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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육/위대한 신앙선배들의 하나님 만남 - 마르틴 루터
2007-01-26 12:37:47   read : 2542

위대한 신앙선배들의 하나님 만남 - 마르틴 루터


노남도 선교사(이스탄불)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
제 3 장: 기독교 역사에 위대한 신앙선배들의 하나님 만남

2.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의 하나님 만남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A.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성장 배경

루터(Luther, Martin:1483.11.10-1546.2.18)는 독일의 작센안할트 주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아버지 한스 루터 (Hans Luther)와 어머니 마가레테 린데만 (Margarethe Lindemann) 사이에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1492)하기 조금 전에 태어났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신다. 엘리야에게 처럼 세밀한 음성으로 말씀해 주시기도 하고 천둥과 번개로 그의 뜻을 전하시기도 한다.

에르푸르트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법률 공부를 시작한 루터가 어느 날 부모님을 찾아뵙고 친구와 함께 대학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에르푸르트(Erfurt) 근교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심한 벼락이 치더니 함께 가던 친구가 벼락에 맞아 루터의 눈앞에 쓰러져 죽었다. 심한 공포를 느낀 루터는 생명을 위해 기도했다. “성 안나여! 도와주소서. 이번에 구해주시면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혼비백산한 루터의 입에서 경망 중에 터져 나온 이날의 서원은 기독교와 개신교의 새로운 역사를 여는 출발점이 되었다. 친구가 벼락에 맞아 갑자기 죽고 자신은 이 벼락으로부터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경험을 한 이후에 루터는 법학도의 꿈을 버렸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22세 되던 루터를 1505년 7월2일 폭풍과 벼락 가운데서 부르셨다. 그는 2주간 동안 준비한 후에 명문대학에서의 법학공부를 접고 그가 서원한 대로 7월 17일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단’은 규율이 엄하고 학구적인 분위기로 알려진 수도원이었다. 그는 수도원 생활에서 중세 교회가 제시한 그리고 수도원의 규정을 따라 열심히 구원의 방법들을 하나씩 실천하며 수도를 하였다.
수도사로 입문한지 불과 2년만인 1507년 4월 3일 성빈, 정결, 순명의 3대 서약을 하고 신부로 서품 받았다. 다음해 1508년 그의 나이 25세가 되었을 때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 철학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루터는 1510년 년 말에서 1511년 4월까지 어거스틴 수도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로마에 갔다.” 이형기, 세계교회사 II (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2000) p. 66.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자 베드로 성당의 빌라도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올라갈 때 주기도(Peter Noster)를 암송하며 계단마다 입을 맞추었다. 그 당시 로마 베드로 성당은 건축 중에 있었다.
베드로 대성당 건축은 1503년 교황의 자리에 오른 율리오 2세가 시작한 건축으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성당을 건축해서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1506년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시작했다. 건축이 진행될수록 건축을 위한 돈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고 그 결과 면죄부 판매가 시작되었다. “면죄부를 사면 살인, 간음, 거짓말, 강도 등등의 죄악과 미래의 죄들에 대해서도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며 그들은 면죄부를 팔고 있었다. 루터는 마치 시장의 물건처럼 구원이 매매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이 그토록 모욕적으로 취급되는 것에 분노하였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비성서적인 일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1512년 10월 19일에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부 교수가 되어 성서강의를 전담하게 되었다. 시편, 로마, 갈라디아서, 이사야, 예언서, 요한복음, 히브리서 등이 당시 그가 강의하던 주제들이었다.

B. 종교개혁자 루터의 하나님 만남

루터는 능력을 인정받아 1515년에 그 수도원에서 학감 직에 임명되었고 그 수도원 산하에 있는 11개의 수도원의 감독이 되었으며 수도원 안에서 경건심과 열심이 대단한 사람으로 평판이 높았다. 그러나 그는 완벽한 수도원적 삶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평화를 느끼지 못하였고 엄청난 죄의식에 사로 잡혀 있었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의식과 규칙을 준행하면서 고행과 노력을 기울이면 마음이 평화롭고 기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럴수록 공허감은 오히려 더 커갔고 마음은 더욱 무겁고 어두워질 뿐이었다.

한편 그는 1512년에서 1517년까지 가르치면서 오캄(William Ockham)의 신학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글들과 바울의 서신들과 자기 나라의 신비주의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성서 연구와 강의를 하면서, 구원의 빛이 말씀을 통하여 비춰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비텐베르크 대학에 있는 교회의 탑에는 기도실이 있었고 그는 이 탑에서 기도하며‘탑의 체험’을 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종교 개혁적 복음의 발견을 의미하고 루터자신에게는 제2의 회심이라고 볼 수 있다.” 성갑식, op.cit., p.271.

그에게 있어서 1512년에서 1517년까지는 수도사로서 그리고 신학교수로서 성경을 연구하면서 복음의 빛을 찾은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요 자기의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자비로운 하나님이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임을 이해했다.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믿음의 종으로 변화된 이면에는 사람들이 흔히 상상할 수 있는 놀라운 영적 체험이나 기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처럼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고 구원의 확신을 받은 것이다. 그는 이제 율법에서 오는 모진 채찍과 고통을 고행과 수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복음의 위안과 희망을 일시에 체험하였다. 심령적인 암흑 가운데서 이제 새 빛을 발견한 것이다. 오랫동안 심령으로 고민하던 그가 복음의 진리를 발견하고 말할 수 없는 감격에 넘쳐 솟아 나온 외침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The Just Shall Live by Faith)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김춘배, 마르틴루터, (서울:기독교서회, 1960) pp.58-65.

그리하여 루터의 신학 사상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성경으로 요약된다.“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할 때의 믿음은 철저한 행위를 동반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는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 지킬 것을 요구한다고 보았다. 동시에 루터의 관심은 그리스도의 “산상 수훈”을 어떻게 실천하느냐 하는데 있었다. 그런 점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세 교회보다 더 높은 신앙적 행위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렇게 높은 신앙적 행위는 율법주의적 신앙의 요구로 이룰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우리 모든 성도들은 성인이고 또 성인의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했다.
루터가 복음의 진리를 발견하고 감격에 넘쳐있던 그 즈음 독일 마인츠의 대주교 알프레히트가 면죄부를 판매하고 있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루터는 이일이 비성경적인 것을 이미 로마에 갔을 때 느끼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지적하고 신학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성도들의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구원이 어떻게 매매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느냐? 이것은 성서의 진리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면죄부를 판매하는 행위가 얼마나 비성서적인 일인가를 교회를 위한 충정의 마음으로 한 조문 한 조문 적어내려 간 것이 모두 95개 조항이 되었다. 1517년 10월 31일 정오, 루터는 공개토론을 제안하는 글과 함께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대학 부속교회 정문에 써 붙였다. 당시 수많은 신학자와 성직자들이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면죄부 판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복음적 신앙에서 면죄부의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것이 불씨가 되어 순식간에 전 유럽으로 확산되면서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영향이라고 말하여진다.1452년에 인쇄기가 발명되어 유럽의 대도시에는 인쇄소가 보편화되어 있었고 지식과 정보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전달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루터가95 개조를 발표했을 때에 이 소식은 독일과 전 유럽으로 순식간에 퍼질 수 있었고 이에 찬동하는 자들이 불같이 일어나 종교개혁이 성공하게 되었다. 준비된 자와 준비된 상황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C.종교개혁자 루터의 소명을 향한 생애

젊은 수도사 루터가 가볍게 한 행동이라고 무시했던 교황은 루터의 주장이 당시 일반화된 인쇄술을 통하여 요원의 불길처럼 유럽 전체에 퍼지자 당황한 교황청은 1518년 10월 루터에게 로마로 출두하라는 소환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신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로마행은 위험하다고 보아 루터와 교황청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하려고 나선 사람은 작센의 선제후 프레드릭이었다. 그는 독일 황제를 선출하는 권한까지 갖고 있었고 교황청에도 영향력이 컸던 인물로 비텐베르크 대학을 설립하였으며 자기가 세운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인 루터를 보호해주려고 생각했다. 루터의 논적 잉골슈타트대학 교수인 에크(Johan Maier Eck:1486-1543)는 교황의 정죄교서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1520년 6월 20일에 정죄교서를 발부케 하였다. “바야흐로 루터는 가톨릭과의 싸움에 깊이 들어가게 되었고 그의 신학 사상을 급속히 체계화하게 되었으며 그는 개혁의 중심 내용을 3편의 논문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이형기, op.cit., p.74.

첫 번째 논문은1520년 8월에 출판된 것으로 ‘독일크리스천 귀족들에게 고함’(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이었다. 그 내용은 교회 안에 장벽들이 무너져야 하는데 먼저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장벽이라고 하였다. 루터는 고린도전서 12장의 말씀에 근거해서 세례 받은 모든 크리스천은 하나님 앞에서 “교황이나 사제들과 똑같이 제사장의 신분을 갖는다.”고 주장하면서 다만 직임이 다를 뿐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루터의 ‘만인제사장’사상이다. 다음으로 무너져야 할 장벽은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하는 전권을 갖고 있는 것과 교황은 신앙과 교리 문제에 있어서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교황 무오설’의 장벽이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성역 중의 성역이었던 교황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두 번째 논문은 2개월 후에 발표한 것으로 ‘교회의 바벨론 포로’(Babylonish Captivity of the Church)를 출판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가톨릭교회의 핵심을 이루는 일곱 가지 성례전 즉 성세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종부성사, 신품성사, 혼배성사 중에서 성세 성사인 세례와 성체성사인 성찬식만이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며 다른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예수님께서 정하지 않은 것들은 성례전(sacrament)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주장은 당시 엄청난 충격으로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내려온 의식을 뒤흔든 것이었다.

세 번째 논문은 ‘크리스천의 자유’(On the Christian Liberty)이다. 이 글에서 루터는 크리스천은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완전한 자유인이며 동시에 누구에게나 예속되는 완전한 종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모순되는 말처럼 들리지만, 모든 크리스천은 신앙의 진리 안에서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지만 봉사와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터는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크리스천들이 살아야 할 삶의 참모습을 제시한 것으로 강조하였다. 당시 중세교회의 교황은 섬기는 종의 모습이 아니라 세상의 왕들도 그의 발에 입을 맞춰야 하는 존재로 군림했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구원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요 인간이 공적을 쌓았다고 하나님 앞에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고 했다. 또한 크리스천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존재이며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주장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감동될 때에만 그리스도의 명령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이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교황청에서는 파문장을 발부하기로 했다.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발부된 파문장은 교황사절이며 루터의 논적이었던 에크와 알렉산더에 의해 그해 12월 독일에 도착하였다. 독일에서는 그것의 공포가 거절되었고 독일 대부분의 지역들도 그것에 대해 미온적이거나 적대적이었지만 에크와 알렉산더를 통하여 결국 교황의 교서(Exsurge)는 루터에게 전해졌다. 그 내용은 루터가 그동안 발표한 ‘이단적’인 모든 책과 글들을 불태워 없애버리고 60일 이내에 그의 주장들을 철회하라는 명령이었다. 명령에 따르지 않을 때는 파문에 처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였다. 당시 파문은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교황청은 그가 순응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최후통첩’을 받은 그는 1520년 12월 10일 교황청의 최후통첩교서를 시민들과 학생들 그리고 동료 교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불태워버렸는데 비텐베르그 시 당국은 이를 묵인하였다. 1521년 1월 2일 교황의 사절인 알렉산더는 교황이 이미 루터에게 파문교서를 내린 이상 국회가 즉각적인 정죄와 처형을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반면 루터와 친지들은 루터에게 자기변호의 기회를 주라고 찰스 5세에게 요청하였다. 황제는 독일 국민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고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교황의 도움도 받고자 4월 17일에 루터가 보름스 국회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루터는 4월 17일 황제 찰스5세와 국회 앞에 출두하였다. 엑크가 황제를 대신하여 국회 앞에 선 루터에게 소환의 이유를 설명하고 이어서 책상 위에 놓인 책들을 가리키면서 “너는 이 책에 기록된 내용을 취소할 것이냐, 고집할 것이냐?”하고 물었다. 보름스에서 국회가 열리기 전 이틀동안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루터는 그러나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역행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나는 다르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하고 외쳤다.“ Ibid., pp. 75-76.

그는 독일 최고의 권위 앞에서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역사적인 양심선언을 하였다. 루터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상했을 것이지만 루터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통쾌한 선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이 선언으로 평생토록 제국의 범법자로 처형 받게 되었다. 그의 생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 때 그의 생명을 지켜준 사람이 곧 비텐베르크대학을 설립한 작센의 선제후 프레드릭이었다. 당시 독일 안에 선제후는 7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신성로마 황제를 뽑을 수 있었고 그 밑에는 지방의 제후들 200여명이 소도시국가들을 이루고 있었다. 선제후 프레드릭은 루터를 비텐베르크에 은거시켰고 루터는1521년 12월에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여 다음해 9월에 출판하였다. 그곳에서 성가를 작사 작곡하여 예배에 사용하였고 그 때 작사한 "내주는 강한 성이요"는 그의 신앙과 정신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루터는 성직자가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고, 반대로 결혼을 비방하고 수치스럽게 만드는 자를 악마라고 규정했다. 그는 1525년 6월 13일 폰 보라(Katherine Von Bora, 1499-1552)와 결혼하여 지혜로운 내조를 받아가며 개혁운동을 계속해 나아갔다.
1517년에 시작된 그의 종교개혁은 1546년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도 확고한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에 있었으나 실망하지 않고 계속하여 루터는 루터다운 방법으로 개혁을 이끌어 가며 그의 사상과 신앙을 표현하였다. 루터는 그의 믿음에 따라 종교개혁을 하면서 많은 고난과 어려움도 당했지만 그를 통하여 믿음과 말씀을 중시하는 개신교가 세워졌고, 그를 통하여 로마 가톨릭교회는 세계 선교에 열중하며 새로운 길을 찾아 나아가게 되었다.
루터와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 동안 많은 아픔을 서로 경험하였다. 그러나 '한국가톨릭대사전'에서는 루터교와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대화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가톨릭교회와 루터교와의 대화는 세계 연맹이 '복음과 교회'라는 주제로 1967년에 개최한 회의를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회의의 결과로 5년 후 말타 보고서(Malte Report, 1972)가 발표되었는데 여기서는 '의화론'과 '성서와 교회 전승', '교회 일치'와 같은 문제들이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이러한 진전은 더 나아가 1973년에 '루터교'와 가톨릭교회 합동위원회'를 구성하게 하였고, 이 합동위원회를 통하여 ‘공동 증거’(1978), ‘공동 업무’(1978), ‘교회 직무 : 주교직’(1981), ‘공동체로 향한 길‘(1984), ’교회 일치를 향하여 : 루터교와 가톨릭교회의 일치의 유형. 방식. 시기‘(1984) 라는 괄목할 만한 성과의 문헌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희망적인 결과들은 가톨릭교회와 루터교 사이의 오랜 역사적 반목에서 벗어나, 밝은 전망의 미래를 보여 주는 예증이라고 하겠다.”
이 진리의 투철한 수호자 루터는 1546년 6월 28일 고향인 아이스레벤을 방문했다가 심장마비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루터의 개혁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오늘도 진행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백년 이상의 개신교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교회도 사회나 교회를 향하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다르게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담대히 외치는 많은 루터의 후예를 필요로 하고 있다.

D. 자신과 종교개혁자 루터와의 영적인 만남

1. 루터는 생명의 위험가운데서 주님께 서원하고 수도원으로 향하였다. 자신의 생애 가운데 어떤 생명의 위험을 당해보았으며 하나님께 약속한 서원이 있는가?
2. 루터는 로마서의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발견하였다, 자신에게 신앙적으로 미해결된 문제가 있으면 무엇이며 그 해결을 위해 어떻게 구체적으로 노력하고 있는가?
3.루터가 가장 위험한 상황에 있을 때에 그의 생명과 개혁을 도와준 선제후 프레드릭에 대하여 느끼는 점은 무엇인가?
4. 루터가 보름스에서 생명을 걸고 국회와 황제 앞에서 선언한 내용과 그의 태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5. 루터의 종교개혁이 세계교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는가?
6. 루터의 생애와 영성을 보면서 자신이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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