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1:10)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행 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행 21: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행 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행 21: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흔히 비전, 비전하는데 과연 비전이 무엇입니까? 비전이란 하나님이 왜 나를 예수 믿게 하시고, 아직도 살려두셨으며, 남은 생애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지 를 깨닫는 것이 비전입니다.
위대한 사람은 큰 비전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라지만, 큰 비전을 품고 있다고 해서 저절로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전이 크면 클수록 반드시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도 그 만큼 큰 법입니다. 그 대가가 바로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고난이라는 백지 수표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의 주인공 사도 바울은 큰 비전을 품은 사람일 뿐 아니라 그 비전을 이루기까지 지불해야 할 대가를 잘 지불하고 위대한 신앙의 선진이 된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비전들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 비전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며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내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최선을 다함으로 마침내 비전을 이루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비전이 무엇이며,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내가 반드시 지불해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을 만난 사람
세상에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만 받는 것은 물론 변화를 받게 됩니다. 부정적인 사람이 긍정적인 사람으로, 미움의 사람이 사랑의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 안에는 이미 변화를 경험한 사람과 아직도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고 구원만 받으면 되지 변화도 받아야만 하는가? 라는 의문이 들것입니다. 그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변화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서 변화를 받으라는 명령형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형으로 지금 변화를 받아야 하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그 변화는 외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그 행위를 좌우하는 내적인 마음의 변화까지 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까요? 누가 여러분에게 당신에게 일어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가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어떤 사람은 성격의 변화
2) 어떤 사람은 나쁜 습관의 변화
3) 어떤 사람은 인생의 목적의 변화
물론 세 가지 변화가 다 좋은 것이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바로 인생의 목적이 달라지는 변화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인생의 목적이 변하게 된다는 말은 이제부터 자기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목표가 설정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도 예수님처럼 살아야겠다는 마음입니다. 나도 예수님을 위해 남은 생애를 살아야겠다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에게 일어난 변화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다음부터 바울의 인생의 목표가 자신이 아닌 예수님으로 완전히 뒤바뀌어졌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어떻게 사셨는가를 살펴서 그대로 본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어디를 가시든지, 누구를 만나시든지, 삼년을 하루같이,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까지 계속하신 일은 사람을 구원하신 일이었습니다.
(마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과거에 바울은 자신만을 위해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던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는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라는 목표로 바뀐 것입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바울의 생애가 바로 그와 같은 삶이었음을 아시아, 마게도냐 어디를 가든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를 만나든지 바울은 동일하게 오직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사단의 세력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도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성격이나 습관만 아니라 인생의 목적까지 변화되었나요?
내가 돈을 버는 이유, 공부하는 이유, 자식을 키우는 이유, 꿈꾸는 비전은 다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바울처럼 인생의 목적이 예수님 중심, 복음 중심, 사람 구원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할까요?
세상에 가장 슬픈 소식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라면, 정반대로 가장 기쁜 소식은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이 복음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산다는 것이 가장 기쁜 소식이며, 그 소식을 전하는 일이 가장 귀한 일이며, 그 일을 하는 사감이 가장 존귀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음 전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고 그 복음 전하는 일에 쓰임을 받는 것이 가장 복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고 가장 힘쓰신 일이고, 바울이 하는 일이 바로 그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예수님을 만나 변화를 받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힘써야 할 일도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인 것입니다.
(사 40: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2. 예루살렘을 향하여
사도 바울이 사방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헤어진 후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몇 차례 배를 바꿔 타야만 하였습니다.
(행 21:1)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행 21: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행 21: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그렇다면 바울의 마지막 목적지는 로마로 가는 것인데 왜 로마로 가는 배를 타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려고 하는 것일까요? 마음이 변했습니까? 목적지가 바뀌었나요?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교회와 성도들로부터 그동안 수고한 것에 대한 위로와 칭찬과 더불어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비전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지금까지의 모든 수고가 끝이 나고 칭찬과 위로와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지금까지 당한 것 못지않게 혹독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자신도 알고 주변 사람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두로에서 한 주간을 머무는 동안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제자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극구 만류하였습니다.
(행 21: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분명히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예언이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두로의 제자들을 사도 바울이 안쓰러워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배에 올랐습니다.
마침내 두로에서 떠난 배가 로마 총독부가 있는 이스라엘의 가이사랴에 도착하였고 바울은 빌립 집사에 집에 머물게 되는 동안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흉년들 것을 미리 예언한대로 적중했던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에서 내려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 바울을 위해 특별한 예언을 하였습니다.
(행 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동일한 한 사건을 놓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똑같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예언하는데도 고집을 부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더구나 예루살렘으로 가면 고난을 받게 되는데 그 예언을 핑계로 모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고집한다면 고난을 즐거워서 일까요?
이미 사도 바울은 일이삼차의 선교여정을 통해서 인간의 힘으로 참기 어려운 갖가지 고난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고후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고후 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고후 11: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가 자기를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를 끝까지 듣지 않고 굳이 고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사람이 고난을 싫어하면서도 부득불 원치 않는 고난을 감수하게 되는 몇 가지 경우는 1) 자신의 부족과 허물로 인해 자청한 고난일 경우 피할 길이 없기 때문에 당하게 되며, 2) 고난은 한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고난을 견디고 나면 더 좋은 결과가 있다고 생각될 때이며, 3) 고난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듣게 되는 명예심 때문에 고난을 참고 견디게 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 세 가지 중 그 어느 것입니까? 그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아닙니다.
3. 영광과 고난
바울의 마지막 비전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분명히 로마였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는 이유는 그 길이 주님을 따르는 길이요, 그 길이 로마로 가는 지름길인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1) 예루살렘의 영광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믿음의 형제들과 사도들과 장로들을 만나 그동안의 선교과정과 열매들을 상세히 보고하였습니다.
(행 21: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의 선교 보고 가운데 선교의 주체가 누군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볼 때 사도 바울이 주체가 되어서 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선교 보고를 자세히 살피면 하나님이 주도하신 일이며 자신은 다만 봉사자로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하였을 뿐이라고 겸손히 간증하였습니다.
남이 한 것도 자기가 한 것처럼 공적을 조작하는 세상에서 자기가 하고서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높이는 바울은 정말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 같은 바울 사도의 겸손함이 바로 바울을 위대한 사도로 자리매김하게 한 비결입니다. 바울은 한 두 번이 아니라 평생을 그러한 마음으로 사역을 한 사도 중에 사도였습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끝까지 들어 쓰십니다. 그와 같은 선교 보고를 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은 선교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물론 바울도 그로 인해 더욱 사람들에게 그동안의 수고에 대한 찬사와 격려와 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행 21: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2) 예루살렘의 고난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그 같은 영광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동안 바울이 아시아와 마게도냐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이미 예루살렘 공회의에서 결정한대로 이방인이 개종을 하면 할례는 받지 않게 하고 다만 세례만 받게 하였습니다.
그 소문이 예루살렘 교회에까지 전해졌을 때 수만 명의 정통 유대인들이 바울을 가리켜 율법을 파괴하는 자라고 낙인찍고 죽이려고 칼을 갈며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 같은 바울의 신변이 염려되어 바울에게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가서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결례를 하는 것을 보면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권고하여 주었습니다.
(행 21:24)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그러나 그것은 이미 바울을 죽이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가 없었으며, 오히려 그것이 빌미로 바울에게 성전을 모독하는 자라고 매도하고 일제히 달려 들어 바울을 패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게 된 것입니다. 두로의 제자들과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이 적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고난을 알았고 또한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그러한 위기를 자처한 것일까요?
1) 그것은 불순종이나 실수나 판단 착오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사랑하는 주님이 앞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뒤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지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었음을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 기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 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물론 예수님은 얼마든지 피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요, 그것이 당신이 사랑하는 백성들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피하시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바울의 현재 상황이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고자 할 때와 너무나 흡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들이 울면서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예수님이 앞서가신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간 것입니다.
(행 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2) 그 길이 로마로 가는 지름길이요 경유지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때로 아프리카나 남미 쪽으로 여행을 가려면 직항하는 비행기가 없거나, 있어도 요금이 비싸기 때문에 중간에서 바꾸어 타게 됩니다. 어느 때는 중간 경유지에서 무려 7-8 시간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고 그곳이 좋다고 해도 그냥 내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적지로 가는 비행기가 올 때까지 지루하고 답답하지만 기다려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의 궁극적인 목적지가 로마라고 하는 데는 추호도 변함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아직 로마로 가는 것을 아직 허락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먼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교회와 사도들에게 그동안의 선교 보고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로인해 이제 잡혔고, 매 맞게 되었고,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나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죽음의 자리에 배 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로 말미암아 로마 군대를 동원하여 바울을 안전하게 보호하여 그의 최종 목적지인 로마로 가는 지름길과 중간 경유지로 삼으신 것입니다.
(행 21:31)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행 21:32) 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큰 비전과 큰 꿈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즉각 이루어주시지 않고 때로는 오래 기다리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비전이라는 최종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예루살렘과 같은 중간 경유지가 있습니다. 그 경유지가 바로 현세의 고난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지막 목적지인 천국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중간 경유지인 이 세상에서의 지불해야 할 고난의 삶을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런 고난이 필요 없지만,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하려면 주님이 앞서가시고, 바울이 뒤따라간 예루살렘이라는 고난의 경유지를 우리도 통과할 때 천국의 상급과 영광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에 이르기 전 경유지인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우리의 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2) 바울처럼 중간 경유지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피하지 말고 인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가 되겠다고 자청하는 사람들에게 (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만 십자가를 요구하신 분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당신이 먼저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요구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신 후 얻게 되는 부활의 영광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도 동참하게 하기 위함임을 깨닫고 중간 경유지인 이 세상의 고난을 믿음으로 승리하는 오늘의 바울이 되시기 바랍니다.
(벧전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