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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의 다리 잇기: 해석학과 설교
2006-05-26 13:47:27   read : 2027









두 세계의 다리 잇기: 해석학과 설교



최승락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해석학과 설교는 두 세계 사이의 다리 잇기를 한다는 점에서 공통의 과제를 가진다. 이런 다리 잇기의 작업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는 상세히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 언어와 문화 등에 있어서 너무나 멀고도 상이한 세계를 성경이 우리 앞에 던져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거리’를 무시하고 설교 속으로 나아갈 수 없다. 설교의 불변적 원천인 성경은 다각적 차원의 해석 과정을 통하여 과거와 같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살아 있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진다.

해석학과 설교는 언어와 문화와 삶의 다리 잇기를 시도한다

성경의 세계와 오늘의 세계 사이의 다리 잇기 작업을 하는 것은 그렇게 수월한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층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는 성경의 언어를 오늘의 언어로 옮기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해석이 문자 대 문자의 해석으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성경 언어와 현대 언어의 단순한 이중구조를 넘어서 성경이 놓여졌던 문화 속에서의 성경 의미를 오늘의 문화 속에서 재상황화하는 4중 구조의 다리 잇기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삶의 변화와 헌신 없이도 성경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4중 구조를 넘어 6중 구조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곧 개인과 공동체의 실제적 삶을 바탕으로 한 성경의 기록이 오늘의 개인과 공동체의 삶 속에 체화되는 다리 잇기의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복합적 차원의 다리 잇기를 위해 해석학과 설교는 긴밀한 협조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언어를 매개로 하는 복음은 언어가 가지고 있는 뉘앙스나 이미지, 연상 작용, 개념화 과정 등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 특별히 이런 현상은 복음이 다른 문화권과 만나게 될 때 일어나기 쉽다.

예를 들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의 언어가 한국에 소개되기 전에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서는 천국 또는 극락세계에 대한 개념이 이미 작용하고 있었다. 이 개념 위에 성경의 하나님 나라가 접맥되면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보다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극락의 개념을 가지고 성경 언어의 의미를 결정해 버리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한국교회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지극히 물질적이고 내세적이며 비역사적이다. 인과응보적이고 보상적인 이해에 많이 치우치며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경향을 가지기도 한다.

해석학의 과제 가운데 하나는 이런 일을 잘 분간해 내는 일이다. 과거 성경 세계의 언어적 매트릭스(모판) 속에서 사용되던 말이 다른 문화의 언어적 매트릭스 속에 접맥될 때, 여기에 나타나는 결과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존에 형성된 의미 세계 속에 성경 언어의 의미가 흡수되어 버리는 경우이다. 이렇게 되면 성경의 독특한 가르침이 그 힘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미 천국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천국’으로 번역된 복음서의 가르침이 무슨 큰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아! 성경도 천국이란 것을 이야기하고 있구나!’ 하는 정도의 인식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결과가 생겨날 수도 있다. 성경의 언어가 우리에게 밝혀 주는 의미가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개념을 새롭게 해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르게 이해할 때, 우리는 죽어서 가게 될 세상을 기다리기만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 속에서 역사를 새롭게 바꾸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하나의 변혁적 결과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타협이 아닌 변혁을 꿈꾼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세상을 바꾸어 놓는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성경의 해석을 통해 언어적 의미와 삶의 변화, 그리고 문화적 변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성경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오늘의 세계 속으로 나오라

성경의 매트릭스 속으로 들어가 보면, 우선 성경의 사고가 철저히 통합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분을 분석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무언가를 알았다고 할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고 감사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감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 것으로 만족하고 머무르는 법이 없다.

오늘날의 세계관은 철저히 분석적 사고를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들은 싫든 좋든 데카르트의 후예들이다. ‘사고하는 자아’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객체화된다. 이런 관점으로 성경을 볼 때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을 자신과 떼어 놓고 분석하려 한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과 하나님 앞에 바르게 반응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 된다. 학교에서 시험을 잘 쳐서 공부의 우등생이 되는 것과 그 삶이 개떡 같은 삶이 되는 것이 전혀 별개의 일인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런 식의 결과가 생겨난다.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설교를 듣고 성경을 배우지만, 그 삶은 세상적 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은 현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자아나 타인을 제3인칭으로 객관화시키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그’로 불러 놓고 분석하고 따지는 일을 성경은 모를 뿐만 아니라 멸시한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하나님을 ‘나의 힘’이라고 부를 때(시 18:1), 신자는 그 하나님을 힘입어 하나님 나라의 싸움을 나의 싸움으로 싸우며, 그 속에서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로 내게 굴복케 하시는”(시 18:39)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나를 아는 것이 이토록 긴밀하게 연관이 되는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 이것은 성경의 세계 전체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젖어 있는 현대 서구식 사고의 틀을 벗어나 성경의 세계관 속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의 사고 체계를 계속해서 걸러 내고 이를 성경적 사고로 바꾸어 가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가 성경 속으로 들어가서 그 세계와 접맥을 이루게 되면 우리에게는 하나의 거대한 삶의 맥락이 형성된다. 성경 세계의 맥락을 이어서 우리는 오늘의 세계 속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세계는 그런 점에서 우리를 사화산이 아니라 활화산으로 불타오르게 한다.

사람들은 종종 성경을 사화산이나 휴화산으로 취급한다. 과거에 이미 폭발하고 지금은 죽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성경은 과거에도 살아 있었고 지금도 계속 살아 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그 폭발적 사건들이 일어났던 상황 속으로 거듭거듭 재접속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설교를 위한 근원적 ‘문맥’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역사 속에 언어를 쏟아 놓은 사건이다. 과연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만 할 것인지, 이 필요성 앞에서 새로운 언어들이 만들어졌고, 기존의 언어들이 새로운 의미를 띄게 되었고, 과거의 언어들 안으로 새 빛이 들어가게 되었다.

더 이상 언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기존에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태의 묘사만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의미 세계의 급진적 확장을 위해 필요하게 되었다. 선포나 고백의 방식뿐만 아니라 비유나 메타포를 통해서, 그 밖의 다양한 창의적 방식으로 기존에 서로 상관없어 보이던 것들이 서로 연결됨으로써 새로운 의미 있는 세계의 확장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요한에게서 보는 것처럼 떡이나 물, 빛 등 일상의 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됨으로써 이제는 가장 신비로운 의미를 담은 계시적 언어가 되었다. 바울 역시 시장에서 노예를 사고 팔 때 사용하던 ‘구속’과 같은 단어를 통해 하나님의 종말 시대의 구원을 표현하고자 말 찾기에 급급했다. 이 유래가 없는 왕의 오심, 또다시 오심 등을 표현하기 위해, 당시 황제들의 옴을 나타내려고 사용했던 ‘파루시아’나 ‘아판테시스’ 같은 단어들이 새로운 의미로 차용되기도 하였다.

우리의 과제는 역동성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장 속에서 생생히 살려 내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이 급진적 사건은 기록된 말씀의 역동성을 그 시대의 맥락 속에서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나아가서 우리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 새로운 말 찾기에 급급하게 만드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말이 많다고들 하는데, 이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말하게 만드신다. 초대교회 속에 말이 터졌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또한 말이 터지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말이 문화와 삶 속에 체화되지 못하고 소위 ‘입만 나불거리는’ 사람으로 남게 될 때에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기록된 말씀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빛과 동시에 열을 발하도록 되살리는 것이 설교이다

성경의 세계와 오늘의 세계의 다리 잇기를 위하여 해석학과 설교가 일심동체가 되어 협력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언어와 언어의 다리 잇기, 또 그 언어의 매트릭스가 되는 문화와 문화의 다리 잇기를 넘어 과거 공동체적 삶과 오늘의 교회적 삶의 다리 잇기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해석학의 이론적 작업이 활화산과 같은 삶의 현장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유익이 없는 작업이 되고 말 것이다. 해석학은 설교를 지향하며, 설교는 해석학의 작업을 가장 유익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통로가 된다.

설교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는 이렇게 답했다. “불을 뒤적일 때 더 많은 열이 나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그냥 읽을 때보다는 설교를 통해 바람을 불어넣을 때 듣는 자들에게 더 많은 불꽃이 전달된다”(Bruce Bickel, 《복음과 청교도 설교》, p. 32). 존 오웬(John Owen) 역시 하나님 말씀의 전달인 설교를 해의 빛과 열로 설명한 적이 있다. 진리의 빛이 있어야 함과 동시에 영혼 속에 전달되는 열기가 있어야 함을 역설하는 표현이다.

오늘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이 오래된 지적을 잘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해석을 위한 지식은 차고 넘치나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뜨거움은 없기에 강한 도전도 삶의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무기력한 설교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역으로 경험적 뜨거움은 있으나 진리의 빛이 뒷받침되지 못하여 균형과 분별력을 잃어버린 신자들을 양산하는 설교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진리의 빛도 영혼을 녹이는 뜨거움도 동시에 차고 넘친다. 다만 오늘날의 설교자가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안타까운 현실로 직시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해석학과 설교는 좋은 단짝이 되어 함께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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