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문화의 다원성]
- 황토와 황하문명
중국문명은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황하유역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중국문명이 남방의 양자강유역에서 일어나지 않고 화북지역의 추운지역에서 발생하는 것은 신석기시대의 농경문화발생을 가능하게 만든 화북평원의 황토지대와 황하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양자강유역은 고온저습지대로 삼싦이 무성하여 석기로 개간하고 농사짓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역사적으로 양자강유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철기가 도입된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와서였다. 이에 비해 황하유역은 농경에 적합한 여러조건을 가지고 있어 황하지대의 황토(수백만년전부터 서북방의 사막에서 불어온 황사가 쌓여서 형성된 초생황토와 그 후 황하의 범람으로 퇴적된 재생황토로 구분한다. 황토의 분포는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산서, 섬서, 감숙 화남지방에 이르며 그 넓이는 약 132만4천㎢이며 퇴적의 두께는 높은 곳이 약 100m, 평균은 약 20~30m이다.)의 토양은 공기가 잘 통하여 배수가 잘되며 용수량도 많다. 황토의 성분은 다량의 규산, 아르미나, 석회분을 함유하고 있어 농장물의 성장에 도움을 줄 뿐더러 황토의 경우에는 석기로도 경작이 가능해 황토지대는 신석기시대의 중국인들에게 경작의 혜택을 가져다주기 충분하였다.
대체로 인류의 문명 발달은 대하유역에서 발생하였다고 하지만 황하문명의 발생은 나일강이나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달라 신석기 시대에 황하유역지대가 직접 관개농업에 이용된 것은 아니다. 나일강의 경우 홍수기에 상류로부터 흘러내려온 비료성분이 하류에 쌓이면서 농장물 성장에 도움을 주었지만 중국 화북의 우기에는 연간강우량의 절반이 집중되면서 홍수의 위협이 대단히 많았다. 이것은 나일강이나 메소포타미아와는 전혀다른 조건으로 이에 따라 황하문명은 황하의 본류유역이 아니고 홍수의 위험이 덜한 황하지류에서 연한 언덕이나 지류가 평지로 흘러들어가는 선상지대로 이곳에서 농경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곳을 중심으로 취락이 형성되었고 신석기시대의 앙소문화와 용산문화의 유물을 남긴 초기 황하문명 담당자의 문명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 신석기문명의 새로운 발견
종래의 중국 신석기문화는 앙소문화로 대표되었다. 여기에 다시 용산문화가 발전된 것으로 해석하여져 왔다. 즉 앙소문화의 연대는 기원전 5000~ 3000년경으로 추정하였고 용산문화는 기원전 2500~1500년경으로 보고 있어 황하의 문명은 앙소 용산문화로 이어져 은대의 역사시대로 전개되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1950년ㄷ 이후 중국의 고고연구 결과 앙소, 용산문화에 대해 내용의 수정이 있었다.
즉 종래 주장되어오던 앙소문화가 곧 채도문화이고, 용산문화가 흑도문화라는 등식이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또한 앙소문화나 용산문화와는 성격이 다른 별도의 신석기 문화가 중국의 각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석기시대의 문화는 범위면에서 훨씬 넓고 문화내용 또한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화북지방에서 일어난 신석기시대 최고의 농경문화를 앙소문화라고 주장한 이는 스웨덴의 지질학자인 앤더슨이다. 1921년 하남성의 앙소촌부근에서 다수의 마제석기와 채색토기를 발견하고 이를 신석기새드이 앙소문화라 하였다. 이곳에서는 붉은색을 비롯한 흑색, 백색의 채색토기가 많이 출토되어 서아시아의 채도와 유사점이 있어 채도문화라 칭하였다. 뿐만아니라 그는 중국 신석기문화가 서아시아에서 전래되었다고 주장하여, 앙소문화의 서방전래설과 더불어 더 나아가 서아시아인의 중국이주설로까지 발전되어 중국민족 및 문명의 서방기원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른바 사양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과정에 나타나는 서양문화 우위론의 확대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대대적으로 추진된 고고학적 발굴 조사로 인해 이전의 서방전래설은 부정되고 중국민족과 구석기, 신석기의 문화가 다같이 중국에서 자생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입증하였다. 또한 중국의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결코 앙소문화와 용산문화로 일원화할 수 없으며, 전 중국에 걸쳐 각지역마다 신석기문화가 독자적으로 발달하였고, 그 수준도 황하유역의 신석기문화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않는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리하여 신석기문화의 다원적발전론이 제기되었으며, 특히나 종래 구석기 문명과 신석기문명을 별개로 취급하여 양자간에 연속성이 없다는 주장과 달리 이들 두 문화간 연속성을 확인하려 노력하고 있고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앙소문화를 포함한 초기 신석기 문명의 특징은 마제석기와 토기의 사용, 그리고 채집경제에서 생산경제로의 발전을 들 수 있다. 주식으로서 화북지방에서는 조와 기장, 그리고 강남에서는 쌀이 재배되었고 가축으로 돼지, 개를 사육하였다. 또한 사슴을 수렵하고 어망과 낚시로 고기를 낚았으며, 야생과일과 조개류를 채집하였다. 생산경제로서 농경을 위한 도구로는 돌호미, 가래, 삽, 쟁기가 사용되었고 수확용으로 돌칼, 돌낫, 곡식가공용으로 돌맷돌, 돌절구 돌절구공이, 돌방망이 등이 사용되었다. 농경방법으로는 들에 불을 놓아 경작하는 화경농밥을 이용하였으며 축력 즉 가축을 이용한 농법은 시작되지 않았다. 더불어 옷감을 만든 도구는 돌과 흙으로 만든 물레와 비슷한 방추차를 이용하였고, 골침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마나 짐승의 가죽 등을 꾀매어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주거는 평지식도 있으나 원형과 방형으로 된 움집이 많다. 이와 함게 당시의 사회구조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바로 매장방식으로 거의 예외없이 여성중심의 매장법을 보이고 있다. 즉 여성이 남성보다 부장품도 많고 특히나 생산용구가 여성묘지에 많이 부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남성보다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이시대는 여전히 생산의 주도권을 여성이 장악한 모계사회임이 확실시 되고 있다.
- 신석기 후기의 용산 문화
신석기 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문화로 용산문화를 들 수 있다. 앙소문화를 채도로 단순화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용산문화 또한 흑도문화로 동일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즉 다양성이 복합되어 있음을 최근 연구결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용산문화는 최근 하남성 삼문협의 발굴조사에 의해 그 문화의 유형을 묘저구 제2기문화, 후강 제2기문화, 객성장 제2기문화(제 1기문화층은 앙소문화층으로 분류) 그리고 전형적인 용산문화의 4개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묘저구 2기문화는 기원전 2300년경에 발생하여 동방으로 확대 전파되면서 후강 2기, 객성장 2기문화를 발전시키고, 산동성 지역의 전형적인 용산문화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산동을 중심으로 북으로 요동반도, 남으로는 강소성 북북에까지 폭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그 시대가 은, 주 시대까지 내려오고 있다.
묘저구 유적의 발굴로 용산문화는 앙소문화를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 분명해졌다. 특히 묘저구유적은 상하 2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하층은 앙소문화층, 상층은 묘저구 제2기문화층(초기 용산문화층)이라 하여 앙소문화에서 용산문화로 진입하는 초기 용산문화로 확인되었다.용산문화의 내용을 보면 농기구는 돌로된 호미, 가래 이외에 짐승의 뼈로 만든 호미와 목재로 된 호미를 사용하였다. 구멍이 2개가 있는 반월형의 돌칼, 가늘고 긴 석부 등 앙소시대보다는 발달된 농기구가 사용되고 있다. 이로 볼 때 농업기술이 훨씬 발달하였으며 경지면적의 확대를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돼지, 개, 소, 말, 양, 닭 등의 가축사육도 향상되었고, 호랑이, 사슴, 늑대, 이리 등의 맹수를 사냥한 흔적이 뚜렷하여 사냥기술도 발전하였다.
토기에는 회색승문이외에 흑도가 다수 발견되고 있어으며 주거는 여전히 수혈식이나 앙소시대보다 소형가옥이 보급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남녀합장과 함께 이미 용산문화기에 일부일처제가 정착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묘의 크기와 부장품이 일정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점차 빈부의 차가 나타나고 사유재산제가 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농업생산의 증대로 인해 점차 남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여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보고 있으며, 짐승의 뼈를 구어 점을 치는 것이 시작되어 은대의 점복과 관계가 깊다.
- 양자강유역의 신석기문화
황하 문명이 시작되는 시기와 좀 떨어져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화중지방에도 별도의 문화권이 형성되어 독자적인 문화가 발달하고 있다. 이러한 신석기 화중문화는 복잡성을 내재하고 있어 황하문명처럼 계통 분류가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양자강, 한수지구의 굴가령문화, 양자강,회수지구의 청련강문화, 절강성북부와 강소성남부의 양저문화, 양자강 하류지구의 호숙문화 등 4개 지구로 구분하고 있다.
기원전 5천년 경까지 소급되는 양자강 하류 호숙문화를 대표하는 하모도문화 유적에서 이 지역의 독자적인 문화성격을 엿볼 수 있다. 즉, 하모도인은 골기, 목기, 석기, 토기를 사용하였고 골기 중에 땅을 일구는 뼈보습이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다. 이것으로써 강남지역은 화경농법을 벗어나 수전경작방법이 발달해 수도작이 시작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가옥도 앙소문화에서는 반지하의 수혈식인데 반대 하모도에서는 난간식 건축양식을 사용해 목조건축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앙소용산문화가 은문화로 계승발전되었던 것과 같이 양자강 유역의 화중문화는 춘추전국시대의 초와 오월 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즉 이러한 중국 고고하계의 의욕적인 연구결과에 따라 신석기문화가 앙소.용산문화로 일원화되었다는 이론을 바꾸어 지역별 문화권의 설정을 통하여 문화의 다원성으로 그 성격이 변화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조사연구가 학자에 따라 다양하여 주장하는 바가 달라 객관적인 정설로 확정되지 못한 부분이 많다. 그로 인해 사마천의 사기에서 기술하고 있는 하왕조의 실체가 들어날 가능성이 많다.
[하왕조의 전설과 실존의 문제]
- 하왕조의 전설에 나타난 문제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중국 역사는 3황5제에서 시작되었고 그것은 다시 하, 은, 주 3대의 역사로 이어진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은대의 경우 갑골문의 연구결과 그 역사적 실체가 밝혀졌으나 하왕조에 대해서는 아직 전설적인 시대로 다룰뿐 역사시대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즉 사기의 권1에 의하면 효임금의 도읍지는 산서성 평양 순의 도읍지는 산서성 포판, 그리고 하왕조의 시조인 우의 수도도 역시 산서성 안읍근처에 있었다고 하였다. 물론 이 지방은 옛부터 소금이 풍부하게 생산되고 그 근방은 채도를 포함한 무수한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기에 원시부족국가의 존재가능성은 충분하며, 효, 순, 우임금 전설이 나타내는 황하 중, 하류 지역의 고고발굴조사에서도 초기단계의 원시적인 국가의 존재가 인정되고 있다.
우임금의 치수로 잘 통치하였다는 전설로 황하의 범람으로 대홍수가 자주 일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어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우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이는 종래의 선양에 의한 왕위교체가 왕위세습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며 고고학적으로는 신석기시대 후기의 모계사회가 끝나고 부계사회로 접어드는 과정으로 해석가능하며 고대사회의 발전단계와 부합되는 것이다. 더불어 사기의 하본기와 은본기의 내용서술형식이 유사하여 실제 존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고 그 위에 시조에 대한 수식적이며 과장적 교훈을 추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발굴과 하왕조
2차대전 이후 중국고대사연구의 주요쟁점중의 하나는 하왕조의 실체를 고고학적 발굴로 규명하는 것이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조사에 의해 하남성일대를 중심으로 중국문명의 초기단계가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문명을 만들어낸 이에 대한 문제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앙소와 용산문화가 계통을 달리하는 화북 신석기문화의 양대계열로 인식되면서 하민족 또는 하족집단을 화북신석기문화 및 초기문명을 발전시킨 주인공의 일파로 보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즉 용산문화를 배경으로 상(은)왕조를 건설한 것이 동이집단이라면 앙소문화를 배경으로 하왕조를 건설하고 다시 상을 멸하고 주를 세운것이 바로 하족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하의 수도를 고고학의 발굴에 따라 산서성의 남부에 가까운 하남성 언사현 이리두유적지로 보려는 견해가 제기되었으며 1959년 이래 발굴이 진행되어 한때 하왕조의 유적지로 단정하기도 하였다. 이리두유적은 모두 4기층으로 구성되어 초기 1,2기층과 후기 3,4기층으로 문화단계가 확연히 구분된다. 시기 역시 기원전 1900년경에서 1500년경에 해당되어 전설의 하왕조의 위치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근년에는 이리두 유적의 중앙부에서 이리두 후기에 속하는 거대한 건물터가 발견되어 이를 이리두궁전 혹은 종묘로 보고 하왕조의 수도로 주장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하왕조의 궁터로 보이는 하남성 등봉현 왕성강에서 발굴된 2개의 옛성터가 그것이다. 연대역시 기원전 2100년경으로 소급되는 신석기 후기의 유적일 뿐만아니라 등봉현의 숭산일대가 하왕조 초기의 전승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우왕의 도읍지인 양성으로 보려는 학자가 많았다. 더욱이 왕성강유적지가 하남용산문화 후기에 속하는 문화층에서 확인되어 그 상층에 이리두문화 후기가 이어진 사실로 하문화의 실체를 해명하는 단서가 되었다. 하지만 이리두문화의 후기인 3, 4기층을 정밀조사한 결과 하문화가 아니고 은대 초기 문화유형에 근접하고 있는 사실이 확인되어 이리두의 전기에 해당하는 1,2기층 문화를 하문화에 근접한 것으로 보았다.
1963년 수차 발굴조사한 산서성 남부일대에서 발견된 용산문화의 도사유적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바로 전설상 하나라의 옛 도읍터로 알려진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도사유적이 여니대 역시 하왕조와 일치하고, 출토 유물 역시 그림이 있는 접시, 즉 채회반에 그려진 반용은 하족의 토템이 용이라는 것을 상기할 때 도사유적지의 주인공이 바로 하족이라는 주장을 하게 된다.
이와 병행하여 선서성일대에 널리 분포된 대표적 유적지로 하현의 동하풍 유적이 발굴됨에 따라 하왕조의 근거지에 새로운 수정이 가해지고 있다. 즉 하왕조는 산서성 남부에서 하대의 초 중기에 걸쳐 도사유적과 동하풍 유적을 발전시킨 후 그 후기에 이르러 하남성으로 이동하여 하남 이리두문화를 만들어 냈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라 하왕조의 실체는 아직 확정적인 결정론이 없으나 중국 신석기시대 유적 가운데에는 상문화와 동일한 유적과 그렇지 못한 유적이 구분되어 비상문화계통을 일단 하문화의 유적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은대의 유적이 갑골문의 발굴과 그 연구에 의해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듯이 하문화에 대해서도 그 어떤 결정적인 단서(문자, 왕궁, 왕묘, 기타)가 발굴되지 않는 한 유적의추정만으로 하문화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으므로 명백하나 이것이 비 선상문화인 것은 명백하고 하족의 전승을 달리할 만한 제3의 문화가 확인되지 않는 상황에서 하문화로 칭하는 것도 무방하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