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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홀드 니버 연구 : 기독교교육적 의의를 중심으로
2006-09-02 04:24:09   read : 3537

라인홀드 니버 연구 : 기독교교육적 의의를 중심으로


1. 서론


1) 라인홀드 니버의 위치


라인홀드 니버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신학자들 중의 하나였다. 그가 특히 공헌한 점은 신학과 사회윤리 사이의 경게에 관한 쟁점들을 강조한 것이었다. 1920년 대에 풍미하던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한 그의 비평은 미국 프로테스탄트 교회들 내부의 지적 풍토를 크게 쇄신시켜 놓았다. 아마도 그는 1920년대 초부터 1950년대 초까지 대학 채플의 가장 인기있는 설교자였을 것이다(cf. 기독교대백과, 3권, p.780). 그의 윤리는 기독교 현실주의이다. 그는 '위대한 정치철학자'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니버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역사 중심의 종교이다. 니버가 이해하는 바에 의하면, 기독교는 권위주의적 종교가 아니다. 그의 인간관은 독특하다. 학문적인 의미에서 볼때 그는 전문적인 학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해박한 지식과 독창적이고 에리한 사상은 그에게 많은 논문들과 기타 학술적인 저술들의 주제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방면의 학문과 사상 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쳤다.


2) 생애


니버는 1892년 6월 21일 Missouri 주(州)의 Wright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Gustav Niebuhr였다. 니버의 부친은 '북아메리카 복음주의 교회 Synod'의 목사였다. 니버는 어렸을 때 이미 그의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기를 결심하였다. 그는 일리노이주의 Elmhurst대학(1910)과 St.Louis에 있는 Eden 신학교(1913)를 졸업하였고, 예일대학교에서 그의 신학수업을 마쳤다. Yale대학에서 그는 신학사(1914)와 문학석사(1915)를 취득했다. 니버는 1915년 복음주의 교회회의에서 목사로 안수받았다. 니버는 1915년 부터 1928년까지 디트로이트주의 벧엘복음주의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했다. 이 때의 경험은 중요하였다. 작품들과 공공의 생활에서 그는 가공할만한 논쟁가였지만 개인적인 인간관계는 따뜻하고 친절하였다. 이것은 그의 제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히 더 그랬다. 또한 그는 결코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였다. 즉 계급투쟁이나 혁명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2차 세게대전이 시작되자 그는 미국의 참전을 지지하였다. 그는 1964년 에 대통령으로부터 자유훈장을 받았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3) 연구의 목적과 범위


이미 언급한대로 니버의 윤리는 “기독교 현실주의”의 윤리이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적 인간관은 독특하다. 그의 신학에서 죄에 대한 교리는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한다. 본 소고는 니버의 인간관의 '기독교교육적' 의의를 찾는데 그 목적이 있다. 연구범위는 주로 니버의 저서에 국한하였 다.


2. 라인홀드 니버의 사상의 개요


1. 인간관


니버에 의하면 악은 인간 본성 안에 뿌리 내리고 있으며, 그것은 단지 사회적 문제가 아니다. 사회내의 갈등은 인간 내부의 갈등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인간 내부의 갈등의 원천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본성의 이원성(duality)이다. 인간은 그의 힘(power)을 통하여 그의 안전을 증대시키려고 노력한다. 힘을 통한 안전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결국 더 강렬하게 한다. 역사 안에서의 힘은 인간에게 모순적 결과들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인간의 안전을 증대시키고 동시에 감소시킨다(예. 현대의학과 핵 전쟁의 가능성).



악의 뿌리는 인간이 힘을 잘못 해석하고 오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약함'은 부분적으로 '유한성'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원죄는 성경적, 역사적 범주가 아니다. 그는 안간 상황을 무시하고 기독론을 세우지 않는다. 니버에 의하면, 개인은 공동체를 요구한다. 인간은 그의 사회조직 안에서 자유를 추구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자유하기 때문이다. 인간관은 니버의 사상에서 근본적인 것이다. 인간은 모순과 긴장관계에 항상 놓여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연과 정신이라는 두 개의 구성 부분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피조성에 대한 니버의 해석은 창조론적이기 보다는 존재론적이다. 니버에 의하면‘교만‘은 근본적인 죄이다. 교만의 죄에는 네 가지가 있다. 힘의 교만과 지식의 교만과 도덕적 교만과 정신적 교만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의 계시로서 진리를 보여주면서 인간의 모든 자기 주장과 교만을 산산주각나게 한다.


2. 구원관


니버의 구원관은 한마디로 '정신적'차원의 강조를 뜻한다. 이 정신적 차원을 가르친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께서는 인간 역사에서 실현될 수 없던 가치관을 강조함으로써 자연과 이성을 초월하는 정신의 차원과 자아의 자유를 가르쳤다. 그에 의하면 산상설교에 나타난 복음은‘불가능한 가능성‘이지 도덕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그에 의하면, 자유주의는 예수의 교훈들로부터 실존적 긴장을 제거해 버렸다. 그리스도의 독특성은 특별히 십자가 가운데서 발견된다. 십자가는 인간상황의 악에 대해 최종적인 설명과 해답을 주는 완전(perfection)을 상징하고 있다. 십자가는 시간과 영원, 역사와 초역사의 교차점에 놓여있는 프리즘(prism)과 같다. 그것은 인간 역사 속에 빛을 던져주고, 또 영원을 향해 빛을 던진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어떤 것을 계시해 준다. 십자가에서의 '완전'의 특별한 내용은 '희생적 사랑'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본 이 희생적 사랑은 '불가능성'과 '어리석음'의 국면을 모두 지니고 있다. 십자가상에서 그 자아는 자신을 보존하려고 힘을 행사하지 않았다. 이기심의 죄가 없는 능력(power)이 있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역사에 대한 그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진노와 자비(용서)의 이중적 관계를 갖고 계시다. 심판은 진리의 일부분이다. 완전한 진리는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이다. 은총(Grace)은 인간 위에 미치는 하나님의 권능이다. 은총은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하심을 의미한다. 이것으로써 하나님은 인간이 완성치 못한 것들을 완성하시며, 인간의 모든 업적 속에 들어있는 죄많은 요소들을 극복하시는 것이다. 니버는 갈라디어서 2:20을 설명함으로써 신자와 은혜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새 생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은‘new selfhood‘의 경험이기도 하다. 이 자아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사랑의 방향으로서 타인 안에서 그리고 타인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니버에 의하면, 자아의 재건의 가능성은 자신을 초월하는데서 오는 권능과 은총의 결과이다.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는 소유물이 아니고 희망이요, 완전은 실재가 아니고 의도(intention)이다.


3. 역사관


니버의 역사관은 교리적으로는 그이 종말관과 관련이 있고 일반적으로는 문화관과 관련이 있다.


인생과 역사 속에서는 만사가 다 종말을 향하여 움직인다. 인간은 자연과 유한에 복종하는 까닭에 이 종말(end)은 그 존재가 중지하는 한 점이다. 그것은 종결(finis)이다. 또한 종말은 인생의 목적이요 목표이다. 그것은 완결(telos)이다. 종말(end)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finis와 telos). 역사에서 모든 것은 그 본질적 성격의 구현과 죽음을 향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종결로서의‘end‘는 완결로서의 종말(end)에 대한 위협이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상황의 이러한 면을 잘 이해한다.



니버에 의하면,‘예수 재림의 상징은 문자 그대로 여겨져도 안되고 중요하지 않다고 각하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신학은 깊이 분석해 보면 역사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음이 나타날 것이다.‘ '최후의 심판'에 대해 니버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이 심판은 죄를 심판하는 것이지 유한성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역사적 현실은 참으로 애매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는 선과 악 사이의 절대적 차이는 지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악에 대한 최종적 심판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회피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불완전을 완성하고, 우리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자비를 신앙이 깨닫기 전에 우선 신앙은 하나님의 심판에 부딪쳐야 한다.‘ 니버는 그의 저서‘신앙과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역사의 드라마는 시간이라는 무대 위에서 연출된다. 모든 역사적 활동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나가는 냉혹한 전진운동을 배경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시간적 사건들의 이 흐름은 역사라는 것의 신비와 의미를 초월하며, 또 그 배후에 있는 신비다.‘ 니버에 따르면,‘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시간이거나, 역사이거나 간에 설명없이도 알 수 있는 것으로는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는 역사에다 의미를 부여하며, 천지창조의 신비는 시간에다 의미를 부여한다.‘



‘처음으로 시간에 대한 고전적 개념을 깨뜨리는 것은 근대과학이기 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신앙이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는 그 마지막과 아울러 새로운 시작을 성취하였다고 하는 놀랄만한 주장을 제시한다. 그리스도가 역사의 마지막이라고 하는 단언은 그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 속에 인간의 역사적 존재의 의미가 성취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니버에 따르면, 역사와 문화의 진행을‘진보‘와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역사와 문화의 진행이 보다 고도의 혼란과 위험성을 내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 신앙은 역사에서의 악의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4. 윤리관


‘니버는 개인윤리와 사회윤리 간에 항상 차이가 있고 갈등이 있음을 지적한다. 사회윤리는 정의를 목표로 하나 개인윤리는 그 목표가 사랑이다.‘ 그의 윤리는‘기독교 현실주의(Christian Realism)‘의 윤리이다. 그에 따르면, 예수의 윤리는‘정치와 경제와의 관련성에 대하여는, 또한 가장 긴밀한 사회적 관계에 존재하거나 존재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권력균형(balances of power)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역사 속에 있는 가능성이다. 왜냐하면 그 순수한 사랑의 높이는 모든 인간의 삶 속에 있는 사랑의 경험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늘 역사 속에서는 불가능성이다.‘ 니버에 따르면,‘예수에 의해서 형성된 윤리적 요구는 인간의 현재적인 실존을 통해서는 성취되기가 불가능하다.‘ 니버에 따르면,‘참으로 심오한 종교의 단점 중의 하나는 인간정신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통찰력이 종종 인간과너계 속의 정의(justice)와 공평의 직접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정치학과 경제학의 문제는 정의(justice)의 문제다... 불행하게도 정치학과 경제학의 문제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관계는 특별히 행운적이거나 또는 고무적인 것은 아니었다.‘ 니버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정치적, 사회적 윤리에 있어서 통찰력과 건설적인 지침의 원천이 되기 보다는 혼동의 원천이 되었던 적이 더 많았다.‘ 그에 따르면,‘자유주의적(liberal) 기독교는 세계 속에서 사랑의 이상이 승리하리라는 희망을 주장하기 위하여 사실상 악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단순한 방편을 채택하였다.‘ 한편,‘정통주의 기독교는 사랑의 이상과 정의의 원리들 사이에 있는 역동적 관계성을 파괴했다.‘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가능성임과 동시에 불가능성으로 남는다.‘ 그에 의하면,‘사랑이라는 이상은 의지(will)에 호소하는 모든 계명 중에서도 첫째가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 속에 있는 반항적 요소들과 저항작용을 하는 조직화된 전(全)인격이다.‘ ‘사랑하라고 명령함은 하나의 paradox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명령되거나 요청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용서로서의 사랑은 도덕적인 성취 가운데 가장 어렵고도 불가능한 것이다.‘‘용서의 교리란 자기자신의 악을 알기 때문에 타인의 악에 대해서 아무런 징벌을 가하지 않고 감수해야만 된다는 요구이다.‘ 초기의 저서에서 니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덕적 문제가 개인들의 관계에서 부터 집단들의 관계에로 옮아가면 갈수록 사회적 내적 충동에 대해서 이기적 충동이 우세해진다. 그러므로 아무런 내적 억제도 그 충동들을 완전히 통제할 만큼 강력하지 못하다. 따라서 사회적 통제가 시도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투쟁없이는 확립될 수 없다... 종교적 도덕과 정치적 도덕 사이의 모순을 깊이 생각하면, 종교적 이상이 그 순수한 형태에 있어서는 사회정의의 문제와 하등관계가 없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 좋겠다.‘



니버의 윤리사상은 이론적으로 매우 짜임새가 있고 예리한 판단과 통찰들을 내포한다. 그러나 그의 윤리는 유감스럽게도 실존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 또한 니버는 사랑과 정의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에 대하여 언급이 없다. 니버는 실존주의 사상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의 윤리적 가치관에 강력한 기독교적 목적론을 부여하지 못했다. ‘니버는 디트로이트에서 받은 윤리적 충격파를 성경계시에 입각해 기독교 윤리적 대답으로 물리치려고 하지 않고 키엘케골의 실존주의 사상을 동원하고 그 자신의 고안물인 기독교 현실주의 윤리라는 것을 가지고 그것에 대처하였다.‘



John C.Bennett는‘라인홀드 니이버의 공헌‘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내리고 있다 :‘니이버의 가장 현저한 공헌, 즉 사회문제와 정치 문제에 적용된 인간과 역사에 대한 그의 기독교적 현실주의는 오늘날 매우 필요하다... 니이버의 기독교적 현실주의는 오늘 일어나고 있는 충돌의 모든 측면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들 자신에게 적용하여야만 한다는 것이 바로 그러한 현실주의가 가지는 기독교적 의미의 일부이다.‘


3. 인간관의 교육적 의의


1. 인간관의 중요성


인간관(혹은 학새에 관한 견해)은 교사의 행위와 태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스도인 교사는 성경에서 가르쳐 주는 인간관을 그의 인간관으로 삼아야 한다. 진보적 종교교육 학파는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 이 학파는 인간을‘창조와 사회화의 가능성을 지닌 낙관적인 존재‘로 본다. 진보적 종교교육 학파의 지도자였던 조지 앨버트 코우(George Albert Coe, 1862-1951)는 인간을 '생성하는 가능적 인격'으로 보았다. Coe는 전적 타락이라는 개념을 거부하였다. Coe는 아동의 위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에 의하면 아동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도 아니고 또 완성된 존재도 아니라 생성과정에 잇는 가능적 인격이다.


헤리슨 엘리옷(Harrison S.Elliott)은 Coe를 계승하여 진보적 종교교육을 최종적으로 그리고 가장 강한 소리로 변호하였던 수제자였다. 엘리옷이 유니온 신학교 강의실에서 진보적 종교교육론을 강하게 변호하고 있을 당시, 같은 학교의 동료였던 Reinhold Niebuhr교수는 진보학파와는 전적으로 다른 신학사상을 강의하고 있었다. 니버는 특별히 비도덕적인 인간사회를 진보의 장(場)으로 보았던 낙관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2. 진보적 종교교육학파와 니버의 도전


낙관주의를 비판한 니버의 도전은 1930-40년의 화려했던 진보적 종교교육 학파의 전통과 근거를 뿌리에서 부터 흔들기 시작한 새로운 도전이었다.


엘리옷은 당시 선풍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던 신정통주의 신학이 제시하는 인간관(특히 니버의 인간관)을 용납할 수 없었다. 니버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바 되었으나 인간은 타락과 함께 전적으로 죄인이 되엇다는 사실을 강하게 내세우고 있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기중심적 충동 혹은 교만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교만이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간의 반항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본래의 관계를 파괴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은 교육이나 역사의 진보(progress)에 의하여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엘리옷은 니버의 이러한 비관적 인간론은 종교교육을 불가능하도록 만들어 버린다고 본다. 엘리옷에 있어서 이러한 비관적 인간이해는 루터나 칼빈에 의해 진행된 고전적 개신교회가 범하여 온 치명적 약점이라고 본다. 이러한 이유에서 엘리옷은 신정통주의 신학을 받아들일수 없다고 보았으며, 또한 종교교육에 불필요한 신학이라고 보았다. 엘리옷은 죄를 어떻게 보았는가? 그에 의하면 죄란, 인간의 책임이기 전에 사회와 환경이 만들어 놓은 희생이다.


니버는 진보학파들의 낙관주의는 두가지 이유에서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① 첫째로 그들이 믿는 인간의 이성과 지혜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② 둘째로 이 사회의 밑바닥에는 충동의 힘이 도사리고 있어, 제한된 이성으로는 이 충동을 극복하기 보다는 그 충동의 종이 되어 버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3. 니버의 인간관의 기독교 교육적 의의


니버는 이간의 윤리적인 정황을 옳게 보려면 인간 본성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에 근거해야 한다고 본다. 어떤 사상가가 갖는 인간관이 그의 사상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규정할 때가 적지 않다. Reinhold Niebuhr의 경우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니버의 가장 독특한 개념은 원죄(原罪)에 대한 교리이다. 이것은 인간이 아담의 죄를 이어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자신에 대한 관심을 다 주장하는 죄 가운데로 자연히 또는 불가피하게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완전한 지식, 완전한 자유,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획득하는 것은 그보다 못한 것이다.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생의 의의나 삶의 목적 등을 가질 필요성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그가 발견한 모든 의의는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이중성은 불안을 가져온다. 니버에 의하면, 인간내부의 갈등의 원천은 인간본성의 이원성(이중성, duality)이다. 인간은 항상 모순과 긴장관계에 놓여있는 존재이다.


그러면 니버의 인간관의 기독교 교육적 의의는 무엇인가? 개혁주의 기독교 교육의 관점에서 볼 때 니버의 인간관에는 몇가지 문제점이 있다. ① 니버는 인간의 죄악을 강조하나, 그의 죄 개념은 철학적이다. 그가 말하는 원죄는 성경적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인간관은 성경에 입각한 것이라기 보다 실존주의 철학사상에 입각하여 전개된 것이다. ② 니버에 의하면, 피조성을 거부하려는 것은 죄이다. 죄는 단지 '나쁜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자기 중심이 되려는 '왜곡'이다. 그러나 소요리문답의 정의에 의하면,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혹 어기는 것'이다. 원죄이든 사실상 짓는 죄이든 모든 죄는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에 대한 위반이다. ③ 인간존재에 대한 니버의 분석은 '심오'하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본서을 철학적이며 존재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해석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태어난다. 그 누구도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받아실만한 영적 선을 행할 수가 없다. 개혁주의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성경적 인간론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관은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좌우한다. 비성경적 인간관은 그릇된 교육철학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니버의 인간이해는 - 개혁주의 기독교 교육의 입장에서 볼 때 - 그 문제점이 명백하게 지적되어야 한다.


4. 맺는 말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니버의 통찰력은 뛰어나지만 그의 인간관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인간의 피조성에 대한 니버의 해석은 존재론적이다. 그의 인간관은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는 역사적 기독교의 인간관을 포기한 것이다. 비록 그의 진지함과 창의성은 인정해 줄 수 있지만, 개혁주의 기독교 교육의 기초로서 그의 인간이해를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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