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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단의 제4대 정통(正統) 칼리프(재위 656∼661)로서 메카 출생이다. 쿠라이시족(族)의 하심가(家)의 사람이며 마호메트의 종제(從弟)로, 마호메트 딸인 과티마와 결혼하여 하산과 후사인이라는 아이를 낳아, 마호메트의 유일한 핏줄인 후손을 남겼다. 그가 칼리프에 오른 것이 정당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이슬람교를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리시키는 주요원인이 되었다. 시아파는 알리를 예언자의 유일하고 진실한 계승자로 간주했다.
그는 이슬람교 초기 귀의자로 마호메트의 원조자였고, 또한 교양이 높았고 용감하였다. 즉, 알리는 지방의 한 씨족장인 아부 탈리브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곤궁에 처하자 마호메트가 알리를 양자로 삼았다. 그때 마호메트는 메카에서 아직 상인이었다. 마호메트는 어린시절에 알리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마호메트가 신의 부름을 받아 예언자가 되었을 때 알리는 아직 10세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초기 신자들 중에 속했으며, 평생 동안 마호메트의 충실한 추종자로 살았다. 전설에 의하면, 622년 마호메트가 그의 암살 음모를 피해 메카에서 메디나로 피신한 날 밤, 알리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마호메트로 분장하여 마호메트의 침대에서 잤다고 한다. 또한 마호메트는 자신이 메카의 상인으로서 위임받았던 모든 소유물을 원래 소유자들에게 되돌려주라고 알리에게 부탁했다. 알리는 이것을 실행한 다음에 메디나로 향했다.
그리고 마호메트는 632년 6월 8일 죽었는데, 일부사람들은 마호메트가 마지막 메카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중에 후계자로 알리를 분명하게 지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을 거부하고 마호메트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채 죽었다고 주장한다. 알리는 마호메트의 장례식 참석중에 마호메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마호메트의 부인들 중 한 사람인 아이샤의 아버지 아부 바크르가 칼리프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리는 얼마 동안 아부 바크르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슬람교도 공동체를 부족간의 유혈투쟁에 몰아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결코 적극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은퇴하여 종교적 임무를 자신의 주요한 일로 삼고 조용한 생활을 했다. 알리의 노력에 의해 최초로 연대별로 배열된 《코란(Koran)》이 나올 수 있었으며 《코란》과 하디스(예언자 마호메트의 언행록)에 대한 그의 탁월한 지식으로 여러 가지 법적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칼리프를 도울 수 있었다.
제3대 칼리프인 B.A.오스만(재위 644∼656)이 암살된 뒤 메디나에서 칼리프로 뽑혔으나, 우마이야(옴미아드)가(家)의 무아위야를 비롯한 메카의 유력자들의 반대를 받았다. 반대파와의 싸움의 혼란 속에서 시리아 ·이집트를 잃고 이라크의 쿠파로 옮겨 항쟁하는 한편 타협에 힘쓰던 중, 그를 배반한 하리지트파(派)의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그를 매장한 이라크 중부의 유프라테스강가의 도시인 나자프는 지금도 시아파(派)의 성지(聖地)로 손꼽힌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