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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성장과 정치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불러내어 교회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 공동체를 세우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이 때로는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하여 방해를 놓은 경우가 허다하다. 사도행전 25장 1절에서 12절을 읽어보자. 오직 복음만을 전한 바울에게 일단의 유대 지도자들이 저항하면서 그들의 정치적 힘 (political power)을 이용하여 바울을 고소하였다. 복음전파 외에는 어떠한 죄를 지은 것이 없는 바울 역시 그의 정치적인 힘인 로마 시민권을 이용하여 로마 황제에게 호소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로 복음전파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임할 것이라"고 고백했다 (고전 9:16). 바울의 사명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행 9:15). 이 선교사명에 사로잡혔던 바울은 억울하게 투옥되었을 때도 그것을 복음전파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어떤 면에서 그의 투옥은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놀라운 기회였던 것이다.
본문에서 바울이 어떻게 처신했는가를 살펴보자. 바울은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었다. 재판장은 이제 부임한지 얼마 안되는 베스도였다.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9절).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유리한 예루살렘으로 바울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이유로 예루살렘대신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겠다고 호소하였다. 당시 로마 시민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가이사에게 호소한다"라고 선언하면 로마의 법정에 가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11-12절, 16절). 바울은 이 로마 사람의 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바울의 계산은 두 가지였다. 로마의 법정에 서게 되면 불공평한 유대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과 아무 비용도 들지 않고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현명하였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에 유리한 어떠한 수단과 정치체제도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그에게 복음전파는 모든 것에 앞서는 최우선 순위였던 것이다. 정치적인 입지나 정치력의 확보 자체는 바울의 진정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의 제자를 많이 만드는 것이야말로 바울의 최고 목표였던 것이다.
이같은 상황은 오늘의 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 교회 안에 이른바 정치의 긴장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새로운 신자가 들어오고, 교회의 갱신이 시도되며, 적극적인 교회성장의 노력이 추구될 때 반드시 기존 세력의 반발이 있게 마련이다. 기존의 인간적 전통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일부 평신도 지도자들의 저항에 대해 목회자, 특히 새로 부임을 한 목회자는 (베스도처럼)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할 기로에 서게 된다. 새로운 개혁세력을 옹호하자니 기존의 저항세력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기존의 사람들을 따라가자니 교회는 여전히 침체와 감소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른바 "교회정치" (church politics)는 일종의 필요악이다. 정치가 목적이 아니라 복음이 목적이다. 정치는 복음이라는 목적을 섬기는 수단이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 많다. 정치가 목적이 되어 생명을 살리는 일이 뒷전에 밀려 있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교회정치, 즉 건강한 행정과 다스림은 효과적으로 실시되기만 하면 교회성장과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는 요소이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정치력이 주어지게 되면 교회는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된다. 진실로 교회성장을 원한다면 바울의 현명한 선택을 배워야 한다. 바울은 교회와 복음이 정치에 의해 중풍걸리듯 옴짝달싹 못하는 지경에 빠지는 것을 격렬히 거부했다. 정치는 복음전파를 섬기는 거룩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설득과 논쟁과 투쟁의 정치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정복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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