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8세기의 기독교 동향
2006-09-02 16:09:51 read : 3446
17,18세기의 기독교 동향
17세기 전반, 결국 루터의 종교 개혁이 1618-48년의 30년 전쟁을 초래한다. 이 전쟁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간 전쟁이 전개된다. 당시 독일의 인구가 원래는 1600만이었는데, 전쟁 후 600만이 남았다고 할 정도이니, 천만명 이상이 죽거나 피난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이 30년 전쟁의 결과 Westphalia 조약(1648)이 체결되어 칼빈, 루터교인들은 특정지역에서 살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게 된다.
청교도 Puritans
"잔인한 메리"를 추방 후 엘리자베드 즉위와 함께 추방당했던 사람들이 영국으로 귀환한다. 이들은 교회행정을 장로회식으로 수정하고, 예배와 교회생활의 단순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분리주의는 표방하지 않았다. 일부는 장로제도를 공공연히 지지하면서 청교도들이 분열하게 된다. 급진적 분리주의자들은 정부의 압력을 받아 네델란드로 이주하여, 조합교회, 침례교회를 만들었다. 한편 영국의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는 청교도들을 억압하기 시작했고, 이에 스코틀랜드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청교도들은 1628년, 1640년 2차에 걸쳐 2만명이 메사츄세츠, 코넥티커트로 가서 뉴잉글랜드의 조합교회를 개척했다. 1640년에는 청교도들이 의회의 대다수를 차지했고, 1642년에서 1649년까지 왕당파와 청교도들 사이의 내란이 일어난다. 이 전쟁에서는 청교도들이 승리했고, 1643년에는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하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만들었다. 이로써 영국은 신앙적으로 완전히 칼빈주의가 되고 교회정치적으로는 완전히 장로주의가 되었다. 그 결과 영국교회는 올리버 크롬웰의 지도하에 12년동안 완전히 청교도 국가가 되었다. 이는 장로제도가 영국에서 승리를 거두는 듯한 사건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1660년 찰스 2세가 영국에 귀환하여 복고주의 정책을 펴고, 1662년 일치령 The Act of Uniformity에 의해 청교도들을 몰아내고 만다. 이때부터 왕들은 계속해서 영국을 카톨릭 국가를 돌리려고 했다. 결국 1688년 명예혁명(무혈혁명)이 있어나, 이때부터 영국은 성공회의 중립적인 개혁으로 굳어지고 정치적으로는 입헌 군주제로 변화한다.
조합교회와 침례교회
영국을 떠난 청교도들중 John Smith가 주도하는 한 집단이 암스텔담에 이주한다. 그는 유아세례가 기독교의식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다시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612년 영국에 돌아와 침례교회를 설립했다. 침례교회는 신도에게만 세례를 주며, 그 형식은 완전히 물속에 담그는 것이었다.
네델란드 Middelbug에 이주한 Robert Brown은 1582년 조합교회주의 책자를 발간했다. 그는 조직적 기구를 반대하며, 신도들이 선출한 목사, 장로, 집사로 성직이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했다. 조합교회는 각 교회의 절대적 자율권을 보장했고, John Robinson과 William Brewster를 중심으로 한 조합교회주의자들이 1609년 Lyden으로 이주했다가 영국으로 귀환했고, 다시 미국으로 이주를 결정하여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유니테리안 교회
Unitarianism의 특징은 삼위일체론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성서적 신앙을 강조하며 예수와 성령의 신성을 주장하는 교리를 부정했다. 근대 유니태리안주의를 창시한 사람은 John Biddle로, 그는 삼위일체론 비판하며 성서에 대한 이성적 해석을 주장했고, 타락, 속죄, 영벌에 대해서도 부정했다. 이들은 17세기 초 폴랜드로 이주했으나, 가톨릭이 다시 세력을 확장하여 박해를 받기 시작한 후 다시 독일, 네델란드, 영국으로 이주했고, 1648년 영국이 그리스도 신성을 부정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안을 공포하자 다시 네델란드로 이주했다. 18세기에는 상당수가 뉴우잉글랜드로 이주했고, 1825년 미국 유니테리안교 협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퀘이커 교회
퀘이커 교회는 형식주의와 기만에 대해 저항해 스스로를 프랜드교회 the Society of Friends 라고 불렀다. George Fox(1624-1691)가 창시자로, 그는 진정한 기독교는 내적인 靈光에 의해 움직이는 어떤 것이라고 주장했다. 쾌이커 교회에는 성례전이 없고, 준비된 설교도 없으며, 의식은 기도에서 시작해 고요한 명상을 통해 내적 영광이 작용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형식주의의 기성 교단과 마찰을 빚어 박해를 받았고,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정착하고, 명예혁명 이후 활동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