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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그리스도의 고난 ■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류의 죽음과 고난의 핵심에 직접 파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고난과 죽음을 먼저 겪은 후 심판자의 자리에 서게 됐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자신의 영혼에 고난의 흔적을 충분히 담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이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이수한 온전한 인간으로 죽을수 있었던 것이며
또한 (2) 부활하심으로 영혼에 있던 고난의 흔적을 승화시켜 이제는 고난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으로
우리들의 영혼을 살리는 도구가 되게 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구약에 살던 의인들의 성화도 가능케 해 주었습니다.
고난 없는 그리스도는, 만약 그가 다른 쉬운 방법으로 죽음에 도달할수 있었다 할지라도, 참 성육신이 될 수 없습니다.
성육신은 바로 고난이 영혼에 주는 고통을 체험할 때 비로서 참 성육신이 이루어 지기 때문 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참 순종도 바로 고난가운데서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순종이 고난을 수반하지 않았다면 순종의 참 의미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죽음까지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비로서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히2:9).
그렇다면 예수님의 고난은 단순히 예수님 스스로의 온전함을 이루시기 위한 고난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창조질서와 구원의 모든 총체적인 연결성 가운데
온전함을 이루시기 위한 고난은 하나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온전함이 불온전함 가운데 거할 때 생기는 자연 현상이었습니다.
빛을 발할 때 어두움이 이를 묵인할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묵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를 죽였습니다. 더 나아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계속 증폭되는 미움과 다툼을 자신의 몸에 지니고
이를 더 이상 타인에게 전달하지 않음으로 증폭시키지 않고 자신안에 품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사53:10-11).
예수님의 고난은 구원 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공중의 권세잡은자가 휘두르는 무기였습니다
바로 그 무기를 제공해 준 자들은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들에게 고난은 4가지 방법으로 다가 옵니다.
첫째는 창조질서의 파고로 말미암은 불행 들입니다 (육신의 병, 자연 기후로 말미암은 인명피해등).
둘째는 인간의 죄성에서 비롯되는 제 삼자의 공격 입니다 (누명, 험담, 살인, 구타, 강도 등).
셋째는 우리들의 창조질서의 무시에서부터 오는 결과입니다 (영: 말씀 거역으로 말미암는 결과와 육체적 세계의 질서무시로부터 말미암는 결과 등).
네 번째는 처음에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결여에서부터 오는 정신적/심리적 공포이며 모든 고난의 근원입니다.
땅의 저주는 끝없이 우리들을 의식주의 문제로 한 순간도 편히 쉬게 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무의미에 대한 공포, 시간허비에 대한 불안감, 등등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존재를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무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과 죽음을 정복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고난에 대한 해결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번째의 고난은 자신들에게 의탁된 땅을 제대로 정복함으로 다스리라고 말씀하시며
두번째 종류의 고난은 용서하는 자세(개인적 차원)와 의를 이루려는 자세 (사회적 차원)로 임하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들에게 세번째 종류의 고난에서는 이제 성숙을 통하여 자라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위의 세가지는 이 마지막 네 번째 고난의 극복 없이는 이룰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존재의 의미와 존재에 대한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공중의 권세잡은이가 다스리는 육체가운데 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 자체가 우리들에게 고난을 순식간에 없애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는 고난을 동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어두움은 빛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계시록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나라”와 “고난”의 동역자라고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계1:9).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난을 각오하고 적극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할 자세를 가지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딤후1:8).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고난이 올 때 이를 담대히 묵묵히 맞이하며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죽음의 독이 묻은 침이
우리들을 찌를 때 바로 그 침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들을 세우고 우리들의 성화의 거름이 되도록 바꾸어 놓으신 하나님 자신을 체험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롬5:3).
무엇보다도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고귀한 지식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는 그분의 은혜의 깊이만큼 체험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은혜의 깊이는 우리들의 영혼에 새겨지는 고통의 깊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바로 고난의 깊이이며 우리 영혼의 깊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고난은 성화를 의미합니다.
고난의 이유에 관계없이 또 그 고난의 이유를 우리의 이성으로 절대 설명할수 없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이제 고난은 하나님을 아는 고귀한 지식의 깊이로 들어가게 하는 은혜의 도구 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룩함은 이 세상의 안락함이 있는 성문 안에서는 찾을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아직도 저주이기 때문 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성문 밖, 세상의 영광과 명예가 없는 지역,
외롭고 버려진 곳에 임할 때만이 얻어질수 있는 거룩함 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히브리서를 통해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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