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하르트 라가츠의 종교사회주의
2006-09-02 04:25:29 read : 3591
레온하르트 라가츠의 종교사회주의
라가츠(Leonhard Ragaz)는 1868년 7월 28일에 스위스의 산간 마을 타민스(Tamins)에서 가난한 소작 농가의 8 자녀들 중의 4 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가사를 돕기 위하여 힘든 노동을 해야 했는데, 이 때에 그는 부락 공동체의 협동조합 운동에서 원초적인 사회주의의 모습을 터득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신학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은 오로지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지만, 바젤, 예나, 베를린을 거쳐 다시 바젤에서 공부를 마친 후에 그는 결국 21세의 나이로 목사가 되었다. 그의 첫 목회지였던 하이젠베르크의 플레르렌 산지에서 그는 성서를 깊이 연구했고, 철학을 깊이 탐독했다. 특히 헤겔(Hegel)의 철학은 그의 사고가 역사철학적 범신론의 성격을 갖도록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목사로서의 자부심을 누리지 못하였다. 실천적인 일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 동료목사들의 무관심과 천박성은 그를 우울증에 빠뜨렸으며, 설교는 생명력을 잃었다.
그래서 그는 24세에 교회를 떠나 쿠르(Chur) 시의 김나지움의 교사가 되어 언어와 종교를 가르쳤다. 그렇지만 2년 후에 그는 다시 쿠르시 교회의 목사로 부름 받아 7년 간(1895 - 1902년) 봉사했으며, 1902년에는 바젤 대성당의 목사로 부름 받았다. 그리고 그는 1908년에 취리히 대학의 조직신학 및 실천신학의 교수로 초빙되어 1921년까지 가르쳤다.
그는 1909년과 1911년에 두 차례 받 볼(Bad Boll)의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와의 만남의 경험은 그에게 일평생 동안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첫 방문 때에 그는 멀리서 다가오는 블룸하르트가 일 순간 예수의 모습으로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라가츠는 1921년에 53세의 나이에 교수로서의 활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자발적으로 교수직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는 곧 바로 노동자 교육 사업에 헌신하게 되었는데, 특히 그는 자신이 설립한 노동자 훈련원 \'가르텐호프\'(Gartenhof)에서 일평생 노동자 교육에 헌신했다.
그는 수많은 강연, 저술(주기도문,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 - 예수의 사회적 복음, 예수의 산상설교, 성서의 하나님의 나라 등), 사회운동(노동운동, 반전운동, 반나치스 운동, 평화운동, 사회교육 등)을 통하여 스위스의 울타리를 넘어 유럽 전역에 많은 정신적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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