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4: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
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 4: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말했던 예언의 성취이다(창3:15).
(창 3: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
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한 이 일에 대하여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고 부활하셨다는 것이 복음의 모든
것이며(고전15:3-4).
(고전 15: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 15: 4) 장사 지낸바 되
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영광스러
운 교회를 세우시기 위함이라고 바울은 말했다.(엡5:25-27).
(엡 5: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 5: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엡 5: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베드로 사도 또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다(벧전3:18).
(벧전 3: 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
한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그리고
사도요한도 마귀의 행했던 일들을 (멸하려)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말해
준다(요일3:8).
(요일 3: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3)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서,(이스라엘의 위로)(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
던 시므온은,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
를 받았다.
이러한 시므온이 그리스도를 보고 자기 팔에 안고서,(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2:25-32)라고 말했다. 여선지자 안나도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사람에게 아기에 대하여) (
눅2:36-38)에 말하였다.구약을 충분히 이해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두 사건은 메시야의 초림이 육체적인 해방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구원redemption)을 위한 사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안나와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알아봄으로 인하여 그들의 지식에 확신을 얻었다.
4)(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을 받으신 예수를 보니)(히2:9).(사람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5)예수께서 열 두살이 되셨을 때에 (내 아버지의 일)에 관하여 말씀하셨다(눅2:49).하나님 아버지의 일에 대한 성취가 바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우리 모두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그의 죽으심에 관한 예언의 성취가 아니겠는가?이것은 그리스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히10;4-10).
6)세례요한에 의하여 소개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은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창세 이후의 모든 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되셨다는 것이다(계13:8)
7)그리스도께서 광야의 시험을 이기시고 돌아 오신 후에,회당에서 무리들을 가르치셨다. 그는 나사렛 회당에 서서 이사야서에 나타난 예언대로 바로 자신이 그 정확한 위치에 계시다는 것을 무리들에게 가르치셨다. 자기가 바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병든자와 고통받는 자들을 치료하고, 죄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고,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메시야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가르치셨다(눅4:14-19/사61:1-2). 그는 (주의 은혜의 해)라는 부분에서 책을 덮고, 이 부분을 (은혜와 진리)로 오신 자신의 초림과 연관시켜 설명해 주셨다. 그는(사61:2하)인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읽지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그 날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다윗의 왕국을 그 시대에 재건하기 위한 목적을 지녔을 여지가 전혀 없다.
8)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임무에 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자신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셨다(요2:18-22).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내가 그 메시야로라)(요4:25-26).(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마18:11/눅 9:10).(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그는 계속하여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셨다(마12:40/ 16:21/ 17:22,23/ 막8:31/ 눅9:2224,/18:31-33/요12:23-33).
9)마태가 전한 복음은 메시야를 갈망하던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침묵을 지키시던) 기간이 지나자, 유대인들은 (바리새인,사두개인 등) 하나님의 말씀의 효력을 인간의 명령과 조상들의 유전보다 낮춰 버렸다(막7:37813).마태는 구약의 20여권에서 120차례나 인용하였는데, 그는 (이루려 하심이라)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다.그는 다른 복음이나 다른 천국을 전하지 아니하였다.그러나 유대인들과는 다른 면을 강조하고 다른 용어를 사용하였다.(천국)에 관한 비유들(13장)과 산상보훈(5-7장)은 단지 은혜의 시대에만 적용이 되며, 지상에 있는 왕국에서는 도저히 적용될 수 없었다.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아니했다면 (나라이 임하옵시고)(현재 동사를 사용)라고 기도할 수가 없을 것이다.마태의 복음은 주님의 지상 사역에 대하여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 주님은 이미 이 땅에 다음과 같은 일을 위하여 오셨다.
(1)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1:21)
(마 1: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성령과 불을 보내시기 위하여(3:11-12)
(마 3: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마 3: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
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3)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하여(5:17)
(마 5: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4)죄인들이 회개하도록 부르시기 위하여(9:10-13)
(마 9: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
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 9: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
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 9: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마 9: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
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5)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기 위하여(10:34)
(마 10: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
요 검을 주러 왔노라
(6)아버지를 나타내시기 위하여(11:27)
(마 11: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
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7)이방을 구원하시기 위하여(12:18)
(마 12: 18)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8)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16:18)
(마 16: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9)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하여(18:11-14)
(마 18: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마 18: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마 18: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 18: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마 18: 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마 18: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 18: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 18: 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마 18: 11) (없 음)
(마 18: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마 18: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
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마 18: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10)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20:28)
(마 20: 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
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11)죄 사함을 받게 하기 위하여(26:28)
(마 26: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께서 처음 열두 제자들을 보내실 때 이방인들에게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하여 보내셨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우선적으로 오신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제자들의멧세지는 (잃어버린 양들)에게 전하여졌다.(
마10:5-7). (잃어버린 양)에게는 단 한가지 멧세지가 필요하다. 이 멧세지는 세례요한과 그리스도가 같이 전파했던(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동일한 내용이었다(
마3:2/
막1:14-15). (잃어버린 양)은 유일한 멧세지가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유일한 사건, 즉 회개와 믿음과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얻어지는 구원도 역시 필요했다.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는 복음서 기자들에게 서로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졌다 (마13:3-11/비교-눅8:4-10).세례요한이 전파한 복음은 (은혜의 복음)이 아닌 (하늘 나라의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마가는 광야에서 외친 요한의 전파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1-3).누가도 (요한의 때부터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16:16)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요한도 모세의 율법에 뒤이은(은혜와 진리)라고 기록하고 있다사실,마태도(천국복음)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복음)은 이적을 동반했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방인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으로 이적을 행했다(행13:7-12/14:3). 바울 사도는 수년 동안의 사역 기간을 통하여 능력있는 표적과 기사로 (복음을 편만하게 전파)하였다(롬15:18-19).또한 그가 유대인들에게 전파한 똑같은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였다(행10:34-3742/13:23-26,46-48).
10)나사로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후,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인기가 높아지자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하였다.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생각함이 아니요.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11:47-52)
11)옛 선지자들이 (임할 은혜를 예언)했으며, (그리스도의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증거하였다(벧전1:10-11).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지상 왕국을 건설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에 관하여 정확하게 설명해 주셨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24:13-27).
12)제자들이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마24:3)라고 물었을 때,그리스도께서는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이르시되..)(마25:31-41)라고 대답하심으로써, 재림시에는 왕으로 오실 것을 인정하셨다.
그리스도의 초림은 다윗의 왕위를 다시 건설할 만한 시기나 조건이 아니었다(겔37:21-25/슥12:1-10) 세상은 그리스도의 초림을 이상하게 맞이하였다. 도덕과 종교는 가장 타락했었다. (하나님의 때가 차매)그리스도께서 오셨으며,때가 되어 어느 유월절 기간에 십자가에 달려 고난받으셨다. 유대인들은 그 분에 관하여 오해를 하였고,그 분에게 대적하기 위한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날을 앞당기게 하는 사건을 초래하였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한 이유는 왕족의 권한을 휘둘렀기 ㄸ문이 아니라(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함)(요19:7)이었다.그리고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요5:18)삼았기 때문이었다. 주님의 마지막 말씀 가운데 한 말씀은 그가 자기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오셨는데 그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세상의 어떠한 권세도 그 나라를 방해할 수 없다는 말씀이었다(요18:36-37).빌라도에게(내가 왕이니라)고 하신 의미는 그리스도께서,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들로 이루어진 영적인 왕국인 (천국)즉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성경을 이해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리스도의 초림은, 그가 죽기 위하여 오신, 바로 이 죽어가고 있는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1:15)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는 자기를 왕으로 세우려는 사람들을 피하셨다(요6:15).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행2:22-23). 이제는 죽기 위해서가 아니고, 권세와 능력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시기 위하여, 왕으로서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이다(마24:30/히9:28). 그는 처음에는 고난을 받으시고, 나중에는 영광으로 들어가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눅24:26/계13:8).
6. 그리스도의 이름
1)예수: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란 이름은 그가 세상에 태어나실 때 불리운 개인적인 이름이다(마1:21)/눅1:31). 이 이름의 근본적인 이름의 의미는 (구세주)(그가 구원하시다.그가 구출하신다. 그가 자유롭게 하신다. 그가 안전케 하신다.)이다. 또한 이 이름으로 인하여 능욕받고 고난받고 수치를 당했던 이름이다(행5:40-41). 이 이름은 (여호수아)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 보배로은 이름이 신약 성경에 거의 700여회나 기록되어 있는데, 복음서에만 600회가 나타난다. 비길데 없는 이 이름이 서신서에는, 높여지고 승귀된 새로운 이름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그리스도 예수) 또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승귀되고 영화롭게 되어 새로운 위치에서 등장하게 된 이름이다.(예수)라는 이름은 서신서에 약 40번쯤 나타난다.
2)그리스도:이 이름은 히브리어로 (기름부음 받다)는 의미가 있는 (메시야)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명칭이 복음서에는 50번쯤 나타나지만 서신서에는 300여번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공적인 지위나 명칭이며, 보통은 앞에 정관사를 붙여서 (그리스도The Christ])라고 사용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The Living God)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대답했다(마16:15-16).
3)예수 그리스도: 이 복합된 명칭은 복음서에서 5,6회 밖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서신에서 이 명칭을 자주 사용하였다. 이 세상에서는 가장 낮고 천한 인간으로 계셨던 예수께서 , 이제는 하늘의 영광 가운데 승귀되셔서 그리스도라고 불리우신다. 과거의 예수와 현재의 그리스도가 합하여 이와 같이 강하고 능력있는 이름을 이루었다. 이 땅에서 고난받으심과 하늘에서 영광받으심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놀랍고 권위있는 이름을 이루게 하셨다.
4)그리스도 예수:(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서신서에서 나타난 일반적인 명칭이다. 그런데(그리스도 예수) 라는 명칭이 바울에 의하여 가끔 사용되었다.사도들과 신약 성경의 기자들은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개종되었는데,단지 바울만은 주님과 처음 만났을 때 영광받으신 후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다(행9:3-6).그리하여 그들과 바울은 자기들이 아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면에서 바울은 먼저 영광받으신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라는 명칭을 사용한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이 명칭을 복음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5)주 예수 그리스도:이 명칭은 그의 권위(주)와 그의 인성(예수), 그리고 그의 영광(그리스도)을 모두 연합시켜 온전하게 부르는 축복 받은 우리 구주의 이름이다.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능력은 그의 인성과 영광받으신 신성이 연합하여 영구불변하는 권세를 보존하신다(마28:18)
6)하나님의 아들: 이 위대한 명칭은 공적이거나 율법적인 명칭이 아닌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영광의 이름이다. 요한계시록의 저자 요한사도는 이 명칭을 매우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위, 즉 성자(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 위에 주님은 그의 교회를 세우셨다. 주님께 받은 두 가지 사역인 (복음과 교회)( 골1:23-26)를 위하여 살았던 바울 역시,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행9:20)전파하였다.
모든 복음전파와 교회의 증거는 이 이름의 신적인 영광에 근거하고 있다. (아들)의 신성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영광이, 교회의 기초와 교회의 축복과 영광 뿐 아니라 멸망치 않는 각 개인의 구원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 집의 구성원인 가족들의 모임, 축복, 인격, 도덕을 위한 (아들)의 신적인 영광은 요한의 행복한 주제가 되었다. 요한은 주님의 품에 기대어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마음을 이미 알게 되었던 것이다.
7)인자(Son of man):포로시대의 선지자 에스겔과 다니엘은 그들의 사역 범위가 이스라엘을 벗어나 온 세상을 위한 사역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자(人子)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그들에게 거절 당한 그리스도께서도 온 세상을 위한 사역을 생각하시며 스스로 (인자)라고 칭하셨다. 이 명칭을 사용하심으로 인하여, 그는 할례에 제한된 좁고 폐쇄적인 유대주의를 어나셨으며, 단지 임마누엘의 땅만을 영광으로 채우는 대신에 하늘과 땅을 포함하여 (인자)의 다스림을 기다리는 온 세상을 영광으로 채우셨다.
또한 유다의 국경 안에 제한된 영광 대신 이 이름으로 모이는 온 세상에 그의 영광을 비춰 주셨다. 천하를 다스림과 절대적인 주권은 이 뛰어나신 이름에서 기인하는 영광이다. 이 영광 중의 하나는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때에 각 사람이 (인자)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되는 일이다(요12:23-48)/행17:31). (인자)가 영광 중에 이스라엘에게 오시며(마24:30), 또한 모든 민족도 그의 영광의 보좌 앞으로 모으실 것이다(마25:31-32) 그때에 그는 우주적인 축복과 의의 법칙을 주실 것이다(마13:41-43).
복음서에서 (인자)라는 명칭이 약 80회 사용되었는데, 언제나 주님 자신이 직접 자기를 가리키실 때 사용하였으며, 다른 사람에 의해서 사용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이 명칭을 죽음 직전의 스데반이 사용하였으며(행7:56), 요한에 의하여 계시록에도 사용되었다(1:3/14:14). 이 명칭이 주님의 겸손하심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되어졌을 가능성은 있지만, 주님의 인성을 나타낼 때는 (인자)를 사용하였고 신성을 나타낼때는 (하나님의 아들)을 사용했다고 흔히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눅22:69-70)
8)다윗의 자손:이 명칭은 공관복음 안에서 14회 사용되었다(마8회,막3회,눅3회).이 명칭은 보다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명칭인 (인자)보다 그 적용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 전자는 유대땅에 한정되어 유대인들에게 축복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후자는 그 범위가 온 세상의 모든 인류에게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네가지의 일반적인 관계로 나타내시기를 즐겨하셨다.
(1)창조주 하나님
(2)이스라엘의 하나님
(3)족장들의 전능하신 하나님
(4)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
*또한 그리스도의 아들 관계도 역시 네 가지 경우로 나타낼 수 있다.
(1)하나님의 아들 -인격적이고 신적인 영광에 대한 명칭
(2)아버지의 아들-아버지와 영원히 함께 계시는 아들의 관계를 나타냄
(3)인자(人子)-천년 왕국을 다스리실 의롭고 자비로우신 통치자.
(4)다윗의 자손(Son of David)-모든 영광스러운 약속과 옛 백성들의 예언
을 이루시는 성취자.
1. 신약의 뜻성경전서는 크게 둘로 나뉘어져있다. 즉 구약과 신약이다. 그런데 신약이라는 He Kaine Diatheke(헤 카이네 디아테케)라는 헬라어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새 계약, 또는 새 언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림설명 / 윌리엄 틴들이 번역한 신약성서 중의 한 페이지 1535년 하나님께서는 옛날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이 있었는데(출24:1-8), 이에 대해서 예수그리스도 께서 최후 만찬의 자리에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맺으신 새 언약을 가르키는 것이다(눅22:14-20). 예수께서는 이 자리에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눅22:20)말씀 하셨는데 이것이 새 언약의 기원이다. 위의 말씀에서 (이 잔)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신 것을 상징적으로 하신 말씀인데 우리는 이 십자가의 사실을 통해서만 속죄함을 받을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깨어졌던 관계를 다시 회복할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이다. 그러므로 이 새 언약을 기록한 말씀을 가리켜서 (신약)또는 신약성서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구약 이라는 말이 낡은 것 이라는 뜻이 아니라 단지 오래된, 옛,언약이라는 점에서 볼 때, 신약은 나이어린, 이라는 의미에서 본 새것이 아니라, 단지 질 적인 의미에서 보아 신선하다는 뜻에서 새 언약이라고 부른 것이다.
2. 저자 들신약성서를 또한 저자들에 의하여 분류할 수 있다. 신약 성서의 모든 저자는 누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유대인들이다. 아마도 마태, 베드로, 요한, 이 세사람은 예수의 12사도에 속한다. 마가, 유다, 그리고 야고보는 초대 교회에서 활동한 사람 들이거나 또는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사도들과 접촉한 사람 들이다. 누가와 바울은 그리스도의 생활을 직접 자기 눈으로 본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러나 잘 알려진 사람들로서 확실히 위에 열거한 이들과 맞먹는 사람들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누구인지 밝혀줄만한 확실한 근거가 없다. 저자에 따른 분류
저 자 책 명 저 자 책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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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태 마태 복음 마 가 마가 복음
누 가 누가 복음 요 한 요한 복음
사도 행전 요한 1,2,3서 요한계시록
야 고 보 야고보 서 유 다 유다 서
바 울 (로마서,고린도전,후,갈라디아서,에베소서,빌립보서,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디모데전,후,디도서,빌레몬서).
? 히브리서 베 드 로 베드로전,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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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약 성서의 문학적 성격신약성서는 27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학적 성격에 따라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1) 처음 4권-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복음서 이다. (2) 역사서 1권-사도행전은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이야기를 서술 하고 있다. 처음 3권을 공관 복음이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서로 다른 견지에서 예수님의 생활과 사역을 똑같이 기술하였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누가복음과 한 쌍을 이루는 책으로서 예수께서 이 세상을 마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그의 제자들이 활동한 이야기가 계속 기록되고 있으며 특히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울의 생애가 강조되고 있다. 다음 21권의 책은 서신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다음 책들-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유다서, 요한1서 등은 주로 교리적(Doctrinal)책이다. 이 책들은 대부분 교회들에게 보내는 서신 형식으로 기록되었는데 각 교회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요소들과 그리고 기독교 윤리의 실천을 가르치려는 목적에서 기록된 것이다. 이것들은 아마 로마서를 제외하고는 공식적으로 논증하려고 기록한 것이 아니다.주로 교회들이 당면하고 있는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비공식으로 다루면서 그 해결책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책들-디모데 전 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요한2,3서등-은 개인적인 책들이다. 이 책들은 어떤 무리들에게 쓴 것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사사로운 서신으로 쓴 것으로서 개인적으로 가르치고 충고하려는 목적에서 쓴 것이다. 그러나 이 서신의 수취인들이 각 교회의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이 책들의 중요성을 감안 하여 개인적 서신으로 보다는 교회들을 위한 공공의 문서로서 받아 들인것이다. 한편 위의 서신들을 저자에 따라서 분류하여 바울서신, 히브리서 및 보통서신으로 나누기도 한다. 신약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예언적(Prophetic)인 책이다. 이 책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미래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환상들과 초자연적 현상들이 포함되어 있어 크게 상징적인 스타일을 취하고 있어서 계시문학에 속한다.
4. 신약 책들의 기원
그림설명 / 최초의 완역성서는 옥스퍼드의 학자 존 위클리프와 그의 후게자들의 번역본 이며 이 필사본은 1420년경에 번역된 신약성서로 오늘날 현존하는 170권 중 의 하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 거의 20년 동안은 신약의 어느 책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리고 신약성서의 마지막 책이 기록되기 까지에는 약 65년의 세월이 경과하였다. 다시 말해서 주후 50년 경에 야고보서가 최초로 기록되고 그리고 96년경에 요한계시록이 최후로 기록된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 초대교회는 유일한 성서로 구약성서를 소유하고 있었다. 베드로는 구약에 기초해서 그리스도를 전하였으며 (행2:16-21), 스데반은 구약에 기록된 이스라 엘의 역사를 그의 설교에서 인용하였고(행7:), 빌립은 이사야 53장을 가지고 에디오피아의 한 내시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였다(행8:). 그리고 사도 바울은 어디를 가든 구약을 인용해서 말씀을 전파하였다. 이렇게 초대그리스도 인들이 구약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복음의 사역자 들이 그들에게 전하여 준 그리스도의 생애, 죽음,부활,승천에 관한 이야기로 말미암은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때에 자서전을 기록하시거나, 또는 가르치신 교훈과 행하신 기사와 이적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 기록하신 일이 없었다. 또한 그의 제자들에게 그런 것을 기록하라고 명하신 바도 없었다. 예수께서는 다만 제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다. 따라서 제자들은 주님의 분부대로 복음을 구두로 선포하였다. 더우기 예수께서 승천하신후 얼마동안은 주님께대한 기억이 생생하여 예수님의 생애나 교훈을 기록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었다. 그리고 당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책을 기록할 필요성 조차 느끼지 않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데다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을 직접 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거기에다 근거없는 전설이 끼어 들게되고 교회안에는 일정한 교리와 규칙이 없어서 신앙과 사상에 혼란이 생기게 되고 이단 사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실정아래서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생애와 교훈을 기록할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현재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순서대로 기록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서가 제일 먼저 기록된 것이 아니고 서신들이 먼저 기록되었다. 바울은 복음에 열심있는 사도 이었다. 그는 갈라디아와 소아시아 각지를 비롯해서 멀리 로마에 까지 복음을 전하여 그 결과 각 곳에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많은 그리스 도 인들을 얻게 되었다. 바울의 전도로 복음을 받아들인 각 곳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관해서 보다 완전하고 보다 정확하게 알수 있고 그리고 이에 대한 사실을 권위있게 기록한 해석도 필요하였다. 한편 교회와 신자가 증가함에 따라 교회 안에는 개인적으로나 또는 단체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많이 생기게 마련이다. 자연히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생활에 적용하느냐 하는 문제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서 소식만 듣게 되는 경우 바울을 위시한 다른 사도와 전도자들은 불가불 붓을 들어 편지를 쓰지 않을수 없었다. 바울서신과 기타 서신은 바로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기록된 것이다. 그러다가 이와 때를 거의 같이 하거나 또는 조금 뒤늦게 그리스도 생애 자체에 대한 권위있는 설명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예수에 관한 허다한 전설이 그 냥 구전으로 떠돌아 다니는 것을 약간의 문서로 기록한것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이러한 문서를 재료로 하여 오늘의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이 기록 되었다. 한편 사도 행전은 사도 시대에 권위있는 역사를 기록할 필요성으로 인해 기록되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은 만물의 최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제시하기위해서 기록 된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에게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들, 계시록으로 알려진 영감 받은 권위있는 문헌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이 신약과 나란히 구약을 병용 하였던 것이다.
5. 신약 성서를 기록한 언어구약성서는 히브리어로 기록 되었고 신약성서는 헬라어로 기록 되었다. 그런데 헬라어에는 고전 헬라어와 일반 헬라어의 두 종류가 있었다. 일반 헬라어를 코이네(koine) 라고 하는데 신약성서는 바로 이 코이네로 기록되었다. 이 일반적인 헬라어인 코이네는 고전 헬라어에 비해서 속된 말이라는 것은 아니다. 본래 마게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정복하고 로마권 판도에 통속적 세계어인 헬라어 코이네를 통용시켰다. 그것은 당시 세계 공통어인 코이네를 보급 시켜서 범 세계적인 문화교류와 정식적인 통일을 기도한데서였다. 그래서 신약 성서는 처음부터 누구나가 읽을수가 있었고 그리고 쉽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6. 정경 으로서의 인정정경은 헬라어 캐논(Canon) 에서 온 말로서 둥근 자 막대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는 주전 776년 이래 올림픽 경기에서 판정을 내려 지는데 캐논을 사용하였다. 여기에서 여러 종교 문헌 가운데서 진위를 한정하여 신앙의 기준이 되는 책을 골라서 정경이라고 하였다. 다시말해서 성서는 기독교인의 정경이다. 이 성서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표준이 되는 것이다. 지금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서만이 초대교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다 더 많은 복음서들이 복음서가 기록된 후에도 교계에 나돌아 다녔다. 그 밖에도 많은 행전 들,서신들 그리고 묵시들이 유포되고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특기할만한 책으로 로마의 클레멘트가 기록한 서신인 클레멘트 1서,12사도의 교훈으로 알려진 디다케,바나바서신,바울행전,허마의 목양서 및 베드로의 묵시를 들수가 있다. 이러한 책들이 일부에서는 신약의 문헌들과 동등한 권위가 있는것으로 간주되기도했다. 또 어떤 문헌은 어떤 한 지방에서는 성서로 인정 받아 사용 되었으나 다른 지 방 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래도 주후 2세기 말에 이르러 신약은 근본적으로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 성서를 인정하는 것과 같이 인정을 받는 동일한 책들을 포함하고 있 었다. 그런데 책들은 반드시 정경으로 받아 들여야 할 4가지 사실이 있었다. 첫째는 사도성(apostolicity)이다. 이것은 책이 사도에 의해서 기록 되었으며, 또는 책이 사도에의해 기록되지 않았을 경우라도 적어도 그 책의 저자가 사도와의 관계를 뒷받침해서 자기가 쓴 책이 사도가 기록한 책과 동일 수준에 오르도록 되어있느냐는 문제이다. 둘째는 내용(contents)이다. 어떤 책의 내용이 정경의 계열에 오를만큼 내용이 영적 성격을 띠고 있느냐는 문제다 세째는 보편성(universality)이다. 그 책이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인정을 받아 용납되었느냐 하는 문제다. 네째는 영감성(inspiration)이다. 그 책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증거를 내보이고 있느냐는 문제이다. 이것이 최종적인 시험인데 이상의 모든 것이 결국은 영감성으로 귀착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이 4가지 조건에 의해서 정경으로 받아 들이는데 대체로 두 그룹이 있었다. 하나는 만민이 보편적으로 논란이 없이 정경으로 인정했던 책들(이것을 호모로구메나 Homologoumena-라고 한다)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경으로 인정 받기에 다소간 반대를 당했던 책들(이것을 안티레고메나 antilegomena-라고 한다)이 있었다. 오늘날의 성서가운데서 초대교회 소수 지도자들에게 정경으로 받아 들이는데 주저했던 책은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2서, 요한3서, 히브리서, 및 계시록 등의 책이었고 나머지 책들은 아무 논란 없이 정경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정경을 재정할 때에 우연히 어떤 개인의 의견으로 단시일에 결정된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여러 사람의 신중한 연구와 토의 끝에 결정된 것이다. 이러한 정경을 재정하는 운동이 개인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시작 되기는 주후 140년 말씨온(Marcion)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였다. 그 후에도 189년 이레니어스(Irenaeus)와 367년 알렉산드리아 감독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등에 의하여 정경이 선포 되었으나 이러한 선포나 주장은 다 개인의 의견이기 때문에 교회 전체가 이를 채택할 수가 없었다. 3세기 동안에 걸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안티레고메나의 정경에 대해서 논쟁이 있었는데 동방 교회에서는 특별히 요한계시록을 반대하는가 하면 서방 세계에서는 히브리서를 반대하였다. 이러한 4세기 동안에 걸친 정경에 대한 논란은 서방세계에서 먼저 일단락 되었다. 그간에 여러번 종교회의가 있었지만 정경에 관한 문제를 회의가 취급하지 않았었다. 397년 칼타고에서 어거스틴이 친히 참석한 제 3차 종교회의에서 처음으로 정경에 대해 회의상의 결정을 내렸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 가운데에는 (정경으로 인정받 은 책)을 제외 하고는 어떠한 책도 성경이란 이름 아래 교회에서 읽을수 없노라고 했다. 그리고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는 책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오늘의 27권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었다. 이 회의 후로는 서방 교회에서는 어느 책에 대해서도 반발이 없었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그후에도 일부 책에 대한 논쟁이 한동안 계속 되었으나 5세기 말에 가서 정경 문제가 해결 되었다. 그 후 현대에 와서 1546년 트렌트(Trent)회의에서 다시 한번 27권을 신약의 정경으로 선포하였으며 1643년 위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는 27권의 이름을 밝혀 다 싣고 있다. 위에서 본대로 약 250년 동안에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경합되어 신약성서가 27권으로 낙착된 것이다. 성서가 27권으로 낙착된것은 결코 인간의 결정이 아니라 인간의 손을빌어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지정된 27권의 신약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시는데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다.
7. 각 책의 주제
8. 신약성서 제 문서의 일람표 서명 저자 연대 저작지 비고
1 마태복음 디아스포라 출신의 80-90경 불명(시리아의
유대인 그리스도교도 안티옥?)
(사도마태가 아니다)
2 마가복음 갈릴레아를 배경으로 50-70경 갈릴레아 16장9절이하는
한 유대인 그리스도 (로마?) 후세의 사본가필
교도
3 누가복음 바울의 제자 누가 80-90경 불명
(또는 바울의 직제자
는 아니지만 그 계통
의 이바인 그리스도교도)
4 요한복음 불명(그노시스가 아닌 80-100경 시리아? 후에 교회적 편집
유대계,헬레니즘계의 가 필이 있었다.
여러 종교 사상을 잘
아는 인물
5 사도행전 누가복음과 같다 80-90경 불명 누가복음의 제2부가
된다.
6 로마서 바울 57-58경 그리스의 미지의 로마교회 방문
고린도 전의 사상적 자기소개
7 고린도전서 바울 55-56 소아시아 고린도 교회의 분쟁
의 에베소 조정을 위한 편지
8 고린도후서 바울 55-57 마게도니아
9 갈라디아서 바울 57-58? 에베소? 신앙 칭의론을 중심
으로 하고 있다.
10에베소서 제2바울 문서 80-100 불명(소아 편지 체제의 교회론
시아?)
11빌립보서 바울 57-61 가이시랴 또 옥중편지
는 로마
12 골로새서 바울?제2바울? 58-100 불명 바울의 진필이라고
하면 가이사랴의 옥중
에서 쓴 편지
13데살로니가 바울 50년경? 고린도? 바울의 편지 중 가장
전서 오랜 것
14데살로니가 제2바울의 문서 1세기말 불명 편지 체제의 종말론
후서
15디모데전서 제2바울의 문서 통칭목회서신,편
16디모데후서 동일저자 2세기초 불명 지체제의 교회 운영의
교훈
17디도서
18빌리몬서 바울 58-60 가이사랴? 개인에게 보내는 옥중
편지
19히브리서 헬레니즘적 80-90 불명 편지가 아니라 신학
유대교를 잘 논문
아는 인물
20야고보서 유대인 1세기말경 불명 편지 체제의 바울주의
그리스도교 비판
21베드로전서 불명(사도 90-95 로마? 도미니티아누스 황제
베드로와 의 박해 아래서 썼다.
무관
22베드로후서 불명(21의 100-130경 불명 유다서를 자료로 썼다
저자의 다른사람)
23요한1서 요한복음의 영향 90-110 시리아? 편지가 아니라 신학논문
을 받은사람
24요한2서 23의 저자와 비슷하나 90-110 시리아? 실제의 편지
25요한3서 다른사람?
26유다서 유대인 그리스도교 1세기말에 불명서 2세기초
27요한계시록 유대인 그리스도교도 90-95 소아시아 도미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아래 쓴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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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이셨다.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에서 탄생하였고 그 최초의 교인들 역시 유대인이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종교적 배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곧 유대인의 종교 그 자체이다.
유대인의 종교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들은 세례 요한이 나타나기 400년 혹은 그 이전에 활동하였다. 그때 이후로 오늘날까지 유대인의 종교는 일어서지 못하였다. 구약의 전통적인 종교는 유대교로 발전(어떤 이들은 전락하였다고 말할 것이다)하였다.
유대교의 몇몇 중요한 제도들성전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귀환한 유대인들이 건축한 간소한 성전(스룹바벨 성전)은 헤롯 대제(B.C. 40-4년)의 명령에 따라 지어진 웅장한 건물로 대체되었다. 헤롯의 성전은 B.C 19년에 착공하여 예수 당시까지도 준공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요2:20) A.D. 64년에 이르러 완공하였으나 불과 (2:20) A.D. 70년에 로마인들에 의해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놀라게 한 (막13:1) 것이 바로 최고급의 화려한 색깔들을 가진 거대한 돌들과 대리석과 황금으로 지어진 복잡하고도 위압적인 이 성전의 건물들이었다. 여기서 제사장들과 성전 수종자들의 집례로 수 세기에 걸쳐 내려온 제사의식과 경배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안토이나 요새의 로마 수비대가 성전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낱낱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행 21:31이하).또 이방인의 뜰(이 뜰에서 이방인이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죽임을 당하였다-행21:28-29: 엡2:14)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여움을 샀던 장사하는 자들(비둘기등 제물들을 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성전세를 위한 환전상)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지붕이 가리워진 행각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무릇 자신의 뜻을 펴고자 하는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회당 :성전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으나 각 지역사회는 그들의 회당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제사의식이 거행되지 않았다. 회당은 예배와 율법연구의 지방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안식일에는 회중이 모여 남녀간에 자리를 따로 하여 앉아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고 해석하는 것을 듣고(눅 4:16이하) 또 기도식에 참예하였다. 그러나 회당은 예배처소 이상의 무엇이었다. 그것은 지역사회 학교요 공동체의 중심이요 또한 지역행정의 본부였다. 회당의 장로들은 그 지역사회의 행정당국자들이요 행정관들이요 공중도둑의 파수꾼들이었다.
육법과 유전 :이스라엘은 모세 이후로 율법을 항상 지녀왔다. 그러나 에스가 시대(B.C 5세기,선지자들의 율법에 대한 백성의 불순종이 초래한 직접적인 결과로 보았떤 바벨론 포로생활이 풀려 고국으로 귀환하던 시대)이후로는 율법의 연구에 더 큰 강조점을 두었고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학자 백성"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 철저한 율법연구는 "유전"의 목록이 점차 비대해져가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그 유전들은 율법 못지 않는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데까지 나아갔다. 율법과 유전의 직업적인 연구생들이자 전문가들인 서기관들은 모든 경우들에 대한 규례들을 정하여 둘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금지된 행위에는 39가지의 형태가 있었는데 추수하는 일과 타작하는 일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는 것도 역시 금지사항에 해당되었다(눅 6:1-2).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행 1:12,3분의 2마일 정도)은 허영된 최대치였다. 애석하게도 유전의 세목에 지나치게 열중한 나머지 서기관들은 때때로 율법 자체의 보다 더 중요한 부분과 관심사를 잊어버리곤 하였다(막 7:1-13,3:4-5,마23:23).
유대교의 분파와 당과 운동들
바리새파 :이들은 종교적인 순수주의자들로서 B.C. 2세기의 "하시딤" (하나님의 충성된 자들)에서 발전하여 정치적인 일들보다는 종교적인 일에 전념해 온 집단이었다. 그들의 최고 관심사와 기쁨은 율법(물론 유전도 포함하여)을 낱낱이 지키는 데에 있었다. 이 표준으로 판단할 때 그들은 모범적인 유대인들이었다(빌3:5-6). 이 목적으로 그들은 가능한 한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하였다. 그들은 십일조(하나님께 드리는 10분의 1)을 드리지 아니한 음식일 경우 바리새인 아닌 자로 더불어 함께 식사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필연적으로 이같은 분리정책은 그들보다 못한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을 것이다. "너보다 더 거룩하다"는 그들의 태도는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을 오늘날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바꾸어놓고 말았다. 사랑과 자비에 앞서 엄한 율법준수를 요구하고 메마른 율법주의자와 혼합된 이 오만한 태도는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만들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정통신앙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범한 오류와 교만과 무정한 생활자세를 책망하셨다. 바리새인들의 영향은 그들의 숫자에 비하여 미미한 것이었다.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로 유대교가 발전해온 것은 바로 이들의 노선을 따라서였다. 그들은 개인적인 경건과 엄한 윤리표준.그리고 더 잘 알려진 가혹한 율법주의에 계속 강조점을 두어 왔다. 그들은 다른 유대인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존경은 받았다.
사두개파 :사두개인들은 예수님 당시 또 하나의 주요 분파였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일찌기 정치적인 이점을 교활하게 이용하여 유력한 지위를 확보해 두었던 부요한 지주회(유대 최고 종교회의)에서 바리새파와 거의 대등한 의석수를 차지하고 있었다(행23:6-10).대제사장들 중 상당수가 사두개파였거나 친사두개파였다. 그들의 종교적인 입장은 자유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모세오경(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이외의 어떤 계시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불멸과 부활, 천사와 귀신들을 믿는 신아과 같은 보다 최근의 관념들을 배격하였다.이점에서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입장을 달리하였다(막 12:18,행23:8). 하나의 귀족적인 소수 공동체로서 그들은 일반 사람들의 지지를 별로 못받았다.
엣세네파 :상당히 그늘에 가리워져 있던 이 "분파"는 1947년 이래 사회사본의 발견과 더불어 극적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사해사본은 사해에 가까운 광야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던 한 은둔종파인 쿰란 사회의 도서관에서 나왔다. 비록 이 종파가 옛세네파였는지는 결정적으로 확인할 수가 없을지라도 분명히 유사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 종파는 달리는 알려지지 아니한 "의의 선생"에 의해서 필시 B.C. 165년경에 창건되어 A.D. 68년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유대 반란 사건 때에 파멸되었다. 예루살렘의 유대 지도자들을 포함한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은 다 그들의 원수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빛의 아들들"로서 "어두움의 아들과"의 최종적인 전투에서 마땅히 그들의 것이 될 승리와 통치권을 쟁취할 날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 동안에 그들은 성경연구에 골몰하고,엄한 은둔 생활 훈련을 하며, 그들끼리는 서로 사랑하고, 밖에 있는 모든 자들은 철저히 미워하면서 그들 스스로를 지켜 나아갔다. 그들은 정성을 다하여 상세한 성경주석들을 펴내었고 구약의 모든 문구들과 구절들을 그들의 처지와 기대하는 것들에 적용하였다. 그들은 두 메시야 곧 아론의 (제사장적인) 메시야와 이스라엘의 (왕적인) 메시야-어쩌면 두 역할을 겸한 한 메시야-의 강림을 고대하였다. 쿰란 문서가 그 종파 자체에 있어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나 그것은 예루살렘의 유대교와는 아주 거리가 먼 하나의 금욕적이면서도 묵시적인 유대교의 경향이 또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여 주고 있다. 예루살렘의 유대교는 이 고립된 집단의 유대교보다도 훨씬 더 널리 퍼져 있었을 것이다. 1947년 이전 같았으면 우리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유대인들"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려 했을 것이나 이제는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한 금욕주의자 공동체의 수도원이었던 사해 근처 쿰란(Qumran)의 폐허. 로마군의 침입 위협을 인하여 그들의 장서였던 사해 사본들이 동굴들에 숨겨졌는데 1947년에 극적으로 다시 발굴되었다.
열심당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로마의 통치를 최대로 이용하려 했고또 쿰란 사회가 하나님의 강권적으로 개입하여 그들을 구원하여 주시리라는 꿈을 가졌던 반면에 많은 유대인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구원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뒤에 와서 열심당으로 불리게 된 이 집단은 유대백성의 혁명군이요 자유의 투사들이었다. A.D 70년에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사건을 초래한 대 반란의 불을 붙인 것이 바로 열심당이었다. 예수 당시에도 실패로 끝나긴 했으나 이미 산발적인 반란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고 있었다(행 5:36-37참조.필시 바라바도). 또 백성들도 반란을 일으킬 태세가 되어 있었다. 애국심에 불탄 열심당원들은 로마에 복종하는 것은 곧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신 하나님께 거역하는 것이라는 신앙에 호소하였다. 적어도 사도들 중에 하나는 이전의 열심당원이었다.
묵시 문학 운동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아포칼립스"(묵시) 로 알려진 문학형식이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B.C. 2세기 이후로 팔레스타인에서는 ㅁ많은 묵시문서들이 저작되었다. 그 문서들은 하나의 강력한 이원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곧,선과 악, 하나님과 사단,빛과 어두움은 서로 충돌하고 있어 도무지 화합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 세계질서는 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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