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많은 설교자들에게 현실성이 없을까?
2005-10-15 23:43:19 read : 1675
왜 많은 설교자들에게 현실성이 없을까?
(Why do so many preachers fail to connect?)
Stuart Olyott/ 서창원 역
필자에게도 고민이 있다. 현대 설교에 뭔가 위험한 잘못이 있다. 성경을 사랑하는 수많은 설교자들에게 현실적 연관성이 없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필자는 의도적으로 ‘연관성’(connect)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였다. 필자의 심중에는 새 집에 대한 그림이 있다. 전기선들이 배선되어 있으나 그 새 집은 전적으로 전력이 공급되고 있지 않다. 단지 아직 연결이 되지 않은 것이다. 그 집밖에 몇 발자국만 벗어나면 전압이 흐르고 있지만 그 집엔 전력이 공급될 선이 아직 연결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설교자도 말하고, 말하고 또 말을 한다. 회중들은 오직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메시지는 먹혀들지 않고 있다. 남녀노소의 사람들에게 어떤 동력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들어왔을 때처럼 그냥 도로 나가고 만다. 변화되지 않은 상태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것이 지금 몇 달 동안 내 머리 속에 맴돌면서 해결해보려는 문제이다. 내 아내는 그 주제에 대해 필자와 함께 이야기하는 것에 싫증을 느끼고 있다. 웨일즈지역이나 그 외의 지방에서 있었던 집회나 모임에 다녀오는 길마다 필자는 아내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 설교자의 설교에 현실성이 있었소?’ ‘그 메시지가 우리 마음에 관통한 것이었소? 그 설교자와 회중들 사이에 영적 교감이 있었소?’ ‘그 설교는 우리들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설교였었소?’ ‘그 설교는 정말 마음 깊은 곳에 와 닿는 것이었소?’ ‘그의 설교에서 강단에 있는 설교자와 회중석에 있는 성도들과 충분한 접촉점이 있었소?’ ‘거기에 맨투맨 교통함이 있었소?’ 거의 대부분의 경우 우리들의 답변은 단순하고 슬프게도 ‘아니다’ 였다.
원인이 무엇인가?
정말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필자는 메시지의 내용들은 정말 건전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고 말씀드린다. 그런데 정말 많은 설교자들이 본문에서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을 말하기 보다 자신들이 발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것이 현실성이 떨어지고 있는 문제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또한 많은 설교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본문에 바싹 접근해 있지 않고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을 설교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하는 자들도 청중들과 연관성을 가지도록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이단적인 메시지를 듣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실로 우리가 들은 설교들의 일부는 가르침에 있어서 정말 놀라울 정도로 풍부한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도리어 설교자들의 현실성을 더 비참하게 하는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정말 전달에 대한 기술적인 문제란 말인가? 독자 여러분들 중에는 필자가 이 주제에 대하여 오랫동안 많이 말해 온 것을 알 것이다. 필자는 설교자들로 하여금 청중들의 눈을 보고 설교를 할 것이며, 그리고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을 가지고 단문으로 구성하여 설교를 할 것이며, 또 질문들을 많이 하라고 주장해 왔다. 그리고 많은 예화들을 사용하라고 촉구하였다. 특별히 이야기식 전달 방식을 더 많이 사용하라고 주장했다. 설교는 변하게 하는 것이며 그래서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는 것임을 실감케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필자는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주장에 귀를 기울여 준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몇몇 그런 설교들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 중 한 두 개 정도는 정말 탁월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측면에서 눈부신 진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연관성이 없는 설교들이 있다. 따라서 연관성이 없는 이유는 단순히 전달 기술적인 측면의 빈약함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보다 더 깊은 것임에 틀림없다. 이 시점에서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잘못인지는 너무나 명백하다. 설교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다. 성령이 설교자들에게 임하시면 설교는 분명 질적 향상을 분명 나타낼 것이다. 그들은 권위를 가지고 설교할 것이며 사람들의 심령을 설득할 것이며 그들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그들의 심령이 박히는 메시지가 될 것이다. 이것을 우리 선조들은 성령의 “부어주심”(unction)으로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그런 축복은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보면서 우리는 설교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으로 주님을 찾도록 촉구해야 할 것이며 주님을 굳게 붙들도록 해야 한다’. 그 모든 주장에 필자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멘! 이다. 필자는 그런 주장을 훼손할 생각이 전혀 없다. 많은 현대 설교자들이 은밀한 곳에서 승리하신 하나님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강단에 올라서서 능력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런 은밀한 시간을 가지고 있다면 필자가 이 글을 쓸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필자는 문제의 본질을 확실히 부여잡고 있는지 확신이 되지 않는다. 왜 그런지 설명을 해보겠다. 그것은 필자는 정말 기도하는 여러분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과 동행하며 산다. 그들은 하늘의 숨결을 내 뿜는다. 정말 그렇다! 그들은 영원과 아주 친밀한 분들이다. 정말 말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그들에겐 있다. 그들을 아는 분들은 그 모습들로 인하여 영원히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실지로 변하지 않음이 남아 있다. 그들이 강단에 있을 때 이 사람들도 연계성이 없음을 본다. 동시에 정치나 경제 및 유흥의 세상에는 전혀 관계가 없이 사는데도 어떤 분들은 정말 현실성이 뛰어난 분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