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의 지배체제는 씨족제를 기반으로 정치적으로는 봉건제를 사회적으로는 종법질서체제 위에서 발전되어 나갔다. 하지만 서주시대 중기 이후(기원전841)에 내외의 모순이 격화되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봉건체제가 붕괴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즉 9대 이왕 대에 이르러 지방의 제후가 주왕실에 대해 조공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서로 공벌을 일삼았다. 이미 왕실에서는 이를 제어할 만한 힘도 가지지 못했을 뿐더러 제후들이 궁정의 조회에 나왔을 때 주왕은 앉아서 제후를 맞이하지 못할 정도로 왕권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었다.이와 함께 이민족과의 분쟁이 격화되어 소왕대의 초민족에 대한 남방정벌과 목왕의 서방정벌을 통한 서북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대외원정이었으나 실패하고 서북방에서의 융적의 침략이 위수 중하류로 계속되면서 장기간에 걸친 전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내외의 문제는 다음 여왕때에는 더욱 심각하였으며, 여왕의 포악한 정치와 남방 초국에 대한 빈번한 원정으로 인한 국력고갈을 농민의 착취와 영주가 소유하던 산림천택의 이권을 빼앗아 왕실소유로 하면서 귀족과 소영주의 반발로 수도에서 국인들의 반란이 발생하였다.(기원전841) 이 반란으로 공화행정이 발생하였다. 즉 여왕의 도주로 인해 조정이 국왕이 없이 제후의 공동관리로 14년간 계속되었다. 이후 공화행정은 여왕의 사후 그 아들인 선왕대에 다시 한번 국력을 중흥시켰으나 선왕대의 빈번한 대외원정으로 인해 농촌의 피폐와 소영주와 하급귀족도 대영주의 착취로 인한 지배계층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선왕의 뒤를 이은 유왕이 즉위 2년만에 관중의 대지진과 실정 그리고 신후와 태자의구의 폐위와 애첩 포사를 왕후로 삼고 그 아들 백복을 태자로 삼는 문제로 인해 기원전 771년 정나라와 연합하여 북방의 견융이 호경을 공격 유왕의 살해되었고, 그 뒤를 이은 의구가 평왕이 되었지만 견융의 침입으로 호경이 파괴되어 낙읍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서주시대는 멸망하고 동주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곧 춘추전국시대의 서막을 알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