 그것이 무리인 것을 알고는 몇 번씩 변경을 하는 동안에 싫증을 느끼고 만다. 그러나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기만 하면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책상에 모래 붙들어 앉히려고 한다. 이것은 곧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부모는 자녀들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어떻게 시간을 유효 적절하게 이용하는가 하는 방법을 깨우쳐주도록 해야 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할 수 있도록 리듬을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사는 30분 이내에 끝내도록 시간을 정해 놓고, 제한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우물거린다면 사정을 보지 않고 모두 치워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녀들은 30분이라는 시간의 중요성을 알고, 그 시간 안에 식사를 끝마치는 습관을 몸에 익히게 된다. 나는 아침에 텔레비전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학교에 늦지 않으려면 정해진 시간 내에 세수하고,식사하고, 옷을 갈아 입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재빨리 끝내야 하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볼 시간적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즉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정신이 팔려 더욱 중요한 일을 등한시하는 따위의 나쁜 버릇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어렸을 때의 시간관리가 가장 능률적인 공부 방법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에게 있어서 시간에 대한 규율은 삶의 전부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유태인들은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부심 한다.
42. 가족 모두가 모이는 식사시간을 활용한다 식당에는 텔레비전을 두지 않는다 나는 언젠가 잘 아는 일본인 가정에 저녁식사를 초대받았을 때 대단히 기묘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그 집 가족들과 우리 부부가 식탁에 둘러앉아 막 식사를 하려던 때였다. 초등학교 4년생인 그 집 장남이 벌떡 일어나더니 식당 한쪽에 놓여 있는 텔레비전을 켜는 것이었다. 마침 텔레비전은 우리 모두가 볼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 광경이 나에게는 참으로 기묘하게 생각되었다. 우리 집의 경우 식사시간에 텔레비전을 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는 '홈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는데, 마침 가족들이 모여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화면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텔레비전을 보면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시각 아마 다른 집에서도 이와 똑같은 광경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부분의 일본 가정에서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식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가족의 일체감을 느끼는 가정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식사시간은 자녀들의 마음의 양식이다 우리 유태인은 구약성서에 의해 굳게 뭉쳐져 있다. 또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유태인에게 있어 식탁은 무엇보다도 신성한 자리이기 때문에 이런 경험은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유태인들이 식사시간에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이유는, 텔레비전은 한갖 오락물일 뿐이지 가족 전체를 하나로 묶는 도구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텔레비전 프로는 다양해서 가족 모두가 공통적으로 흥미를 느끼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에서 가족이 텔레비전 프로를 화제로 삼는 것은 '회화'는 될 수 있을지언정 대화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일본 역시 다른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부모 자식간의 대화의 단절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듯한데, 그 한 가지 원인은 식당에 텔레비전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식사시간은 한 가족이 모여 서로 마주보면서 연대관계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낮 동안 아버지는 직장에서, 자녀들은 학교에서, 그리고 어머니는 가정에서 활동하다 한 자리에 모이는 유일한 시간인 것이다. 그것은 가족들에게는 가장 즐거운 시간인 동시에, 교육적으로 보더라도 유익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본 가정에서는 이러한 귀중한 시간에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봄으로써 가족의 유대관계를 흐려놓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이것이 포인트! 식사시간은 한 가족이 모여 서로 마주보면서 연대관계를 확인하는 시간인 동시에, 교육적으로 보더라도 매우 유익한 시간이다.
43. 외식을 할 때는 어린 자녀를 데려가지 않는다 젖먹이는 외식할 때 데려가지 않는다 부모들이 음식점에 젖먹이 아기를 데리고 오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한 가족이 정답게, 늘 머리를 맞대고 사는 자기 집과 다른 분위기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음식도 음식이려니와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 가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겨우 두세 살밖에 안 된 젖먹이들까지 데리고 온다는 사실이다. 한 가족이 함께 모여서 식사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유태인들은 결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유는 그 또래의 어린이들이 밖에서 식사하는 즐거움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즉 아이들에게는 외식이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음식점에서 식사를 할 경우,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은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떠들거나 돌아다니며 수선을 떠는 등 다른 손님들에게 폐를 끼칠 것이 틀림없다. 때로는 음식을 흘리거나 그릇을 깨서 종업원이나 주인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은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될까 봐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진짜 이유는, 밖에서 식사를 하는 행위는 어른들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외식을 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첫째로는 생일 등 축하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이다. 그 외에 집에서는 먹을 수 없는 특별한 음식이 먹고 싶어서일 경우도 있을 것이고, 단순히 기분 전환을 위해서 외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어른의 세계에서는 어느 경우든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모두가 이해되지 않는 것들 뿐이다. 그들에게는 평소와 다른 상황에서 식사하는 것만이 흥미로울 뿐, 외식을 통해 그 어떤 기쁨도 얻지 못한다. 이처럼 그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기 전까지 외식은 아이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어른들 역시 아이들 때문에 신경을 쓰느라 외식의 즐거움은커녕 기분만 망치게 될 것이 뻔하다. 어른에게는 즐거울지 모르지만 어린이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유태인들의 상식이다. 아이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런 이유로 인해 외식을 할 때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 좋다.
남에게 협조하는 것은 '자기 희생'이 아니다 <탈무드>에 '날마다 오늘이 최후라고 생각하라'는 말이 있다. 하루 하루, 한순간 한순간을 전 생애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내세'라든가, '저 세상'을 믿지 않는 유태인들의 생활신조이다. 그러므로 외식을 즐기는 것도 우리들 생애의 귀중한 한순간이며,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이기에 이 순간을 가장 충실하게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약간 과장된 말 같지만, 외식에 어린이를 동반하는 것은 유태인의 생활 방법에 역행하는 셈이다. 음식점에 어린이를 데리고 가서 다른 손님에게 폐를 끼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이지,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 않는 직접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철저한 개인주의자인 유태인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는 발상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대로 행동을 제약하는 발상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대로 자신에게 충실한 행동이 바로 남과 협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동양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다른 사람과의 협조는 곧 자기 희생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견해도 우리 유태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불합리하게 여겨지는 부분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는 발상 따위는 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에게 충실한 행동이 바로 남과 협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44. 한 살이 될 때까지는 부모와 함께 식탁에 앉히지 않는다 식탁은 인간형성의 장소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자녀들이 가족의 일원으로서 교류하는 최초의 자리가 바로 식탁이다. 그것은 식탁에 둘러앉아 가족 전체가 얼굴을 마주보고 앉았을 때, 어른들은 물론이고 비록 말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무의식중에 '가족'이라는 집단 의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느낌은 어린아이의 연령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한 예로, 전혀 말을 못하는 어린아이와 조금이라도 말을 할 줄 아는 어린아이가 함께 식탁에 앉아 있을 경우, 분위기를 인식하는 차이는 아주 다르다고 하겠다. 그런데 아무리 식탁이 한 가족이 교류하는 데 있어 절대 중요한 자리라 할지라도 자녀가 한 살이 채 안 되었을 때는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 지나친 표현일지 모르지만, 특히 젖을 먹는 유아인 경우, 간혹 가다가 식탁의 침략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리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가족과 별도로 식사를 해서는 안된다. 우리 유태인들은 그 경계를 첫 번째 생일날로 잡고 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아이는 비로소 부모 형제들과 나란히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된다. 그쯤 되면 겨우 어른이나 다 큰 형제들의 식사법을 흉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로부터 한참 동안 아이는 식탁의 불법 침입자 처지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자녀들이 그랬듯이, 아이들은 차츰 부모 흉내를 내면서 식탁에서의 기본 예절을 배우므로 어른들은 사소한 실수쯤은 눈감아주면서 아이가 식사 예절을 터득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협력해야 한다.
먹는 방법에서도 '인간다움'을 고려한다 유태인들은 그 행위로 보아서는 인간도 동물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초월한 존재라는 것에 특히 주의한다. 동물이나 인간의 공통적인 행위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바로 섹스와 먹는 일이다. 그러나 섹스도 그렇지만, 먹을 것이 눈앞에 있다고 해서 동물처럼 무조건 입에 넣거나 손으로 집어먹는다면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젖을 떼게 되면 포크나 나이프, 혹은 젓가락이나 숟가락 따위의 도구를 사용해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인간답게 먹는 첫 걸음이라 하겠다. 즉 이것이야말로 동물과는 구별되어지는 첫 단계인 셈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와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동물적인 본능에서 벗어나기 위한 초보 훈련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비로소 아이에게도 가족의식이 형성된다. 유태인들이 식탁을 인간 형성의 자리로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포인트! 아무리 식탁이 한 가족이 교류하는 데 있어 절대 중요한 자리라 할지라도 자녀가 한 살이 채 안 되었을 때는 동석시키지 않는 것이 좋다.
45. 편식 버릇을 방관하면 가족이란 일체감을 잃게 된다 '이 음식점에는 이 메뉴밖에 없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구미인들이 '유태인 어머니'라는 말에서 우선 연상하는 것은 '교육 엄마', 즉 교육에 열성적인 엄마이고, 그 다음이 식사 때 자녀들에게 무조건 '많이 먹으라'고 권하는 어머니이다. 사실 이런 지적을 받을 만큼 유태의 어머니들은 귀찮을 정도로 자녀들에게 많이 먹으라고 권한다. 구미나 동양에서는 흔히 '치즈는 프로틴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라거나 '시금치는 철분이 많은 식물이기 때문에'라는 따위의, 주로 영향학적인 지식을 과시하면서 자녀들이 싫어하건 말건 먹을 것을 강요하는 엄마들이 많다. 그런데 유태인 엄마들은 '먹어라, 많이 먹어라'고 권하긴 하지만 다른 나라 어머니들처럼 영향학적 가치까지 들먹이지는 않는다. 소박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어린이들에게는, 특히 젖먹이에게는 '성장' 이 첫째 요건이다. 더욱이 모든 음식은 성장의 필수 요건이므로, 성장한 다음 어떤 생활환경에 처하더라도, 또 어떤 직업에 종사하더라도 남에게 절대로 뒤지지 않는 확고한 '체력'을 만들어주는 것이 부모된 자의 의무라고 우리 유태인 어머니들은 믿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유태인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을 가려서 먹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건 내가 싫어하는 음식이야, 안 먹을 테야'라는 말을 못 들은 척 묵인해 버린다면 그만큼 자녀들의 올바를 성장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행동이 자녀들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물론 어린이들 자신은 그때 그때의 기분에 따라 먹는 것이 다르므로 하나 하나 영양학적인 측면에서 설명해 준다 하더라도 이해할 리가 없다. 그래서 '많이 먹으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것이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유일한 방법인 까닭이다. 음식점에 갔을 때, 어린이들이 간혹 자기 식성에 맞지 않는다며 먹기를 거부할 때가 있다. 이럴 경우에는 '이 음식점에는 이 메뉴밖에 없으니 정 싫으면 너 혼자 다른 음식점에 가서 먹으라'고 딱 잘라 말하라. 그러면 아이는 어쩔 수 없이 먹게 될 것이다. 또는 참을성 있게 '아이 착해, 이걸 먹으면 건강해진다'라고 타이르면 대개의 어린이들은 왕성하게 먹게 되므로 편식 습관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다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초콜릿이나 과자 따위의 자극성이 강한 것들은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으므로 결코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만든 음식은 가족을 하나로 만든다 자녀들이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면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이 생기게 되어 음식이 맛있느니 없느니 하며 가려먹는 습관이 생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인간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짐승들처럼 단지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가족이 정답게 한 자리에 모여서 연대감을 결속하는, 나아가 하나님을 축복하는 신성한 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렸을 때의 편식 습관을 방임하는 것은 결국 가족의 일체감을 깨트리는 원인을 제공하는 셈이 된다. 어쩌면 이런 위험성이 예상되기 때문에 유태인의 어머니들이 편식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기를 먹는 부모 옆에서 자녀들이 생선을 먹는다면, 한 가족이 따로 따로 생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광경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유태인 가정에서는 음식은 되도록 엄마가 정성 들여 손수 만든다. 엄마가 직접 만든 음식은 가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함과 동시에, 자녀들에게 식사라는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포인트! 어렸을 때의 편식 습관을 방임하는 것은 결국 가족의 일체감을 깨뜨리는 원인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유태인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편식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46.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은 위생상, 외견상 목적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몸이 깨끗하면 마음도 깨끗해진다 어머니가 자녀들을 교육시킬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식사 전에 반드시 손을 씻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손을 씻는 것뿐 아니라 자기 몸을 청결하게 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의무이자 최소한의 예의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마찬가지이겠지만, 유태인 가정에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유태인 가정에서는 손을 씻고 식사를 시작할 때까지는 절대로 입을 떼서는 안된다고 자녀들에게 엄격히 가르친다. 그것은 곧 하나님은 축복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기 위함이다. 즉 우리들 유태인에게 있어 손을 씻는 행위는 하나님을 대하는 신성한 의식이며, 그러므로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신성한 의식은 비단 식사때 뿐만이 아니라 교회에 갈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출입구에는 물을 담아놓은 그릇이 있어 그곳에서 손을 씻고 들어가게 되어 있다. 손을 씻으면 마음도 깨끗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2천여 년 전의 일이다. 이스라엘이 히렐이라고 불리는 랍비의 대승정이 있었다. 그는 손꼽히는 랍비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인물로서, 그리스도의 말은 사실은 히렐의 말을 인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이 위대한 랍비 히렐이 어느 날 거리를 황급히 걷고 있었다. 제자가 그 이유를 물었다. "좋은 일을 빨리 하고 싶어서 서두르고 있네." 제자는 좋은 일이란 것이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스승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히렐은 공중 목욕탕으로 들어가더니 온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보고 어리둥절해 하는 제자에게 히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 곧 선행이라네."
나는 수시로 우리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때마다 반드시 한마디 덧붙이곤 한다. "집 안을 청소하거나 교회를 깨끗이 하는 것도 꼭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어. 그러나 그보다 먼저 너희들 몸부터 청결히 하거라. 그것이 바로 선행의 시작이니까."
청결은 과학적, 종교적 의미가 있다 우리들 유태인의 이와 같은 청결벽은 예로부터의 전통이며, 그로 인해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까지 생기게 되었다.
중세 때 페스트가 퍼져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 그때 유태인이 이 무서운 페스트를 만연시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왜냐하면 오직 유태인만이 이 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유태인만이 페스트에 걸리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그 당시 그리스도들은 평소 목욕하는 습관이 없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모르게 돈은 감추려면 비누 밑에 숨겨라'는 농담이 유행할 정도로 목욕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실제로 비누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유태인만은 그 당시에도 목욕을 자주 하는 습관이 있었고,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물론이고 화장실에 다녀온 다음에도 반드시 손을 씻는 것은 종교상의 규칙이기까지 했다. 이 청결함이 페스트로부터 유태인을 구해 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도 소문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유태인이 페스트균을 우물에 넣었다는 소문이 퍼져 박해를 받게 되었다.
우리 유태인들은 신앙심이 매우 돈독한 민족이며, 또한 현실주의적 생활 태도를 계속 유지해 온 민족이기도 하다. 몸을 청결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연관된다는 신앙은, 동시에 건강이나 위생이라는 과학적인 이유에도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건강에 관한 생활의 지혜가 고대 유태인들에 의해서 신앙으로까지 승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습관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생활 속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와 같이 우리 유태인 어머니들은 청결의 필요성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경우에도, 손을 씻고 샤워를 하는 것은 질병을 예방하고 남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신앙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설명해준다. 그럼으로써 자녀들의 마음속 깊이 그런 습관이 보다 튼튼하게 뿌리내리도록 노력한다. 또 현대생활에서는 이러한 의식적인 습관을 통해서 깔끔한 태도와 경건한 기분으로 사물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에게 있어 손을 씻는 행위는 하나님을 대하는 신성한 의식인 동시에 건강이나 위생이라는 과학적인 이유에도 부합된다. 이러한 의식적인 습관을 통해서 깔끔한 태도와 경건한 기분으로 사물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기를 수도 있다.
47. 용돈을 줌으로써 저축하는 습관을 길들인다 쓰는 것보다 저축하는 습관이 먼저 유태인 자녀들 중에는 용돈을 넉넉하게 받는 어린이도 있고 전혀 받지 못하는 어린이도 있다. 왜냐하면 어린이에게 반드시 용돈을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일상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부모가 알아서 사주던가, 아니면 필요한 만큼 돈을 주면 되므로 그 이상의 돈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자녀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초등학생에게는 용돈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만약 유태인 부모들이 자녀에게 용돈을 준다면, 그것은 저축하는 습관을 길들이기 위해서일 때가 많다. 여덟 살된 아들이 있는 내 친구는, 아들에게 처음으로 용돈을 주면서 '꼭 필요한 때만 써라'고 했더니, 곧바로 은행에 저금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은행원한테서 '저금을 해두면 이자가 불어 돈이 불어난다'는 말을 듣고 아이가 매우 불안해했다는 것이다. '이자'가 무엇인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아이는 자기 돈이 무사한가 매주 한 번씩 은행에 들어 확인을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유태인 어린이들은 돈을 가지고 물건을 사는 습관이 별로 없다. 대개는 용돈은 아껴서 저금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어린이가 많다. 다만 친구를 사귀는 데에는 얼마간의 돈을 써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데 용돈을 써도 돼요?'하고 어머니에게 물어본 후 돈을 쓰는 자녀들이 많다. 나의 경우는 아이들에게 미리 용돈을 주지 않는다. 아이들이 돈이 필요하다고 요구할 경우, 그때마다 필요한 만큼의 용돈을 준다. 이 경우에도 아이들은 쓰고 남는 돈은 반드시 저금한다. 그 대신 가족의 생일 등 선물을 살 때에는 아끼지 않고 필요한 만큼 쓰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돈을 쓸 때는 마음과 일치해야 한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항상 '돈을 쓸 때는 마음이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친다. 가족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것도 친구끼리의 우정의 표시인 것이다. 유태인 어린이들이 조그마한 저금통에 자선용으로 따로 저금을 하는 마음과, 용돈을 아껴 저축하는 마음가짐은 똑같은 심정에서 출발한다. 돈이라고 하면 인간적인 정감과는 약간 거리가 먼 차가운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사용 방법에 따라서 얼마든지 인정이 실린 따스함을 느낄 수도 있다. 우리 유태인들이 특히 돈의 사용 방법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흔히 수전노라고 손가락질 받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만 돈의 중요성과 무서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태인의 격언 중에 '돈이란 벌기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쓰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유태의 어린이들은 '저축'하는 행위에서 무엇보다 돈을 신중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먼저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의 어린이들은 '저축'하는 행위에서 무엇보다 돈을 신중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먼저 배운다. 돈을 쓸 때는 마음이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사용 방법에 따라서 얼마든지 인정이 실린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
48. 은은 무거워야 한다, 다만 무겁게 보여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내적인 충실을 중요시한다 대개의 유태인들은 겉치레에 능숙하지 못한 편이다. 아니 경원하고 주저하며, 오히려 싫어한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항아리의 겉모양을 보지 말고 내용물을 보라'는 격언은 유태인들의 그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유태인들은 내면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며, 겉모양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내면의 추악함을 감추려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이나 생활태도는 인간에 대해서 뿐 아니라 모든 사물에 대해서도 철저하다. 예를 들어, 번지르한 포장술로 소비자를 현혹시키는 약삭빠른 상혼에 속아서는 안된다고 자녀들에게 가르친다. 겉모양을 치장하는 데만 집착한다면 아무래도 내면을 충실히 하는 데 소홀하기 쉽다. 즉, 내면이 알차지 못한 사람일수록 겉모양을 적당히 치장하여 마치 속이 꽉 찬 것처럼 보이려고 애쓴다. 이러한 심리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흔히 있는 일이다.
외면을 도외시하는 만큼 내면에 충실한다 뉴욕에 살고 있는 유태계 부호 중의 한 사람인 필립 J. 구다스 부인은, '은은 무거워야 한다. 다만 무겁게 보여서는 안된다'라는 말을 처세훈으로 삼고 있다. "옷을 구입할 때는 최고급 옷감에 최고의 솜씨로 지은 것을 선택해야 하지만, 야한 색깔이나 유행을 따르는 옷은 절대 입지 않으며, 밍크 코트 같은 최고급 의복은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 해도 입어서는 안된다. 또한 좋은 그림을 벽에 걸어두는 것은 좋지만 손님들 눈에 잘 띄게 거는 것은 피해야 하며, 소녀는 둥근 밀짚모자와 흰 장갑을 끼는 것이 좋다." 바로 이런 것들이 '무겁게 보이지 않는 방법'이다. 예컨대 자기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꾸미지 않고 허세를 부리지 않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남으로부터 공연히 반감을 사지 말라는 뜻이다. 런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초대 총수였던 네이슨 로스차일드도 당시 신사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옷 끝단 장식 등의 치장이나 허례허식을 극단적으로 경멸했으며, 오직 실력만이 전부라고 믿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유태인들은 은이 참무게를 자랑하는 것처럼 내면의 충실에 힘을 쏟는다. 비근한 예일지 모르지만. 조그마한 명함 한 장에 앞뒤가 꽉 차도록 직함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유태인들은 그와 같은 겉만 번지르르한 직함보다는, 남이 인정할 수 있는 실력 함양에 모든 힘을 경주한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어렸을 때부터 소박하고 단정하게 차려 입히고, 눈에 뛰는 행동은 삼가도록 교육시킨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들은 내면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겉모양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내면의 추악함을 감추려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소박하고 단정하게 차려 입히고, 눈에 띄는 행동은 삼가도록 교육시켜야 단다.
49. '내 것' '네 것' '우리 것'을 구별시킨다 소유권은 명확히 구별한다 유태인들이 어린 자녀들을 교육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소유권에 관한 것이다. 소유권이라고 하면 대단한 재산이 연상되는 거창한 말 같지만, 한 가정 내에서, 그리고 비록 한 가족끼리지만 자기 물건 외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못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 경우, 물건의 소유자를 정하는 데는 다음의 세 가지 부류가 있다.
1. 내 것(MINE) 2. 네 것(YOURS) 3. 우리 것(OURS)
나는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책이나 노트 등을 자녀들이 가지고 놀 때는, '이것은 엄마가 쓰는 거니까 가지고 놀면 안 돼'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고 비록 형제간이라 해도 쓰고 싶은 물건이 있을 때는 '빌려줄래?'하고 동생이나 언니에게 물어본 다음 빌리도록 한다. 공놀이 등을 하다가 유리창을 깨뜨렸을 경우에는, '이 유리창은 네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니 조심해야 한다'라고 스스로 깨닫도록 부드럽게 타이른다. 한 가족이면서 왜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 소유권을 분명히 하느냐고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이 '소유권'문제를 확실히 교육시켜 두면, 그들이 커서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남의 물건이나 공공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 안의 모든 물건을 가족 전체의 것으로 알고 조심성 있게 다루는 어린이가 거리에 함부로 침을 뱉지는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의 물건이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어린이가 남에게 폐를 끼치는 장난은 하지 않을 것이다. 소유권을 인식시키는 것이 결국 아이의 인격을 배양하는 더없이 훌륭한 교육 방법인 셈이다.
'어린아이니까'라는 관용적인 태도는 절대 금물이다 새삼스럽게 공중도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러한 예절과 질서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단 2∼3세까지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를 구별해서 가르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린아이라고 해서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한 예로, 우리 딸아이는 두세 살 때까지 관엽식물의 잎사귀를 따서 씹어먹으며 '샐러드, 샐러드' 하고 뛰어 놀았다. 그러면 나는 그 현장을 목격하는 즉시, 딸아이가 보란 듯이 그 화분을 아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겨놓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것이야.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돼." 비록 어린아이지만 '내 것', '우리 것'의 개념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한 것이다. 이처럼 유태인 어머니들은 '애들이니 할 수 없다'라는 태도는 절대로 취하지 않는다. 진정 자녀들의 '인격'이나 '인권'을 존중한다면 '어린아이니까'라는 관용적인 태도는 절대 금물이다.
이것이 포인트! 어렸을 때부터 '내 것', '네 것', '우리 것'의 개념을 이해시킴으로써 남의 물건이나 공공물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터득하도록 만든다. '어린아이니까'라는 관용적인 태도는 절대 금물이다.
50. 노인을 존경하는 마음은 아이들의 문화적 유산이다 유태인은 전통의 메신저 유태의 격언에 '늙은이는 자신이 두 번 다시 젊어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젊은이는 자신이 늙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산다'는 말이 있다. 이미 인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늙은이와, 인생을 전혀 모르는 어린아이들 사이에 엄청난 세대 차가 생기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 즉 요즘 같은 핵가족 사회에서는 노인이 경멸 당하고 그로 인해서 문화의 전통성을 잃어 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 유태인들에게 있어서 문화적 전통은 마치 공기나 물과 같이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구약성서의 가르침이 오늘날에도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유태의 노인들은 전통을 전하는 '메신저'이기 때문에 결코 경멸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일이 없다. 그들은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지혜를 다음 세대에 전하고 가르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긴다. 또한 젊은이들도 노인들의 귀중한 체험을 통해 5천 년 유태민족의 역사와 지혜를 배우며, 아울러 생활 방법도 터득한다. 히브리어에는 경어가 없다. 대신 노인들에게는 공손한 태도로 이야기하는 것이 존경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노인데 대해 난폭한 행동이나 예의에 어긋난 말을 하는 사람은 유태의 전통을 무시하는 자로 취급되어 멸시를 받게 된다.
노인의 '육체'가 아니라 '정신'을 중시한다 노인을 존경해야 한다는 것은 구약성서에도 언급되어 있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위기 19장 32절)
젊은이들은 노인을 인간으로서의 역할이 끝난 '퇴물'정도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동양에서는 지난날 나이 많은 노인들을 깊은 산 속에 버리는 풍습까지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럴 만한 충분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노인을 문화의 전달자로서 존경하고 있는 유태인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육체'가 시든 노인들일지라도 경험과 지혜가 풍부한 그들의 '정신'을 높이 사는 사고방식이 뿌리 내린다면, 노인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노인은 불쌍한 사람도, 버림받을 이유도 없는 존재이다. 오히려 후손들에게 지혜와 충고를 제공하는, 존경받아 마땅한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노인은 불쌍한 사람도, 버림받을 이유도 없는 존재이다. 오히려 후손들에게 지혜와 충고를 제공하는, 존경받아 마땅할 존재이다.
51. 부모에게 받은 만큼 자식들에게 베풀어라 부모는 주기만 하고, 자식은 받기만 한다 유태인 가정에서의 부모 자식 관계는 '기브-언-테이크'관계가 아니다. 이를테면 부모가 이만큼 해주었으니 자식도 그만큼 부모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의 사고 방식은 유태인과 거리가 멀다. 유태인들은 예로부터 부모는 오직 줄뿐이고 자식은 오로지 받으면 그만인 존재로 생각한다.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너는 너희들로부터 아무것도 되돌려 받을 생각이 없어. 만약 내게 보답하고 싶은 생각이 있거든 이다음에 너희 아이들에게 엄마가 너희들에게 했던 것처럼 하면 돼. 그것이 나에게는 제일 기쁜 일이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에서이다. 나의 이와 같은 생각도 사실은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다. 내가 IBM에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언젠가 봉급에서 얼마를 떼내어 어머니의 선물을 산 적이 있었다. 무엇을 샀는지는 잊었지만, 당시 나의 형편으로는 비교적 비쌌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머니는 선물을 받고는 '왜 이런 것을 사왔느냐'고 내게 물으셨다. '어머니가 저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려고요'라고 대답하자 어머니는 손을 내저으시면서 다음과 같이 딱 잘라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아니야, 내가 너를 키우는 건 무엇을 바라서가 아니란다. 내게 보답하고 싶거든 나중에 시집가서 네 아이들에게나 그렇게 해주어라."
내 친구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녀는 젊었을 때에 집을 장만하기 위해 부모님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그 돈을 당연히 빌린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3년 동안 열심히 저축을 해서 그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부모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녀 역시 나와 똑같은 이유로 그 돈을 돌려 받았다는 것이다. 유태인의 부모들은 늙어 병이 들어도 자녀들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병든 부모를 돌볼 때만큼 신경 쓰이는 일도 없다. 병든 부모를 돌보는 것은 '보은'이 아니라, 부모에 대한 애정과 자식된 도리임을 납득시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자식들의 '10년후'를 생각한다 <탈무드>에는 이와 같이 부모 자식간의 관계를 다른 측면에서 다룬 일화가 있다.
한 노인이 뜰에 묘목을 심고 있었다.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 광경을 보고 물었다. "언제쯤 그 나무에서 열매를 수확할 수 있습니까?" "70년쯤 후에나 ..." 노인의 대답에 나그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물었다. "노인장께서 그때까지 사실 수 있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딱 잘라 대답했다. "아닐세. 내가 태어났을 때 과수원에는 열매가 잔뜩 열렸었네. 아버지께서 심어두셨기 때문이지. 나도 그저 우리 아버지와 똑같은 일을 할뿐이라네."
부모는 자녀에게, 자녀는 다시 그 자신의 자녀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지금까지도 면면하게 지켜지고 있는 유태의 전통중 하나이다. 동양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부모는 자식에게 의지하고, 자식은 당연히 부모의 시중을 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에서 나온 말인 듯하다. 물론 자식의 부모에 대한 애정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보다는 그 애정을 새로운 세대에 쏟는 것이 미래를 위한 확실한 방법이라고 우리 유태인들은 생각한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 가정에서의 부모 자식 관계는 '기브, 언, 테이크'관계가 아니다. 이를테면 부모가 이만큼 해주었으니 자식도 부모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유태인과 거리가 멀다.
52. 남한테 받은 피해는 잊지 말라, 그러나 용서하라 복수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유태민족의 역사는 바로 '박해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동안 받아온 박해에 대해 복수를 해야 한다거나, 상대를 증오하는 내용이 담긴 유태의 문헌은 하나도 없다. 복수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태의 자녀들은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악한 자가 너에게 가한 짓을 잊지 말라. 그러나 용서하라'고 배우면서 자라난다. 유태인들에게 가해진 잔인한 박해는 비단 나치스에 의한 것만이 아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유태인에 대한 박해는 이미 기원전 5세기에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페르시아 왕 아하슈에로가 간신 하만의 말에 따라, '12월, 곧 아달의 달 13일 하루 동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유태인을 도륙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도록 하라(에스더 3장 13절)'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 명령은 다행히 실행되지 않았지만, 크리스트교가 유럽을 지배한 이후로 유태인에 대한 박해사건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자행되었다. 1215년 라테란 교회의 회의에서는, 유태인을 구별할 수 있도록 황색 또는 진분홍색의 헝겊조각을 달고 다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의를 했고, 심지어는 여러 사람 눈에 잘 띄게 하기 위해 모자를 쓰고 다니게까지 했던 것이다.
<안네의 일기>는 유태인들의 개인적 역사 그러므로 나치스에 의해서 저질러진 박해는 유태민족의 '박해의 역사'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사건에 불과하다. 유태인은 노란 색 별을 달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자전거를 공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차도, 자동차도 타지 못할 뿐 아니라 오후 3시부터 4시 사이에만 물건을 사야 한다. 그것도 유태인 상점이라는 표시가 있는 가게에서만 살 수 있다. 그리고 유태인은 밤 8시 이후에는 반드시 집 안에 있어야만 한다.
이 글은 네덜란드 유태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나치스 치하에서 쓴 <안네의 일기>중 일부분이다. 안네는 결국 강제수용소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유태인의 개인적인 역사인 것이다.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는 소년 시절을 독일에서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나치스에 의해 교직에서 쫓겨나고, 그 자신은 김나지움(대학 진학을 위한 정규 예비교육학교)에서 퇴학당해 부득이 유태인 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그가 열네 살 때까지 14명의 친척들이 나치스에 의해 학살당했다. 그래서 키신저 일가는 하는 수 없이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자녀들에게 되풀이해서 말한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는 일 이 없도록 하라. 역사란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 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마빈 토케이어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구약성서는 B라는 글자로 시작한다. 히브리어의 B는 왼쪽이 열려 있는 모양이다.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나가므로 오른쪽의 과거는 닫혀 있지만, 왼쪽의 미래는 열려 있다." 즉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앞으로만 나아가라는 것이다. 복수나 증오는 과거에 얽매인 부정적인 태도이다. 그보다는 모두를 깨끗이 용서하고 미래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 더욱 건전한 삶일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복수나 증오는 과거에 얽매인 부정적인 태도이다. 그보다는 모두를 깨끗이 용서하고 미래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 더욱 건전한 삶일 것이다.
53. 기회 있을 때마다 민족의 긍지를 심어준다 '이 사람은 유태인이다'라고 항상 말한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아들러, 트로츠키, 키신저, 프루스트, 샤갈, 로스차일드, 구다스, 미요, 토머스 만, 아서 밀러, 하이네, 프란츠, 카프카, 맨델스존 등의 유태계 사람들이 과학, 예술, 문화, 정치, 경제를 포함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고, 지금도 많은 유태인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가족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그중 반드시 한 번쯤은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유태인은 전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야기 속에 유태계 위인이 등장할 때는, 아이들에게 '이분은 유태인이다'라고 반드시 말해 준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인물에 대해 대단한 친근감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사람의 행적을 굉장한 자랑거리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들은 긴 세월 동안 조국이 없는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했던 민족으로서, 유태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 도우며 가까이 지낸다. 토케이어 씨는 랍비 신분으로 일본에 부임하기 전, 일본 규슈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사병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오기 전까지 2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 가운데 유태인은 단 두 사람밖에 없었다. 그런데 단 이틀만에 그 두 사람은 서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유태인끼리는 자석같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 민족으로서의 일체감이 강하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위인이 유태인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들이 자기 친척인 듯한 기분에 젖는다. 그리고 차츰 세계사에서 유태인들이 이루어놓은 업적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되고, 아울러 그 이면에 흐르는 박해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과연 유태인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수한 유태인들이 세계 각국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은 유태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며, 세계를 이끌어나갈 주역인 어린아이들에게도 큰 격려가 되고 있다.
이것이 포인트!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자기 민족의 위인들에 대해 얘기해 줌으로써 민족적 긍지를 심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