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상황이라도 다르게 이해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것은 상황을 맞는 사람이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컵에 물이 반 정도 들어 있는 것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물이 반이나 남았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다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의식의 차이가 이만큼 무섭다.
그런데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목적이다. 목적이 사람의 의식을 형성시킨다. 어떤 목적을 설정하게 되면 사람의 의식은 꾸준히 그쪽을 향하여 작용한다. 그래서 결국은 지향하는 목적으로 말미암아 의식이 형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은 절대로 중립적일 수가 없다. 어쨌든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목적이 다르면 같은 상황도 다르게 이해된다는 것이다.
영적인 시각에서 보면, 목적에는 신앙적인 것과 불신적인 것밖에는 없다. 신앙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은 신앙적인 의식을 가지고, 불신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은 불신적인 의식을 가진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신자들은 자주 신앙적인 목적보다는 불신적인 목적을 가진다. 그래서 그들의 의식은 불신적이 되고 상황을 불신적인 안목으로 바라보게 된다.
설교자의 사명 가운데 하나는 청중의 의식을, 다르게 말하자면 의식을 결정하는 목적을 공격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청중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의식으로, 어떤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보는지 비판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설교자는 신자들을 세상적인 목적에서 영적인 목적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이것을 계도적 설교라고 부를 수 있다.
(월간프리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