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기독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중요한 개념의 하나로 되어 있다. 기독교를 일컬어 흔히 사랑의 종교라 부르기도 한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라 하셨다(마 22:37-40).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주신 새 계명이라 하였고(요 13:34; 15:12; 요일 3:11·23; 4:21)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근본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고 하였다(요 3:16; 요일 4:9). 요한서신 저자는 과감하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16)라는 신학적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라 했으며(로마 5, 8)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선언하였다(롬 13:8·9·10). 또 바울은 그리스도인 서로 사이에 행하는 사랑을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생활에서 가장 좋은 삶의 길로 추천하였으며(고전 12:31 하반; 갈 5:6 하반) 사랑은 그리스도인에게 길이 남을 가치들 가운데서 으뜸가는 것이며(고전 13:13)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를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복의 총합으로 제시하였다(고후 13:13).
이와 같이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근본 동기와 목적, 하나님과 인간 사이 및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룩되어야 할 최선의 관계, 개인의 삶 및 인류의 역사를 올바른 방향으로 추진하는 모든 동력의 원동력, 등등을 표시하는 개념으로 승격되었다. 학문적 논의에 있어서 추상화 작업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산봉우리에서 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보듯이 복잡·다기(複雜·多岐)한 사정을 한 단계 더 높은 사상으로 묶어서 정리해 주기 때문이다. 추상적 요약은 이해를 명료하게 하는 데 필요 불가결하다. 그러나 이 추상화의 결과물을 이용하는 데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고액의 수표는 많은 분량의 화폐를 휴대하거나 운반하는 데 따르는 불편을 덜어 준다. 그렇지만 결국에 그 수표는 삶에 필요한 물품으로 교환되지 않는 한 그것 자체로는 무용지물이다. 한 가지 더 구체적인 본보기를 찾아보자. 어떤 사람이 아프리카 대륙을 가로질러 건너갔을 경우에 신문 기자들은 그것을 보도할 때에 “아프리카 대륙 횡단”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부를 것이다. ‘횡단’이라는 낱말은 그 사건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개념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 ‘횡단’이라는 개념 속에 그가 이룩한 일의 내용이 모두 응축되어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그 사람이 여행한 목적은 아프리카 대륙의 생태계 조사이거나 문화 유적지 답사이거나 원주민들의 풍속 조사이거나 원주민들에 대한 의료 봉사일 수도 있다. 그의 여정은 갖가지 위험과 난관, 수많은 실패와 성공의 모험담으로 점철되었을 것이다. ‘횡단’이라는 개념 속에는 그 사람의 여행 목적이나 그가 겪은 구체적 모험이 담겨 있지 않다. 그 사람이 이룩한 일을 ‘횡단’이라는 개념으로 요약하는 한 편에 또 다른 한 편으로 이 개념은 구체적 사례로써 채워야만 그 의미가 살아난다. 신학화 작업도 이와 같아야 한다.
요한복음 저자는 복음서 저자들 가운데서 사랑을 가장 중요한 신학적 개념으로 정립한 사람이다. 그는 그의 복음서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 제자들의 대표로서의 베드로와 부활하신 예수 사이에 바야흐로 이룩되어야 할 이상적 관계를 사랑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표현하려고 하였다(요 21:15-17). 예수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거듭해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다. 이 물음에 대해서 베드로는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하면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는 말을 덧붙였으며 예수는 이 답변에 대하여 “내 양을 먹여라”(둘째 번에는 “내 양을 쳐라”)하고 응수하셨다. 만일 요한 기자가 마치 화룡점정(畵龍點睛)하듯이 사랑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그리스도교의 구원에 대한 그의 신학적 논의를 완결 지으려고 생각했거나 완결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의 예수의 물음에 대해서 베드로가 “예, 그러합니다” 하고 대답하고 예수께서 “됐어, 그렇게 하여라” 하는 대화로 끝맺었을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왜 그렇게 끝맺지 않고 있는가?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사랑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하느냐 않느냐의 여부는 그 사람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의 인정(認定)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며 둘째는 사랑한다는 말은 감정적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가시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어야만 그 실체가 확인된다는 사실이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신구약 성서의 내용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하나의 주요한 열쇠(key word)의 기능을 하지만 그것은 모든 신학적 진술을 마무리짓는 마지막 낱말(the last word)로 머무를 수는 없다. 사랑이 무엇인지는 또 다시 다른 말로 해명되지 않으면 안된다.
신구약 성서가 증언하는 사랑이 내용적으로 무엇인가를 밝히기 위해서는 첫째로 성서에서 사랑을 뜻하는 낱말들의 의미 영역을 분석해야 하며 둘째로 이 낱말(들)이 성서에서 어떻게 특수한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로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추적해야 한다.
II. 신구약 성서에서 ‘사랑’을 뜻하는 용어들
신약성서에서 사랑을 뜻하는 명사와 동사는 각각 거의 배타적으로 ‘아가페’(agapē: 약 113회)와 ‘아가파오’(agapaō: 약 135회)가 사용되었다. 신약성서 이전에 세속 그리스어에서는 ‘아가페/아가파오’가 전혀 통용되지 아니했다. 신약성서 저자들은 <70인역 성서>로부터 이 용어를 채용하였다. 세속 그리스어에서 ‘에로스’(erōs＝사랑)와 ‘에라오’(eraō＝사랑하다)는 주로 남녀 사이의 사랑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신약성서에는 전혀 사용되지 아니했다. ‘필레오’(phileō＝사랑하다)는 세속 그리스어에서는 주로 친구 사이의 사랑을 뜻했는데 신약성서에 22회 나타나는 ‘필레오’는 ‘아가파오’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구약성서에서 사랑을 뜻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여럿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아하바/아헤브’(ahaba/aheb)이다. 이것은 남녀, 부부, 부모와 자녀, 친구와 친구, 종과 주인, 신하와 왕, 하나님과 인간 등등의 모든 인격적 존재 사이의 사랑뿐만 아니라 사물이나 사정에 대한 사랑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70인역 성서>는 이것을 주로 ‘아가페/아가파오’로 번역했다.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표시하는 중요한 낱말로 ‘헤세드’(ḥesed)가 있다. <70인역 성서>는 이것을 주로 ‘엘레오스’(＝자비)로 번역했으며 우리말 <개역성서>에는 대체로 ‘인자/인자하심/인애/은혜/은총/자비/긍휼’로, <공동번역성서>와 <표준새번역성서>는 거의 ‘사랑’으로 번역했다. 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라하밈/라함’이 사용되었는데 ‘라함’은 <70인역 성서>에서 ‘아가파오’(＝사랑하다)로 5번, ‘엘레에오’(＝불쌍히 여기다)로 26번, ‘오이크테이로’(＝가엽게 여기다)로 5번 번역했다. ‘하난’이라는 동사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표현한다(출 33:19;삼하 12:22; 왕하 13:23; 대하 30:9; 시 77:10 등등).
III. 사랑의 현상학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랑이 발현되는 현상을 4 가지 범주로 나누어 검토해야 한다. 첫째는 자연적 현상으로서의 인간의 본능적 사랑이며 둘째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신적·초월적 사랑이며 셋째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로서의 인간의 종교적 사랑이며 넷째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의무로서의 윤리적 사랑이다. 성서가 인간에게 참된 삶의 길로 제시하는 사랑은 둘째, 셋째, 넷째 사랑이다. 이 세 가지 사랑은 별개가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본능적 사랑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두 극 사이의 관계인 데 반하여 성서가 제시하는 이 사랑은 하나님-인간-인간이라는 세 극 사이에서 움직이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기본적인 중심 축을 이루신다. 즉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사랑이 나머지 두 가지 사랑의 대전제, 근거, 근원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 사랑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윤리적 사랑에 선행(先行)하며 인간의 종교적 사랑과 윤리적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일 따름이다. 성서는 첫째 범주에 속하는 인간 본래의 본능적 사랑을 부정하지도 아니하며 논의의 토대로 삼지도 아니한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는 문맥에서 세리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며 이방인들/죄인들도 그렇게는 한다고 하셨다(마 5:46-47; 눅 6:32).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이야기에 나타나 있는 그 사람의 사랑의 행위는 자연적 인간으로서의 본연의 사랑의 가능성을 전제한 것이다(눅 10:30-37). 멜리데 섬사람들이 바울 일행에게 베풀어 준 인정도 자연적 인간의 사랑의 행위임에 틀림없다(행 28:2). 그러나 성서의 사랑은 절대로 스토아 철학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인간의 본유적 존엄성에 근거한 어떤 이상(理想)이 아니다. 성서의 사랑은 또한 하나님의 존재론적 본성에서 유추한 어떤 가치도 아니다. 성서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에는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통해서 이룩된 새로운 세계 현실과 인간의 새로운 삶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성서는 사랑이라고 하는 어떤 감정이나 사랑이라고 하는 어떤 사상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를 증언한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행해진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며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한다. 따라서 사랑에 관한 성서의 언어는 사상적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범주에 속한다. 인간적 사랑과 성서적 사랑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 둘은 질적으로 철저히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그 둘은 완전히 분리해서 다룰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서적 사랑만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특별한 용어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구약성서에서는 인간적 사랑과 신적 사랑을 표현하는 용어가 완전히 겹친다. 신약성서에서는 세속 그리스어에서 남녀 사이의 감성적 사랑을 나타내는 낱말인 ‘에로스/에라오’를 완전히 배제한 채 신적 사랑을 표현하는 특수한 용어로서 ‘아가페/아가파오’가 도입·관철되었지만 이 ‘아가페/아가파오’는 신적 사랑만을 배타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사랑을 표현하는 데도 사용된다(마 6:24; 눅 6:32; 7:5·42·47; 요 3:19; 12:43; 딤후 4:10; 벧후 2:15; 요일 2:15). 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서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인간적 사랑을 비유 또는 상징으로 이용된다(시 103:13; 사 49:15; 66:13; 렘 31:20; 호세아서; 마 7:9-11).
1. 구약성서에 나타난 사랑
구약성서는 ‘아하바/아헵’을 사용하여 인간의 자연적 사랑을 광범위하게 묘사했다. 이 사랑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이삭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사랑한 것(창 24:67), 종이 자기 처자와 상전을 사랑하는 것(출 21:5), 사울이 다윗을 사랑한 것(삼상 16:21),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한 것(삼상 18:1·3; 20:17; 삼하 1:26), 히람이 다윗을 사랑한 것(왕상 5:1)은 정당한 것이다.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사랑한 것(삼하 13:1), 솔로몬 왕이 많은 이방 여인을 사랑한 것(왕상 11:1), 여호사밧 왕이 야훼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한 것(대하 19:2), 이방 신을 사랑하는 것(렘 2:25), 우상을 사랑하는 것(렘 8:2; 호 9:10)은 부당한 것이다. 정의를 사랑하는 것(시 45:7)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것(시 122:6)은 정당하나 사망을 사랑하는 것(잠 8:36)과 은을 사랑하는 것(전 5:10)과 뇌물을 사랑하는 것(사 1:23)과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는 것(렘 14:10)은 부당하다.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 것(삼상 18:20·28), 아가서에 묘사된 남녀의 사랑은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보이며 삼손이 드릴라를 사랑한 것(삿 16:4)은 중립적으로 보인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잠 10:12; 17:9)와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않는다”(잠 17:17)에서 ‘사랑’과 ‘사랑하다’는 절대적 용법으로 사용되었으며 긍정적인 가치를 표시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 사랑과 이웃에 대한 인간의 윤리적 사랑의 근본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특수한 사랑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무슨 뜻이며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가늠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개념을 분석하거나 사랑의 열기(熱氣)를 수치화(數値化) 함으로써 되지 않는다. 구약성서 자체가 그러한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속의 어떤 심리적 현상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어떤 가시적인 행위로 표출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첫째로 이스라엘 민족을 만민 중에서 선택하시는 데서 드러났으며(신 10:15; 시 47:4) 둘째로 이스라엘을 억압으로부터 구원하시는 데서 드러났으며(신 7:8; 시 60:5; 사 43:4; 63:9; 호 11:1·4) 셋째로 이스라엘을 인도하며 복을 내리시는 데서 드러났다(신 7:13; 33:3·12; 렘 31:3; 호 11:4).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특별한 관계는 언약(＝계약)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은 이 계약 백성의 구성원에게 ‘헤세드’(＝<개역성서>로는 ‘은혜/은총/인애/인자,/인자하심/자비하심’,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으로는 ‘사랑’)을 베푸신다고 약속하셨다(출 20:6; 신 5:10; 7:9·12; 사 54:8·10; 미 7:20).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의 ‘헤세드’(＝은혜/사랑)로 인도하시며(출 15:13; 렘 31:3) 하나님은 ‘헤세드’가 크시어서 벌을 내리시지 않으신다(욜 2:13; 미 7:18).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라함’(＝긍휼히 여기다/가엽게 여기다/불쌍히 여기다)하셔서 언약을 지키시고 구원하시며(출 33:19; 신 13:17; 33:3; 왕하 13:23; 사 14:1; 49:13; 54:8; 55:7; 렘 30:18; 31:20;42:12;겔 39:25;호 2:23; 14:3; 미 7:19; 슥 10:6) 하나님은 ‘라훔’(＝긍휼/자비/사랑)을 베푸셔서 구원하신다(삼하 24:14; 대하 30:9; 느 9:19·27·28·31). 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하난’(＝은혜를 베풀다/은혜롭게 대하다)이라는 동사로 표현하기도 한다(창 33:11; 출 33:19; 삼하 12:22; 시 4:2; 6:2; 77:10; 사 30:18·19 등등).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을 일컬어서 “자비롭고(＝‘라훔’) 은혜롭고(＝‘하눈’)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헤세드’,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으로는 ‘사랑’)와 진실(＝‘애매트’)이 많은 하나님”이라 부르거나(출 33:6; 시 103:8; 145:8; 욜 2:13; 욘 4:2; 시 86:15 참조) “은혜로우시고(＝‘하눈’) 자비하신(＝‘라훔’)” 분이라 불렀다(시 111:4. 느 9:17 참조).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헤세드’(＝‘인자/인자하심/사랑’)를 간구하였고(시 6:4; 17:7; 25:7; 31:6; 33:18; 36:10; 40:11; 44:26; 51:1; 61:7; 69:13·16; 85:7; 90:14; 119:41·88·149·159; 143:12) 하나님의 ‘헤세드’를 찬양하였다(시 18:50; 21:7; 23:5; 26:3; 31:7·21; 32:10; 33:5; 36:5·7; 40:10; 42:8; 48:9; 57:3; 59:10·16; 62:12; 63:3; 66:20; 86:13·15; 89:1·2·14·24; 94:18; 98:3; 100:5; 101:1; 103:4·8·11·17; 106:1·7·45; 107:1·8·15·21·31·43; 108:4; 117:2; 118:1·2·3·4). 특히 시편 136편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낱낱이 열거하면서 매 절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고백으로써 하나님의 ‘헤세드’를 찬양한다(1-26절). 하나님은 모든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우시다. 하나님이 사랑을 베푸시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자유 의지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변덕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한 품성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사회적으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를 밝히면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세워 주시고 떠도는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시며(신 10:18),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며(시 33:5; 37:28), 억눌린 자들의 권익을 보호하시며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묶인 자들을 풀어 주시고 눈먼 자들을 눈뜨게 하시고 거꾸러진 자들을 일으켜 주시며 나그네를 보살피시고 고아와 과부들을 붙들어 주신다(시 146:7-9).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은혜(＝사랑)를 베풀겠다”(출 20:6; 신 5:10; 7:9)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사랑을 베푸시는 조건을 나타내기보다는 그가 이미 이룩하신 사랑의 관계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함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 응답으로 그를 사랑할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계약 백성에게 올바른 삶의 지침으로 율법과 계명을 주셨다. 그런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신 6:5; 30:6)는 명령은 모든 율법과 계명의 요구를 요약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의 심리적 현상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반드시 다른 가시적인 행위로 표출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나란히 언명된다(신 10:15; 11:1·13·22; 19:9; 30:16·20; 여 22:5).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악을 미워해야 한다(시 97:10).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시절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좇았는지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난다(렘 2:2).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의 응답만으로 그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역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뿐만 아니라 그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또한 사랑해야 하며(레 19:18) 나그네를 사랑해야 한다(신 10:19). 인간 사이의 윤리적 사랑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 사랑과 마찬가지로 인간 마음속의 심리적 현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윤리적 사랑은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레 19:18), 함께 거하는 타국인을 같은 동포와 같이 여기라(레 19:34)는 명령과 결합해서 제시된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사랑에 대한 명령도 극히 적지마는 인간에 대한 윤리적 사랑의 명령은 두세 개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종교적 사랑과 윤리적 사랑을 중요하지 않게 다루기 때문이 아니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관계는 율법 안에 모두 규정되어 있어서 이러한 관계는 사랑이라는 정감적 개념을 사용해서 규제하기보다는 정의, 공의, 언약 따위의 법적 개념을 이용해서 서술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2. 신약성서의 사랑
공관복음서에서 예수가 ‘아가페/아가파오’(＝사랑/사랑하다)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사랑을 가르치신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사랑’이라는 명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각각 한번만 사용되었으며 ‘사랑하다’라는 동사는 공관복음서의 병행 구절까지 합해서 25번 사용되었을 뿐이다. 이 가운데서도 사랑이라는 명사를 사용하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서술한 경우는 한번도 없다. 다만 누가복음 6:35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결부해서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라는 말씀이 오직 한번 나온다. 공관복음서에 사랑이라는 낱말이 거의 사용되지 아니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주요한 주제가 아니었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잘못이다. 예수의 선포에서 설령 사랑이라는 낱말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의 활동과 삶 전체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한 것이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고 죄인들과 더불어 밥상 교제를 하고 죄 용서를 선언하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등등의 그의 삶의 모든 행태는 곧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사랑을 표출한 것이다. 잃은 아들의 비유(눅 15:11-32), 잃은 양의 비유(눅 15:4-7),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 20:1-15), 큰 잔치의 비유(눅 14:16-24), 악한 종의 비유(마 18:23-33)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드러낸다. 특히 산상설교에서 들꽃도 아름답게 입히시고 새들도 먹이시는 하나님이 하물며 사람을 돌보시지 않겠느냐는 물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설득하는 말씀이다(마 6:25-32).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문맥에서 하나님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해를 떠오르게 하시며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비를 내리신다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무차별적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9:13과 12:7에는 각각 금식 논쟁과 안식일 논쟁과 결부해서 호세아 6:6을 인용하여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비(히브리어로는 ‘헤세드’)를 원하시는 분이심이 역설되었으며 누가복음 6:36에는 “그러므로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는 가르침 속에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심이 부각되었다. 이 두 경우에 히브리어적 관점에서 판단하면 ‘자비’는 ‘사랑’과 동의어이다. 예수의 전체 활동과 가르침은 하나님의 사랑을 잘 반영한다는 사실도 주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이 내용적으로 어떠한 성격의 것인지를 잘 드러내 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이른바 이중 계명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율법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는 물음에 대하여 예수는 신명기 6:5와 레위기 19:18을 복합적으로 인용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 22:37-40)하고 대답하셨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속에 모든 계명의 요구가 요약되어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개개의 계명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사랑의 정신이 그 동기와 추진력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그 실천은 무용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데 이르기까지 율법의 사소한 조문까지도 철저하게 준수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정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한다고 책망하셨던 것이다(눅 11:42). 그렇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이어야 한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한 애착을 동일한 수준에 놓아서는 안된다(마 6:24).
인간의 윤리적 사랑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우선 “네 이웃을 네 몸과 사랑하라”(마 19:19; 22:39; 막 12:31·33)라는 계명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웃 사랑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의 특징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일반적인 이웃 개념의 한계를 뛰어 넘어서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 눅 6:27·35)라는 과격성에 있다.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며(마 5:44)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잘해 주며(눅 6:36) 일체의 보복과 폭력을 단념하는 일(마 5:38-42)은 인간 관계의 최대 최후의 장애물을 철폐하는 것이 되며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원수의 존재가 소멸되고 다 같이 이웃으로 만나는 사랑의 공동체는 인류 역사의 궁극적 이상(理想)이다.
이웃 사랑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사랑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식의 하나님의 본성에 관하여 추론한 존재론적인 명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 행위를 가리킨다. 인간은 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며 이웃을 사랑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 이 사실은 다음 두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진 사람이 둘 있었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지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졌다. 둘이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돈놀이꾼은 둘에게 그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눅 7:41-42). 이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사랑에 선행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일만 달란트나 되는 엄청난 빚을 왕으로부터 탕감 받은 어떤 종이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밖에 안되는 작은 빚을 진 동료를 용서해 주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다(마 18:23-35)라는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반드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실증하신 분이시다. 예수는 그의 삶과 활동 속에서 바야흐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고 있다고 선포하셨다(마 12:28; 눅 11:20. 또한 복선언 참조). 이웃 사랑 또는 원수 사랑에 대한 의무는 바야흐로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다.
요한복음서에는 요한일서만 예외로 하고 신약성서의 나머지 모든 문서에 비하여 ‘사랑/사랑하다’라는 낱말이 월등하게 많이 사용되었다(‘아가파오’:37회; ‘아가페’:7회; ‘필레오’:13회). 요한복음서는 사랑의 복음서라 일컬을 정도로 사랑이라는 개념이 요한 신학을 전개하는 데 중심 축을 이루고 있다.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 역사의 동기, 방법, 목적을 사랑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서술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동기)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방법)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목적). 즉 하나님의 궁극적 구원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하여 예수의 전체 삶을 거쳐서 인간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예수는 생명의 빵이시며 생명이시다(6:35·48; 11:25; 14:6). 요한복음은 바로 이 구원사의 대주제를 사랑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자세하게 전개한다. 이 사랑의 서사시에는 아버지(＝하나님), 아들(＝예수), 제자들이라는 세 극이 설정된다. 이 세 극을 토대로 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그 아들과 제자들, 제자들과 제자들, 제자들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상호 관계가 성립되는데 그 관계는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된다. 이 모든 관계들 가운데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사이의 관계가 기본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셨으며(3:35; 5:20; 10:7; 15:9·10; 17:23·24·26)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신다(14:31). 아들은 제자들을 사랑하신다(13:1·34;15:9).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제자들에 대한 아들의 사랑의 원동력이다(15:9; 17:36). 아들이 제자들을 사랑하셨으므로 제자들은 아들을 사랑해야 하며(14:15·21·23·24; 16:27) 또 제자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13:34·35; 15:12·17; 17:23; 21:15·16·17). 아버지와 제자들 사이의 사랑의 관계는 아들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즉 제자들이 아들을 사랑하면 아버지께서도 제자들을 사랑하신다(14:21·23; 16:21). 요한복음에는 제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은 없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으며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예수를 사랑함으로써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일서도 요한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사랑하다’라는 개념을 많이 사용하여 사랑의 신학을 전개했다(‘사랑’:18회; ‘사랑하다’:28회). 그러나 요한일서와 요한복음서의 사랑의 신학은 구조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4:8·16) 또는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4:7)라고 선언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클로스-업(close-up)시킨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데서 나타났으며(4:9·10)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사실에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다(3:16). 그러나 요한일서에는 요한복음서에서와는 달리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 즉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사랑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요한복음서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사랑은 오직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을 매개로 해서 계시될 따름인 데 반하여 요한일서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사랑이 직접적으로 서술된다.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먼저 사랑하셨다(4:10·11·19와 3:17과 4:9의 ‘하나님의 사랑’, 4:12의 ‘그의 사랑’, 4:17의 ‘사랑’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뜻한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4:19·20·21; 5:1·2).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결실을 맺어야 하며(3:9-14·23; 4:7·11; 5:2)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 형제들을 사랑하는 데서 구현되며 입증되어야 한다(3:17; 4:8·12·16·20·21).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또한 그의 계명을 지키는 데서 입증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동의어이다(5:3; 2:7-11 참조). 왜냐하면 그의 계명은 사랑하라는 명령이기 때문이다(3:23). 놀랍게도 요한일서에는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에 관하여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그것은 요한일서 저자가 이 사랑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과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숙지된 사실로 전제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역점을 두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인들 서로 사이의 사랑에서 그 목표에 도달한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사를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진술한 최초의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로마서 5:8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으로 간주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를 사랑해 주신 사건으로 실존적으로 체험했다(갈 2:20).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사랑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며(롬 1:7; 5:5; 8:37·39; 살전 1:4. 엡 2:4와 살후 2:16과 딛 3:4 참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롬 8:28; 고전 2, 9; 8:3; 16:22. 엡 6:24 참조). 이제 하나님의 사랑 또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어려운 역경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된다(롬 8:35·37·39).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실로 구현시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본다(롬 5:5; 15:30. 골 1:8과 살후 3:5 참조). 바울은 그의 서신의 훈계 부분에서 그리스도인들 서로 사이의 사랑 실천에 대하여 많이 언급한다. 그는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촉구하며(롬 1:10; 13:8·10; 갈 5:13·14. 엡 5:2 참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롬 13:8·10; 갈 5:14).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방언, 기적, 예언, 지식 등의 화려한 은사를 흠모하며 경쟁적으로 과시하는 현상을 비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가장 좋은 삶의 길이 무엇인지를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제시한다. 그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사랑을 가장 좋은 삶의 길로 추천한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용어는 절대용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문맥으로 보아 그것은 이웃 사랑을 뜻한다. 이 사랑은 방언, 예언, 지식, 기적 행위, 자선 행위 따위에 단순히 병렬되는 하나의 덕목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비로소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근본 바탕이며 사랑은 영원히 남을 것이지만 이 모든 것들은 일시적인 것으로 결국에는 사라져 버릴 것들에 속한다.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이 세상에 영원히 남을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사랑이 으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왜 사랑이 으뜸인가? 과거에 일어난 구원 사건을 포착하는 인간의 인식 행위를 일컬어서 여기서 믿음이라고 했다면 이 구원 사건의 미래적 완성을 확실한 가능성으로 움켜잡는 결단의 자세를 일컬어서 소망이라 했을 것이다. 인간의 삶은 현재라는 시간의 영역에서 전개된다. 현재라는 시간은 인간에게 그냥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과거로부터 건져내고 미래로부터 앞당겨 오는 분량만큼만 그의 몫으로 허용된다. 현재라는 시간은 이미 사라져 버린 과거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로 하여금 현실태가 되게 하는 장(場)이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드러내는 창(窓)이다. 현재가 없이는 과거와 미래는 없음과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현재의 삶을 과거로부터의 인과적 결과물로 보거나 미래의 결실에 대한 예비 단계로 보는 경우에는 현재의 의미는 사라져 버린다. 바울은 열광주의자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과 반대로 현재의 삶을 귀하게 여긴다.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의 공동체적 유대 관계를 지탱하는 가장 튼튼한 끈은 사랑이다. 인간의 삶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사랑이 으뜸이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을 핵심 주제로 다루는 갈라디아서의 결론부에서 주장하기를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라고 하지 않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이다”(갈 5:6)라고 했으며 사랑을 성령이 맺는 열매의 맨 첫째 자리에 사랑을 올려놓았다(갈 5:22).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이웃 사랑의 계명을 으뜸가는 법이라 일컬었다(약 2:8). 그는 또 그리스도인들을 정의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약 1:12; 2:5)이라 하였다. 베드로전서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묘사되어 있다(벧전 1:8). 베드로전서는 형제 사랑을 거듭해서 권면했으며(1:22; 2:17; 3:8; 4:8) 사랑은 허다한 죄를 엎어 준다고 했다(4:8).
베드로후서에는 ‘아가파오’라는 동사가 부정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즉 “불의의 삯을 사랑하는 것”(벧후 2:15)은 그릇된 행위이다.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요 3:19),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다”(요 12:43), “이 세상을 사랑하여”(딤후 4:10)에서도 ‘아가파오’는 그릇된 행위를 묘사한다. 이에 반하여 “돈 사랑”(딤전 3:3; 6:10; 딤후 3:2; 히 13:5), “쾌락 사랑”(딤후 3:4)에는 ‘필레“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필레‘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딤후 3:4), “선을 사랑하지 않는 것”(딤후 3:2), “사람을 사랑하심”(딛 3:4)에서는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필레오’라는 동사도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며(요 5:20; 11:3·36; 16:27; 20:2; 21:15·16·17; 고전 16:22; 딛 3:15; 계 3:19)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요 12:25; 계 22:15). 이와 같이 신약성서에는 ‘필레오’와 ‘아가파오’는 동의어로 혼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V. 요 약
성서가 말하는 사랑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인도하신 데서 구현되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종교적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는 윤리적 사랑을 요구한다. 인간의 이 두 가지 사랑은 철두철미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며 이 두 사랑은 인간의 마음속의 심리적 현상으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이웃의 권익을 관철시키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표출되어야 한다.
신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드러났다. 예수의 선교 활동과 가르침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구약성서의 이웃 사랑의 계명을 원수 사랑으로까지 승화시켰다. 요한복음서는 구원사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서술했다. 요한복음은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 제자들 서로 사이의 사랑, 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이 네 사랑 사이의 연관 관계를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다루면서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머지 모든 사랑의 근원으로 제시했다. 요한일서에서는 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과 제자들 서로 사이의 사랑의 근원이다. 제자들 사이의 사랑은 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요 목표인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의 입증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작용한다. 이웃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사랑을 가장 좋은 삶의 방식으로 추천하였다.
성서의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실체도 아니오 인간의 본성에 근거한 심리적 실재도 아니다. 성서의 사랑은 관념적 사상 체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범주에 속한다. 이 사랑이 무엇인지는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대하셨는지에서, 신약성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떠한 새 생명의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확인하는 데서 드러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형제를 사랑하라는 생활 윤리적 권고로 바꾼 것은 예수의 가르침의 과격성을 완화하는 데 역점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의 실용적 적용에 역점을 둔 것이라 할 것이다.
인간의 구원에 대한 성서의 증언은 한편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선포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이에 대한 마땅한 응답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이웃에 대하여 해야 할 의무를 규정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하나님이 하신 일은 직설법(Indicative)으로 표현되며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명령법(Imperative)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이 하신 일과 인간이 해야 할 일을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여 나타내는 경우에 이용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개념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또한 자기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성서가 증언하는 종교의 골자이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개념은 심리적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초대 교회의 신도들의 삶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서 드러난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지 않는지 여부는 그가 자기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느냐 않느냐에서 드러나며 사람이 그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는지 않는지 여부는 그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서 드러난다. 화폐를 현물로 교환해야 하듯이 사랑이라는 개념은 항상 구체적 행위의 개념으로 대치되어야만 그 본래적 의미가 살아난다.
인간의 사랑은 결코 정의의 모순 개념도 아니며 정적주의(靜寂主義)의 대명사도 아니다. 행동의 날개가 붙지 않은 사랑은 죽은 것이다. 사랑은 마음속에 갇혀 있는 것을 박차고 행위의 옷을 입고 나들이 할 때에 비로소 ‘사랑’으로 그 정체(正體)가 확인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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