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역사의식;물량주의를 중심으로 -
최 재 건 박사 (연세대학교 교수 )
들어가는 말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과 19세기에 시작된 한국교회는 시ㆍ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나,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enda)는 종교개혁의 이상과 의의에 비추어 한국교회의 모습을 성찰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통용되는 ‘종교개혁’이란 말은 ‘The Reformation’이란 단어를 일본인들이 번역한 것이다. Reformation이란 보통 명사에 정관사 the가 붙은 이 단어는 16세기에 있었던 ‘그 개혁’, 곧 ‘교회의 개혁’을 가리킨다. 따라서 ‘종교개혁’보다 ‘교회개혁’이라는 번역이 더 본래적인 의미를 살리는 것이다. 한국 장로교 신학교 사상 최초의 교회사 교수였던 왕길지(E. Engel)선교사도 같은 뜻에서 ‘종교개혁사’를 ‘교회갱정사’(敎會更正史)라고 지칭했었다. 한편『기독교사상』(1997년 10월호)에서는 ‘종교개혁’을 “루터의 종교개혁”(Luther's Religious Reformation)이라고 영역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The Reformation’은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그 당시 서구의 종교는 오직 기독교였기에 ‘종교’라는 말을 덧붙여도 당연히 교회개혁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본래적인 교회개혁의 영역을 벗어나 서구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교회 문제에만 집중하자면, 그 일은 베드로적인 교회에서 바울적인 교회에로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곧 교회 외적인 것 중심에서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의 전환이고 개혁이었다. 로마가톨릭 측에서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교회의 분열운동으로 보는 견해가 오랫동안 주류를 이루어왔다. 그러나 반종교개혁(The Counter Reformation) 운동이 일어나 자체개혁을 시도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교회가 부패했었음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었다 할 것이다.
종교개혁의 의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고 하겠다. 하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지만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그런고로 부패와 타락의 가능성이 있어, 실제로 종교개혁 이후로 개혁된 교회 내에서도 많은 실수가 발생했다. 이로 볼 때 “교회는 개혁되었으므로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테오도어 베자(Theodore Beza)의 말은 지당한 표현이다. 교회는 부단히 자기 개혁을 시도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한국교회가 오늘날 개혁해야 할 점을 16세기 종교개혁에 비추어 탐사하는 것이 본 소론의 의도이다. 특별히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한 면죄부 사건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의 물량주의의 폐해를 돌아보고 개혁의 길을 찾고자 한다.
1. 종교개혁의 발발과 배금주의
1517년 이전에도 위틀리프(Wycliff)나 존 후스(John Hus) 등의 개혁 시도가 있었으나, 그 개혁운동은 널리 확산되지 못하고 종교개혁의 여명을 밝히는 역할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던 중 테젤(Tezel)의 면죄부(indulgences) 판매에 대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공격이 종교개혁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성직매매 현상(Simonism)도 또한 당시에 크게 문제시 되었다. 정화운동의 차원에서 성직매매 방지법, 성직자 독신제도, 수도원 운동 등이 시행되고 있었으나 중세교회를 휩쓴 배금주의(拜金主義)의 물결을 거스리지는 못하였다. 이런 현상에 대해 위클리프는 잘 낫지 않고 오래 지속된다는 점에서 영적나병과 같다고 하면서 극력 반대하였다. 루터도 성령의 은사와 그리스도의 피는 매매될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루터는 그 당시 교회가 가르치는 잘못된 점들에 대해 학문적으로 토론을 가질 계획으로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회 정문에 95개 항의 논제를 내 걸었다. 처음부터 개혁운동을 일으킬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그 일은 세계 역사에 획을 긋는 교회개혁 운동의 시발이 되어 4주 만에 온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그가 내건 95개조에서 면죄부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주요 항목들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27. 연보궤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학설을 설교하는 것이다.
#28. 돈이 연보궤 안에서 딸랑 소리를 낼 때 이득과 탐욕이 증가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동시에 성직자의 대도의 응답여부는 하나님의 선한 뜻에만 달려 있는 것이다.
#45. 가난한 사람을 보고도 본체만체 지나쳐버리고(요 3:17) 면죄를 위해서 돈을 바치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이라는 것을 크리스찬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6. 풍부한 재산의 여유를 가지지 못한 자라면 자기 가족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저축할 의무가 있으며(딤전 5:8), 결코 면죄증 때문에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크리스찬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7. 면죄증을 사는 것은 자유로운 일이요 결코 그렇게 하라고 강요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크리스찬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8. 교황은 면죄증을 주는 일에 있어서 가져오는 돈보다도 오히려 자기를 위해 경건한 기도를 드리는 것을 필요로 하고 바란다는 것을 크리스찬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0. 만일 교황이 면죄증 설교자들의 행상 행위를 만나면, 자기 양의 가죽과 살과 뼈로써 성베드로 성당이 세워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것을 불태워 재로 만드는 것을 좋아할 것이라는 것을 크리스찬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1. 어떤 면죄증 설교자들에게 돈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에게 교황은 필요하다면 성 베드로 성당을 팔아서까지라도 그 자신의 재산으로 갚아주려고 (當然之事) 한다는 것을 크리스찬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3. 면죄증 설교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교회에서 아주 잠잠하여지도록 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교황의 적이다.
#54. 설교하는 데 있어서 면죄증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시간 또는 보다 긴 시간을 쓰는 것은 그 말씀에 대하여 부정을 행하는 것이다.
#62. 교회의 참 보호는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의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
#66. 면죄증 ‘보화’는 오늘날에도 그것을 가지고 사람의 재산을 낚는 그물이다.
#83. 또한 이미 구속받은 사람을 위한 기도는 부당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죽은 사람의 장례식이나 기년제(忌年祭)를 계속하는가? 또 무엇 때문에 교황은 그런 목적으로 교회에 바친 기부금을 돌려주지 않으며 혹은 그것(기부금)의 최소를 허락하지 않는가?
#92.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평안도 없는데 “평안”하라고 부르짖는 예언자들은 다 물러가라.
#94. 크리스찬들은 형벌이나 죽음이나 지옥을 통하여서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따르도록 훈계 받아야 한다.
#95. 이같이 하여 크리스찬으로 하여금 위안에 의해서보다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더욱 깊은 신뢰를 가지게 하라(행 14:22).
이 같은 항의가 제기되었던 당시는 매우 종교적인 시대였으며 독일은 더욱 그러하였다고 말해진다. 김명혁,『한국교회의 종교개혁』(서울: 정음출판사, 1983), 8.
종교성이 넘쳐나던 곳에서 루터는 잘못된 신앙생활의 위험성을 염려하였다. 그는 면죄부 판매의 불법성을 비판하면서 그 내면에 있는 교회 당국의 탐욕과 불경건과 구원의 진리에 대한 무지를 질타하였다. 해방 후 한국교회가 내보인 갖가지 문제점들 역시 내적 탐욕과 불경건과 무지가 외적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상기(上記)의 발췌 조항들은 한국교회의 현 상태를 진단하는 시약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95개조의 끝부분인 92-95조는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흐름인 예수를 믿으면 복 받고 잘 된다는 풍조를 경고하고 있다. 루터는 “잘 산다”, “복 받는다”만 “부르짖는 예언자들을 배척하였다. 형벌이나 죽음을 통해서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훈계를 받을 것을 주장하였다. 위안에서보다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감을 알아 고난 속에서 신뢰를 잃지 말도록 권고하였다.
2. 한국교회의 물량주의
1) 물량주의 만연의 원인
해방 후 한국교회는 1990년대 이전까지 성장 일변도로 달려왔다. 1970-80년대의 성장ㆍ발전은 세계교회사상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이런 급성장의 와중에서 여러 잘못된 것들이 부수적으로 교회 안에 끼어들었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 실시되었던 사정 대상자 가운데 약 70%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교회가 안은 문제의 심각성이 능히 증명된다고 하겠다. 루터교 목사로 튀빙겐(Tübingen) 대학에서 종교개혁사를 가르치는 오버만(Oberman) 교수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대해 “종교개혁 직전의 로마가톨릭교회와 같다”는 비판을 했다고 한다. 『신앙계』, 1997년 11월호.
개혁 당시의 면죄부 건에 빗대어 한국교회의 물량주의 경향성을 비판했던 것 같다.
재물 숭배는 예수께서도 문제시 한 바 있었거니와, 사회와 종교를 타락시키는 주범으로서 각 시대마다 부패의 척도를 가늠하게 하는 기본적인 요소였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정치계 경제계뿐만 아니라 교계에도 물신 숭배사상이 휩쓸게 되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산업화의 기치 속에서 교인들도 하나님을 잘 믿으면 축복받아 잘 살게 된다는 것이 교회의 주 흐름이 되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이신칭의’(以信稱義)였으나 한국교회는 ‘이금칭의’(以金稱義)를 신봉한다고 할 정도에 이르렀다. 김광식, “종교개혁에서 본 부흥회”, 『기독교사상』, 1997년 10월호, 27.
한용상은 이런 정신을 “박정희식 유물사관”이라고 비꼬아 지칭하였다. 한용상,『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서울: 에누리, 2001), 67.
박영신은 “경제주의”에의 “교회의 식민지화”라고 단언하였다. 박영신, “한국기독교와 사회의식”, 기독교역사문화연구소 편,『한국의 기독교』(서울: 겹보기, 2001), 119.
그런데 문제는 종교의 힘이 영력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력에 비례한 것에 있다. Glen M. Vernon, Sociology of Religion(NY: McGrow Hill, 1962), 319.
다시 말해서 황금숭배사상이 물량주의로 이어져서 교회에 갖가지 폐해를 일으켜왔다는 사실이다. 현재 서울을 중심으로 한국 대교회가 가진 경제력이 실로 막강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런 여건 속에서 한국교회의 목회 성공여부는 영력이 아니라 예배당의 크기, 교인의 수, 헌금액수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으로 일반화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가 물량주의에 빠져 있다는 한 증거이다. 통계자료를 보면 한국교회가 극복해야 할 가장 심각한 당면과제로서 ‘물량주의’를 지적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고 있다. 1993년 크리스찬 리서치의 “서울 시내 담임목회자 의식구조 조사결과”에서는 물량주의 지적이 66%로 가장 높게 나타나고 있다. 『월간목회』, 1993년 7월호, p. 337. 참고로 이원규가 소개한 1989년의 조사수치에 의하면 일반 사회에서도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28.5%)이 불신풍조(16.4%), 고위층의 부정부패(13.8%), 사치 낭비 풍조(16.1%), 경제적 불평등(16.4%), 지역갈등(3.0%), 공중도덕무시(2.0%) 등 여러 부정적인 사안들을 제치고 단연 수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원규,『한국교회의 현실과 전망』(서울: 성서연구사, 1994), 321.
그러면 이 같은 물량주의의 만연은 어디에서 기인하였는가? 이에 관해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약소민족으로 지내온 역사적 경험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그래서 “가난에 찌들린 한 많은 민족의 원혼이 경제성장이란 마당에 마련된 한풀이 푸닥거리에서 기적적인 힘을 발산하게 된 것”이라고 이해한다. 한용상,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71.
70년대에 유신정부가 보급한 “잘살아보세”란 노래 중의 “우리도 한번”이란 구절이 바로 이런 역사성이 있는 내적 동기를 증거한다. 당시의 정부정책이 국민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에 대해 박영신은 “경제성장을 내세워 물질적 풍요를 약속하는 구원의 설법에 사천만 동포가 ‘자발적으로’ 합의"했다고 표현하였다. 박영신, “한국기독교와 사회의식”, 119.
식민지 시절의 억압, 해방 후 미군정 치하의 혼란, 그리고 전쟁의 공포 속에서 한국인들은 계속 곤궁하였다. 전후 복구가 진행되는 동안 교회는 미군의 구호품, 우유, 의복을 나눠주는 곳이 되었으며, 그 후 자본주의의 향도로서의 역할을 기꺼이 감당하였다. 산업화가 진행되는 동안 기독교계는 보수와 진보의 구별이 없이 근대화 또는 물질적 풍요라는 국가적 비전을 인정하였다. 1988년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기획한 좌담회에서 손학규는 한국기독교가 근대화 수립을 위해 큰 기초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좌담: 한국교회의 성장과 기독교운동의 진단”,『진통하는 한국교회』, 기사연무크1 (서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88), 20-23.
그러나 그 일의 윤리성과 사회적 공헌에 대한 기독교 진영의 평가와 관심사는 엇갈려왔다. 박영신은 교회가 “능률과 효율의 일차성, 경쟁적이며 타산적인 인식 유형과 인간관계, 물량적 사유와 물질적 가치의 우선, 이런 것들이 참다운 ‘사람됨’으로부터 우리를 얼마나 멀리 떨어져 벗어나게 하는가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물음은 전혀 제기하지 않고, 교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기존하는 세상의 질서와 흐름에 맞추어 매끄럽고 부드럽게 ‘적응해’갈 수 있게 하는 그런 생활태도를 교회가 제공해 왔다”고 비판하였다. 박영신, “한국기독교와 사회의식”, 125.
이원규는 1960년 혁명 이후부터 교회가 책임의식을 가지고 사회발전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분화된 흐름을 형성하기 시작하다가 70년대에 보수적인 기독교집단은 정치사회적으로 수구세력으로 남아있었으나, 많은 신도를 확보하면서 사회통합적인 기능을 나타냈으며, 진보적인 기독교 집단은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평등화라는 사회발전의 목표를 달성하는 일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하여 양편 모두에 대해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원규, “한국 기독교의 사회변동적 기능”,『한국사회발전과 기독교의 역할』(서울: 한울, 2000), 40-41;『한국교회 어디로 가고 있나』(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0), 212-224.
그런데 민주화가 성취된 후 보수와 진보는 함께, 사회 이슈 문제에 있어서 그다지 큰 갈등 없이 이런 현상에 대해 백찬홍은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민간정부가 들어서면서 체제전복이 주류를 이루던 민중운동이 채제내운동(시민운동)으로 전환되어갔으며, “현재의 시민운동은 분명히 중간계층의 관심과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80년대부터 계급운동과는 다른 방식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나 합리성을 강조해 왔던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백찬홍, ‘기독교 운동의 현황과 향후 전망“,『한국 기독교 그 어두운 자화상』,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편,『시대와 민중신학』7권 (서울: 다산글방, 2002), 300-301.
, 근대화를 넘어 세계화를 향해 매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시민단체의 보수화 경향도 나타났다. 경제적 번영을 조금씩 만끽함과 함께 자본주의의 병폐인 부패와 쾌락의 증세가 만연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교회가 배금주의(拜金主義)에 취약하게 된 것은 역사적 경험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한국 사회가 전통적으로 지녀온 현세적인 복의 개념 위에 한국교회가 세워진 것에 그 근본 요인이 있었다. 고래의 현세의 복에 대한 개념은 한국교인들로 하여금 ‘기복신앙’ 일변도로 치우쳐가게 하였다. 기복신앙은 경제정의의 문제뿐만 아니라 개인의 인격과 사회성과 역사의식 등 다방면에서 왜곡과 결핍 현상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한완상 편,『한국교회 이대로 좋은가?』(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27-34.
그런 점에서 무속과의 연관성이 특히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기복신앙’이 오직 무교만의 영향으로 생성되었다고 못 박을 수는 없다. 현실복락을 기원하는 데는 유교나 불교가 무교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김연택은 무속신앙에 대표성을 부여한다. 그는 “오늘날 무속 신앙은 유교, 불교 그리고 도교의 혼합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무속신앙이 모든 한국인들의 종교적 전통 중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김연택,『한국종교와 교회성장』(서울: 대한신학대학원 출판부, 1998), 69-70. 역사적으로 사회 저변에서 종교가 혼합되어 온 사실을 감안하면 기복신앙이 무속의 영향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교와 불교 또한 현세적 성향을 농후하게 지녀왔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한국인의 염원인 이 오복(五福)에 ‘부’(富)가 포함된 사실은 자명한 일이다.
상기한 역사적 경험이나 전통적인 현세적 복의 개념을 내적 요인이라고 한다면 선교사들에게서 배운 청교도의 경제관이나 해방 후 해외(특히 미국)에서 유입되어온 배금주의와 세속주의의 풍조는 외적 요인이라 일컬을 수 있다. 이 외적 요인은 물량주의를 자극하여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 목사의 ‘적극적 사고방식’(positive thinking)이 그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TV 복음전도자(Televangelist)들의 화려한 전도행각도 부유한 목회생활(또는 신앙생활)을 그리게 만든 한 모델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초기에 주한 선교사들은 한국교인들에게 청교도의 근면정신을 가르쳤다. 동시에 성수주일하고 십일조를 하면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도 강조하였다. 그럴 때면 십일조 생활을 잘 한 관계로 물질적인 축복을 받아서 십일조를 세는 직원만 37명이나 둘 정도가 되었다는 석유왕 록펠러(Rockfellor) 이야기가 곧잘 예화로 곁들여졌다. 워너메이커(Wanamaker)의 백화점 왕 등극 이야기, 콜게이트(Colgate) 치약회사 사장이 10의 8조 혹은 9조를 했다는 이야기 등도 목회자나 부흥사를 통해 한국교회 강단에서 널리 회자된 예화들 중의 하나였다.
미국 자본주의는 교회와 더불어 발전해왔다. 그러나 미국의 자본주의는 청교도주의의 부단한 견제로 그나마 어느 정도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하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병폐는 부패와 타락(쾌락의 추구)이다. 미국의 교회는 이런 점을 정직, 정의, 공의, 등등의 개념으로 많이 견제하여 금융상의 투명성을 가져왔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거의 동시대에 들어온 한국의 기독교는 세력이 약해 자본주의에 적절한 견제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오히려 세태와 영합한 자본주의의 병폐에 오염되어 물량주의 안으로 더욱 깊이 침몰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2) 교회에 나타난 물량주의의 폐해
그러면 배금주의에서 유래한 물량주의는 구체적으로 한국교회에 어떤 폐해를 가져다주었는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먼저 경제력이 영력의 수위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기능하게 된 사실을 들 수 있다. 헌금으로 들어온 돈이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 불문하고 액수를 많이 한 교인이 신앙이 좋은 교인으로 받아들여져, 대다수의 교회들이 교회직분자, 특히 장로를 피택할 때 신앙보다 헌금의 과다와 사회적 신분 지위를 더욱 고려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또한 사례를 많이 받는 목회자가 유능한 교역자로 대우받는 실정이 되었다. 따라서 무리한 헌금강요, 교회재정의 파행 운용, 목회자의 개인축재 등등 갖가지 오류가 파생되게 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교단 총회장 선출 과정에서 또는 목사를 임직시키는 과정에서 직책수여에 영향을 끼칠 목적으로 돈과 향응과 선물이 오가고 있다는 점이다. cf. 기독교신문 취재팀 편, ‘감투욕심’과 ‘기대심리’ 맞물려 상승작용-과열ㆍ타락 선거풍토-“,『한국교회의 허와 실』Ⅲ (서울: 쿰란출판사, 1993), 84-91.
곧 교권매매 또는 성직매매 현상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소위 국가조찬기도회를 비롯한 각종 교회연합활동을 위해 교계 지도자들이 교회당을 외면하고 굳이 호텔에서 모이는 것도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기 어렵다. 최근 성행하는 해외 선교지 현지방문 여행에서도 단기선교란 명의로 선교관광을 즐긴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운 사례들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물량주의의 대표적인 한 실례는 대교회주의의 유행이다. 시장경제논리가 교회에도 들어와 동양최대 혹은 세계최대의 교회를 지향하게 하고 있다. 대교회가 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오늘날 대교회의 병폐를 지적하는 소리가 만만치 않다. 중세의 부재직(Absenteeism)을 떠올리게 하는 문어발식 지교회 경영도 주요 비판사항들 중의 하나이다. 온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공동체를 이룬다는 관념의 부재가 개교회들의 세력확장 경쟁을 유발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서 대교회주의가 개교회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노치준은 1982년의 전국 154개 교회 재정보고 결산서를 분석하여 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비용―교역자 급여(32.2%), 교육비(7,9%), 예배비용(5.3%), 관리비(16.2%), 운영비(10.4%), 건축비(10.4%) 등―이 전체의 82.4%를 차지하며 교회 밖으로 사용되는 비용―사회복사비(2.3%), 선교비(4.8%), 상회비(2.2%) 등―은 전체의 9.3%에 불과하였다고 제시하였다. 노치준, “한국교회의 개교회주의”,『한국교회와 사회』(서울: 나단, 1996), 41.
김원식은 이런 현상을 ‘개교회주의의 재정적 원자주의(Atomism)‘라고 칭했다.
그 원인에 대한 설명이 여러 방면에서 제기되었는데, 김원식은 그 이유를 해외 선교자금의 중단과 네비어스 정책에서 찾았다. 그는 과거에는 해외선교자금이 한국교회 재정구조의 상부구조를 형성하여 교육, 의료, 자선, 선교 사업 등 대규모 사업을 이끌며 교회 간에 원활한 재정적 교류가 이루어지게 했으나, 선교사들의 철수와 선교자금의 중단으로 이 상부구조가 와해되고 개교회 재정이라는 하부구조만 남게 되어 총회나 노회의 재정구조가 약체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김원식,『한국기독교 100년 허와 실』(서울: 풀빛목회, 1982), 122-123.
또한 개교회성을 조장하는 네비어스 정책구조도 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원규는 전통문화와 전통가치 지향성에서 사상적 원인을 찾았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가 근대화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폐쇄성―이는 특수주의, 권위주의, 집합주의의 성격을 함유하고 있다―을 더욱 강하게 견지하고 있으며, 보수적인 신앙 지향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원규, “한국교회의 개방성과 폐쇄성”,『한국 교회와 사회』(서울: 나단, 1989), 82-89.
사회학적 측면에서 노치준은 한국교회의 물량주의와 결합된 개교회주의의 형성 원인을 자본주의 상품생산 원리의 영향, 다종교 상황에서의 증대된 경쟁력 요구, 자발적 단체로서의 한국교회조직의 구조적 특성, 교회성장신학의 영향 등을 들었다. 노치준,『한국 개신교 사회학』(서울: 한울 아카데미, 1998), 100-105. 그는 물량주의의 문제점으로서 복음의 훼손, 교회 간 불균형과 사회적 무관심, 도덕성의 위기와 신도증가의 한계 등으로 꼽았다. 105-111.
김병서는 대교회주의의 원인을 개교회주의와 무관하게 직접적으로 사회적ㆍ심리적 혼란과 불안이라는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원인을 찾았다. 김병서,『한국사회와 개신교』(서울: 한울 아카데미, 1995), 21-30.
그런가 하면 이성희는 교회의 대형화가 자본주의의 논리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설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토가 작고 체구가 작은 데서 나온 ‘스몰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것으로 주장하였다. 이성희, “한국교회의 사회적 책임의 현실”,『한국교회와 사회적 책임』, 임성빈 편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7), 106; 이성희.『미래 사회와 미래 교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6), 42.
‘스몰 콤플렉스’론의 경우 이는 전체 한국인들의 콤플렉스 증상을 고쳐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더불어 외국의 대형교회도 콤플렉스를 가진 자들의 집합으로 볼 것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어쨌든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대교회를 만들려는 개교회들의 경쟁은 물량주의로 흐르면서 교회 자체의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의식을 약화시키고, 심지어는 복음마저 훼손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마태복음 5장 신상수훈의 팔복이 한국 전래의 오복의 개념으로 변질되어 전해지는 것은 흔한 현상이 되었다. 헌금자의 명단을 주보에 싣거나 헌금자를 일일이 광고하면서 현금으로 환산된 복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헌금의 본정신을 대신하고, 속된 표현으로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투기유도성 헌금 강조가 유행하고 있다. 교회들이 다투어 대형 예배당, 교육관, 기도원, 수양관 등을 짓는 소모적인 일에 몰입한 관계로 일년에 한 두 차례 영적각성을 위해 모이던 부흥사경회가 건축이나 다른 특별 사업을 위해 헌금을 모급하려고 갖는 기만적인 것으로 변질된 사실은 지적되어온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이처럼 물량주의는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모임도 흐리고 있다.
오늘날 교인들은 해방 전에 한국 최대교회가 어느 교회이었고, 누가 그 교회의 목회자였는지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신사참배 문제로 폐쇄되었던 산정현교회와 노회에서 제명당했던 주기철 목사를 더 밝히 기억하고 있다. 교회의 대형화는 역사학적 시각에서 조명할 때 해방 후에 크게 보아 다음 세 가지 방면에서 진행되어왔다. 첫째는 8ㆍ15와 6ㆍ25를 계기로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결집한 경우이다. 영락교회와 충현교회가 대표적인 경우이며, 이 경우에 교인들은 대체로 경제력이 약한 반면 강한 근검자립정신과 내세소망의 정신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미군정을 업고 이권을 독점하여 사업에 성공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둘째는 전후 복구와 산업화 과정에서 유행한 부흥운동에 편승하여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겪는 서민들이 현세적 축복을 바라고 교회로 몰려든 경우이다. 주지하다시피 순복음교회가 그 대표적인 경우로 그 교회의 삼박자축복은 동양적 축복관과 성공적으로 접속하여 기복신앙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 까닭에 한국교회의 경제 비리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원인 제공자로서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신학이나 지성이 결여되었으므로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은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한용상,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109.
노길명은 초기 수용과정에서 형성된 “개인주의, 공동체의식의 결여, 내세주의, 경건주의, 신비주의, 부흥중심, 사회제도 및 사회참여에 대한 무관심, 반에큐메니칼적 성격” 등이 한국 개신교의 전통으로 고착화되어 “한국 개신교를 신학의 빈곤, 교회론의 약화, 사회부재의 영혼구제, 정치무관의 정숙주의, 합리성의 결여, 이원론적인 신앙 등으로 이끌어 온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라고 비판하였다. 노길명, “한국 종교성장의 사회적 배경”,『한국교회와 사회』, 115.
이러한 비판에는 기독교인의 반지성적인 경향의 원인을 ‘근본주의’라 칭하는 보수주의 신학에 돌리는 것도 포함된다. 맹용길,『기독교와 한국사회』(서울: 목양사, 1986), 159. 서광선,『한국기독교 정치신학의 전개』(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6), 48-56.
그런데 이 같은 지적들은 부분적으로 타당성이 없지 않으나, 신학적 선입견이 통전적 이해를 방해한 사례들로 기억될 소지가 다분하다. “축복신앙” 또는 “부흥신앙” 또는 근본주의적 신앙을 이 같은 문제의 모든 원인인양 단순화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장식은 사회참여적인 진영에서도 이제껏 복음주의적 성격을 탈피한 적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었다. 그는 조선신학교 측에서 신학과 학문의 자유운동을 벌이며 한국교회 재래의 부흥회를 비판하고 신앙의 지적인 면을 강조하였으나, 그것이 반드시 복음적인 신앙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고 설명하였다. 이장식,『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77), 192-193. cf. 김흥수,『한국전쟁과 기본신앙확산 연구』(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9).
역사가적 견지에서 말하자면,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경제윤리의 손상에 대해 총체적으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보수주의 계열에서 일제시대 이래 내세주의에 몰두하여 반현대문명적인 태도를 보였고, 지나친 단순화 혹은 경건지상주의에 치우쳐간 면이 컸던 관계로 현 사회의 병폐에 대한 책임의식이 더욱 통렬해야 할 것이지만, 과거 한국 교계 지도자들의 역할을 파악하는 일에는 사회 전반적인 여건과 정황을 함께 고려하는 역사적 안목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해방 이후 신문을 장식한 큼직한 경제비리 사건들은 주로 한국을 대표하는 기독교 지도자, 신앙을 가진 지성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우민화 현상 못지않게 심각하게 고려할 사항은 정부수립 이후로 정치적 경제적으로 사회 지도층을 이룬 기독교 지성인들 사이에서 기독교의 이상을 실현하도록 사회를 움직일 대안이 빈약했고 자본주의의 병폐를 견제할 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한국 기독교가 해방 후 한국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국가로 이끄는 일에 주요 동력원이 되었던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그간 한국사회를 선진화 시키는 데 필요한 인재들을 무수히 배출하였다. 그러나 그 인재들이 그러한 과업에 기능적으로 참여하는 면 외에 기독교 윤리를 구현하는 면에서 어쩔 수 없이 무력감을 느껴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선진화와 윤리가 서로 충돌하는 그런 현상을 해결하지 못한 사실에 그들의 지성의 역량의 한계가 있었다.
교회의 대형화를 이끈 세 번째 경우는 70년대 이후에 약진한 기독교 학생운동을 경험하고 이른바 “신복음주의”의 정신을 흡수한 기독교인들이 결집한 것이었다. 온누리교회와 사랑의교회로 대표되는 이들은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과 윤리의식을 비교적 강하게 견지하는 한편, 막강한 지적ㆍ경제적 능력을 바탕으로 중산층적ㆍ엘리트적인 성향을 지니면서 최첨단의 고급문화를 선호하고 있다. 따라서 서울 강남지역의 보수성과 합류한 지 이미 오래이며, 그런 점에서 상황돌파를 위한 새로운 사회윤리를 제시하는 일에 대한 역량이 부족한 것을 노정해왔다. 세계화의 첨병으로서 이들은 해외로부터 서구적 가치(혹은 문화)―대체로 미국의 보수적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를 유입ㆍ보급하는 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급진적인 사회윤리를 주장하는 진영과 거리를 두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런 만큼 각종 사회문제, 세속주의의 문제 극복에 대하여 소극적이고 반개혁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강남지역으로 말미암아 전국의 부동산 가격이 불안정해지는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하고 있으며, 옷로비 사건처럼, 그 사건의 진위성의 여부를 떠나, 서민들이 자신의 작은 소유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왔던 것을 문득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드는 일들이 그 세계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
물량주의 정신은 권위주의와 결합하여 교권의식의 폐해를 파생시켰다. 그 한 사례가 목회 후계자를 세습시키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한문으로 된 서학서(漢譯西學書)들이 전래될 때 왕권세습 외에 다른 권력승계 개념을 알지 못했던 조선 지배층에서는 서교에서 교황을 선출한다는 사실을 책에서 접하고서 해괴하고 불손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 지식이 천주교인들로 하여금 왕권에 도전하게 만들 것이라고 우려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역으로 한국교회는 교역자의 세습을 우려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교역자 세습을 문제시하는 것은 그 일이 대교회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형편이 어려운 시골교회에서 모든 고난을 무릅쓰고 복음전파의 소중한 뜻을 전수하려 하는 것이라면 교역자 세습이 문제 될 것이 없다. 문제는 도시의 초대형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직계후손에게 무리한 방법을 써서라도 영화와 권세를 세습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cf. “한국교회 성직세습의 문제”,『기독교사상』, 1997년 10월호.
서울의 대교회들에서 1세 교역자가 은퇴할 때 후임교역자와 쉽게 교대를 이루지 못하고 세습문제를 발생시키는 근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어떻게 담임목사의 교권이 가능한 일로 허용되는 것인가? 그 답은 아마도 담임목사직을 소득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의 다른 극단적인 예는 목사가 교회를 팔아―건물 매매가에 교인수를 헤아린 금액을 권리금으로 얹어 팔아서―이윤을 챙기는 것이다. 이 모든 비정상적인 현상은 교권의식이 물량주의와 얼마나 넓고 깊게 결합되어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한국교회의 교권의식은 일제시대에 교회가 조직을 강화해가는 가운데 목회자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바탕으로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그 존경심은 유교 전통에 의해 더욱 탄력을 받았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 자율적인 교권의식은 용인될 수 없었다. 현상학적인 견지에서 자율적인 교권의식은 신사참배 문제와 2차 세계대전으로 선교사들이 일제와 갈등을 빚어 대부분의 기독교 학교들과 교계조직의 행정에서 손을 떼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일제의 한국교회 황민화(皇民化)정책과 맞물려 진행된 것이었다. 이 황민화로 형성된 교권은 해방 후에도 유지되었고, 1950년대 이후로 교회가 분열을 거듭하는 동안 더욱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었다. 그 과정에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신학 노선에 따라 서로 뜻을 달리하였지만, 교권 장악에 뜻을 둔 점에서는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그간에 교계를 좌우했던 지도자들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교권에 대한 동경이 다만 교회에 대한 충정과 인간본연의 권력욕구에서만 기인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독교계를 잠식한 물량주의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가운데 있었던 경우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오는 말
한때 한국의 교회가 민족에게 꿈과 소망을 안겨주던 때가 있었다. 그 때 교회는 사회적으로 공신력을 갖고 있었다.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10%도 안 되었던 때의 일이다. 1997년 현재 전체 인구의 25% 이상이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사회적 공신력은 저조해진 현상을 보이고 있다. 국민 70%가 한국교회에 대해 어떤 행태로든지 거부감을 갖고 있다고 한다. cf. 한국갤럽조사연구소,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한국인의 가치관』, 1990.
한 조사에는 대학생이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응답하는 경우가 모두 52.5%로 나타나고 있다. Se Ze Cho, "The Impact of Religious Cultural Factors on Church Growth in Korea," D. Min dissertation, I, T, C, 1992, 109-113.
근본 원인은 교회의 도덕적 타락과 물질주의적 경향 때문일 것이다. 이런 거부의식은 역사적 경험상 결코 무시하고 말 일이 아니다. 고려 말에 신흥 사대부 계층은 불교계의 비리를 누구보다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그런 다음에 제시한 대안이 불교의 배척과 주자학의 수용이었다. 조선말에 ‘개화파’ 지식인들은 유교의 사회적 폐단을 힘주어 지적하였다. 근대화의 표상이 구한말 유교적 교양을 갖춘 지배층에 의해서 한국사회에 처음 제기되었다고 하는 차성환의 지적은 타당하다. 차성환,『한국 종교 사상의 사회학적 이해』(서울: 문학과 지성사, 1992), 244-245. 그들이 부르짖은 ‘개화’는 서구적인 근대문명을 도입하는 것을 뜻했다. 내한 선교사들은 처음으로 근대화의 청사진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를 향하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나아가 근대화는 곧 기독교화를 뜻한다고 선두에서 주장하였다.
그러할 때 선교사들은 개화주장에 동조하여 기독교를 믿으면 미국과 같은 강대국과 선진 문명국이 될 수 있다고 부채질 하였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유교를 버리고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들은 사회 공신력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운다. 근래 비교종교학자로서『예수는 없다』를 저술한 오강남은 하버드대 출신의 어느 목사가 주장하였다는 ‘신종교개혁’을 지지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더욱 충실하면서 새 시대의 필요에 더욱 효과적으로 부응하는 기독교가 될 것”이란 비전을 제시하였다. 오강남,『예수는 없다』(서울: 현암사, 2001), 34.
이런 말은 언뜻 보면 마치 교회갱신을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성불(成佛)하신 예수님”의 새 종교를 창출할 것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오강남,『예수는 없다』, 223.
교회가 무너진 공신력을 회복하여 사람들이 기독교가 아닌 다른 것에서 대안을 찾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기독교 지도자들이 사회 속에서 제 역할을 이행해야 한다.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교회들은 경제파탄의 원인을 타락과 부패에서 찾고 교회가 그동안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고 바르게 비판하지 못했던 것을 뉘우친다는 자기반성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cf. 이삼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교회의 신앙각서”, 『한국사회발전과 기독교의 역할』, 300-30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된 것과 비례하여 군소교회의 몰락과 대교회의 대형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경제 부정의(不正義) 시비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런 정황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의 방향제시와 해결 노력이 절실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사회를 향한 윤리적 무기력증과 상황돌파를 위한 지적 능력의 부족을 서둘러 해결해야 한다. 동시에 이제껏 그래왔듯이 한국 사회가 각 방면에서 질적 수준을 더 높이고 고급문화를 형성해가도록 부단히 수고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고급문화가 함의하게 될 사회적 기능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동반되어야 한다.
경제적 측면에서의 종교개혁은 통일준비작업 차원에서도 시급한 일이다. 이재정은 통일은 “역량의 통합”이라고 정의하였다. 이재정,『한국 교회 운동과 신학적 실천』(서울: 다산글방, 2000), 188.
일리가 있는 말이다. 교회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곳으로 빨리 돌아가야 한다. 곧 받은바 은혜와 축복을 주는 교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북한에 경제적 지원을 하는 것으로. 또는 북한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여긴다면 이는 큰 착각이다. 인도주의, 상호주의, 통일신학 등의 현실적 구체화를 논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cf. 안재웅, “남북교회와 민족통일”,『한국의 미래와 기독교』(서울: 민중사, 1997), 284-285.
우선적으로, 적어도 경제적 측면에서는, 유물사관에 함몰되어 있는 그들에게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혹시라도 사단이 욥에 대해 하나님께 했던 말처럼 남한 사람들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겠느냐고 하게 되지는 않을는지를? 결국 중요한 것은 교회가 경제윤리를 정립하여, 물량주의를 청산하고, 본연의 제 모습을 확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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