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립보서 3:8)
가난한 농사꾼의 딸로 태어나 이복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스물한 살 나이에 법무부로부터 전국 40개 교도소 최연소 교정위원으로 위촉받은 여자. 초등학교 중퇴가 전부인 학력으로 경기도에서 손꼽히는 학원 원장이 된 여자. 그 여자가 바로 '청송 감호소의 찔레꽃' 박순애 전도사입니다.
징용에 끌려간 아버지로 인해 눈물로 세월을 보내시던 어머니는 재혼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꿈꾸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새 아버지의 무차별적인 구타, 갑작스런 어머니의 가출, 초등학교 중퇴, 이복오빠의 성폭행이라는 더 큰 불행만이 그녀에게 찾아왔습니다.
유년의 꿈들을 키워가야 할 때 그녀는 산으로 들로 헤매며 나물을 캐야 했고, 식모살이와 농사일로 생계를 이어야 했습니다. 가방을 둘러매고 조잘거리며 지나가는 친구들을 보면 부끄러워 숨었고, 친구들이 지나간 후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참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청송보호감호소에서 교정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만난 수감자들에게서 오히려 위로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처절하게 살아오면서 나보다 더 절망적이고 더 나빠질 사람은 없을 것 같았는데, 청송감호소에서 교정활동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이런 내 모습과 처지가 더없이 행복한 것임을 일깨워주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녀는 청송보호감호소에서 만난 사람들의 처절한 생활을 통해 사회보호법의 부당성을 깨닫고 교도소 교정위원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몇 년 간의 힘겨운 투쟁 끝에 지난 1989년 사회보호법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끌어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녀는 유난히 추웠던 그 해 89년 겨울, 단돈 3만6천원을 쥔 채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누구도 반겨주지 않았고 오라고 부른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헤매고 떠돌다 흘러들어 간 곳이 경기도 의정부. 월세 5만원의 삯 월세방에서 공장 노동자의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그녀는 공장에 다니며 인근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습니다. 자취를 하던 골방에서 가르치던 한 명의 학생이 축복의 근원이 될 줄을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새끼를 치면서 과외 1년 만에 학생이 20명으로 불어났고, 불과 1년 6개월 만에 정식으로 학원 문을 열개 될 정도로 커졌습니다. 냄새나는 골방, 그 밑바닥에서의 눈물나는 기도가 하나님을 울렸고, 그 성실성이 사람들을 감동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문을 연 학원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몇 년 후 그녀는 원생 7백명 정도가 모이는 종합학원의 원장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편하게 살아도 될 법한 1999년 여름 어느날 남편과 함께 신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어느 날 학원을 망설임 없이 팔아버렸습니다. 단지 이 일은 내 일이 아니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일은 가시에 찔리고 상처 난 사람을 위로하고 싸매주는 일, 세상으로 한발 더 나아가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중에 나의 살아온 삶을 한권의 책으로 쓰라는 마음을 강하게 주셨어요. 사실 부끄러운 한 여자의 삶을 한 권의 책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마치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살아가는데 나만 알몸으로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죽으면 죽으리라’ 는 믿음으로 순종하여 ‘찔레꽃 그 여자’라는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고 겸손히 말을 내 뱉습니다.
박순애 전도사는 책을 낸 후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해 주셨으며, 그 부끄러움을 토해내는 결단과 용기를 기쁘게 받으셔서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심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2001년 2월부터 전국 교회에 전도간증 부흥집회를 하며 집회를 하는 곳마다 하나님의 성령 역사하심으로 인해 교회를 변화시키고 한 생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하나님의 능력이 본다며 그녀는 어린아이와 같은 감격으로 얘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