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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현대사 연구의 새 흐름
2007-10-26 18:59:10   read : 3469

서양 현대사 연구의 새 흐름



구  학 

강릉대학교 교수

 

1. 세기말 증후


  일반적으로 한 시대의 끝 무렵에는 쇠퇴기의 징후 또는 퇴폐적인 분위기가 대두하기 마련인데 19세기 말 유럽 서구사회도 ‘ 데카당트 ’라고 지칭되는 독특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E. H. Carr는 정신질환의 병력을 가진 F. 니체의 ‘ 神의 죽음 ’이라는 외침이 유럽 사회 전역에 걸쳐 큰 파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까닭을 19세기 말 유럽의 문화풍토의 덕으로 돌린 바 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이후 중세를 거치면서 근대 유럽인들에게 있어 전지전능하고 편재하신 기독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비록 선명하게 눈에 드러나지는 않아도, 일상의 삶을 지속시키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유럽인들에게 표면상으로는 영혼의 삶을 위한 것으로 간주된 기독교 신에 대한 믿음은 육신의 생명을 위해 공기가 요구되는 것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즉 근대 이후 유럽 사회에서 세속화의 과정이 꾸준히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개인 영혼의 구원문제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가치의 원천 나아가 국가존립의 기본적 근거로 훌륭하게 기능하여 왔었다. 이러한 유럽의 풍토 가운데서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신성모독적 외침은 누구도 감히 본질적으로 문제삼지 않았던 가치중의 가치 또는 사회 중심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되었고 이로부터 수많은 기존 제도, 관행, 가치 등에 대한 문제제기가 뒤이어 나타날 수 있었다.


  19세기 말 S. 프로이드는 ‘ 꿈의 해석 ’을 출발점으로 삼아 인간심리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펼쳐 정신분석학의 토대를 쌓았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행동이 이성(理性)적 판단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욕이라는 본능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일 프로이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성에 대한 굳건한 신뢰에 입각하였던 근대 유럽 사회의 세속적 토대는 동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근대 유럽인들에게 있어 이성에 대한 믿음은 거의 종교적이었다. 理神論이 나타날 정도였으니 이성은 현존하는 인간사회를 지상의 천국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힘과 권력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프로이드는 이성이라는 鐵甕城의 토대를 그 토대보다 더 깊은 아래 부분의 탐색을 통하여 강력하게 뒤흔들었고 그로 인하여 유럽 사회에서 이성에 대한 뿌리깊은 신뢰가 동요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19세기 말 이후 유럽은 니체와 프로이드에 의하여, 오랜 동안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기독교 신의 섭리와 이성에 대한 신앙이라는 토대들이 흔들거리자 불안해하며 표류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전반 실제로도 두 차례에 걸쳐 가장 합리적인 사회체제를 갖추었다는 평판을 받고 있던 유럽 국가들 사이에 수년간에 걸친 전대미문의 총력전이 발생하여 유럽인들은 물론 인류 전체에게 쓰라린 고통을 주고 지우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아픈 경험에도 불구하고 유럽사회에서 기독교 신앙과 이성에 대한 오랜 전통적 믿음은 쉽사리 최고 權座를 내어주지는 않았다. 기독교 하나님을 超人으로 대체한 니체는 편집광적 니힐리즘 환자로 판명되었고 초인을 자처한 히틀러는 비극의 원흉답게 자살함으로써 책임을 모면하였을 뿐이었다. 잠재의식을 파헤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이론 또한 결국은 이성의 힘을 이용하여 인간 내면의 숨겨진 더 깊은 세계를 들여다 본 것이라고 평가되어 오히려 이성의 능력은 더욱 무한한 것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20세기 후반에도 여전히 이성과 인류의 진보에 대한 오랜 믿음은 당당하게 일정 부분 그의 역할을 행하였던 것이다. 


  20세기는 두 번째 밀레니엄이 끝나는 시기로 새로운 천 년을 향한 첫 걸음을 놓을 수 있는 시기였으나 돌이켜 보면 지난 천 년의 발목잡힘에서 편안하게 벗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20세기의 역정은 지난 천 년 동안 쌓아왔던 토대를 허무는 임무에 몰두하였음을 드러낸다. 특히 20세기 말 급부상한 새로운 사조, 포스트 모더니즘은 새로운 가치관을 창조, 정립하는 작업에 힘쓰기보다는, 서양 근대를 지탱한 이성과 진보에 대한 신앙이라는 낡은 토대를 우선 전방위적으로 파괴하는 도구로 쓰였다고 생각된다.


2. 포스트 모더니즘과 역사


  가. 과학적 역사   

  이성에 대한 우상숭배적 신앙과 깊은 관계를 지닌 역사 연구 방법은 19세기 이후 역사연구자의 가치중립을 표방한 실증주의 역사학이었다. 역사학도 과학적 연구방법을 지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19세기 후반 유럽의 지적 풍토에서, 역사학은 충실한 사료연구에 입각하여 엄밀한 논증을 거쳐 가능한 주관적 해석을 배제하여, 자연과학의 법칙과 유사한 수준까지 역사 연구의 결과를 내려고 노력하였다. 게다가 19세기 말 물리학에서 상대성 이론과 불확정성 이론이 나타나 주목을 받게 되자 과학적 역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물리학 법칙의 한계성을 초들어 역사학도 자연과학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강변하였다. 과학적 역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보다 광범한, 보다 정확한 사료연구는 실험실에서 가능한 모든 실험과 가능한 정확한 실험과 같은 의미였다. 그러므로 실험의 결과없는 자연과학의 새로운 법칙 정립이 불가능하듯 완벽한 사료의 검증없는 역사학의 새로운 주장은 신뢰를 받지 못하였다. 이같은 지적 분위기는 유럽에서 적어도 1968년(참고)까지 주류를 형성하였다.

  참고 : 1968년 유럽에서 과격한 학생운동이 발생하였다. 당시 과격한 학생운동은 안정된 사회체제의 재생산을 위하여 특권을 부여받았던 학생들이 주제를 모르고 설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실제 30 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현실은 당시의 학생운동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1968년 체제내 세력을 대표하는 학생들의 기존 체제 운영의 토대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다시 한 번 이성에 대한 오랜 믿음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해되고 있다.


  나. 포스트모던적 역사

    (1) 역사와 과거의 구분

  포스트모던주의자임을 자처하는 K. 젠킨스에 따르면 역사란 세계를 해석하는 여러 담론 가운데 단지 하나에 불과하다. 역사 담론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세계를 직접 창조할 수 없다. 하지만 각 역사 담론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한다. 한편 과거란 역사 연구의 가시적 대상으로써 세계의 조각난 편린이다. 그러므로 담론인 역사와 담론의 대상이 되는 과거와는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한다. 요컨대 역사와 과거와는 서로 동일시될 수 없다. 이 둘은 시간상으로나 거리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과거를 역사적으로 읽는 행위가 필요하게 된다. 왜냐하면 동일한 대상도 상이한 담론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동일한 풍경을 지질학자, 사회학자, 역사가, 경제학자, 예술가 등은 전혀 다르게 읽고 해석할 수 있다. 나아가 각각의 경우에서도 시간, 공간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읽기들이 존재할 수 있다. 역사학의 분야에서 다른 읽기들의 훌륭한 예들은 사학사(Historiography)에서 알 수 있다.


  역사와 과거를 구분하는 일을 검토해야만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과거는 일어난 일이다. 과거는 이미 살아져 버렸지만 역사가들을 통하여 다시 살아난다. 역사가들은 책이나 논문 등 다양한 수단들을 통하여 과거에 발생한 사건들을 원상태와는 별로 일치하지 않는 형태로 다시 살려내고자 한다. 그러므로 역사는 역사가의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과거에 대한 일종의 구성물이다. 역사가가 수행하는 작업의 본질은 비록 사료작업을 완벽하게 행하였다 할지라도 문서들 간의 상호관계를 통하여 만들어진 언어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둘째, 중세 봉건사회 연구라는 과목을 수강하면서 M. 블로흐의 ‘ 봉건사회 ’를 주교재로 사용하여 학기말에 좋은 성적을 받았다면 비록 봉건사회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얻었다할지라도 블로흐의 봉건사회를 읽는 관점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봉건사회 읽기는 블로흐의 봉건사회 읽기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과거와 역사를 구분하는 일에 의미를 두어야 하는 좋은 예는 여성에 대한 역사 서술의 철저한 배제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예컨대, 과거 그리스, 로마, 중세, 아프리카 등에서 남성의 수와 비슷한 수의 여성들이 살았는데 여성들은 역사의 중심 무대 즉 고전으로 간주되는 역사 연구서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여성들은 역사학 연구대가들의 눈에는 역사변화를 이끌어 내는 역할과 무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여성해방론자들은 한편으로는 ‘ 여성들을 역사 가운데로 다시 써넣는 작업 ’ 에 매진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과 여성 모두가 남성성(Masculinity)의 형성과정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도 수많은 집단과 사람들이 역사로부터 배제되어 왔었을까? 지금까지 역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이 주변으로 밀려나고 국외자들이 주연으로 떠오른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이러한 가정에 입각한 작업들은 아직 뚜렷한 결과물을 생산하지는 못하였으나 적어도 특정 현상에 대하여 단 하나의 읽기만이 변함없이 되물림되고 있는 관행에 대한 거부의 단계에는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2)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소멸된 과거를 오늘에 되살리는 역사 연구 및 서술에 있어 인식론, 방법론, 이데올로기 영역 등이 해결하기 힘든 문제로 남아 있다.

  인식론 : 현재 존재하고 있는 사물을 인식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현존하지 않은 ‘ 역사속의 과거 ’와 같은 주제에 대하여 정확하게 인식하고 설명하는 일은 가능한 것인가? 역사적 인식과 설명은 가설이며, 역사는 실제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전제하에서 직업적으로 연구하는 역사가들의 창작품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쓴 역사가 정확하며 심지어는 사실에 입각하여 충분히 설명된 생생한 객관적 과거라고 주장하는 역사가들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같은 확신주의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상실하였다. 실제로는 잘 모르면서 임의로 각자가 원하는 것을 우리들이 역사라고 보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어떻게 하여 특정한 역사만이 지금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는지 의문이 생겨나게 되며, 이 시점에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역사 내용과 방법은 각각 권력과 관계를 맺고 있음이 포착된다.


  방법론 : 만약 하나의 연구 방법을 통하여 모든 것을 통달할 수 있고, 한 번 파악한 것은 죽을 때까지 간직할 수 있다면 역사는 더 이상 새롭게 쓰여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역사가들은 동일한 방법으로 역사를 반복하여 말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역사가도 과거 사건을 총망라하여 재현할 수 없다. 무한한 과거 사건들의 기본 골격을 넌지시 언급할 뿐이기 때문에 역사가의 과거 읽기는 여러 가지가 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과거에 만들어진 여하한 기록도 과거의 사실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다. 과거란 여러 가지 사건들과 상황이기 때문에 결코 단 하나의 기록일 수 없다.


  과거의 사실 여부가 어떻게 확인되든 또 그같은 내용이 얼마나 여러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사실로 받아들여지든지 간에 역사는 어쩔 수 없이 역사가라는 한 개인의 구성물이므로 ‘ 이야기 주체 ’인 역사가의 관점이 표명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과거의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이해 사이에 서있는 해석자를 통하여 사건을 보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라 역사가의 관점은 역사자료를 선택할 때 이미 결정적 역할을 행한다. 사실 역사란 과거보다 터무니없이 용량이 작은 범주에 속하며 역사가는 단지 과거의 편린만을 복구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역사란 과거의 특정 부문을 부풀리고 과장하고 축소한다. 가장 실증적인 연대기 작가조차 시간과 장소에 일정한 형태를 부여하기 위하여 이야기 구조를 만든다. 결국 이로부터 역사란 역사가가 구성하여 만든 흔들거리는 담론이며 과거의 존재로부터 오로지 하나의 읽기만을 강요받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 : 역사적 해석이란 궁극적으로 방법론과 증거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결정된다. 엄밀한 연구 방법이 중요하다는 것은 사실이나 여러 방법 가운데 어느 엄밀한 방법을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는 방치되는 경향이 있다. 보다 진정한 과거로 우리를 이끌어줄 방법론이 과연 마르크스의 엄밀한 방법론인지 아니면 베버의 방법론인지 아니면 브로델의 방법론인지 나아가 계량경제학의 방법론인지 어느 기준을 사용하여야 선택을 바르게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특정한 방법을 통하여만 진실에 다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풍부하다. 선택을 위한 합의된 기준없이 그저 여러 엄밀한 방법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역사를 정리해보면 실제 과거는 결코 온전히 알 수 없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과거와 역사 사이에 놓인 간극은 어떤 인식론으로도 메워질 수 없다. 역사가는 어떤 대상을 보편화시키기 위하여 꼼꼼한 방법들을 창안해 내어 해석을 덧붙이려는 다른 역사가들의 영향을 차단할 방법들을 강구하여 왔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오직 한 방법만을 따른다면 진실과 객관성에 다다를 수 있을지 모르나 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수많은 방법들이 병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흔히 말하는 중심 개념이란 단지 최근에 이루어진 여러 편파적인 구성물들의 하나에 불과하고 이로부터 지배와 권력이 개입하게 된다. 역사는 이론이고 이론은 이데올로기이며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이해 다름 아니다.

  역사는 역사가들이 빈약한 증거에 입각하여 만들어 낸 언어적 구성물이므로 당연히 해석적이고 그리하여 상대적 성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은 틀린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식으로 역사를 보는 것은 해방의 의미를 지닌다. 낡은 확신을 내팽개침으로써 그 낡은 확신을 통하여 혜택을 받은 사람들을 노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이론상 모든 역사적 설명이 문제 투성이고 상대적이라는 한계를 알고 있음에도 특정한 역사적 설명은 지배적인 것이 되고 다른 것들은 주변적이 된다. 역사적 설명들은 가치의 위계질서안에 놓여 있다. 왜라는 것이 문제가 될 때, 지식이란 언제나 권력과 연관되기 때문에 사회내에서 강력한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은 자기 이익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최대한 퍼뜨리고 정당화시키려 한다. 우리가 상대주의적 관점을 견지할 경우 우리는 이것이나 저것이나 매한가지다라는 절망에 빠질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 사태의 올바른 파악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3. 최근 역사 연구의 동향  


  매년 5월 말 우리나라에서는 전국 역사학 대회가 열린다. 1993년 5월에는 10개의 역사 분과 학회들이 ‘근대 국민국가와 민족문제’라는 주제아래 연례 집안 잔치를 치룬 바 있다. 당시 분과학회는 역사학회를 필두로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 역사교육, 경제사, 과학사, 고고학, 미술사 학회 및 한국사 연구회 등으로 구성되었다. 2001년 전국 역사학 대회는 ‘역사에서의 공공성과 국가’라는 주제아래 16개 분과학회가 참여하여 다소 산만하게 집안 잔치를 치루었다. 올 해 분과학회에는 대구사학회, 부산사학회, 전남사학회, 호서사학회, 한국 역사연구회 등이 집안 식구로 새롭게 선을 보였다. 얼핏 보기에도 지방사학회의 약진이 눈에 뜨인다. 그러나 지방사학회의 약진과 분과학회 등의 수가 늘어난 것 못지 않게 주목되는 바는 공동주제가 1995년에는 ‘사료와 실증’이었고, 1997년에는 ‘역사와 도시’ 그리고 올 해는 ‘공공성’ 등 과거의 전통적 역사에서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던 주제와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비추어지는 내용들을 함께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경향은 주제의 선정뿐만이 아니라 개별 발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 여년전만해도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싶던 ‘난장이와 거인’이라는 주제가 2001년 서양사부에서 발표되었고, 과학사부에서는 ‘레일리의 실험 음향악 연구’라는 발표가 나왔다. 몸, 질병, 역사 분과에서는 ‘20세기의 대 역병 에이즈’와 ‘콜레라! 조선 땅을 습격하다’라는 제목의 발표가 있었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역사 분과에서는 ‘영웅 만들기 또는 영웅 죽이기 - 브레이브 하트를 중심으로 본 역사 영화의 현재성과 과거성’이라는 발표와 ‘중국 영화 속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저항과 현실’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생활사와 민속 분야나 ‘정보화 시대의 영상역사학’이 독립 분과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심지어 ‘역사 관련 애니메이션- 게임의 현황과 과제 ’라는 발표도 나왔다.


  전통 역사학에서는 주목을 받지 못하고, 별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였던 여러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진지한 문제 제기와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려는 역사가들의 노력은 오늘날 역사 연구의 영역을 무한히 확대시키고 있다. 이러한 역사 연구 영역의 확대가 역사학에게 바람직 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인지 아닌지는 당장 판단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종래 역사 연구의 중심 개념으로 간주되었던 대상들이 과거에 누리던 특권적 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를 확인하는 것이 역사 연구의 출발점이 되는 현실 가운데서, 누구에게나 공히 중심으로 간주될 수 있는 특정 분야란 점차 더욱 찾아내기 힘들게 될 것이다. 각자가 자기의 목소리를 우렁차게 내어도 시끄러운 잡음이 아니라 보다 깊고,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납득시킨 대위법 같은 화음의 법칙이 언제 그 모습을 들어낼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가능하다고 믿는 한 과연 창조해 낼 수 있을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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