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교의 쟁점연구
김승혜(서강대 종교학과 교수)
머리말
20세기 한국유교의 연구 백년사를 조명하면서 드러난 쟁점 다섯 가지는 유교의 종교성 논쟁, 선비정신과 정치 이데올로기 역할 사이에 흐르는 긴장, 사단칠정론과 인물성동이론의 반복적 연구와 의미의 되새김, 유교 공죄론과 예의 현대적 적용문제 및 조선후기 실학의 개념정립에 관한 논쟁이다.
첫째, 한국유교의 종교성 논쟁이란 우선 유교가 종교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세계적 논쟁의 일부분을 이루는 것으로 종교의 본질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오게 된다. 종교를 죽음 후의 내세관과 초월세계에서 누리는 구원으로 정의한다면,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종교의 핵심을 '이 세상에서 인간다운 사람이 되고 서로 배려하는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하늘의 뜻을 이루는 것'에 둔다면, 유교는 종교적 바탕과 길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 20세기 초와 1990년대에 두 번 일어난 한국유교의 종교화 논쟁은 구체적으로 유교의 교단화가 가능할 것인가의 실험이었다. 이런 실험이 중단되었다는 사실은 유교가 교단적 성격을 갖기보다는 가정, 사회, 국가를 맺어주는 인간관계를 이끌어주는 종교적 윤리성을 그 고유의 영역으로 한다는 유교의 성격을 드러낸다.
둘째, 선비정신과 정치 이데올로기 사이의 긴장은 유교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오는 것으로 이 긴장은 학자들의 직접적 논쟁으로 드러나기보다는 다른 두 주장 사이에 암묵적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유교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조선시대 유자들의 내면적 이상인 선비정신을 연구하고 그 정신을 구체적으로 살아간 이상적 유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양반선비들을 연구하는 사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사대부의 사회적 기능을 다루면서 그들의 자기 독점적 보수성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 두 가지 연구 사이에는 침묵의 긴장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이 긴장이 표면에서 쟁점으로 주제화되어야만 유교의 전모를 총괄적으로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사단칠정론과 인물성동이론은 16세기 및 18세기 이후로 한국유교의 대표적 논쟁으로 지속되어 한국유교의 간판과도 같은 주제이다. 다산과 같은 실학자들이 이런 사변적 논쟁의 반복성이 지닌 소모성을 우려하기는 했지만, 인간의 본성, 감정의 도덕성 문제, 수신에 대한 관심이 한국지성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다는 한국유교의 특성을 대변해왔다.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는 외국학자들까지 이 논쟁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 논쟁이 두 가지 쟁점을 가운데 놓고 돌고만 있는지 아니면 새로운 방향을 향해 해석학적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넷째, 유교의 공죄론은 20세기 전반기에는 국가의 멸망과 관련되어 언급되었지만, 최근에 와서는 예의, 당쟁, 여성의 주변화 등에 유교가 기여한 것이 무엇인가로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부부유별 등의 오륜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인가 아니면 그 본래의 뜻을 밝히고 역사적으로 축적한 차별적 의식을 벗겨낸 후에 현대윤리로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인지가 한국유교의 현대적 실용성을 두고 일어나고 있는 논쟁이다.
다섯째, 조선후기 실학의 개념에 관한 토론은 주로 역사가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인데 실학의 철학적 성격규명이 요청되면서 그 범위가 확대되고 있는 논쟁이다. 실학을 주기론의 발전으로 볼 것인가, 북학파에 국한할 것인가 등 다양한 제안이 있는 것처럼 실학에 대한 개념자체가 아직 명확하지 않다.
이와 같이 지난 100년 동안 한국유교 연구에서 쟁점으로 부각된 주제들을 살펴봄으로써 한국유교의 성격을 규명하고 그것들을 재평가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여기서 쟁점이 되는 주제들을 재평가한다는 말은 각각의 주제들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를 상세히 고찰할 뿐만 아니라 오늘의 시각에서 이러한 쟁점들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탐구해 보려는 것이다.
Ⅰ 한국유교의 종교성 논쟁
종교성 논쟁은 크게 한국유교가 종교로서 역할을 해왔느냐 아니냐는 사상적 논쟁과, 종교화 운동을 둘러싼 논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논쟁에 참고가 되기 위해서 근대적인 '종교' 개념이 유입되기 이전의 한국전통사상 안에서 늘 유교가 포함되던 전통적인 삼교론(三敎論)을 함께 조명해보도록 하겠다.
1. 유교의 종교성을 가리는 사상적 논쟁
유교가 종교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사상적 측면의 논쟁은 유교의 천명관(天命觀) 이해로 집약하여 조명할 수 있다. 유교전통에서 천명사상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천명관에 대한 윤사순, 이기백, 김충렬, 금장태, 마이클 칼튼의 의견을 살펴보겠다.
윤사순은 "韓國性理學과 天命思想"이라는 논문에서 조선 성리학자들의 도설(圖說)을 분석하여 한국유교가 갖고 있는 천명관(天命觀)을 분석한다. 윤사순은 특히 주염계(周 溪)의 {太極圖}와 조선시기의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天命圖}를 비교하여 한국성리학의 특징을 찾고자 한다.
윤사순은 한국성리학자들은 중국학자들보다 천리에 대한 인식이 투철하며 윤리의식 내지 선 지향의식이 더 강하다고 평가한다. 결과적으로 천인합일사상과 본성의 실현의식이 두드러지고 현세치중적 경향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윤사순은 퇴계의 {天命圖說後敍}를 소개한 후에 "性理學者들의 天命觀의 基底에는 理氣로 이루어진 '生命의 始原'과 더불어 '上帝'에 대한 敬虔의 마음가짐이 자리하고 있다"고 결론내린다. 한국 유학자들에게는 수기와 연결된 천명이 중요했다고 하겠다.
이기백은 {新羅時代의 國家佛敎와 儒敎}에서 "이 시대의 유교가 내세울 수 있는 권위의 상징은 공자였고, 천사상은 유교의 도덕적 근거가 되지 못했다"라고 단정한다. 역사학적 시각에서 그는 한국유교 전체를 다루기보다는 통일신라에서 고려초기까지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확립되는 과정에 관심을 가졌다. 이 시기의 유교에 있어 천(天)사상은 도덕적 근거가 되지 못하였다는 주장의 근거로 이기백은 최승로의 시무28조에 보이는 "천도는 헤아릴 수 없다"라고 탄식을 들고 있다. 당시의 유학자들이 천을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보았다는 사실은 당시 유교의 비종교적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결론내린다.
김충렬은 {高麗儒學史}에서 "來世나 他界를 인정치 않고 철저하게 現世間的 現實主義라는 면에서 儒敎는 결코 宗敎가 아니다"라고 단정한다. 내세나 타계가 없고, 철저한 현실주의이기 때문에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시각은 현대 한국 학계에 폭 넓게 퍼져 있는 관점이다. 김충렬은 고려시대의 종교를 논하면서 불교와 도교를 미신(迷信)으로 보고, 유일하게 유교가 합리적인 성격과 도덕성을 갖고 이 두 종교의 폐해를 극복했다고 본다. 김충렬은 모든 종교의 내세지향적 성격을 유교의 합리성으로 극복하려는 입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기백과 김충렬은 유교가 종교가 아니라고 보는 시각을 갖고 있다.
유교의 종교성 논쟁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윤사순과 유교의 종교성을 부정하는 김충렬은 유교의 현세중심적 성격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상이한 시각을 드러낸다. 김충렬은 유교가 현세중심적이므로 종교가 아니라고 말한 반면, 윤사순은 유교가 현세중심적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이는 윤리의식이 강하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윤리의 기반이 되는 천리의식 역시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윤사순은 유교가 현세중심적이라고 말하면서도 이 현세중심적인 성격을 천명, 천리와 직결시킨다. 즉, 유교의 현세중심적 특성을 궁극성에 기초를 둔 윤리와 본성을 실현시키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윤사순은 유교의 종교성 논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유교의 거경궁리(居敬窮理)중에서도 궁리(窮理), 즉 경학(經學)에만 관심을 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유교에 거경(居敬)과 궁리(窮理)가 항상 공존함을 인정하며 거경(居敬)을 도외시하기보다는 실천과 윤리 및 천명과 천리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중국유교와 구별되는 한국유교의 특성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보인다.
금장태는 {한국유교의 이해}에서 유교는 인도(人道)요 인도(仁道)로 가장 본질적으로 사람이 다니는 길을 말한다고 정의한다. 어진 사람이 되는 것이 유교의 속알이며 인간 삶 전체를 인도하고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종교라고 단정한다. 그는 "유교정신을 조금씩 이해해 갈수록 유교의 근원은 명령하는 하늘이 존재하고 인간이 이 하늘의 명령을 듣는 데 있음을 절감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인연을 소중히 하여 인간을 이 세상 속에 두텁게 얽히게 하는 믿음의 배양은 유교에서 얻을 수 있는 구원의 모습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인간 사회 안에서 믿음을 구축하는 것이 종교로서의 유교가 제시하는 현실적인 구원관이라고 본다.
마이클 칼튼은 {성인이 되기 위하여}에서 퇴계가 김돈서(金惇敍)에게 보낸 편지에 "대월상제라는 말을 읽고 음미할 때마다 말할 수 없이 감동된다"고 한 말을 인용한다. 그러나 "신유학자들이 대월상제하듯이 공경스러운 생활을 하라"고 할 때의 '상제'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에서처럼 바깥에 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내재화된 현존이라고 보았다. 칼튼은 {中庸}에서 "하늘이 명한 것을 일러 본성이라 한다"(天命之謂性)고 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유교의 천은 인간의 본성 안에 내재화되어 있고, 그러기에 유교는 특히 일상 안의 종교성을 특성으로 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조선조의 유학자들이 중국의 유학자들에 비해 서민의 유교화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졌으며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생각했다고 보고 있다. 즉, {小學}과 향약(鄕約)의 보급 등이 유교 서민화의 증거이며 이것이 조선유교의 독특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조선유교의 특성은 삶의 지침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종교적 성격을 띤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교의 종교성 논쟁의 중심에는 천명(天命), 천도(天道), 천리(天理)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놓여있다. 이 개념들은 인격적 성격과 원리적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 개념들이 의미 있는 것인지, 살아있는 것인지, 체험되는 것인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 없는 껍데기일 뿐이라면 도덕의 근거가 될 수 없고, 따라서 이기백의 지적처럼 실제로 종교적인 에너지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천(天)이 인격적으로 이해되든 원리적인 것으로 이해되든 간에 여기서 삶이 활력과 힘을 받으며 규제를 받는다면 이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며 유교가 일상 속에서 종교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유교가 지닌 내재된 초월의 개념은 마이클 칼튼과 금장태가 지적하는 것과 같이 새로운 세계의 종교성으로 부각될 수 있다. 유교는 기적보다는 일상 속에서, 외부의 인격적인 신보다는 인간의 내면 안에서 양심으로 호소하는 현대적인 신관 내지는 종교성에 더 잘 어울릴 수 있다.
2. 유교의 종교화 운동에 관한 논쟁
유교의 종교화 운동은 우선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지속된 것으로 공교운동(孔敎運動)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 운동에 대한 소개는 금장태의 {한국근대의 유교사상}의 제4장과 유준기의 {한국근대유교 개혁운동사} 제2장에 자세히 나와있다. 본 논문에서는 한국 근대의 유교 종교화운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박은식과 이병헌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공교운동에 영향을 준 첫째 요인은 서학, 즉 그리스도교의 전파였다. 19세기 후반 중국과 한국은 서양의 근대문명과 충돌하는 시대적 전환기에 서있었다. 서학, 즉 그리스도교와 서양의 과학사상의 충격에 대한 유교의 반응 중 하나가 바로 공교운동이었다. 당시의 지식인이었던 유학자들은 서양의 그리스도교 세력에 저항하기 위해 유교사회의 정신적 주축을 확립할 필요를 느꼈다. 공교운동의 주축을 이루었던 이들은 서양문명의 중심에 그리스도교가 서있다고 보고, 조선에서는 공교가 이러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두 번째로 한국의 공교운동에 직접 영향을 준 사람은 중국의 강유위(康有爲)였다. 강유위는 전통적 유교의 마지막 인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사상에서 유교가 이미 해체되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유위는 금문학(今文學)의 입장에서 진보적 역사관의 특징을 갖는 "공양삼세설"(公羊三世說)의 거란세(據亂世), 승평세(升平世), 태평세(太平世)와 {禮記}[禮運]의 대동사상을 기반으로 {大同書}를 집필했다. 강유위의 {대동서}는 1902년에 완성되어 그의 사후인 1935년에 출간되었는데 그 내용은 유교적인 규약의 대부분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그는 {孔子改制考}를 1897년에 광서제(光緖帝)에게 진상하였다. 이 저술에서 나타나는 개혁의 내용은 공자 기원(紀元)의 채택, 공교회(孔敎會), 다신(多神)을 버리고 천(天)에게만 제사를 지내는 것, 7일마다 휴식을 하는 것, 육경과 사서를 일종의 성경(聖經)으로 읽는 것, 공자의 교조화 등 유교의 종교화에 관한 것이었다. 강유위의 주장은 공교를 기초로 사회를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즉, 사회를 개혁하는 데 공교가 그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강유위의 개혁은 우선 정치적으로 실패했고, 그의 사상 역시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의 주장은 보수파의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급진적인 것이었으며, 진독수(陳獨秀)와 같이 완전한 혁명을 주장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여전히 구습에 얽매인 것이었다. 결국 중국에서 강유위의 공교운동은 무술정변을 거치며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직간접으로 강유위의 영향을 받으며 조선에서도 유교의 종교화 운동이 소수의 학자들에 의해 펼쳐졌다.
갑오경장(1894) 이후로 조선의 사회제도는 서양의 근대적인 사회제도로 바뀌었으나 대부분의 유림들은 구제도를 옹호하며 의병 등을 통해 저항을 거듭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유교는 점차로 몰락해갔다. 가장 중요한 서당, 향교, 성균관 등의 교육매체를 잃으면서 유교는 점차로 사회에서 소외되어 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수의 유학자들은 쇠망해가는 유교를 재건립, 재구성하기 위해서 유교개혁운동을 벌였다.
1909년 박은식과 장지연은 대동교(大同敎)를 제창한다. 박은식은 "종교설"(宗敎說)에서 "종교란 성인이 하늘을 대신해서 말을 세우는 것"이라고 하고, 다시 "宗敎란 도덕의 학문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경제(經濟)의 기술로서의 과학기술과 도덕이 정치가가 애써야 할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도덕이 더 우선시 되어야함을 주장한다. 박은식은 특히 "유교구신론"(儒敎救新論) 등에서 유교가 국교로서의 위치를 정립할 것을 촉구하고, 유교의 침체원인, 유림의 폐해 원인 등을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박은식은 "유교구신론"에서 유교 폐해의 원인으로 다음 세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유학자의 정신이 제왕의 편에만 있고 인민사회에 보급됨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박은식은 이것이 한국유교가 맹자의 민본주의를 버리고 순자의 뒤를 따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둘째, 당시의 유교가 열국의 사정을 밝히 알지 못하고 폐쇄된 점을 지적했다. 따라서 유교를 당대의 시대성에 맞게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 박은식은 유학자들이 현실적으로 쉽고 절실한 것을 말하지 않고 지리멸렬한 이론적 공부에만 정신을 쏟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또한 한국유교가 주자학과 양명학 중 주자학만을 높인 것도 비판했다. 그는 "20세기가 서양문명의 발전시기라면 21세기와 22세기는 동양문명의 발전시기이다. 따라서 유교를 새롭게 하면 유교 고유의 광명이 드러날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그는 개혁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유교가 미래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박은식은 새로운 유교의 당위성만을 주장하고, 새로운 유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제시하지 않았다.
이병헌은 국내에서 공교회 운동을 벌인 학자인데 1903년 34세에 상경하여 처음으로 전차와 철도를 본 후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직접 느꼈다. 그는 1914년에서 1925년 사이 다섯 차례 중국에 가서 강유위를 만났다. 따라서 그가 벌인 한국의 공교운동은 강유위와 직접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19년 이병헌은 그의 공교회 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儒敎復原論}을 저술한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종교령이 유교를 종교단체에서 삭제한 사실에 대해 항의하는 글을 총독부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병헌의 {유교복원론}의 특징으로는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신(神), 상제(上帝), 태극(太極)을 하나로 보고 이를 최고의 주재자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둘째, 상제와 심(心)이 동일한 존재는 아니지만 신령함으로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 셋째, 공자의 도는 보편적인 것으로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堯, 舜, 禹, 湯, 文, 武, 周公)은 모두 하나의 강과 같은 존재이지만 공자는 이 모든 것을 포섭하는 바다와 같은 존재로, 그의 가르침은 보편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공자 이전의 성인은 시대적 특수성을 갖지만 공자는 시대와 지역의 한계를 넘어서는 보편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공자의 가르침이야말로 대중을 구할 수 있는 종교이며 공자는 유일무이한 유교의 교주라고 말한다. 이에 근거하여 이병헌은 공자 이후의 주자, 퇴계, 율곡을 통해서 공자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 반대하고, 우선 그 시원(始原)의 덕이요 마음인 공자를 직접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병헌은 서양종교는 위로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흐르므로 초월적인 것이 많지만 유교는 아래로부터 배워서 위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에(下學而上達) 현실적인 법이 많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혹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구원하려는 마음은 한가지라고 본다. 즉, 이병헌은 공자 본래의 도를 복원하고 세속적인 유학자들의 관습을 타파해서 오늘에 적합한 유교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병헌은 1923년 그의 고향 근처에 배산서당을 건립했다. 그리고 그는 곡부의 공교회 총본부와 서로 연락을 취하여 공자의 진상(眞像)을 가져와서 공자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그는 배산서당 안의 상단에 문묘를 짓고 공자를 모시고, 중단에 퇴계, 남명과 자기 집안의 조상을 모시고 하단에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서당을 지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문묘를 사설서당에 짓고, 자신의 조상을 모셨기 때문에 지방 유림의 비판을 받았다.
그의 {유교복원론}을 보면 이병헌이 우선 교 내지 종교를 분명히 긍정했을 뿐만 아니라 유교도 동서양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종교로서의 사상을 갖고 있으며 자신이 그것을 복원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교조에 대한 사상이 이미 동양의 전통 안에 그 실마리가 있었으며 오늘날 이것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병헌은 송나라의 유학, 즉 성리학이 당시 이미 시대성을 상실하고 있으며, 반드시 이를 개혁해야만 송나라 유학의 오류를 벗어던지고 유교 본연의 모습에 가까운 새로운 유교가 가능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또 그는 "우리가 말하는 바 개혁이라는 것은 신성(공자)의 도를 회복하고 세속 유학자의 관습을 타파하여 오늘에 적합하게 할 따름인 것이다"라고 말하여 공자만이 하나의 교조이고 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함을 주장한다. 이병헌은 유교 개혁을 위한 하나의 모델을 서양에서 들어온 그리스도교에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유교의 전통 안에 이미 그 실마리들이 있으므로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여 유교를 종교화하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병헌은 미래에는 종교들이 유교를 중심으로 하나로 합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병헌이 생각하는 종교의 참된 모습은 일상 속에서 같이 호흡하는 종교이며, 바로 유교가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세상 속에서 같이 살 수 있지만 세상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참된 종교인데 그것을 가장 잘하는 것이 바로 유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야말로 미래의 종교로서 모든 종교를 하나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금장태는 "韓國 近代儒學의 孔敎運動"에서 공교운동을 16세기 중엽 이후 동아시아에 전래되기 시작한 천주교 신앙, 즉 서학(西學)이라는 새로운 사조와 유교가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켜 유교가 서학에 반응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이런 시각에서 19세기 후반 이래의 박은식, 장지연의 대동교(大同敎), 이승희의 공교회(孔敎會), 이병헌의 {유교복원론}을 분석했다.
금장태는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된 공교운동이 유교의 자기 발전을 위한 시도로서 유교의 종교성이 계발되고 종교적 조직화가 발휘되는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금장태는 그러나 이들 공교운동이 갖고 있었던 한계점으로 이들이 보수유림을 설득하기에는 너무 급진적이고 서민대중을 회유하기에는 너무 비현실적이었음을 지적하였다.
1990년에 와서 유교의 종교화 운동을 주장한 학자로는 전 성균관장이었던 최근덕을 들 수 있다. 그는 유교가 현대의 과학문명에 적합한 참모습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쇠미(衰微)의 길을 걷고 있고, 오해의 수렁에 빠져있는 유교를, 다시 보고 가꾸어 새로운 모습으로 참신한 가치관을 부여"하는 것을 '유교의 현대화'로 정의한다. 그리고 유교 현대화의 4대 원칙으로 유교의 종교화, 유교의 공맹화(孔孟化), 유교의 한국화, 유교의 대중화를 주장했다. 최근덕은 유교의 종교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유교는 당당한 종교이며 ①위대한 성인(聖人)의 존재나 ②도덕적 숭고성 ③하늘과 땅의 인간백반(人間百般)을 탐구한 교양 ④이단 배척의 위엄(威嚴) 등에서 종교적 면모를 갖추고 있음이 분명하다. 앞으로 유교의 현대화는 어디까지나 종교적 차원에서 그 출발점이 시작되어야 하고 그러한 궤도를 따라 그러한 확신으로 수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확신은 감명을 주고 신앙을 낳게 된다.
최근덕은 유교가 풍부한 종교성을 갖고 있으며 유교의 현대화를 위해서는 그 출발점이 반드시 종교적 차원에 있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유교의 종교화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개항기로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이루어진 유교의 종교화운동이 실패한 원인은 민중에 뿌리를 박고 민중들에게 호소력을 가진 면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유교 종교화운동의 주체들은 교육의 대상을 확대해서 여성들과 서민에게 가까이 가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으나 실질적인 실현을 이루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종교화운동에서도 기본적으로 현대인에게 유교가 어떻게 새롭게 태어나서 의미를 갖고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점에서는 20세기 초기의 공교운동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유교의 현대적 해석과 종교화운동의 문제는 남을 의식해서 서구의 그리스도교처럼 교회를 만든다는 등의 차원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그야말로 유교 본래의 가장 근본적인 성격이 무엇이며, 과연 유교가 종교라면 그 특성이 무엇이고 특성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드러낼 것인지가 문제이다. 이러한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졌을 때 계시종교인 그리스도교나 이슬람이나 유대교와는 다른, 그러나 또 초세간적인 승가를 이루는 불교와도 다른, 세속과 세상 안에서 초월성을 지니면서 사회적인 영성을 키우는 새로운 유교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유교의 종교화, 유교의 종교성 복원의 성패를 가르는 열쇠가 될 것이다.
이러한 작업에서 가장 큰 문제는 유교종교화 혹은 유교현대화의 주체가 누구냐는 문제이다. 오늘날 유교를 복원시킬 주체가 누구인지 애매하기 때문이다. 공자 자신이 스승이었기 때문에 유교를 진정으로 공부하고 가르치는 유학자들이 모여서 이 일을 해야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유교의 잠재적 영향력이 큼에도 불구하고 전통유교와 사회적 연결을 고수하는 유림자체의 현대화가 아직 미진하다는 점이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유교의 현대화는 반드시 현대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데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이 다원적 세계이므로 유교의 현대화 작업은 비교연구와 대화 속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할 수 있겠다.
3. 전통적 三敎論과 異端論 고찰
지난 백년간 일고 있는 유교의 종교성 논쟁을 역사적 시각에서 평가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유불도 삼교론과 유교의 이단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종교로서 당연시되고 있는 불교 및 도교와 더불어 그 한 축을 이루어 온 유교를 삼교의 차원에서 조명해 봄으로써 유교가 불교와 도교에 비견되는 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최치원의 삼교사상, 최승로의 "時務二十八條", 정도전의 {佛氏雜辨} 및 {心氣理篇}을 최일범, 조남국, 금장태의 논문의 도움을 받으며 살펴보도록 하겠다.
최일범은 "孤雲 崔致遠의 思想硏究"에서 최치원의 삼교사상을 다루고 있다. 최치원은 한국의 사상가 중 "삼교"(三敎)라는 말을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이다. 최치원의 삼교론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가지를 중점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최치원은 삼교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이 삼교를 서로 차별하여 생각하고 있는가? 둘째, 최치원의 종교관은 무엇이며, 현대의 종교라는 개념과 최치원이 사용하는 "교"(敎)라는 개념은 어떻게 다른가?
최치원은 "난랑비서문"에서 삼교가 모두 풍류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최일범은 최치원이 특별히 삼교 중에서 유교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최일범은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로 최치원이 자기자신을 "유자"(儒者)라고 부르고 있음을 지적한다. 최치원은 869년에 당나라에 유학가서 874년에 과거에 급제했다. 이 당시는 한유가 "불골표"(佛骨表)를 쓴 이후이다. 즉, 송나라의 성리학자들에 앞서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의 폐해를 지적하고 견제하는 시각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이다. 따라서 최치원은 당나라 유학시기에 이미 불교를 배척하는 유교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치원이 삼교를 포섭하는 풍류도를 언급하고 있다면, 최치원은 자신의 사상 안에서 삼교를 차별 없이 포괄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敎"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최일범은 자신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그가 神仙術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說話는 부정되어도 좋을 만큼 孤雲은 철저히 神仙思想을 배척하고 있으며, 宗敎로서의 道敎에 있어서도 道敎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다만 人間이 갖고 있는 宗敎性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최일범은 이에 대한 근거로 최치원이 지은 "中元齋詞"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중원일(中元日)에 쓰이는 재사(齋詞)의 내용이다. 도교에는 초례(醮禮)라는 제사를 일 년 중 상원일(上元日; 음력 1월15일), 중원일(中元日; 음력 7월15일), 하원일(下元日; 음력 10월15일), 즉 三元日에 지내는데 특별히 중원일은 사자(死者)를 위한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최일범이 인용한 최치원의 재사는 도교 제사의 제문이다. 따라서 최치원이 사상면에 큰 관심을 두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이것으로 최치원이 도교 자체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中元齋詞"의 내용 중 "물외(物外)의 삼청(三淸)이 마음 안에 있으므로 마음으로 재(齋)를 지낸다"는 것 역시 도교의 중심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당시 중국 당나라 시기에 가장 유력한 도교였던 상청파(上淸派)가 모든 신(三淸, 五臟神 등)들이 물외(物外)에 있지만 동시에 인간 안에도 있으므로 그 신들을 명상을 통해 계속 인간의 몸 안에 지켜서 원기(元氣)와 생기(生氣)가 나가지 않게 하는 존사법(存思法)을 주된 수행의 방법으로 삼았던 점을 감안해 보면, 최치원이 재사에서 말한 삼청 역시 존사법과 관계가 있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최치원을 한국도교의 시조로 보고 있는 전통 역시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시유교의 인(仁)은 인간의 도덕적 바탕이면서 동시에 그 완성이다. 공자의 인(仁)은 인간이 천부적으로 받은 도덕성이 완성된 것을 가리키는 데 비해,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모든 인간 안에 내재한 기본적 도덕성의 기반을 지칭한다. 한편 송대의 유학자들은 인(仁)을 "하늘의 낳고 낳는 마음"이라고 해석했다. 하늘이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낳고 낳는 것에 비유하여 인(仁) 역시 모든 것을 낳고 낳는 생명과 같은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최치원은 불교적인 것을 받아들여 인(仁)을 불성(佛性) 내지 불심(佛心)으로 해석하였다. 최일범은 이것을 인(仁)사상의 변질이 아니라 확대라고 평가한다.
최치원은 삼교가 서로 조화될 수 있으며 그러한 조화가 풍류, 즉 한국인의 심성, 한국인의 종교성 안에서 조화롭게 발전될 수 있고 합일될 수 있다고 보았다. 최일범은 최치원의 종교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孤雲의 思想이, 天人合一을 人間의 內面의 誠實性을 통해서 추구하는, 東洋的인 道德的 宗敎思想과 그 脈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그에 있어서 道德과 宗敎는 別個가 아니었으며 貫通되고 있었다. 그의 宗敎思想을 '道德的 宗敎'라고 정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의 道德觀이 儒敎와 佛敎와 만나는 이유도 역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최일범은 여기서 도덕적 종교사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최치원의 '종교사상'이라는 말을 쓸 때, 최치원의 종교 개념은 도덕적 종교라는 의미이다.
박은식은 "宗敎說"에서 종교는 경제를 발전시키는 과학의 기술과 대비되는 도덕의 학문이며, 敎는 성인이 하늘을 대신해서 말을 세워 만민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설명을 했다. 즉, 박은식은 성인이 하늘을 대신해서 도덕의 학문을 가르쳐서 만민을 가르치는 것을 종교라고 보고 있는 설명이다. 20세기 초 박은식의 종교 정의를 생각해 보았을 때 9세기 최치원의 삼교가 도덕적 종교를 의미한다는 설명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려 성종에게 올려 국가종교정책으로 채택된 최승로의 시무책은 그 내용 안에 삼교가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종교의 개념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료이다. 조남국은 최승로가 시무책 안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은 국교로서의 막강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불교의 폐단, 즉 지나친 불사(佛事)로 인한 국가경제의 파탄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개인의 불사는 국가경제에 영향을 크게 끼치지 않으나 왕의 이기심으로 인한 지나친 불사는 국가경제를 흔드는 것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공기(恭己) 등의 유교적 덕목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시무책의 "성인이 하늘과 인간을 감동시키는 이유는 그 순일(純一)한 덕과 무사(無私)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은 유교적인 사고틀에 근거하고 있는 언급이다. 최승로는 하늘과 인간, 즉 백성을 감동시키려면 순일한 덕이 있어야 하고 무사한 마음이 있어야 함을 임금에게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최승로는 유교와 불교의 역할을 분담하여, 수신의 근본으로 불교를, 치국의 근원으로 유교를 제시한다. 도교의 번잡한 의례에 대해서는 불교의 사치스러운 의례와 마찬가지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조남국은 최승로가 제시한 수신지본(修身之本)과 이국지본(理國之本)의 분업은 불교의 전통적인 영향 때문에 불교와 조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으며, 수기적인 면을 불교에 양보하고 이국의 면을 유교가 가져온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삼교론의 발전에 있어 한국의 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세 사람은 최치원, 최승로, 정도전이다. 최치원과 최승로는 삼교의 조화 내지 분업을 주장했지만 정도전은 벽이단(闢異端)의 입장에 서 있다. 성리학이 조선조에 확립되면서 정도전의 {佛氏雜辨}, {心問天答}, {心氣理篇} 등이 조선 유교에 하나의 전범을 이루어 성리학적 삼교론, 즉 벽이단론을 구성하게 되었다. {불씨잡변}은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하는 것으로 결코 대화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이후 조선의 벽이단론은 정도전의 저술을 하나의 모범으로 삼고 이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유교에서 정도전의 {불씨잡변}을 매우 높게 평가하며 불교를 배척하고 있는 데 반해, 조선조 불교는 기화(己和) 득통(得通)의 {顯正論} 등을 써서 신유교의 강한 힘을 의식하고 유교와의 알력을 일으키기 보다는 유교와의 조화를 주장했다.
금장태는 벽이단의 역사를 요순의 시대로부터 이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불초한 자식을 버리고 천명을 전할 수 있는 올바른 사람을 왕위의 계승자로 정한 것이 벽이단이라는 설명이다. 금장태는 공자에게도 벽이단의 사상이 있었다는 설명을 한다. 공자가 당시의 은자들이 세상을 떠나 있는 것은 인간의 자리가 아니라고 한 것이 바로 공자의 벽이단정신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맹자의 경우처럼 분명한 벽이단은 아니지만 사람의 도를 전하는 노력 자체가 벽이단이라는 설명이다. 송대 유학자의 당시 불교와 도교에 대한 입장, 그리고 명대(明代) 사상가들의 서학에 대한 태도 등을 모두 벽이단이라고 본다.
금장태는 조선의 성리학이 바로 이러한 유교의 벽이단 전통에 서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벽이단이란 바로 정도(正道)를 열어나가는 과정이며, 정도를 찾아나가는 유교의 본령이다. 그러므로 조선유교의 벽이단 정신 역시 조선 개국 초기라는 한 시대의 상황에만 국한되는 특징이 아니라 유교의 본질을 발현하는 것이었다는 설명이다.
한편 금장태는 똑같은 벽이단의 정신이 당쟁의 근원이 된다고 설명한다. 조선의 당쟁이 권력투쟁이라는 정치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 본질은 결국 누가 옳고 그르냐는 정도(正道)를 가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대주의 또한 올바른 정도를 행하고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금장태는 이 또한 벽이단의 하나로 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조선에 있어서 왜란, 호란, 서양세력의 침입에 대한 저항 역시 모두 벽이단의 전통 안에서 설명한다. 금장태는 벽이단을 유교의 역사 전체 안에 이어지는 진리추구의 전통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금장태는 이러한 시각에서 신유교에서는 노장과 불교라는 이단을 물리치고 유교를 지킨다는 견해가 강화되었다고 설명한다. 정도전은 최승로의 시무책에서 불교의 영역으로 분담되었던 수신의 측면을 유교의 것으로 흡수한다. 정도전과 성리학자들에게 신유교는 도학이었으며, 그 결과 유교는 다른 종교 혹은 가르침과는 공존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정통성 유지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최승로는 불교와 유교의 역할을 "수신의 근본"과 "치국의 근원"으로 나누었지만, 정도전은 불교가 수신의 근본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불교는 마음을 공(空)한 것으로 보고 리(理)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옳고 그름이 분별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불교에서는 이 세상을 위한 윤리적 기초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도전은 최승로와는 달리 수신의 영역 또한 유교가 담당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신유교는 벽이단을 그렇게 강하게 주장해야만 했는가?
신유교는 스스로를 도학(道學)이라고 칭한다. 이때의 도학은 자기만이 바른 것이며, 다른 어떤 종교나 가르침과도 공존할 수 없다는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성리학자들은 중종 때 조광조를 중심으로 소격서도 혁파한다.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조선에서 도교의 제사를 담당하는 관청을 둘 수 없다는 논리를 관철한 것이다. 이와 같이 진리를 독점하려는 유교, 즉 벽이단을 핵심사상으로 하면서 도학을 표방하는 유교를 우리는 종교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금장태는 이와 같은 강한 벽이단 정신을 조선유교의 특성으로 보았다.
이런 전통적인 삼교 내지는 도학적인 사상 안에서 전통유교를 바라볼 때 종교성이 너무나 분명해서 오늘날 유교의 종교성 문제 자체가 왜 토론의 대상이 되는지 의아해진다. 조선조 유교는 불교와 도교와 더불어, 아니 그들을 배척하면서 종교의 역할을 담당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교가 종교인가 아닌가를 논쟁의 주제로 삼기보다는 현실 속에서 실현되는 "내재적 초월"이라는 유교의 고유한 종교성을 이해하고자 해야 할 것이다.
2. 선비 논쟁
선비에 대한 논쟁은 실제로 이 논점을 두고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기보다는 수면 밑에서 서로 상반된 견해를 가진 학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이 되풀이되고 있는 침묵 속의 논쟁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할지 모르겠다. 한국유교 전통 속의 선비는 연구자들이 이 '선비'라는 개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매우 상이한 결론들을 도출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마이클 칼튼은 {성인이 되기 위하여} 에서 한국유교의 선비를 바라보는 두 가지 상이한 시각, 즉 "...제도화된 이데올로기로서의 신유교와 삶의 길로서의 신유교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이때 국가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란 치인(治人)의 면을 강조하고 실천하는 것이고, 선비의 의식적인 삶의 길로서의 유교란 수기(修己)가 더 중시된다. 다시 말하면 칼튼의 구분은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지배계급으로서의 사대부와 유교를 도덕적 인격수양의 방도로서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 안에서 온전히 실천하려 했던 선비의 이상을 구별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한국유교 연구자들의 상이한 결론들이란 바로 봉건사회의 지배자로서의 양반인 선비와 유교적 삶의 실천자로서의 선비라는 이 두 가지 시각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다. 대체로 한국유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두 가지 상이한 시각들 중 하나를 채택하고 있으며, 동시에 나머지 하나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현실, 즉 선비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 중 하나만을 택하고 나머지 하나를 간과하는 상황이 이 선비 논쟁을 수면 밑에서 이루어지는 침묵 속의 논쟁으로 만들고 "선비의 정체성"이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이루어져야 할 대화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어 온 것이다.
선비를 바라보는 두 가지 상이한 시각은 연구자들의 접근방법에 따라 갈라지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대체로 유교 사상에 관심을 두는 철학적, 종교학적 연구자는 선비의 이상을 연구하고 강조한다. 그들은 선비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유교적 인격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과학적 시각에서 국가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를 살펴보는 연구자들은 대개 선비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본다. 이는 같은 현상을 보면서도 각 연구자의 접근방법에 따라 서로 다른 측면을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는 이 두 가지 상이한 시각, 즉 한국유교의 선비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 그리고 두 관점을 통합려는 노력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선비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
선비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유교를 철학적, 종교학적 입장에서 연구하는 학자들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유교를 바라보는 대표적인 학자들로 윤사순, 마이클 칼튼, 금장태가 있다. 아래에서는 이들의 연구를 중심으로 선비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의 특징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윤사순은 {한국유학사상론}의 "사림파의 선비정신"에서 선비의 정체성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선비란 첫째 독서인, 즉 당시의 지식인이며, 둘째 수신과 수행을 하는 덕이 있는 사람이며, 셋째 그 수신의 결과로 나라의 원기(元氣)로 간주되는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즉, 윤사순은 선비 안에서 지식, 수덕(修德), 정치라는 이 세 가지가 모두 발현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덕이었다. 단, 국가의 관리를 채용하는 선발시험인 과거에서 평가하는 것은 덕이 아니라 독서와 작문의 능력이었다. 한편 선비는 항상 정치를 목표로 하기는 하되 어떤 경우에는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한 의롭지 않은 상황에서는 자기의 직무로부터 항상 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
마이클 칼튼의 {성인이 되기 위하여}는 퇴계가 만년에 어린 선조임금을 위해서 10개의 도표를 그린 {聖學十圖}의 번역과 칼튼의 주석으로 이루어진 저술이다. 마이클 칼튼은 "상황에 따라 적중하는 반응을 하는 것"이 신유교의 중요한 문제라고 파악한다. 이것은 바로 시중(時中)의 문제인데, 시중을 위해서는 유교 덕목에서 요구하는 바람직한 인격이 형성되어야 한다. 퇴계는 {성학십도}의 제10장 "夙興夜寐箴"에서 인격형성을 위해 정좌(靜坐)를 가르쳤다.
신유교에는 미발(未發)의 공부와 이발(已發)의 공부가 있는데 미발(未發)의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좌(靜坐)이다. 특히 주자는 초학자에게 하루의 절반은 독서를 하고 나머지 절반은 정좌를 하라고 권고할만큼 정좌를 중시하였다. 퇴계도 매일 아침과 저녁에 정좌를 했다. 정좌는 마음을 비우고 머리 속에 특별한 생각을 갖지 않는 거경(居敬)의 공부이다. 독서를 할 때에는 반드시 궁리(窮理)를 해야 하지만 정좌를 할 때에는 마음 본래의 신령함을 드러내도록 가라앉혀야 하고, 이렇게 하면 마음 안의 천리(天理)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즉, 정좌란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인간의 독특한 도덕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하는 공부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본연의 도덕성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정(靜)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정약용은 {牧民心書}에서 지방관이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으로 정좌를 권고한다. 그 후에 이발(已發)의 공부, 즉 행동 속에서 천리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발(未發)의 공부, 즉 정좌가 완전히 된 상태에서 이발(已發)의 공부, 즉 실천을 하면 자연스럽게 천리가 드러나므로 이것이 바로 시중(時中)이 된다. 그러나 간혹 시중이라고 믿었던 행동이 잘못된 경우가 있으므로 이발(已發)의 공부 중에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성찰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 두 공부를 겸하는 것이 바로 거경(居敬)이다.
마이클 칼튼은 신유교가 궁리(窮理)를 강조하는 것은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주학(程朱學)에 의하면 기질지성은 정좌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 역할도 할 수 없지만 일단 행동을 하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 있게 되면 바로 본연지성(本然之性)과 욕구의 분열을 일으키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칼튼은 분석한다. 따라서 이러한 기질지성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궁리(窮理)가 필요하게 된다고 분석한다. 그러므로 거경(居敬)과 궁리(窮理) 양자가 모두 마지막에서는 수행론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앞서 밝혔듯이 칼튼은 조선의 신유교를 바라볼 때 두 가지 시각이 필요하며 그 하나는 제도화된 이데올로기로서의 신유교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길로서의 신유교라고 말했다. 그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신유교가 조선사회 양반의 봉건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했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삶의 길로서의 신유교는 그와 반대로 세속적인 가치체계에 저항하는 소수 유자들의 정신적 수행방법을 제시했다고 분석했다. 칼튼은 이와 같은 신유교의 두 가지 측면이 우리가 보고 있는 선비의 두 가지 모습에 각각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금장태는 {유교와 한국사상}에서 선비를 도학정신을 구현한 유교적 인격체라고 보았다. 즉, 유교의 가르침을 실제로 실천하면서 그것을 실제적인 인격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선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비의 전형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으로 조광조를 들고 있다.
선비가 지향하는 가치는 관직이 아니라 인(仁)이다. 맹자는 선비와 서민을 둘로 나누고 일반 서민은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만한 토지를 갖지 못하면 부정을 저지르지만 선비만은 흔들림이 없기 때문에 무항산(無恒産)의 상황에서도 도덕적인 의연함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선비에게는 가난한 속에서도 때묻지 않도록 타협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는 청빈(淸貧)이라는 덕목이 부여된다.
신유학자들은 천리(天理)의 공(公)은 사사로움과 반대되는 공평함, 의로움으로서 선비는 이 천리의 공평함을 항상 지키기 때문에 군주의 독재에 대해서까지도 항거할 수 있었고 살신성인(殺身成仁)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유교적 이상정치를 펴기 위해서는 선비다운 사람에게 정치를 맡겨야 한다.
만약 조선의 선비들이 의가 아니라 인을 앞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의 유학자들은 유교사상을 논구하는 데 있어서 이론적으로 인을 앞세우는 경우가 있었으나 실천적인 선비의 역할을 얘기하거나 정치적인 현실 속에서는 항상 의리가 앞세워졌다. 즉, 신유교의 천리 개념을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의리로 강화시킨 것이다. 만일 조선조의 신유학자들이 의리보다 인을 더 중시하였다면 현재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선비의 모습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포용적인 선비의 모습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천리의 실천에 있어 의리를 강조하는 조선유교의 특성은 대쪽같은 선비가 포용적이고 남을 사랑하는 선비보다 더 강조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인과 의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지만 조선의 선비사상에서 의가 중시되므로 금장태는 "義理사상과 선비 精神"이라는 논문에서 선비의 덕목으로 의를 부각시키고 있다.
금장태는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 시기 선비들의 반응을 정도전, 권근 등의 혁명론(革命論)과 정몽주, 길재 등의 강상론(綱常論)으로 나누고 있다. 결과적으로 강상론(綱常論)이 승리하는데, 금장태는 선비란 "권력의 편에 서서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강상의 편에 서서 권력을 견제하는 것이 본래의 기능이요, 입장인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선비의 기능을 수행한 예로서 조선왕조의 역성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정몽주와 길재, 세조의 찬위에 반대한 사육신과 생육신 등을 들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조선의 유학자들이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끝까지 반대했던 정몽주 등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는 점이다. 금장태는 이것이 권력을 견제하는 선비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한다.
금장태는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권력을 견제하는 도구로서 상소와 간관(諫官) 제도를 들고 있다. 그러나 도이힐러는 선비와 사대부, 즉 지배계층을 동일시하면서 이들이 권력을 견제했다기 보다는 권력을 독점적으로 향유한 것으로 파악한다. 정도전이 태종에 의해 실각한 것을 보면 조선의 선비들이 실제로 상당한 실권을 갖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의 선비들은 실질적인 권력을 갖게 된 후에도 계속 의리의 편에 서있었는가? 만약 그들이 의리의 편에 서있지 못한다면 그들이 행사하는 권력에 대한 견제란 왕권과 신권 사이에서 자기자신들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한 집단적 이기주의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금장태는 선비를 나라의 원기(元氣)와 같은 존재로 비유하고 있다. 그는 선비들이 지켰던 의리를 논하면서 병자호란 때의 삼학사(三學士)를 예로 든다. 선비들의 역사의식은 정당한 국가와 정당한 왕조를 지키기 위한 의리정신 위에 있는 것이었으며 의리는 천리에 근거하는 것이므로 국가와 임금을 위해 죽는다는 것 역시 국가와 임금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의리와 천리에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유교에서 이야기하는 의리는 시중(時中)적인 성격을 갖는다. 저울의 추로 무게를 잴 때에 대상에 맞추어 균형을 잡듯이, 자신이 처한 상황 안에서 가장 적중하는 행동을 재는 것이므로 권도(權道)의 성격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각 사람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는 두 사람의 가장 적중한 행동은 서로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현재의 상황을 저울질하여 그 안에 있는 원리를 판단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므로 이러한 시중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군자와 성인뿐이다. 따라서 공자 자신도 권(權)이 가장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금장태는 의리의 시중적 실현이 주관적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은 인정하되 오늘날의 법적 정의가 매우 보편타당한 것 같으면서도 그 또한 법을 실천할 사람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므로 정의의 개념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님을 말한다. 유교적 의리의 개념과 법적 정의의 개념이 서로 장단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2. 선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선비 논쟁이 침묵 속의 논쟁이라는 성격을 띠면서도 두 가지 상이한 시각의 첨예한 대립을 보이는 까닭은 유교적 인격의 이상으로서의 선비와 조선사회의 현실적 지배자로서의 사대부의 역할이 정반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앞서 유교가 추구하는 이상에 대한 사상적 접근을 시도하는 학자들과는 달리 유교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유교의 선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회학자의 상당수는 유교를 조선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로 보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조선사회의 선비들은 유교의 이론을 말할 때는 항상 민본정치를 이야기했지만 현실사회에서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착취 내지는 안정적 지배유지를 위해서 유교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즉, 유교의 선비는 그 내면에 권력추구라는 욕심을 항상 숨겨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나타내는 연구들로 신채호의 견해를 먼저 다루고, 그 후에 최봉영,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연구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0세기 초기 유교비판을 대표하는 지성인으로 신채호를 들 수 있다. 그는 당시의 유림이 세계 정세에 어둡고 시대에 뒤떨어져 있음과 함께 그들의 부패를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이것은 유교의 공죄를 따지는 관점에서 유교의 본질이 근대사상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유교 쇠미의 원인이 유림들에게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신채호는 1909년의 국제정세가 국가간 상호경쟁의 시대라고 파악하고 새로운 국가관의 성립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만약 국가와 군주의 이해가 상충하는 경우에는 군주를 버리고 국가를 우선해야 하는데, 백성들이 곧 국가이기 때문이다.
신채호는 "國家는 卽 一家族"이라는 글에서 소가족주의의 타파를 주장했다. 신채호의 관점은 소가족주의적 사회관을 부정하고 확대된 가족개념을 국가에 투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다시 새로운 충신관으로 발전된다. 한 임금, 한 왕조에 대한 충성, 즉 조선왕조라는 하나의 사직, 이씨 왕조라는 하나의 소가족에 대한 충성은 거짓 충신, 작은 충신이라고 비판하고, 당시의 정세에 맞는 충성은 민족국가 전체에 대한 충성이어야 진정한 충신이며, 큰 충신이라고 주장했다.
최봉영은 그의 저서 {조선시대 유교문화}에서 조선시대 유교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통합학문적 방법이 반드시 요구된다고 말한다. 문학적 접근은 선비들이 남긴 시문(詩文)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철학적 접근은 기본적인 우주관, 세계관, 가치체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사학적 접근은 역사의 대의(大義)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통합학문적 방법론'을 통해 유교가 갖고 있는 문학, 사학, 철학을 모두 고찰해야 조선시대의 유교문화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봉영은 의리라는 철학적 문제와 더불어 의리가 실천되지 않아 발생하는, 인간의 감성에서 나오는 정한의 문제를 동시에 다루고 있다. 그에게 조선시대 선비들의 의리란 천리로부터 나오는 현실생활의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사회 내에서 지배자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도구였던 것이다. 질서와 윤리의 강조, 즉 의리의 강조는 지배층에 대한 피지배층의 복종을 강요함으로써 지배층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률적 해석은 덕을 중시하던 선비들이 임금에게 잘못을 지적하는 상소문을 올리거나 임금과 의견이 맞지 않으면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던 사실과 또 그런 선비들이 존경을 받았던 전통에 비추어 본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인욕과 사욕을 버린다는 것은 유학자들 자신의 뜻으로는 현세의 권력에 대한 복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천리(天理)와 연결되는 것인데 최봉영은 이 책 안에서 천리(天理)의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이는 금장태가 선비의 의리정신이란 천리와 직결되는 것이며 이것이 국가의 존망보다도 우선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과 큰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최봉영의 '자발적 복종'이라는 해석은 조선시대의 여성문화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 때 충분한 가능성을 지닌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봉영의 해석은 시종 유학자 자신들이 가장 중시했던 유교의 이상, 선비의 이상은 도외시하고 있어서 일면적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가 대비시키는 나와 우리, 즉 부분자와 통체 사이에는 갈등만이 있을 뿐, 그것을 초월하여 규범이 될 수 있는 천리(天理)의 개념이 없다. 따라서 나와 우리,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갈등관계만이 있게된다. 그 결과 지배층인 사족(士族)이 피지배층인 서민에게, 남자는 여자에게, 임금은 신하에게 요구하는 관계만이 있고, 그것들이 결국에는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봉영의 분석은 절반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 외의 부분, 즉 유교적 이상과 도덕개념을 소홀히 함으로써 그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힘든 것이다. 결국 최봉영은 자신의 '통합학문적 방법론'이라는 표어에도 불구하고 유교의 밑바탕이 되는 중요한 부분을 도외시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마르티나 도이힐러는 {한국의 유교적 변형}에서 주자학이 약 100여년간의 법제화를 통해 조선을 유교화시킨 사실을 설명한다. 그는 이 저술에서 사대부로서의 선비에 중점을 두고, 고려사회에서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사회로 교체되는 시기를 분석했다. 사대부란 관료, 사족(士族), 사회적 지배계층을 이르는 말이다. 사대부는 자신들의 사회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위해 첩의 자식은 절대 사대부에 편입될 수 없게 했다.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자식들의 신분이 결정되므로 사대부는 서자들의 사대부 진입을 막았고, 이를 통해 자기들의 소수적 특권을 계속 유지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반과 서민의 차이는 심해졌고 간혹 양반이 가난 때문에 농민이 될 수는 있었으나 서민이 양반으로 올라가기는 어려웠다. 도이힐러는 유교사상 안에는 균등적인 요소와 위계적인 요소가 모두 있었지만 조선의 유교는 균등적 요소를 발전시키지 않고 위계적 요소를 유지하는 데 쓰여졌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유교는 가부장제의 강화를 통해 여성을 주변화시켰으며, 그 결과로 고려에 비해 조선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은 훨씬 더 약화되었다고 분석하였다.
도이힐러는 특별히 제6장에서 여성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는 여성문제 특히 결혼제도의 문제를 고려와 조선의 제도를 비교하여 고찰한다. 도이힐러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 이전, 고구려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결혼제도의 특징은 처거제(妻居制; uxorilocal system)였다. 즉, 결혼을 한 직후 남자가 처가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살고, 일정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도이힐러는 이러한 결혼제도가 자식에 대한 상속에 있어서 남녀의 구별이 없이 상속을 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그런데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들은 {朱子家禮}에 의한 혼례를 치르도록 강하게 추진하였다. 여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끝까지 실현되지 못한 것은 처거제와 상충되는 친영(親迎)제도였다. {朱子家禮} "혼례"(婚禮)의 친영제도는 신랑이 처가에 가서 신부를 자기의 집으로 데리고 와 결혼식을 하는 제도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처거제와 완전히 반대되는 혼례절차였다. 성리학자들이 친영(親迎)제도를 강력하게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완전한 친영제도는 보편화되지 못하였고, 결혼식을 한 후 남편이 처가에서 약 3년간 기거하는 반친영(半親迎)제도가 시행되었다. 도이힐러는 처거제와 친영례의 충돌은 고려이전의 결혼풍속과 유교적 혼례절차의 단순한 충돌을 넘어 여성의 상속권 약화와 그에 따른 지위의 약화를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도이힐러는 상례(喪禮)에 있어서도 고려시대에는 부계친과 모계친의 상례가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음에 비하여 조선의 상례는 부계친 중심으로 재편된다고 분석했다.
도이힐러의 결론은 유교가 가부장제를 강화했고, 이것이 여성에게는 억압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도이힐러는 조선시대 여성의 유교적 수신지침을 담고 있는 {內訓}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낸다. 그에 의하면 유교적 사회에서 여성이 칭송되는 경우는 그 자신의 개성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전형화된 여성상을 얼마나 [실현이 아니라] 잘 모방(mimic)했느냐에 따라 칭송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도이힐러는 조선시대의 여성은 사회적 가치관이 완전히 세뇌된 상태에서 철저하게 굴종적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도이힐러는 신유교 학자들이 조선을 유교화하기 위하여 조선 초기 많은 법제를 만들어서 강력하게 실천하였지만, 그 자체가 여성, 서얼 등 사회의 소외층에게 한층 더 부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도이힐러는 성리학자들의 조선의 유교화 노력 자체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채호가 유교 자체를 비판하기보다는 유교가 당시의 정세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도이힐러는 유교적 법제화 자체, 즉 유교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다.
이장희는 {조선시대 선비연구}에서 선비의 긍정적인 면(실상)과 부정적인 면(허상)을 모두 조명하려고 한다. 그는 선비의 긍정적인 면으로 예, 의, 염치, 언론의 행사(대간들의 공식적 비판기관으로서의 역할, 사림들의 상소), 학문의 연마와 도의의 실천, 국난 속의 의병활동을 들고 있다. 반면 선비의 부정적인 면으로는 신분차별을 당연시한 것, 학문을 중요시함으로써 산업능력의 저하를 초래한 것, 복고풍의 숭상과 진취성의 결여, 속유(俗儒) 및 부패한 유학자를 들고 있다.
그가 역사적인 접근을 통해 선비의 긍정적 역할과 부정적 역할, 양면을 모두 보고 있는 것은 좋으나 그의 관점이 긍정과 부정, 양면 사이를 일관된 기준 없이 오락가락 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경우는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면서 여성의 삶에 있어서 유교적인 법제와 관습은 부정적이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신채호는 도 자체는 문제가 없으나 유림에게 문제가 있다고 결론을 내리는데, 이장희는 어떤 한 기준을 통해서 이것들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라는 것을 밝히는 면이 부족하다.
이장희는 제7장에서 무인(武人)과 농업, 공업, 상업을 천시하는 선비의 신분관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선비가 당시 사회의 차별적 신분관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때 이장희는 선비의 전형 안에서 선비의 본래적인 성격으로서의 부정적인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제8장은 선비의 변질을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선비의 폐단, 즉 원래 선비의 모습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부패의 결과로 선비 정신의 변질이 초래되었다는 설명이다. 다시 말하면 선비의 부정적 측면에 속하는 당쟁, 과거제의 부패, 교육기관의 부족, 교화의 결여 등은 선비의 본래적인 모습이 아니라 부패의 결과라는 것이다. 제9장에서 이장희는 이 양 측면을 종합하는데 그 제목인 "선비의 실상과 허상"은 잘 맞지 않는 듯하다. 오히려 제7장의 경우처럼 선비의 부정적 측면을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나은 듯하다.
그는 제7장에서 선비의 신분관을 비교적 냉정하게 진단한다. 이장희는 기본적인 선비의 이상이나 선비의 정신이 구체적으로는 직업과 신분의 차별을 가져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농민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땅을 갈아서 먹을 것을 가져오는 자이며, 국가의 경제 또한 농업에 근거하고 있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선비가 농업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고, 실제로 농사를 지은 선비의 예도 있었다. 그러나 공업과 상업은 기본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림들은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즉, 선비들은 학문을 하기 때문에 이익을 구해서는 안된다. 사림이란 기본적으로 도학(道學)을 하는 사람들이고 관료들이다. 도학을 하고 관료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익을 추구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어 경쟁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한대(漢代)의 염철(鹽鐵)논쟁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가는 백성과 이익을 두고 경쟁해서는 안된다는 소극적 경제정책이 유교의 기본이다. 따라서 선비들로 하여금 이익을 추구하는 직업을 갖지 못하게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교의 기본사상은 선비는 도를 찾는 사람이고 백성은 이익을 찾는 사람이라고 규정하며 도가 이익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봄으로써 신분의 차별과 직업의 차별을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유교가 이런 직업의 차별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며 지금까지도 3D 업종을 기피하는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전통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즉, 조선시대 유교적 신분의 차별이 가져다주는 분위기가 부분적이나마 현재에도 남아있는 것이다.
기존의 선비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면 선비를 규정하는 데 크게 네 가지 견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신채호와 같은 민족주의적 경향은 한국 고유의 선비의식이 있었음을 주장한다. 둘째, 금장태와 이장희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유교의 경전을 받아들인 이들을 선비로 본다. 셋째, 최근덕, 윤사순, 최봉영 등은 여말선초 성리학이 도입된 이후, 특히 윤사순은 조광조 이후의 사림파만을 선비로 보고 있다. 넷째, 이우성, 이성무 등 역사학자들은 선비정신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고 선비를 사대부, 사족(士族), 지배계층으로서의 조선시대 양반과 동일시한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게 되었고 개화 실패의 책임을 이들에게 돌린다.
그렇다면 현대에 남아 있는 선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지배계급을 이루는 사회신분으로서의 선비는 현재의 세계에서 이미 사라졌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이 지적하는 지배적 사회신분으로서의 선비는 일단 논외가 된다. 조선시대의 선비에 대한 논의가 오늘날의 유교 현대화에서 논의되는 선비라는 개념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은 현대적 의미를 갖는 선비의 모습일 뿐이다. 과거의 사실로서만 기록된 선비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신분적인 선비개념과 본래 선비정신의 구현자로서의 선비개념, 이 양자 중 신분적인 선비개념은 역사적으로 사라진 것이고, 본래정신의 구현자로서의 선비개념은 아직 남아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선비란 유교적인 인간이다. 유교의 주요경전을 읽는 사람이 유교의 독서인이다. 공자의 사상에서 배움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문장을 배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문장을 배움으로써 예를 실천하는 것이다. 독서를 통해 유교경전을 배우고 거기에 따라 삶으로써 그 둘이 합해져서 문질빈빈(文質彬彬)한 조화된 상태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교는 성직계급이 따로 있지도 않고, 세례의식을 통한 신자집단이 따로 있지도 않기 때문에 결국 유자(儒者)란 유교경전을 독서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유교 정신의 이상은 독서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부패한 선비로 본다. 이상적인 선비는 독서와 실천을 겸비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비정신의 유무를 구별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우선은 유교경전의 독서를 하느냐 안 하느냐로 선비를 가릴 수 있다. 유교의 현대화를 책임질 사람을 선비라고 했을 때 이 점은 더욱 중요하다. 전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바로 그 전통의 경전에 가장 익숙한 사람들이 그것들을 현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사단칠정론과 인물성동이론 논쟁 및 그 해석
이 두 논쟁은 몇 세기를 지속한 논쟁으로 조선성리학의 대표적 쟁점이었고, 20세기에 와서 행해진 연구들은 이 논쟁 속에서 한국유교의 고유한 사상적 발전과 특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논쟁에 대해서는 우선 한국과 외국의 학자들에 의해 연구된 결과들을 살펴보고 그 후에 한국의 젊은 소장학자들의 연구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특별히 소장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주목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 논쟁들이 한국유교 연구사에 있어서 가장 빈번히 다루어진 주제였기 때문에 그 연구결과들을 토대로 젊은 학자들의 새로운 시각과 견해가 도출되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1. 20세기 후반기 한국학자들의 연구
한국유교 연구사 초기로부터 현상윤, 장지연 등이 이 논쟁에 주목하여 주제별로 사료를 수집해 놓았다. 그러나 본격적인 연구는 박종홍, 배종호로부터 시작되어 이남영, 윤사순으로 이어져 현대적 시각으로 이 논쟁을 조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박종홍은 사단과 칠정을 이성과 감정의 관계로 풀어보려고 했고, 배종호는 그것을 발전시켜서 도심과 인심으로 연결시키려 했으며, 윤사순은 소이연(所以然)과 소당연(所當然)의 일치에 중점을 두었다.
박종홍은 "이성과 감성의 관계"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리는 사물에 있어서 "소이연지리"이기에 앞서서 인간 이성에 있어서의 "소당연지리"인 것이요, 따라서 퇴계가 능동적인 리발을 주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퇴계가 왜 사단을 리발(理發)이라고 말했는가라는 의문에 대해서 박종홍은 자연만물 속에서의 존재이유인 소이연지리(所以然之理)라는 면보다는 소당연지리(所當然之理), 곧 인간의 생활 안에서 도덕적으로 당연한 것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즉, 사단칠정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것이고 당연한 것, 도덕적인 것이라는 설명이다.
박종홍은 리와 기를 이성과 감성의 관계로 본 것이다. 그리고 유교는 항상 인간이 먼저 문제가 되고 그 다음에 자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이 논쟁이 한국유학의 특징임은 인정하나 이론적으로나 실천윤리로 더 고양되지 못했다는 점이 한스럽다." 이것을 보면 박종홍은 사단칠정론의 문제가 실천윤리로 혹은 순수이론적으로 더 발전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배종호는 이런 박종홍의 생각을 훨씬 더 발전시킨다. 단, 배종호는 리와 기, 이성과 감성의 관계를 도심과 인심으로까지 연결시켜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결국 배종호는 이것을 천리와 사욕의 문제로까지 발전을 시키는데 이것은 본래의 이기설과는 다른 방향으로 간게 아닌가 의심된다.
이남영은 박종홍이 이성과 감성의 관계 내지는 인간의 당연한 규범으로서의 이에만 치중한 나머지 사단칠정론을 너무 인간적으로만 이해하게된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본래 신유교의 이기론은 자연계와 인간계를 합하려는 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박종홍이 소이연지리를 바깥에 놔두고 소당연지리로 인식적 도덕의식으로만 너무 강조한 면이 있음을 지적했다.
윤사순은 퇴계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소이연과 소당연의 일치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는 소이연은 존재의 이유이고 소당연은 도덕성인데 인간의 존재를,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거기에 따른 도덕성이 일치하는 것이라고 본다.
윤사순은 퇴계가 지향했던 것이 도덕적 우월성이었음을 지적했다. 퇴계가 사단과 칠정을 같은 위치에 놓을 수 없었던 것은 천리와 인욕의 혼돈을 막고자 했기 때문이었고, 율곡이 "기가 발해서 이가 탄다"는 氣一途說을 주장한 것은 이는 활동할 수 없다는 원칙뿐만 아니라 기의 생명으로 이루어진 현실사회를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율곡은 도덕 역시 현실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현실사회에 구체성을 주는 것이 기이기 때문에 기의 발현이며, 결국 현실세계라고 할 수 있는 기 안에서 사단이라는 도덕성의 근원을 찾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남영은 "爭點으로 본 韓國 性理學의 深層"에서 크게 두 가지 문제, 즉 사단칠정론과 인물성동이론을 다루고 있다. 이남영의 논문이 갖는 강점은 이 두 가지 문제를 역사적인 배경에서 시작하여 시대적인 사상의 발전을 조감할 수 있게 했다는 데에 있다. 그는 율곡학을 퇴계학의 선별적(選別的) 반정립(反定立)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율곡의 사단칠정론은 주자에게서 바로 나온 것이 아니라 퇴계의 성찰을 통해서 그에 대한 반론으로서 정립되었다는 해석이다.
이남영은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대해서 이간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성리학 체계를 계승하고 있을 뿐 새로운 주장이 없으나 한원진의 사유는 분명히 회의하고 추리하는 자아에서 문제를 출발시키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호론의 논점이 구체적인 인간과 경험적 대상을 주어진 조건으로 긍정하면서 인간과 사물을 이해하고자 했던 철학적 모색이었던 점"에서 조선조 후기의 실학사상과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다.
2. 서양학자들의 연구
마이클 칼튼, 뚜 웨이밍, 쥴리아 칭은 사단칠정론을 심성론의 발전으로 보고 그 이유가 조선조의 유학자들이 실천적 수기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마이클 칼튼은 그의 번역서 {사칠논쟁}에서 사단칠정론에 대한 퇴계와 고봉의 편지들을 번역하고 그 서문에서 즉 이기론과 사단칠정론은 결국 어떻게 우주적인 기와 인간 안에 있는 도덕적인 기를 종합해서 볼 수 있는냐는 이 둘 사이의 긴장의 문제라고 말한다. 인도철학이나 불교철학의 특성은 인간의 의식을 매우 중요시하여 인간의 의식 속에 물질세계를 삼켜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물질을 현실의 것으로 보기보다는 인간의 의식이 만든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즉,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식으로, 모든 것이 다 내 마음의 산물이며, 현실세계는 그 자체로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20세기 서구철학의 사조는 물질을 중시하여 물질 속에 인간을 삼켜버리려는 문제가 있다. 즉, 현대의 서구철학과 인도의 철학에서 서로 정반대의 경향을 살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동아시아 신유교의 특성은 이 둘을 동등하게 놓고 서로 긴장을 이루고 있다. 기는 자연을 이루는 기이기도 하고 동시에 인간 안에 있는 기이기도 하다. 또 이 기 안에 구체화된 리를 실현시키려는 것이 신유교이다. 즉, 이 둘을 똑같이 놓고 어떻게 이 둘이 긴장 속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를 추구한 것이 신유교 학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뚜웨이밍(Tu Wei-ming)은 "이퇴계의 인간본성 이해(Yi T'oegye's Perception of Human Nature)"에서 퇴계의 사단칠정론을 다루고 있다. 역사적으로 신유학자들은 [중용]을 자사(子思)의 저술로 보았다. 자사는 맹자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 경우 사단을 설명한 맹자는 칠정을 알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즉 [중용]과 {맹자}가 연결되므로 사단과 칠정도 연결되어야 한다는 추론이다. 그러나 뚜웨이밍은 {예기}가 한나라 이후에 성립된 문헌이므로 {중용}의 칠정과 {맹자}의 사단은 상이한 전통에 속하는 것이었으며 주자는 이 독립적인 두 개념을 일관되게 설명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예기}의 [예운]과 [중용]의 칠정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의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사단과 연결시켜 설명하면서 이론적으로 매우 복잡해졌다. 뚜웨이밍은 실질적으로 주자 자신은 사단과 칠정의 관계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적이 별로 없었음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뚜웨이밍은 퇴계와 고봉의 논쟁 이후로 중국의 유교에서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정(情)의 문제가 조선에서 계속 제기되는 것이 한국 유교의 특징이라고 파악한다. 뚜웨이밍은 이처럼 정(情)의 문제가 계속 논쟁으로 지속된 것은 한국인에게 있어서 감정의 문제가 중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퇴계의 경우에서처럼 도덕적 실천수행을 최우선으로 중시했기 때문이다. 사단칠정론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하려면 이 논쟁이 정(情), 즉 감정의 문제임을 중시하여 재해석해야 할 것이다.
뚜웨이밍은 "사단(四端)이 정(情)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그는 만약 사단이 정이라면 어떻게 기(氣)에서 분리될 수 있는가를 묻고, 다시 만약 사단(四端)이 기(氣)가 발(發)한 것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초월적"이라고 규정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뚜웨이밍은 그리스도교의 '초월적 초월'(transcendental transcendence)과는 달리 유교의 천리(天理)는 '내재적 초월'(immanent transcendence)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인간 안에 내재된 천리인 성(性)이 사단으로 발현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에서 사단의 초월성이란 하늘로부터 받은 천리(天理), 천명(天命)으로 인간이면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지, 사회적 합의, 개인의 선택, 판단에 의해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고봉의 견해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이다. 고봉이 사단은 원래부터 도덕적인 자질이고 칠정은 내외적인 상황에 따라서 일어난다는 각각의 특징을 구별하지 않고 둘 다 정이라고 하는 것을 비판하는 퇴계의 지적이 옳다는 것이 뚜웨이밍의 입장이다.
뚜웨이밍은 감정(emotion)과 느낌(feeling)을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다.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 밖으로부터 안을 향하여 행동-사고-느낌(feeling)이 세 가지 층을 이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 있는 느낌은 가장 가까운 사람과만 나눌 수 있고, 이 느낌의 핵심에 있는 것이 종교적 감정이라고 설명하였다. 뚜웨이밍이 이야기하고 있는 느낌(feeling)은 이와 유사한 것으로, 인간 안에 있는데 그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며 이런 느낌에는 앎과 의지 양면이 모두 내포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안에는 변화되지 않는 항구한 도덕감정이 있는데 가장 근원적이고 동시에 초월적인 성격을 갖는 느낌을 사단이라고 표현한다. 이에 비해 감정(emotion)은 흥분된 정신상태라는 것을 중시하여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은 흥분된 정신상태로서 불안할 수 있고,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심리적인 상태라고 설명하였다. 따라서 뚜웨이밍은 사단과 칠정을 모두 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양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설명한다. 사단은 느낌(feeling)과 같은 것으로 가장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이며, 칠정은 감정(emotion)과 같은 것으로 외부의 자극에 따라 나오는 것으로 지극히 자연적이며 인간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지나칠 수 있는 것으로 절제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쥴리아 칭(Julia Ching)은 "이율곡의 사단칠정론(Yi Yulgok on the Four Beginnings and and the Seven Emotions)"에서 율곡의 사단칠정론과 율곡-우계 사이에 이루어졌던 인심도심(人心道心) 논쟁을 분석하고 있다. 쥴리아 칭은 주자의 견해와 비교해보면 퇴계도 호발설(互發說; alternating manifestation)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며, 율곡 역시 새로운 사상을 내놓았다고 본다. 율곡의 리가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분명히 기가 움직여서 리가 탄다는 설명 역시 혁신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3. 최근 한국 소장학들의 연구
{四端七情論}은 23명의 소장학자들이 조선시대 주요한 사상가들 23명의 사단칠정론에 대한 연구결과를 모은 것이다. 이들 중 여섯 논문을 살펴서 이들 소장학자들이 기존의 연구자들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을 갖고 새로운 관점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정대환은 "정지운과 사칠 논쟁의 발단"에서 정지운이 사단칠정론을 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천명도설}을 통해 사단칠정론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다고 보았다. 정지운은 천인합일을 목표로 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