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다는 것의 역사>는 '읽는다는 것'의 역사화를 시도한 최초의 책이다. '책의 역사'에 대해서는 여러 선행연구가 있었지만 '읽는다는 것'을 미시사로 정리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이는 '독서의 역사'와도 다르다. 독서는 책을 읽는 것을 지칭하지만 '읽는다는' 행위는 책의 탄생 이전에도 존재했다. 따라서 이 책은 인류가 탄생한 이후의 모든 '읽기'를 다루고 있기에 책의 제목은 마땅히 '독서의 역사'가 아닌 '읽는다는 것의 역사'여야 했다.
물론 '읽는다는 것의 역사'는 이제 겨우 출발점에 서 있다. 앞으로 이 학문은 고대와 중세 독서사, 근세와 근대의 독서사 사이를 또한 역사학과 문헌학 사이를 좁힐 수 있을 터이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들과 방법론을 마주 대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읽는다는 것의 역사'라는 첫 통사通史의 신기축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럽을 중심으로 바야흐로 생성 과정에 있는 '읽는다는 것의 역사'는 대체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학문일까. 이에 대해서는, 이 책의 편자 가운데 한 사람인 로제 샤르티에가 쓴 마니페스토(manifesto)적인 머리말이 설명해준다. 그에 대해서는 첨부한 일본어판의 역자 후기에 잘 설명되어 있다.
오늘날 '읽는 행위'는 어떤 경로를 거쳐왔는가? 처음에 그것은 '음독'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씌어진 모든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불완전하다고 생각했다. 씌어진 문장이 완전한 것이 되기 위해 읽는 행위가 필요했다. 미셸 샤를(Michel Charles)은『독서의 수사학』에서 "독서는 텍스트의 일부이며 텍스트 속에 새겨져 있다"라고 쓰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에서 씌어진 문자들이 갖고 있던 물질적 특성을 고려한 것이다.
공백 없이 계속 쓰는 연속기법 문장은 사실상 소리를 내어 읽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어간에 빈틈이 없고 또한 통일된 정서법도 결여된 문자는 소리를 내어 시험해보아야만 비로소 그 의미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텍스트'의 어원(라틴어 '텍스투스textus'는 '직물'이라는 의미이다)을 비유해서 말한다면, 텍스트는 씌어진 문자라는 연속된 날줄에 음성이라는 씨줄이 짜여져 나온 직물인데, 독서행위로 이 직물이 짜여지고 그것이 끝나면 다시 풀어졌다고 보았다.
이런 개념이 고대인의 현실체험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텍스트는 정지된 물체에 대한 명칭이 아니고 씌어진 것과 음성, 그리고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과의 동적 관계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따라서 텍스트는 씌어진 것의 음성적 실현에 지나지 않으며, 낭독자의 음성 없이 씌어진 것만으로는 표현도 분배도 할 수 없다.
그리스인들은 비록 한정된 사람이었지만 이미 눈으로만 읽는 묵독을 사용했다. 그러나 음독에서 묵독으로 바뀌게 된 계기는 15세기 중반의 인쇄술 발명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샤르티에가 한 글에서 간략하게 정리한 바에 따르면, 음독에서 묵독으로라는 읽기의 혁명적 변화는 12세기와 13세기에 글의 역할 자체를 철저하게 바꾼 생각의 변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수도원 시대에 제작된 수사본은 글을 보존한다는 성격이 강했지만, 대학 시대로 넘어오면서 책은 지적 탐구를 위한 대상인 동시에 도구가 되었다. 눈으로 읽는 독서법이 전파되면서 독자는 책과 훨씬 자유롭고 은밀한 관계, 즉 완전히 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또한 신속하고 전문적인 독서가 가능해졌다. 학문적인 책에 담긴 복잡한 내용을 성찰하며 읽을 수 있었다. 글의 유형에 따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큰 소리로 읽을 수도 있었다. 기도 실이나 도서관 등에서는 조용히 눈으로 읽을 수 있었다. 요컨대 책의 혁명에 앞서 독서법의 혁명이 있었던 것이다.
음독에서 묵독으로의 변화가 읽기의 1차 혁명이라면 묵독 중에서도 '집중형' 독서에서 '분산형' 독서로 이월된 것을 제2차 독서혁명으로 볼 수 있다. 집중형 독서는 극히 제한된 양의 텍스트를 반복하며 숙독·음미하는 독서를 말한다. 15세기 소르본 학교의 도서 대출부에 남겨진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파리대학 신학 부에 다니던 우수한 학생들조차 독서가 빈약해서 10년 동안에 성서,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명언집과 그 주석,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과 주석 정도밖에 읽지 않았다."고 한다. 또 일본에서는 에도시대에 교양층인 무사들마저 "대부분 어린 시절에 학교나 숙(塾)에서 사서오경을 읽고 사기, 한서를 읽었다. 더 나아가 좌씨춘추(좌전), 통감망목(痛鑑網目)까지 올라갔으며, "중요한 학자이자 문화적 소양이 풍부한 선생의 반열에 오를 경우 운 좋게 당시선이나 고문진보를 살 수 있는 형편"(쓰키무라 다쓰오(月村辰雄),「디지털 시대 독서의 행방」, <책과 컴퓨터> 2004년 겨울호)이었다. 조선시대에 사서오경만 통달해도 관리가 되어 국민을 지배할 수 있었던 우리도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이다.
그 시대의 독서가는 "제한된 자료와 텍스트를 읽고 또 읽어 이해하고 기억해서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었다. 따라서 이런 독서법은 일종의 신성한 행위로 여겨졌으며 독서가는 텍스트의 권위에 종속"(로제 샤르티에, 「책의 과거와 미래」,『문화란 무엇인가 1』, 시공사)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은 책이 교양 층의 전유물이었던 시대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시대에 따라 교육 커리큘럼이 바뀌었기 때문에 내용은 그리스어·라틴어 고전문학이나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작품 등 약간 차이는 있었다. 그러나 구체제(ancien rqime) 프랑스나 에도시대 일본의 교양인들은 보통 5-6년의 교양교육 과정에서 접했던 10권 안팎의 서적을 평생 감사한 마음으로 깊이 음미하여 열독했다. 이것이 교양인, 즉 사회의 상층에 속하는 인간들의 평균적인 텍스트 필요량"(쓰키무라 다쓰오, 앞의 글)이었다.
서적사가들은 집중형 독서가 날마다 갱신되는 대량의 텍스트를 그 자리에서 소비하고 다시 돌아보지 않는 대중 저널리즘의 독서인 분산형 독서로 바뀐 시기를 18세기라고 본다. 산업혁명에 따른 문화 르네상스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독자층이 대거 유입되었고 과거에 교양계층이 아니었던 사람들, 즉 여성이 열심히 책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그것이 1820년대에 시작되었다. 아날파 서적 사회사社會史에는 5년 단위로 베스트셀러의 일독표가 작성되었는데 (프랑스)혁명을 거친 후에도 여전히 고전주의적이었던 서적군에 이 무렵부터 속요집이나 가정의학, 요리, 레시피 등의 오락·실용서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후 바로 대중 저널리즘의 시대가 와 책과 잡지, 신문으로 그 형태가 다양해졌는데 누구나 그날그날 그 자리에서 소비할 수 있는 많은 양의 텍스트를 찾는 시대가 되었다. 거기서 현대의 탤런트 책이나 어처구니없는 책까지 일사천리로 나오게 된 것"(쓰키무라 다쓰오, 앞의 글)이다.
물론 분산형 독서 시대에도 일부 교양층은 여전히 고전소설을 반복해 읽거나 시를 암송하는 등 집중형 독서를 계속했다. 그런 독서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감수성'이었다. 텍스트는 읽을 때마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거나 눈물을 참기 어려운 수준이어야 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정보폭발로 말미암아 되도록 많은 정보를 소유한 사람이 경쟁에서 이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독자(reader)는 점차 사용자(user)로 변해갔다. 자기에게 필요한 책을 다양하게 섭렵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 시대 독자는 텍스트에 대한 선호도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때로는 엄정한 비판을 가차없이 해대는 '불경스런' 독서가 자유롭게 이뤄졌다.
디지털 시대는 독서 형태를 다시 한 번 혁명적으로 뒤집어 놓았다. 이는 제3차 독서혁명으로 볼 수 있는 '검색형' 독서이다. 겨우 전문검색이라는 수단으로 대치할 수밖에 없는 '디지털 독서'를 독서라고까지 보아야 하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독서환경은 급속하게 변하고 있으며 이미 대중은 그 같은 행위에 '중독'되어 있다.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블로그(blog)만 해도 그렇다. 2003년에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싸이월드나 최근의 블로그는 개인중심 네트워크의 작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지금 블로그에서는 누구나 '자신만의 거점'을 확보하고, 날짜에 따라 분리되어 나열된 전자텍스트를 발신한다. 더구나 "날짜나 키워드에 따른 분류와 관련 있는 블로그에의 링크, 코멘트와 트랙백track back이라는 공통의 개념과 인터페이스를 바탕으로 관련 있는 다른 저자, 다른 문장에의 접속이 독자에게 제시"된다.
블로그는 이런 시스템의 변화뿐 아니라 '독서환경' 자체를 혁명적으로 바꾸고 있다. 블로그에서는 책이라는 형태가 완성되기 이전의 모든 단계가 자유롭게 유통되면서 읽혀지고 있다. 따라서 블로그는 "전자텍스트가 아니면 실현할 수 없는 '독서환경'의 최초 샘플"이 되고 있다. 그야말로 "유동성이 높고 하나 하나의 문장이 짧은 타입의 전자텍스트에 적합한 환경"이다. 전자텍스트가 등장하기 이전 '작품'이라는 개념의 길고 정돈된 문장을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른 '독서환경'이 등장한 것이다. 블로그라고 하는 "하나의 포맷이 정착되고 '텍스트의 내용'을 둘러싼 활동이 안정적으로 전개되어 나간다는 것은 전자텍스트 진화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이상 인용은 히로세 가쓰야(廣瀨克哉), 「전자 텍스트의 8년」, <책과 컴퓨터> 2004년 가을)을 나타낸다.
디지털 공간은 매체 이동이 자유롭고 매체에 주어지는 각종 제약에서도 자유롭다. 또한 '읽는'다는 행위가 '텍스트 그 자체'까지도 조작할 수 있게 한다. 일종의 '편집' 행위가 '읽는' 행위에도 개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신성한' 독서에서 '불경한' 독서로 바뀌었다가 이제는 자기 생산까지 자유롭게 이뤄지는 '경쾌한' 독서로 발전했다. 물론 전자텍스트를 읽는 행위가 아직까지 질적으로는 높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읽는 행위임은 분명하며 앞으로 점차 세를 키워갈 것이다. 또 그것을 인정해야만 언제, 어디서나, 모든 매체에 접근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시대에도 적응할 수 있다.
이 모든 변화는 물론 전자텍스트의 등장 때문이다. 전자텍스트는 종종 음성을 수반한다. 그래서 새로운 음독시대의 도래로 보기도 한다. 북 디자이너는 정병규 씨는 문자는 인쇄기술의 발명에 따라 활자로 바뀌었고, 컴퓨터의 등장으로 전자(電字)로 바뀌었으며, 전자텍스트(e-콘텐츠)의 활발한 소비 이후에는 성자(聲字)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활자의 음성화, 곧 음성적인 세계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새로운 음독의 시대가 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텍스트는 새롭게 탈바꿈한다. 전자 텍스트뿐만 아니라 아날로그 책에 담기는 텍스트도 변화할 것을 '강요'받는다. 한때는 문자와 이미지가 상보적으로 결합하면 만사형통일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더 복잡하게 얽히고 있다. 이미지의 과도한 노출은 오히려 읽는 것 자체를 방해하거나 나아가 상상력의 저하를 불러온다.
<읽는다는 것의 역>, 이 책은 텍스트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나 단순히 책을 즐기는 독자 모두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지 않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지역이 유럽에 국한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