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용자 PC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스크립트를 차단했습니다. 원본 글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신성종 목사의 평신도신학 ⑺] 네 번째 간구(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대부분의 종교를 보면 물질을 무시하거나 죄악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독교는 물질의 근원을 하나님에게 둠으로써 물질을 무조건 죄악시하지 않는다. 네번째 간구는 먼저 ‘기도 순서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다. 즉,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한 다음에 우리의 필요에 따라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기도의 목적은 우리의 뜻을 이루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날마다의 일상적 생활을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죄송하게 생각돼 안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란 것이다. 셋째로 네번째 간구는 아굴의 기도(잠 30:8)와 유사점을 가진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즉,쌓아놓고 사는 삶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사는 하루하루의 삶을 원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와 만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정신적인 것,영적인 것만을 기도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은 온전한 기도의 자세는 넷째로 ‘물질도 간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왜냐하면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시 136:26)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적인 것을 간구하는 기도와 물질적인 것을 간구하는 기도 사이에 한계의 차이점이 있다. 즉,영적인 것(죄의 용서,하나님의 은혜,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은사,구원 등)은 반드시 주시지만 물질적인 간구는 ‘하나님께서 선하게 보시는 한계 내에서라는 단서’가 따른다. 왜냐하면 욕심으로 물질을 구하면 하나님은 진노하시기 때문이다 (시 78:28∼31). 다시 말하면 세상의 기도는 ‘천국 가는 우리의 여행에 필요한 영적 목적을 가지고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삼상 1장 11절의 한나의 기도).
그러므로 결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해서는 안 된다(약 4:3)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양식이란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 즉,의식주에 관계되는 일체의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 즉,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적인 것을 간구할 때에는 항상 ‘주여 당신께서 기쁘게 보신다면’이란 단서를 붙임으로써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죄를 범치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