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단락(19~27절)은 안식일 준수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단락은 예레미야가 조건적인 설교를 행한 것으로 소개한다. 예레미야가 설교를 행한 장소로 언급된 “유다 왕들의 출입하는 평민의 문”이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지 단정지을 수는 없다(19절). 그러나 이 설교가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행한 것으로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 메시지는 예루살렘 지도층뿐만 아니라 모든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적용되어야 함을 알려 주고 있다.
예레미야는 안식일에 일을 중단하고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설교한다(21~22절). 그는 이러한 말씀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미 알려 주었던 말씀임을 상기시킨다(참조. 출 20:8~10; 신 5:12~14). 그러나 조상들은 이 안식일 계명을 준수하지 않았다(23절). 24~27절에서 예레미야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조건적인 설교를 한다. 이 설교는 안식일 준수에 대하여 불순종하면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27절), 그 반대로 순종하면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24~26절). 이 단락은 예레미야가 심판만 선포하지 않았으며, 멸망을 원하지도 않았다는 16절과 관련하여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 앞선 탄원단락(12~18절)과 연이어 나온 것 같다.
예레미야의 이 메시지에 따르면, 모든 것이 안식일에 달려 있다. 안식일을 준수하면 정치적인 상황이 안정된다: “다윗의 위에 앉은 왕들과 방백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영히 있을 것이며”(25절). 또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의 관계를 이어 주는 예배가 그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사람들이 번제와 희생과 소제와 유향과 감사의 희생을 가지고 야웨의 집으로 오려니”(26절).
다시 말해서 정치적인 삶의 안정성(25절)과 예배의 효력발생(26절)은 안식일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능력을 신뢰하는 가장 극적인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물을 불신하는 것이다. 따라서 안식일은 신앙공동체를 이루는 특징적인 마크이다.
여기서 안식일은 회복된 예루살렘을 간절히 기대하는 희망의 날이었다. 그것은 과거의 영광과 활기의 회복을 기대하는 날이었다. 즉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영광스러운 도시요, 과거처럼 다시 순례의 중심지가 되도록 하시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믿음과 관련된 미래의 희망의 상징이었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 준수 자체가 회복의 희망을 미리 맛보고 기리는 축제의 시간이 되었다.
또다른 측면에서, 안식일을 준수하는 행위는 하나님께 복종을 함으로 자신의 생명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주인이신 하나님께 되돌리지 않는다면,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전 시스템은 붕괴될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 7일째마다 자신의 자율성을 포기하고,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확인한다.” 안식일은 유다 백성들에게 널리 퍼진 파괴적인 자기 의존성(self-reliance)에 중지를 요구한다. 자기 의존성은 유다 백성을 유혹한 심각한 병리(pathology)였다. 안식일을 충실히 지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주권에 예속시킴으로써 자기 의존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안식일의 새로운 의미를 배운다. 안식일은 회복의 희망을 미리 맛보는 축제의 시간이요, 주기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주인에게 되돌림으로써 자기 중심성(self-centeredness)을 포기하는 자기 성찰의 시간이다. 오늘날 드려지는 매 주일의 주일성수도 이러한 안식일의 새 의미를 되살려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미리 맛보는 축제의 날이요, 자신의 삶을 성령으로 세척하는 엄숙한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