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770년에 이르러 수도를 서방의 호경에서 동쪽의 낙읍[낙양]으로 옮기면서 이전시대를 서주시대로 천도 이후 진이 6국을 통일할 때(기원전221)까지를 동주시대라고 하였다. 그리고 동주시대는 다시 춘추와 전국시대로 구분하며 춘추는 공자가 편찬한 노나라의 연대기인 춘추에서 유래하고 전국시대도 그 시대의 사실을 적은 전국책에서 비롯된 시대구분용어이다,
춘추시대는 대체로 주의 동천 즉 낙읍을 수도로 하면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춘추시대의 종말과 전국시대의 시작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대체로 전국시대의 시작은 진이 한, 위, 조의 3국으로 분열되어 주왕실이 이를 공인하는 기원전 403년을 가지고 시기구분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춘추 전국시대의 시대구분이 다양한 것은 이시대의 정치적 변동이 극심하고 사회적 변혁이 다양하였기때문이다.
이러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역사적 전개와 시대상황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시대별 역사적 가치 역시 독특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종래 춘추전국시대는 공자의 저술이라 알려진 춘추에 근거한 유교적 역사관으로 인해 부정적으로 평가하였으나 정치적으로 볼때 이시대는 난세임은 틀림없지만 사회와 경제 문화면에서 고대사회를 재편성하고 진, 한의 통일제국을 형성하기 위한 거대한 변혁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대는 유교적 역사관에 의한 부정적 시각보다는 정치적 변화와 함께 사회, 경제, 문화적인 발전시대로 파악해야 한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춘추시대는 아직 주대의 봉건질서가 유지되어 주왕실이 쇠퇴하였지만 낙양을 중심으로 한 동주체제하에서 지방의 제후들이 존왕양이 즉 주왕실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대의명분을 세우고 패권을 다퉜으며 각국의 정치는 경, 대부 등 귀족의 수중에 있었으나 제후의 세력을 넘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들면서 봉건제도가 붕괴되고 주왕실은 낙양근처만을 차지하는 소국으로 전락하였으며 주의 축소로 인해 지방의 제후국에서 강력한 실력의 경, 대부들이 제후국[공실]의 지위를 찬탈하는 하극상의 사태가 발생하고 제후국도 약소국을 병합하는 이른바 약육강식의 시대가 되어 신흥강국인 전국 7웅은 봉건제 대신 중앙집권적 군현제도를 실시하여 이에 따라 군주의 권력은 강화되었지만 귀족세력은 약화되는 가부장적 군신관계로 변모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함께 종래의 읍제[도시]국가의 구조가 해체되고 전국시대의 영역[영토]국가의 형태로 발전되어가는 모습을 보이며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적 관료국가의 등장을 알렸다.
사회적으로는 주대의 씨족공동체가 춘추 중기부터 붕괴되면서 전국시대에 들어와서는 실력을 중시하는 실력주의시대가 도래하였으며 지식계층의 활약이 돋보이고 평민계층의 지위상승으로 인해 이른바 포의장상이 속출하였다. 귀족세력의 몰락은 토지제도나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발생하여 전국시대에는 경제력이 국왕에 집중되는 모습을 보였다.
민족적으로는 중국민족을 상징하는 한민족의 범위가 정착되지 못하여 춘추 5패 중 중원에 위치한 제, 진, 송 등은 중원의 문화민족 하를 자칭하고 변방의 진, 초, 오, 월 등은 오랑캐시하였으나 전국시대에 들어서는 융적은 모두 제하국으로 통일되어 민족구성이 화[하]로 단일화되었고 변방의 초,전, 연, 월 등도 점차적으로 중원의 중화[하]문화에 흡수동화되면서 민족적 통일이 추진되어 중국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러한 민족과 문화상의 동화통일로 인해 춘추 전국시대는 각국의 정치와 사회에 변화릉 일으키고 이는 다시 학수사상에서도 중국적인 제자백가사상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