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홈     교회안내     예배안내     담임목사목회     신구약66권장절전체설교(가입후열람)     교회학교     전도부     교육부     남전도회     여전도회     청년부     봉사부     선교부     예배자료     신앙자료     생활정보     시,수필,컬럼     기도실     이단자료     운영자자료실     가  

  일반교회시사
  이쁜글.좋은글
  각 기관 부서
  교육자료실
  성경공부 방
  오늘의 Q.T
  은혜의 간증
  절기(추수.맥추)
  여름성경학교
  주일학교설교
  고난(사순절)부활절
  5월가정의 달
  성령 강림절자료
  찬송 및 복음송
  기독교영상플레시
  기독교자료
  기독교동영상
  덕천교회 약도
  시사 예화
  유머 예화
  상식건강자료
  고려수지침강의
  가정상담
  한자 사전
  아름다운이야기
  다양한 이미지
  성경말씀 듣기
  기도는어떻게하나?
  선 교 학
  신간도서기독교
  자주묻는질문 답변
  예화자료
  목회설교돕는 정보
  기도원 소식
  북한 탈북자 등
  명언 격언실
  역사신학실
  실천신학실
  현대신학실
  철학이야기
   서양고대사
   서양중세사
   서양근대사
   서양현대사
   동양사자료
  히브리 헬라어사전
  비교이단자료
  창조와진화론
  1907년 대부흥사
  강해설교
  컴퓨터 배우기
  평신도신학
  유익한 정보
  특선.다큐멘타리
 



성경공부

생활정보

사전사이트


> 철학이야기(전체리스트) > 헤드라인

일러스트레이션의 역사
2007-10-26 18:51:20   read : 4295

일러스트레이션의 역사

인류의 시각적 기록의 시작

 

1.선사시대의 동굴화

 이 시기의 그림의 목적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문제였고 이러한 먹이 감을 위한 주술적 의미의 수단으로 미술은 행해진다. 우리가 문자를 사용하기 훨씬 이전에 인류는 그들의 표현을 그림으로 남겼다. 이는 크로마뇽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주술적 수렵의식의 한 부분으로 인류는 시각적으로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선사시대에는 사람은 거의 묘사되지 않았고, 주로 동물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시대의 그림은 각 동물의 개성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당시 예술가들의 도구는 날카로운 돌이나 갈대 따위였다.

 한 시대의 그림은 그 시대의 관심사를 담고 있다. 이들의 그림을 보면 그들의 관심사가 사냥에 관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미 이 초창기부터 미술은 이미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원래 선사시대의 원시인들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단순한 감상용이 아니었다. 감상용을 위한 작품이었다면 동굴의 깊숙한 곳에 작품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미술이라는 존재는 생활을 위해 필요했던 수단, 좀더 정확히는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신석기로 접어들면서부터는 미술의 형태도 조금씩 변화가 나타난다. 사고 능력이 발전하며 추상 형태가 나타나기도 하고,  또 자신들만의 언어 수단으로 기호나 상징의 형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즉, 먹이 감을 구하기 위한 주술적인 목적으로 시작되었던 미술이 인류 최초의 동굴벽화에서부터 점차 추상화되고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브뢰이유에 의하면 "짐작컨데 선사시대인 들에게 그림이 지닌 가장 큰 목적은 먹이 감을 잡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 지극히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결국 먹이 감을 잡는 수단으로 미술 활동을 시작한 셈이다. 그들은 동굴에 자신이 원하는 사냥감의 모습을 그리고, 그 그림을 향해 창을 던지거나 창을 맞은 모습을 그리는 행위가 사냥감의 영혼을 빼앗아 간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2.이집트의 파피루스 그림

 시대가 지나면서 인간의 문명은 발달 해 갔고, 인간의 창의력 또한 커져갔다. 정교한 연장으로 식량을 얻는 것은 더욱 쉬워졌고, 안전한 주거가 마련되면서 공동사회가 형성되었다. 이 때부터 말과 글 그리고 철학 등이 생겨났다. 더욱 다양하고 정교한 재료가 만들어졌고, 이러한 발전과정에서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바로 이집트의 *파피루스이다. 파피루스에는 문자로 기록을 했는데, 그림은 글자를 보충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어져 사용했고, 파피루스 일러스트레이션은 이집트 외에도 그리스와 로마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료들은 오랜 기간동안 보관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기원전 200년경에 발명된 것이 바로 *양피지(parchment)와 *모조피지(vellum)이다.

 

 고대 이집트인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 특히 죽음과 장례의식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사후에 대한 이들의 믿음은 본질적으로 삶에 대한 애착과 환경에 대한 적응 욕구로부터 생겨났다. 일반적으로 내세에서의 이상적인 삶은 현세에서의 삶과 기본적으로 동일했다. 그들은 현세에서의 신분이 내세에서도 변함없이 계속된다고 믿었다. 현세의 서민이 내세에서 왕이 될 수 있다는 식의 믿음은 갖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훌륭한 왕과 현명한 귀족이 다스리는 이상적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을 바람직한 내세의 삶이라고 믿었다. 각 계층마다 사후에 대한 믿음은 그 계층이 현세에서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삶의 모습과 일치했던 것이다. 또한 바람직한 내세를 얻기 위해서는 죽은 사람의 이름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육신이 훼손되지 않고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먹을 양식이 계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부패하지 않는 미라와 사자의 이름과 내세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음식과 생활도구 등을 무덤에 그려 넣었다. 사자는 내세에서 주술로서 그림을 실제 음식 또는 물건으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믿음 때문에 벽화에 생활과 밀접한 장면을 새긴 무덤이 발달하였다.

 

 이집트 벽화가 측면으로 그려져 있는 이유는 고대 근동지방에 BC 5세기초까지는 *프리미티브 양식의 벽화가 유행하였기 때문이다. 포리그노토스·미콘·파나이노스 등과 같은 대 화가의 출현으로 BC 5세기 중엽부터는 알카이크 양식의 약속적 형태나 표현으로부터 탈피하여 인간의 자유로운 자태와 사실에 가까운 이상적인 기법으로 모든 형상에는 입체감을 넣는 화법도 나왔다. 어떤 이들은 이집트인들이 묘사능력의 부족으로 벽화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은 비례에 맞지 않고 신체구조상 불가능한 자세를 한 인체를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동시대의 그리스인들이 추구하였던 자연에 대한 그대로의 재현, 다시 말하자면 자연주의적 경향보다는 그들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관념을 그리고자 하였다. 눈과 몸통은 정면일 경우 가장 그 특징을 잘 보여주면 얼굴, 팔, 다리는 정면보다는 측면일 때 가장 그 각각의 특징들을 잘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 그래서 그 특징들을 잘 보여주는 방향에서 인체를 조합하여 그렸던 것이다. 즉 그리스 미술의 두드러진 경향인 "보이는 대로" 그리기보다는 마땅히 "보여야할 혹은 보여주어야 할대로" 그렸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눈"으로 그렸다면, 이집트인들은 "머리"로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회화적 경향은 종교와도 관련을 지닌다. 그리스의 종교는 다분히 인간적인 신들로 현실적인 면이 강하였다면, 이집트의 종교는 내세관을 기본으로 하는 관념적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집트 양식은 대단히 엄격한 규칙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미술가는 그것을 어려서부터 배워야만 했다. 좌상의 경우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야 하며 남자의 피부는 여자의 피부보다 더 검게 칠해야 했고, 모든 이집트 신들의 모습도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하늘의 신 호루스(Horus)는 매나 매의 머리모양으로 그려야 하며 장의를 주관하는 신인 아누비스(Anubis)는 자칼이나 자칼의 머리 모양으로 표현해야 했다. 그리고 모든 미술가들은 상형문자의 형상과 상징을 명확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쓸 수 있도록 배웠어야만 했다. 기존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가장 뛰어나 미술가로 추앙되었고, '새로운 것','독창적인 것'은 요구되지 않았다. 그래서 3천년 이상 이집트의 미술은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3.그리스 시대

 문명이 동방으로부터 그리스로 옮겨온 수세기 동안 몇 가지 발전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사람들이 문자기록과 함께 시각적 표현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꽃병이나 항아리 위에 역사적인 사건과 종교적 의식 그리고 일상생활과 같은 이미지들에 특별한 흥미를 갖고 묘사하였다. 특히 7세기경 그리스의 그림들은 그 시대의 삶에 대한 풍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도자기 위에 그려진 그림들은 장식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실용적 기능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 꽃병들은 매매에 의해 거래되었는데, 유행과 수요팽창에 따라 도시국가에 부와 지위 그리고 권력을 가져다주었다. 이로 인해 예술가와 장인들의 기술과 개인적 재능이 장려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초기 일러스트레이터가 생겨났는데, 그들은 고객의 취향과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고 있었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500년경부터 신전들이 지어졌는데, 훌륭한 *프리즈와 조각 장식들 위에 그림들이 그려졌다. 벽화나 모자이크 그림들이 도시국가와 귀족들에 의해 사치스럽게 제작되었다. 새로운 힘을 가진 국가인 로마가 등장한 이후에도 그리스는 여전히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그리스 예술가들에 대한 주문이 그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중요한 것은 당시 대부분의 작품들이 주문이나 수수료를 받고 제작되었다는 점이다.실제적인 요구 없이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얘기이다. 이 중 신화는 적지 않게 양식의 변화와 해부학에 대한 지식들에 대해 설명해준다. 로마신화는 그리스 신화를 다양하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이름과 등장인물들을 추가하거나 변경시켰지만, 대부분 그리스 신들의 성격과 덕성을 충실히 따랐다. 로마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그들의 신화 역시 발전해갔고 신의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그에 대한 믿음도 증대되어갔다. 점성학, 길조, 마술사 등이 나타났다. 이러한 발전 속에 기독교의 등장은 수많은 신들에 대한 관념이 사라지고 유일신만을 섬기는 계기가 되었다.

 

4.중세

 서양중세의 미술은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스·로마 미술은 인간 중심의 미술이었으나 중세는 기독교 중심의 미술이었다. 한마디로 기독교는 세상의 중심이었고 민중을 천국으로 이끄는 안내자였다. 교회는 일상생활의 중심이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예술의 중심지였다. 벽화, 조각, 모자이크 등의 중세 미술은 교회건축에 종속되었다.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통치기에 미술은 상당한 변화를 보였다. 이상적이고 고전적인 특성들이 사라지고 신체비례의 규칙들이 깨어짐은 물론 도식적 표현을 주로 하는 자연주의로 인해 개체의 특징들이 사라졌다. 중세 또는 암흑시대라고 불리는 새로운 시대가 미술에서도 시작되었다.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성서의 필사본도 함께 소개되었다. 이 책들에 그려진 그림에는 그리스의 경우와 달리 자연풍경은 볼 수 없다. 대신에 이미 존재하는 조각상이나 소묘, 회화 등이 참고자료가 되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교회 벽화와 마찬가지로 세밀화(miniature)라고 불린다. 이 그림들은 필사가 들에 의해 일일히 손으로 베껴 그려졌다. 그려지는 과정 중에 실수가 생기기도 했으나 이 실수로부터 새로운 창안이 이루어졌다. 제각각의 스타일과 의식적 또는 무의식으로 개성이 혼합되는 속에서, 도미노 효과와도 같이 연속되면서 모든 미술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5.르네상스

 고대의 의식적 표현에서 벗어나 중세는 설명적인 미술로 변화되었다. 전쟁장면이나 정신적인 탐구, 철학적 사고 등이 현재의 만화나 그래픽 소설의 기법과 비슷하게 한 장의 종이 위에 네모꼴의 그림들이 연속적으로 연결된 것처럼 상징적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구텐베르그의 활자와 목판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텍스트와 일러스트레이션은 긴밀하게 결합되었다. 14세기에 오면서 해부학과 과학적 발전에 병행하여 회화에 대한 분석적이고 자연적인 접근이 재확립되고, 수학의 발달로 원근법이 발견되었다. 이 시기에는 지식과 이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물질적 세계에 대한 관찰과 탐구를 통하여 시각적 실제의 상을 보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미술분야에서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지오토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수평면으로 연결된 견고한 물체들을 통하여 형태를 이해하였다. 이러한 원리는 14세기에 프라 필리포 리피와 그의 제자 산드로 보티첼리, 그리고 그의 아들 필리포 리피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그들은 선과 빛에 대한 완벽한 이해로 고대 신화의 주제들을 표현하였다.

 

 16세기경 전성기 르네상스에는 관찰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정착되었다. 미술과 과학의 융합이 이루어지고 보다 진보된 재료와 기법, 타고난 호기심, 비판적 관찰, 지적 관심이 정밀하고 민감하게 시각적 실재에 대한 상을 창조하는데 기여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알브레히트 뒤러 같은 화가들은 이론과 자연세계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여 이미지를 구성하였다. 그들은 해부학과 건축학 그리고 자연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했으며 일생동안 그들 주제가 담은 신비를 탐구하고 발견해 나갔다. 이러한 분석적이고 묘사적인 작업들이 기술적 일러스트레이션의 시작이 되었다. 기술적 일러스트레이션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함께 성장했고 의학, 지형학, 전자공학 등의 서적들, 그리고 3차원 물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분야에 신뢰도 높은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동안 미술은 각 나라마다 그 성격을 달리했다. 이탈리아는 제스처나 얼굴표정을 통해 인간의 육체적이고 감성적 본성을 정확히 파악하려고 한 반면, 북유럽의 예술가들은 혼동기의 어둠, 절망, 두려움, 고통을 묘사했다.

 

6.현대 일러스트레이션

 르네상스는 봉건제도의 종말을 가져왔고 그와 함께 독일의 30년 전쟁, 프랑스의 백년전쟁, 종교적 가치의 변화와 유럽일대를 강타한 무서운 전염병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히에로니무스 보슈와 같은 예술가들이 나타났다. 그는 공포와 지옥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어떤 친숙한 사물이나 동물 또는 해부학적 부분을 그 실체와 전혀 상관없는 것들과 병치시키는 기술을 가졌다. 보슈의 작품들은 무의식 속에 잠재된 꿈이나 악몽에 대하여 막연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초현실주의의 창시자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들은 사실 현실에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간의 공포에 대한 강조는 16세기의 피터 브뤼겔에게로 이어진다. 이탈리아에서 묘사법이 과학으로 확립되는 동안 북부 플랑드르 지방의 화가인 반 아이크는 빛과 색채에 의해 작품 표면에 관심을 집중시킨 유화기법을 발전시켰고,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판화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인쇄기술은 마르틴 숀가우어에 의해 동판화로의 길을 열어주었고 그의 놀라운 기교는 독일에서 크게 인정받았으며 알브레히트 뒤러와 같은 예술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뒤러의 판화들은 거의 자신의 회화를 옮겨 그린 것이거나 복제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이후에 보편화되었다.

 

7.일러스트레이션 신문과 잡지의 등장

 1840년대에는 일러스트레이션이 들어간 신문들이 인기를 끌었다. 1844년 전신의 발명으로 일간지들이  많은 소식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고 사건들에 대한 관심도 증대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민첩하고 유능한 일러스트레이터를 요구하게 되었다. 시사 일러스트레이션의 등장은 알러스트레이터 들에게 이제까지의 현실 도피적이거나 환상적인 작업으로부터 벗어나 실생활을 주제로 다룰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전쟁을 시각적으로 다루었고 당시 일어난 크리미아 전쟁, 보물 전쟁, 미국의 남북 전쟁은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무궁무진한 주제를 제공했다. 이 때에는 사진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각 저널리즘은 여전히 일러스트레이션을 장악하고 있었다. 일러스트레이터들은 그들 앞에 주어진 사물이나 상황을 정직하게 표현하였다. 전쟁 외에도 철도부설과 같은 산업적인 발전이나 미개척지에로의 대여행 등을 소재로 다루었다.

 

8.만화의 등장과 발달

 연속만화는 일러스트레이션에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만화는 원래 일러스트레이션에 문구를 삽입한 연속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만화는 각기 독립된 사건들을 그 자체로 다루거나 아니면 다른 시대와 세계의 사건들을 이야기 식으로 풀어나가는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최초의 연속만화는 신문에 게재되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19세기말에는 애니메이션 기술이 적용된 만화책이 등장하게 된다. 영화 기술적인 효과가 만화에 도입되었는데, 분위기나 신비함을 나타내기 위해 고전적인 원근법은 물론이고 명암법 등이 활용되어 빛과 어두움만으로 형태를 단순하게 표현한 그래픽 효과가 주목할 만하다. 이런 그림들의 스타일은 미술과 일러스트레이션에서의 운동들만큼이나 다양했는데, 초인적인 영웅들의 고전적이고 로맨틱한 묘사에서부터 연속적인 꿈을 나타내기 위해 초현실적인 배경이 사용되기도 했다. 1930년대의 만화책은 신문지와 같은 종이로 만들어졌는데 4분의 1 크기로 접쳐져 인쇄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8 × 11 인치로 규격이 정해졌다. 이 지면들을 통해 작가들은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내거나 스타일을 변화시켰으며 또 정치적·사회적 논평을 하고 환상을 펼치기도 하였다. 초인적인 영웅에 대한 아이디어는 1938년 '수퍼맨' 을 창조해 낸 미국의 제리 시겔과 죠 슈스터에 의해 시작되었다. 어린이들을 주요 독자로 삼으면서 만화출판은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해 가기 시작했다. 만화책을 고정적으로 보는 독자들이 늘어나면서 1965년 무렵부터는 *옵셋인쇄의 기술적 혁신으로 그래픽 소설이라고 불리는 질적으로 고급한 만화책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픽 소설은 최상의 작화, 디자인, 지질이 어우러져 단행본 또는 전집 형태로 출판되는데, 내용은 보통 상상을 초월한 환상이나 무시무시한 공포 등을 다루고 있다.

 

9.풍자 일러스트레이션 시대

 19세기 전반 프랑스에서는 낭만주의가 정치 사회적 변동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자유나 정의 사상을 신화적인 여신이나 영웅들을 통해 인격화 시켰다. 낭만주의 운동의 결과로 연극무대에서는 정치적 도덕적 주제가 다루어질 수 있었고 이 운동은 19세기 내내 예술가와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사실주의의 출현은 사람들로 하여금 작업실로부터 벗어나 실생활 속에 깃든 무궁무진한 주제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이 시기에는 성공한 부르주아 계급, 서민 계충, 신흥 중산층, 세탁부, 창녀, 술주정뱅이, 상인들이 낭만주의의 신화적인 영웅이나 여신들의 위치를 대신했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고, 그로 인해 정치적인 캐리커처가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캐리커처는 시각적 무기로서 모욕과 조소를 익살스럽게 표현하였다. 시각적 또는 개념적으로 과장된 주제들은 그 시대의 부조리에 모욕과 조소를 던지는 강력한 요소가 되었다. 신체적 특징이나 매너의 유별남에 초점을 맞추어 표현하는 것이 캐리커처이다. 얼굴표정이나 제스처는 간략한 선으로 묘사된다. 풍자 일러스트레이션의 구성요소들은 익살스러울 뿐 아니라 핵심을 찔러야 하는데, 여기에는 주제 및 배경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캐리커처는 항상 새로운 사건들에 대한 논평을 대중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정치적인 잡지들의 근본목적은 언제나 동일했는데, 그것은 당대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비판하는 미술과 문학을 발표하여 정권에 도전하고 그 반응을 살피는 것이었다.

 

 캬바레, 클럽, *압생트주와 예술가 등, 밤의 세계라든가 온갖 사회적 부조리들이 예술가들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이는 일반인들에게 아주 상투적인 방식으로 예술가 적인 생활양식을 낭만적인 것으로 보도록 만든 원인이기도 했는데, 그런 편견은 귀족적인 화려함의 일종으로서, *로트렉 같은 작가가 활동한 환경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사회적 캐리커처나 일상생활의 표현들은 사진이나 로트렉의 독특한 그래픽 기법의 개발에 기초가 되었던 일본 판화의 영향에 힘입은 것이었다. 채색 석판화의 발달은 로트렉이 캬바레에 관한 포스터나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는 데 훌륭한 매체가 되었다. 당시 영국 화가들이 환상적인 영역을 주로 다룬 반면에, 로트렉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다채롭고 생생한 주제들은 그의 상상력이 현실생활에 근거를 두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0.19세기 영국의 북 일러스트레이션

 '폴리매스'라는 말은 19세기의 많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을 일컫는 데 적합한 용어이다. 이 말은 한 분야를 넘어서는 재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예로 영국의 윌리엄 블레이크는 판화가, 일러스트레이터, 공상가, 시인으로 이 말에 적합한 인물이다. 18세기 중엽 블레이크와 같은 일부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적인 규칙과 이념, 그리고 사실주의와 산업혁명에 반발하였다. 당시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로서 미술과 문학에서 광범위한 현실도피주의가 나타났다. 산업혁명이 가치관을 크게 변화시켰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상업과 대량생산으로 향했으며 정신적이고 자연적인 미는 물질주의로 대체되었다. 1848년 윌리엄 홀맨 헌트는 존 에브릿 밀레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와 함께 라페알전파를 결성하였다. 라파엘전파의 이념은 중세적인 전통을 단절시켜버린 당시의 가치관과 산업적 과정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들은 중세의 기사와 요조숙녀들의 시대야말로 도덕적인 순결과 정신적인 진정성을 지녔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있지도 않은 진실을 추구한다고 하여 그들이 비판한 대상보다 더 많은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활동한 윌리엄 모리스는 강한 사회적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전적으로 예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책을 출판하는 켐스콧 출판사를 운영하였다. 그는 새로운 기계시대에 반대하는 *[미술공예운동]의 주창자로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었다. 이 시대의 문학과 일러스트레이션에는 공포, 고통, 추악함, 탐욕, 섹스, 죽음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환상적인 일러스트레이션은 보통 교훈을 암암리에 깔고 있는데, 대부분 당시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캐리커처 역시 발전하여 의인화와 인격화가 유행하였는데, 동물이나 식물 또는 기타 사물들에 인간적 성격을 부여하였다. 또한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여 작가들은 자연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나타냈다. 비록 다양한 스타일이 사용되긴 했지만, 이 당시의 그림의 구성 전체에 흐르는 대담한 이미지, 선 그리고 질감은 장식적인 안목에 따라 모든 면과 요소들에 활력 적인 음양공간으로 넘쳐 났다. 더 이상 전통적인 서구의 원근화법은 사용되지 않고 대신에 환상적인 공간이 창조되었는데, 이는 수직적 구도를 기본으로 하면서 높은 수평선과 함께 위에서 아래로 그려나가는 일본판화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자연으로부터 착안된 문양과 질감은 무궁 무진 하였고 각각의 모티브들은 상징적 힘을 획득한 채 뚜렷한 이미지와 순수한 디자인들로 엮어졌다. 1890년대에는 환상적인 일러스트레이션 분야에서 채색 *하프톤 기법이 도입되었다. 19세기 중후반 동안 *아르누보가 전 유럽과 미국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예술개념이 그런 것처럼 아르누보 역시 그 기반이 되었던 본래적 정열과 논리는 유명무실하게 끝나버렸다. 산업화의 전진과 엄격한 순응에 반발하는 표현이었던 복잡한 선과 자연적인 형태는 디자인의 순수한 요소로 되어버렸다. 이는 어떤 면에서 과거의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던 공식이나 구조와 다를 바가 없었다.

 

 풍부히 쏟아져 나온 정기간행물들의 영향으로 일러스트레이션의 개념도 보다 확고해져갔다. 텍스트와 결합된 미술은 일종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그림으로서, 어떤 사실을 발언하거나 독특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대중이 이해하기 쉽고 더러 통찰과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편 일러스트레이션은 소비자들에게 제품에 관한 시각적 이미지를 제공하여 관심을 유발시키는 만큼 광고의 필수적인 요소로 인정받게 되었다. 20세기 초 라디오와 TV가 등장하기 이전, 이들 일러스트레이션이 들어간 정기간행물들은 매우 인기있는 오락과 정보의 수단이었다.

 

11.현대 미국의 일러스트레이션

 오랜 역사와 경험을 가진 유럽에 비해 미국은 아직 과도기에 있었으며 재능을 가진 유럽인들의 이주를 환영하였다. 미국에도 이미 많은 잡지들이 있었지만 특히 영국에서 출판된 일러스트레이션 잡지들이 그들의 시장을 미국의 가정으로까지 확대하고 있었다. 위대한 문학과 환상 그리고 모험이 이 시대의 한 장을 장식할 때 미국 일러스트레이션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하워드 파일은 일찌감치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들 선조들의 유럽적인 배경이 미국의 의식과 혼합된 것처럼, 파일의 예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초기 일러스트레이션은 아르누보,라파엘전파, 알프레히트 뒤러의 기법을 도용한 펜화였다. 펜화는 목판공의 기술을 활용하여 쉽게 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많이 애용되었다.

 

'일러스트레이션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시기에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높은 수준과 윤리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일러스트레이션도 독자와 매체에 따라 달라져야만 했다. 점차 잡지들은 일러스트레이션이 들어간 기사들을 줄이는 대신에 광고와 시사적인 내용을 늘려갔다. 아트디렉터와 편집자들은 갈수록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작업에 시간적 제한을 가했는데, 이것이 아주 큰 문제가 되었다. 복제생산의 발달에 크게 기여한 사진은 일러스트레이션을 대신해 전 세계의 사건들을 기록하였는데, 사람들은 예술가의 해석에 기반한 사실주의보다는 사진을 더 신뢰하였다. 점차 사진이 정착되어 갔으며 이는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착잡한 일이었다. 어떤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작품제작에 참고하기 위하여 사진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사진술과 경쟁하는 동안 일러스트레이션의 낡은 형식들은 대중적 관심을 잃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디자인과 외형에 보다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들었다. 사진술은 일러스트레이션의 적수 또는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서 꾸준히 발전해 나갔다.

 

 대중문화의 출현과 함께 대량생산과 소비적인 상품들이 시장을 가득채웠다. 산업화 된 세계와 50년대의 이념에 대항하여 60년대의 젊은이들은 자연, 사랑, 공동체의 이름으로 뭉쳤다. 그들은 마약과 *사이키델릭, *옵아트와 *팝아트를 즐겼으며, 미술공예운동의 부활을 꾀했다. 한편 70년대는 모든것을 포기하고 멋대로 놀아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만,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두드러지면서 그들의 사회적 의식과 정치적 행동주의는 < 마더 존스 > 나 < 진보 > 같은 잡지에서 토론의 장을 마련하였다. 갈수록 사회의 모든 부분들이 스피디해졌다. 스피디한 자동차, 패스트푸드 체인점 등과 마찬가지로 아주 빨리 마르는 물감인 아크릴릭이 1954년 개발되었다. 미국문화의 다양성은 일러스트레이션 분야에서도 다양한 혁신의 문을 열어놓았다. 70년대 후반과 80년대에는 과거의 모든 미술과 일러스트레이션 운동들을 해석하고 반영하는 새로운 작가들과 관념이 쏟아져 나왔다. 어린이 그림책에는 성인세계로부터 흘러나온 마술, 신화, 환상적인 상상력이 도입되어 고도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보여주었다. 대개 이런 책의 기획자는 일러스트레이터들 자신인데, 그들은 자신의 창조력을 완전히 쏟아 부음으로써 개성적인 시각적 해석을 확립하였다. 인간과 동물 그리고 중세 갑옷을 합성한 캐릭터라든지, 당대의 문제나 관심사에 대한 비평적 도구로써 성인들을 위해 동화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위대한 영웅들과 공상과학 소설을 주제로 한 환상적인 일러스트레이션 또한 꾸준히 독자층을 늘려갔다.

 

 전기통신과 매스컴의 발달로 사람들 사이는 더욱 가깝게 결속되었고 취미와 관심이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다. 또 이러한 점은 다양한 스타일과 기법, 태도를 통해 일러스트레이션 분야가 발전할 수 있도록 고무하였다. 애니메이션이나 컴퓨터 같은 새로운 분야도 등장하였다. 매체에 상관없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려는 인간의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그것은 처음에는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런 표현의 일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지성과 정열, 장인정신과 노력의 복합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션은 거울로 된 건물의 벽면처럼 과거와 현재를 반영하고 희망적이건 묵시록 적인 예언이건 아무튼 미래를 투사한다. 이들은 기하학적 형태, 상상과 기억을 담은 선과 색채로써 공간 속에 표현된 우리문화의 취미와 관심들을 반영한다. 주제에 대해 때로는 어두운 방식으로, 때로는 화려하고 빛나게 조명되었을지라도 이들은 모두 인간의 역사를 대변하는 그림들 인 것이다.

 

 

Tip

  

*일러스트레이션이란?

일러스트레이션의 어원은 'to make light'로 보이지 않는 대상에 빛을 비추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세계, 즉 감정이나 사상을 시각화하여 명확하게 제시한다는 의미이다. 이 의미에서 유래된 것으로 문자를 제외한 그림이나 사진, 도표 등을 뜻하며 문장의 보조적 기능은 물론 독립된 작품으로서의 역할을 하며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시각적인 조형 활동이다. 곧 일러스트레이션은 사고 이전의 느낌이며, 직감적 영상 언어를 표현함으로써 개인과 사회를 연결시켜 주는 시각 언어인 것이다. 시각전달 기능을 보완하는 방법과 수단 가운데 그 성격상 심벌이나 사인(sign) 이외의 모든 회화적 또는 조형적 표현을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션은 시각디자인의 목적이나 기능에 따라 다양하다. 즉, 시간 전달을 위한 캘린더, 공간 전달을 위한 지도, 각종 도표(diagram), 상업적인 목적을 가진 인쇄를 위한 일러스트레이션, 순수하게 기록적인 일러스트레이션(동식물 도감, 역사적인 기록), 보이지 않는 과학의 세계(미생물의 세계나 미래와 미지의 세계)를 위한 상상도, 심지어 사진이나 전시를 위하여 표현된 것까지도 전달을 위한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각 예술의 중요한 장르 중의 하나인 일러스트레이션은 인류의 발생 초기로부터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를 새로운 조형 개념으로 다극화시킨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러스트레이션은 대중과의 유대 관계를 이루는 시각 예술 즉, 대중 시각 언어로서의 본질을 지녀왔다. 서구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의 역사의 뿌리를 보면 동굴의 벽화로부터 시작해서 최소한 20세기 초 까지는 순수미술 안에서 잉태되어 자연스럽게 현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현대적 개념의 일러스트레이션이란 순수회화나 단순한 설명적인 그림이 아니고 또한 그래픽 디자인의 지엽적 요소만도 아닌, 컨셉을 가진 목표 지향적 그림으로서 또는 시각 언어와 커뮤니케이션 아트로서 그 자체의 독자적인 장르를 형성해 가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은 현대 예술의 흐름과 산업 사회의 기능 속에서 그 역할이 점차 강조되어 하나의 사회 예술 영역을 이루고 있으며, 그 영역은 사회적 연관성을 갖는 모든 시각 문화 속에 내포되어있다. 일러스트레이션은 이미지와 그것에 상응하는 언어적 해석을 통해서 그 본질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이미지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즉, 주제를 명확하게 시각화하는 목적을 갖고 테마에 표현 가치를 두는 것이 일러스트레이션이다.

 

*파피루스

나뭇잎을 길게 잘라 서로 교차되게 얽은 뒤, 물에 넣고 불려서 만든 것인데 주로 종교의식을 기록하는 재료로 쓰였다.

 

*양피지

양의 속가죽으로 만든 것

 

*모조피지

송아지 가죽을 벗겨 물에 빨아서 잡아 늘린 후, 면과 두께가 고르게 될 때까지 표면을 긁어내서 만든 것

 

*프리미티프 양식

프리미티브아트(Primitive Art)란 말은 선사 시대의 미술, 현존하는 원시부족사회의 미술, 르네상스 직전의 미술, 근대 소박파회화 등에서 사용한다.

현대미술상에서의 프리미티비즘의 효시는 고갱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미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으로, 양식상의 문제보다는 장식적인 상징물로, 즉 원시인에 대한 신화를 모방적으로 재구성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추세는 20c야수파에게로 전승되었으나, 19c 고갱 적인 시각을 탈피하지 못한 채 기본의 개념을 답습하는 동시에, 아프리카 조각상의 비교적 사실주의적인 경향에 주목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입체파들은 프리미티브라는 용어에 새롭고 보다 미적인 방향의 함축성을 띠게 하는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는 새로운 성과를 보였으니, 피카소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할 것이다.

1907년 피카소의「아비뇽의 처녀들」이 원시부족예술의 표현력과 조형적인 특성에 촛점을 맞춤으로써, 프리미티비즘이 유럽에서 전적으로 시작되었고, 1906~1907년사이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 피카소 등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부족 민들의 가면과 인물상을 발견하면서부터, 부족예술을 현대적인 안목으로 재해석하는 일이 시작된 것이다. 아프리카 부족예술은 가면이나 조령상 등의 조각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며, 그들 대부분은 의식에 사용되고, 조형적으로는 매우 견고한 인상을 주는, 감각적인 것이다. 오세아니아 가면이나 조령 상은 해양적인 환경과 강렬한 태양광선의 영향으로 분방한 상상력과 다채로운 장식이 풍부하며, 촉각적인 아프리카 조각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시각적이다. 이들의 옷감, 야자섬유, 끈, 나무껍질, 찰흙, 기타 사물 등이 뒤섞인 부족 미술품은 피카소가 꼴라주나 앗상불라주 기법을 찬양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클레의 공포의 가면과 쥬리 족의 조각을 비교해보면, 색채나 형태에서 상당히 유사하고 또 변용된 부분을 찾을 수 있다.

 

*프리즈

삼각형 모양의 지붕 정면의 장식 벽

 

*초현실주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세계 내지는 꿈의 세계의 표현을 지향하는 20세기의 문학·예술사조를 말한다.

 

*옵셋인쇄

고급스럽고 정밀하며 다양한 색을 사용하여 인쇄하는 방법을 말한다.

 

*사실주의

객관적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재현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압생트

향쑥의 라틴명 압신티움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원래는 알코올분이 강하고(약 70%) 당분을 포함하지 않은 암록담황색 술로서 아니스의 방향과 약간 쓴맛이 나서 아페리티프로 쓰였다. 그런데 향쑥의 정주 주성분은 신경조직에 유해하여 과하게 사용하면 중독증세를 나타내기 때문에 원산지인 스위스나 프랑스에서도 1915년을 전후하여 향쑥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근래의 압생트는 향쑥을 포함하지 않으며, 알코올분도 40% 정도의 것이 많다.

 

*툴루즈 로트렉

프랑스의 후기인상파 화가로, '로트렉'이 물랑루즈의 포스터와 무희들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미술공예운동

18세기 말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빅토리아시대에 와서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생활을 완전히 변화시킬 만큼 발전하였고, 공업생산과 기계생산에 의한 제품들이 대량 생산되었다. w.모리스는 이러한 기계만능주의가 결국은 생활 속의 미를 파괴할 것이라는 우려에서 가구 ·집기 ·옷감 디자인 ·제본 ·인쇄 등 응용미술의 여러 분야에서‘수공업’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회복시키려고 중세적 직인제도의 원리에 따른 공예개혁을 기도하였다. 모리스의 이러한 혁신운동은 1860년대부터 시작하여 건축가와 공예가들의 큰 호응을 받았으며, 1880년대에는 직인기술의 향상을 위한 몇 개의 조직도 결성되었는데, 1882년의‘센추리 길드’, 1884년의‘아트위키즈 길드’와‘아츠 앤드 크렙츠 전람협회’등이 그것이다. 이들 직인적 공예운동은 기계능력의 가능성을 무시하였다는 점에서 시대를 역행한 듯하나, 예리한 문제점 제기와 세련된 미의식은 그 후의 공예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하프톤 기법

미세한 점들로 화면이 구성된 원고를 분해하여, 각각의 점의 크기와 간격, 농도를 이용하여 영상을 표현하거나, 사진을 인쇄하는 기법이다.

 

*아르누보

아르누보는 19∼20세기에 유럽·미국 각지에서 일제히 유행한 장식양식이다.'아르누보(artnouveau)'는 불어로 '새로운 예술'이란 뜻으로 이 명칭은 1895년 말 미술상 사무엘 빙이 파리에 개점한 가게의 이름 <아르누보>에서 유래한다. 빙의 상점은 벨기에의 반 데 벨데에 의해 장식되었고 새로운 시대를 느끼게 하는 공예품을 전시했다. 1900년 빙이 드 풀, 가이야르, 콜로나 등 3명의 공예가의 협력을 얻어 파리세계박람회에 공예품을 출품, 대성공을 거둘 무렵 <아르누보>라는 상호가 사람들 사이에서 양식 명으로 바뀌어 정착되었다. 독일에서는 '유겐트 양식 (Jugendstil)', 프랑스에서는 '기마르양식(Style Guimard)', 이탈리아에서는 '리버티 양식(Stile Liberty:런던의 백화점 리버티의 이름에서유래)'으로 불린다. 아르누보는 유럽의 전통적 예술에 반발하는 당시 미술계의 풍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아르누보의 작가들은 대개 전통으로부터의 이탈, 새 양식의 창조를 지향하여 자연주의, 자발성, 단순 및 기술적 완전을 이상으로 했다.

산업혁명 이후 기술 발전으로 미술품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지만 진정한 예술이 파괴되었다고 자각한 예술가들은 수공예와 중세 장인 세계를 동경하며 미술과 공예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아르누보가 발생하게 된 기틀이 되었다. 아르누보는 자연에서 유래된 아름다운 곡선을 디자인의 모티브로 삼는데, 예를 들어 공작의 형태, 파도나 포도덩쿨의 줄기, 백조, 꽃봉오리 등이 그것이다. 주로 곡선을 사용하여 식물을 모방한 까닭에 '꽃의 양식', '물결의 양식', '당초양식' 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특히, 덩굴풀이나 담쟁이 등 식물의 형태를 연상하게 하는 유연하고 유동적인 선과, 파상, 곡선, 당초무늬 또는 화염 무늬 형태 등 특이한 장식성을 자랑했고, 유기적이고 움직임이 있는 모티프를 즐겨 좌우 상칭이나 직선적 구성을 고의로 피했다. 원래 건축이나 공예품, 그리고 조각 등의 장식미술에 접목했는데, 점차 모든 미술 분야에 나타나기 시작하며 아르누보는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파리에 지하철이 처음 생긴 1899년부터 그 입구는 아르누보 예술가인 엑토르 기마르(1867~1942)에 의해 디자인됐다. 기마르는 철제와 유리등의 재료로 곡선형 디자인을 도입해 환상적이며 생동감 있는 이미지를 그려냈으며, 기마르는 이를“날개를 편 잠자리 같은 모습”이라고 설명했다.영국의 매킨토시, 벨기에의 반 디 벨데와 오르타, 엑토르 기마르,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등이 대표적인 예술가이다. 그러나 1910년경부터 건축, 공예계에서 기능과 사회성을 보다 중요시하는 풍조가 강해지면서 아르누보는 소멸해갔다.

 

*사이키델릭

줄여서 사이키라고도 한다.

그리스어로‘정신’이라는 뜻인‘psyche’와‘눈으로 보이는’또는 ‘분명한’이라는 뜻의‘d'elsos’를 결합시킨 조어로 LSD 등의 환각제를 복용한 뒤 생기는 일시적이고 강렬한 환각적 도취상태 또는 감각체험을 말하며 그런 상태나 체험을 재현한 그림이나 극채색 포스터, 복장, 음악 등을 가리킨다. 회화에서 비롯된 이러한 현상은 사진, 영화, 음악 등에까지 확대되어 유행을 일으키고 있다. 1960년대에 주로 히피들이나 그들의 주의에 찬동하는 예술가·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일종의 마약문화이다.

 

*옵아트

옵아트는 팝아트의 상업주의와 지나친 상징성에 대한 반동적 성격으로 탄생되었다. 옵아트라는 용어는 1965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전시회‘감응하는 눈(The Responsive Eye)’ 이후 타임지에 처음 쓰였다. 이 전시회 출품작들은 평행선이나 바둑판 무늬, 동심원 같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형태의 화면을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명도가 같은 보색을 병렬시켜 색채의 긴장상태를 유발했다. 그 결과 관람자는 그림이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고 한 부분을 오래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옵아트의 한 작가는“색과 형의 정적인 힘을 극적인 것으로 변화시켰고 동적인 심리반응을 통해 눈의 활성화를 도모”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고의 세계와는 거의 관련이 없고 오로지 시각의 착각을 유도하여 수수께끼를 즐기는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옵아트의 시조는 몬드리안으로 볼 수 있으나 옵아트의 발전을 이룩한 사람은 빅토르 버서레이(Victor Vasarely)이다. 그의 대작 <직녀성>은 사각형을 형성하는 선을 구부러뜨려 거대한 서양식 장기판과도 같다. 그러나 선의 구부러뜨림은 그림 전체와 관련하여 아주 정교하게 계산되어 있고 각각의 사각형은 수축과 팽창의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그 크기를 조절하여 가장 큰 사각형은 가장 작은 사각형의 10배가 넘는다. 또 조제프 알버스(Josef Albers)는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 사이의 미묘한 색채관계에 기초를 둔 작품을 발표했다. 옵아트는 구성 주의적 추상미술과는 달리 사상이나 정서와는 무관하게 원근법상의 착시나 색채의 장력을 통하여 순수한 시각상의 효과를 추구한다. 그리고 빛·색·형태를 통하여 3차원적인 다이나믹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나치게 지적이고 조직적이며 차가운 느낌을 준다. 때문에 옵아트는 인문과학보다는 자연과학에 더 가까운 예술이다. 옵아트는 당시 디자인계나 패션계에 영향을 끼쳤으나 사고와 정서를 배제한 계산된 예술로서 일반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팝아트

1950년대에 영국에서 일어나 60년대 이후 미국에서 확산된 현대미술의 조류로 일명 뉴 리얼리즘이라고 불리며 포스터, 만화, 통조림, 전기제품, 자동차 등 대량소비시대의 기성품에 포위된 환경을 묘사한다. 이러한 몰개성적·상업적인 사물에 파묻힌 현실을 마치 즐거이 받아들이고 있는 듯한 화면이 풍자와는 어느 면에서 다른 중립적인 공허감을 은근히 나타낸다. R. 리히텐슈타인, C. 올덴버그, J. 로젠퀴스트 등이 미국 팝 아트의 대표적 인물이다.

참고문헌 및 사이트

디자인하우스 ㅣ 줄리 리버맨 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

                 

네이버 지식검색

http://blog.naver.com/luvhasu/

http://blog.naver.com/espoir/

http://blog.naver.com/sugoiyo.do/http://cgi.chol.com/~color30/




독자 한마디

의견쓰기
이 름 E-mail
제 목



프린트하기 기사메일보내기 독자한마디


이전으로
헤드라인
2017,7,16 주 창세기 13:10 무엇을 바라보십니까?
2017,7,30주 딤전6:7-10 돈
2017, 7, 30 주 예수 안에 있는 생명으로 (요일5:5-12)
2017,7,16주 시편19편12-14 듣고
2017,7,23 주 디모데전서1장12-17절 긍휼함을 입어 능하게 하신 예수
2017,7,30 주 히브리서 2:10-18 이사치사(以死治死
2017,7,23,주 갈 5:22-23 성령의 열매-오래참음
2017,7,16,주 창세기 25장 27-34절 장자의 명분
2017,7,30 주 열왕기상 3장16-28 '솔로몬의 재판에 담긴 세가지
2017-07-30 조용기 목사 하나님, 나의 하나님 사 40:28~31
2017,7,30주 -갈라디아서 6:15-17 그 흔적이 있습니까?
2017,7,30주 이재훈목사 - 이스라엘아 ! 너는 행복하다 ( 신 33 : 26 ~ 29 )
2017,7,2 주 봄부터 준비해야 할 것 - 오정현 목사
20170730 포도원의 굼벵이(이사야 27장 2절~6절) 포도원교회 김문훈목사
2017-07-30 / 구원 받은 두 사람이 베푸는 잔치 / 김삼환목사 / 마 18:21
 | Home | 사이트구조 | 내용검색 | 전체내용보기 | 내용올리기 |
경남 하동군 금남면 덕천리 1431-5 (전화055-883-4843)   Contact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