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부부가 미국 프로야구 선수 박찬호 때문에 부부싸움을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부인이 남편에게 말하기를“당신 박찬호 선수 어머니가 일본 사람인 것 알아요?”그랬대요. 그러자 남편이“무슨 헛소리 하는 것이야?”라고 하자“헛소리라니요? 신문에 났는데요.”“신문에, 당신 정말 정신 어떻게 된 것 아니야?”라고 하자 아내가 신문 쌓아놓은 것을 뒤지더니 신문 한 장을 가지고 와서는 타이틀 기사를 손으로 지적하며 퉁명스럽게“봐요”하며 신문을 펼쳐 보여 주었습니다. “한국인 박찬호와 일본인 노모...” 아직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본인 야구선수 노모를 늙은 어머니(老母)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오해는 애교 있는 오해이고, 또 피해성이 전혀 없는 오해입니다. 그런데 어떤 오해는 우리 인생길에서 매우 중대하고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남길 수도 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종료된 직후에 필리핀의 산악지대에 숨어있는 일본 군인들에게 헬리콥터가 저공비행을 하면서 종전(終戰) 방송을 했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일본군들은 항복을 하고 나오시면 당신들의 조국인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산악지대에 숨어있던 많은 일본 군인들은 이것을 연합군의 전술 전략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그 후 어떤 일본 군인은 종전 후 무려 30년 동안 동굴 속에 들어가서 생명을 유지하다가 1970년대 말에 원시인과 같은 모습으로 동굴 속에서 발견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해 때문에 30년간의 세월을 잃어버린 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오해 무지 때문에 생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에피소드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왔습니다. 그는 재물이 많은 부자 청년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관원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 앞에 꿇어 앉아“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모든 계명을 다 지킨 유덕한 도덕군자로 자처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영생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난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의 문제로 고민하며 구도하는 그 부자 청년에게“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너는 가서 네 제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말씀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의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시면서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고 나오는 것보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심히 놀라며“그럼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시고“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한 부자 청년을 통하여 교훈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 시대에 필요한 행동명령을 받기 원합니다.
1. 바른(성경적) 구원관을 확립해야합니다.
본문 17절에“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2절에 보면“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달려 나온 것은 인생이면 누구나 관심을 가져야 할 참으로 중요한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재물이 많은고로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청년이 재물이 많은 부자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갔다고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님을 등지고 슬퍼하며 떠나간 진짜 이유는 재물이 많았기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떠나간 진짜 이유는,
첫째, 예수님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이 청년은 예수님을“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선하다는 것을 부인하신 것이 아니라‘사람 가운데는 선한 이가 없다. 즉 인간의 선함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자신의 선함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인정될 수 있는 선함을 가지고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선한 자는 하나님 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은“나는 선한 선생의 차원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선언입니다. 위대한 선생님은 죄인의 구주가 될 수 없습니다. 선하신 하나님만이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선한 선생으로 오해 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자기 손익 계산서가 맞지 않다고 판단될 때는 언제라도 예수님 곁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예수님 곁을 떠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구원관을 확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영생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청년은 예수님께“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19절에“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자, 20절에“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청년은 대답을 합니다. 청년은“영생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한다.”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청년은 자기가 무엇을 행하고, 업적을 세우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의 도덕적인 자긍심도 우월의식이 그에게 영생을 보장해 주지 못했습니다. 많은 재물이 그에게 영생을 보장해 주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영생의 문제로 목이 말랐던 것입니다. 그런 그를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극단적으로 해석하여“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재산을 다 팔아야 한다.”라고 비약시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청년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나기 위해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아픈 곳을 찌른 것입니다. 이 청년은 자신의 도덕적 우월의식 뒤에 숨기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장 강력한 삶의 동기 중의 하나는 재물에 대한 탐심이었던 것입니다. 영생은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해야 얻는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제자들이 심히 놀라며“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어떤 선행도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이웃을 돕는 어떤 자선 행위도 이웃을 구원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다 죄인이고, 사람은 다 그릇된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실 때 행함에 근거하지 아니하시고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을 결코 구원할 수가 없고,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에“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영생은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어린아이처럼 순전하게 믿고 받기만 하면 됩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원은 단지 값없이 은혜로,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주의 십자가 그늘 아래, 영원한 생명, 영원한 안식을 값없이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은 영생에 대하여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마태복음 19장 22절에“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2절에는“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23절에는“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고 했습니다. 결국 인간의 선행이나 많은 물질 가지고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질문을 했던 청년은 주님의 위대하신 답변에 대하여 결국 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심히 근심하고 예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영생 문제를 가지고 왔으면서도 결과론적으로 그 영생 문제를 거절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그 중대한 이유는 바로“재물”곧 물질이었습니다. “영생”은 인간의 노력이나, 도덕적 선행이나, 더욱이 물질적인 매수 조건이나, 교환 조건으로 성립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사실에서 오히려 경계하고 교훈하시기를“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가난한 자는 그 가난이 조건이나 이유가 되어 천국(영생)에 들어간다는 말도 결코 아닙니다. 결국 영생(구원=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은혜로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롬1:16-17, 요1:12, 엡2:8). 주님은 항상 사람들에게 재물을 경계하셨습니다. 물질적인 소유감은 마음을 항상 이 세상에다 고정시켜 버립니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또한 얼마나 많은 큰 부자가 영생의 복을 받았는가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이나 요셉, 신약의 삭개오, 아리마대 사람 요셉, 니고데모, 그리고 바울 서신에 나오는 많은 무리의 부자들이 모두 영생의 복을 누린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바른 구원관을 확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선순위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등지고 떠나가는 또 하나의 진짜 이유는 인생의 우선순위를 오해 때문입니다. 우선순위란 무엇입니까? 인생에서 무엇이 좀 더 중요한가를 묻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우선순위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요, 불행이라는 것은 우선순위의 혼란에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부자 청년은 우선순위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예수님에 대한 관심도 있었습니다. 영생에 대한 관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지배하고 있는 더 중요한 관심사는 재물에 대한 탐심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재산을 늘리고, 재물을 축적하는 것이 자신의 삶의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선순위에서 예수님은 밀려났고, 영생은 포기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아쉽지만 예수님을 등지고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슬픈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인 바른 구원관을 확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주신 생존 질서를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21-23절에“...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위대한 하나님의 창조질서(법칙)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존재질서, 축복질서, 생존질서가 나옵니다. 여기“만물”은 전 피조물의 존재세계를 말합니다. 전 피조세계의 자원을 총칭한 표현입니다. 모든 피조세계의 자원은 하나님 자신의 창조적 선물입니다. 사람들이 누리는 재물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생존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도구입니다(시19:). 돈은 사람들의 생존에 필요한 여러 유의 자원과 재산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재산)은 자신과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해야 될 사회적 연대성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활발한 경제적 교류를 통하여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피조세계의 자원을 인간에게 소유물로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인간에게 준다고 하셨습니다(창1:29-30). 그러므로 정당한 소유욕은 죄가 아닙니다. 정당한 소유욕은 오히려 강한 생욕(生慾)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자원을 인생에게 시여(施輿)하심으로 문화적 사명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돈(재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생존케 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이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운 생존의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그 돈(재물)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전도와 선교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도구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돈(자원)의 참된 내용과 의미와 목적을 모르고, 분별하지 못하고 사용하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저주의 표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철두철미하게 돈(재산)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의 생존의 도구와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하기를“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고전3:23). 여기에 돈(재물)과 인생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설정이 나옵니다. 만물을 주께로부터 부여받은 인생은 하나님의 재물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그 재물을 소유할 정도와 사용할 시간과 내용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그리고 그 재물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생존질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만물(재원)은 인생의 것입니다. 인생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물질(돈)의 관계는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입니다. 질서의 법칙입니다. 축복과 생존의 법칙입니다. 말하자면 만물이, 사람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창조질서의 법칙이고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받은 인간은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그 받은 모든 재물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용하여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29-30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생존질서를 무시하고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가 버리므로 100배의 축복도 영생도 얻지 못했습니다. 현세의 축복도 내세의 영생도 얻지 못했습니다. 또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하나님이 주신 생존법칙을 어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의 저주를 받아 즉사하고 말았습니다(행5:1-11). 그러나 동방의 의인 욥은 모든 재물이 그의 곁을 떠나갔을 때“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욥1:20-22). 그는 하나님이 주신 생존의 질서를 바로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의 모년에 배나 더한 축복을 다시 받았습니다(욥42:12-16).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돌아서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오히려 재물이 많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감사하고 헌신하며 영광을 돌리며 삽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나그네가 사막 길을 걸어서 먼 길을 가는데 하늘로부터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네가 북쪽으로 2km만 더 가면 오아시스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오아시스 물가에 자갯돌들이 많은데, 그 자갯돌들을 네 주머니에 될수록 많이 넣고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한 가지 기쁜 일이 있고, 한 가지 슬픈 일이 있으리라.” 이 나그네는 혼잣말로 별일이네 하면서고 궁금했습니다. 마침내 사막 길을 한참 걸으니 오아시스가 있고 자갯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머니에 돌을 주워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무거운 걸 주머니에 넣고 자라니 이게 도대체 아리송해서... 중얼거리며 두 주머니에 작은 돌 몇 개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반신반의하면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주머니에 넣었던 돌들이 금덩이가 되었더랍니다. “아! 금이다.”하며 기뻐하다가“그럴 줄 알았으면 주머니마다 채울 걸... 열두 주머니나 되는데 주머니에 가득 채울 걸 내가 왜 두 주머니에만 넣었던가?”결국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았답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자기가 무엇에 부족함이 있는지, 근본적으로 돌아가서 이것부터 생각해야 됩니다.
인생은 영생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본래 인생을 영생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범죄이후 영생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겐 그 본래를 되찾아가고픈 욕망이 있습니다. 그것이 영생욕(永生慾)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본래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영생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결코 소유(재산)때문에 슬픈 기색을 띠고 예수님을 떠나지 맙시다. 결코 영생은 선행이나 재물로 사거나 관계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합니다(눅12:15). 사람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안에서만 있습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는 것은 축복의 문제이지 결코 구원의 문제가 아닙니다(고후9:6). 인생이 지닌 물질의 부가 영생의 조건이나 빙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영생 얻는 자에게 주어진 한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인은 하나님이 생존의 질서를 바르게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적인 바른 구원관을 확립하고 하나님이 주신 생존질서를 바르게 지키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에게 금세에 100배의 복과 내세에 영생의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