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홈     교회안내     예배안내     담임목사목회     신구약66권장절전체설교(가입후열람)     교회학교     전도부     교육부     남전도회     여전도회     청년부     봉사부     선교부     예배자료     신앙자료     생활정보     시,수필,컬럼     기도실     이단자료     운영자자료실     가  

> 기사메일보내기


제목
받는 사람 이름
받는 사람 Email
보내는 사람 이름

cancel


역사란 무엇인가?
2006-09-02 12:06:54   read : 3042

역사란 무엇인가?   


작가 및 작품 해설 E.H. Carr는 1892년에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난 정치학자  역사가로서, Cambridge대학을 졸업했다. 1916년 영국 외무성에 들어가 1919년에는 1차 세계대전 이후에 파리에서 열린 국제강화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 후 피는 영국 외무성에서 러시아 혁명 (1917)이 일어난 뒤의 소련문제를 다루는 전문위원이 되었는데 이 경력이 소련을 연구하는 사학자가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대표저작들은 대부분 소련에 관한 것이다. 외무성 근무중 Riga (소련 라트비아 공화국의 수도)주재 영국공관, 국제연맹 등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1936년 외무성에서사임하고 Wales대학의 국제정치학 교수가 되어 1946년까지 재직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 정보성 외교부장(1939-40), 런던 타임즈 논설위원(1941-45)을 역임했고 1953-1955년 사이에는 Oxford대학에서 정치학 강의를, 1955년 이후에는Cambridge 대학에 서 강의를 했다. 그의 저서로는 본서 외에도 』Dostoevsky(1931), Karl Marx(1934), Michael Bakunin(1939) 등의 전기물과 The Twenty Years' Crisis 191-1939 (1939), Nationalism and After (1945) The New Society (1951) 등과 최대의 역자 The Bolshevik Revolution(1958)이 있다. 본서는 1961년에 있었던 Cambridge대학의 연속강의 (TheGeorge Macauly Trevelyan Lectures)에서 발표된 것으로서 후에 다시 책으로 편집된 것이다.

본서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역사의 본질을 묻는 역사철학서이다. 19세기에는 역사란 곧 사실의 열거라는 등식이 성립되었고 또 역사란 진보를 향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역사가 무엇이냐고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두 번의 대전을 거치고 또 「서구의 몰락」이라는 말이 인용부호가 필요없을 정도로 흔하게 되어버리자, 과연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여 노석학인 Carr교수가 역사에 대하여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한데 모아 6차례의 강의로 풀어나갔는데, 본서는 그 강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우리들이 역사철학이라고 하면 철학을 연상하기 쉬운데 이 책은 전혀 각도를 달리하여 아주 평이하고 대중적인 태도로 역사이론을 풀어 나가고 있다.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어 나갈 때에도 이론을 펼쳐 보이겠다는 현학적인 태도라든가 추상개념 을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따위의 고답적인 자세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역사가와 사실」, 「사회와 개인」, 「역사의 인과관계」 등의 제 문제를 다룸에 있어 역사상의 구체적인 사실을 적절히 인용하며 자세하게 설명할 때는 마치 그의 육성을 들으며 강의를 듣고 있는 듯한 친근감을 느끼게 해준다. 저자는 "역사책을 읽으면 거기에서 나는 소리에 항상 귀기울여라.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당신이 음치이거나 그 역사가가 재미없는 녀석이다. "라고 말했는데, 본서를 읽으면 반드시 그 소리가 들릴 것이니 한 자 한 자 정독하여 그 깊은 뜻을 음미해 보기 바란다. 편집상 일부 내용을 생략하였으나 본서의 핵심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줄 안다.

  차례

The Historian and His Facts (역사가와 사실)
Society and the Individual(사회와 개인)
History, Science, and Morality (역사와 과학과 도덕)
Causation in History(역사의 인과관계)
History as Progress(진보로서의 역사) T
he Widening Horizon(넓혀지는 지평선)

    역사가와 사실

역사란 무엇인가? 누구도 이 질문을 무의미하다거나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나는 주제로 「재임브리지 근대사」의 제 1차와제 2차의 간행에 관련된 두 개의 문장을 인용하고자 한다. 여기에 액튼이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의 평의회에 보낸 1896년 10월의 보고서가 있는데 그는 이 보고서를 통해 자기가 편집하기로 한 작업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것은 19세기가 남기려고 하는 모든 지식을 가장 많은 사람에게 유용한 방식으로 기록할 수 있는 좋은 한 기회이다. 현명하게 작업을 나눔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해낼 수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최근의 문서와 국제적 연구에서 얻어진 가장 원숙한 결론을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 세대에는 궁극적인 역사를 가질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재래의 역사를 청산하고 하나의 역사에서 다른 하나의 역사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도달한 경지를 보여줄 수 있다. 이제 모든 정보가 입수될 수 있고 모든 문제가 해결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의 정확하게 60년 후에 제 2차「케임브리지 현대사」의 서문 속에서 죠지 클라크 교수는 액튼과 그의 공동작업자들의 신념에 대해 언젠가는 궁극적인 역사를 제시해낼 수 있으리라고 언급하고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후 세대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전망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작업이 계속되어 새 작업에 밀려나리라고 기대한다. 그들은 과거에 대한 지식이란 한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인간의 생각을 통하여 내려왔고 그들에 의해 가공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과거에 대한 지식이 아무도 바꿀 수 없는 기본적이고 비개성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탐구는 끝이 없기 때문에 일부 조급한 학자들은 회의주의로 도피하거나 적어도 다음과 같은 학설로 도피하는 것이다. 즉 모든 역사적 판단이라는 것은 사람과 그 사람의 관점이 관련되어 있으므로 역사적 판단들이란 것은 이래저래 서로가 마찬가지이며 "객관적" 역사의 진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학들이 이와 같이 명백하게 의견이 대립되어 있으니 이 분야는 연구의 대상이 된다. 나는 1890년대에 쓰여진 것은 모두가 헛소리임에 틀림없다고 인식할 정도로 충분히 현대적이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나는 1950년대에 쓰여진 것이면 반드시 이치에 맞는다는 견해를 가질 만큼 진보한 사람도 아니다. 정말로 이러한 연구는 역사의 성질이라는 주제보다는 좀더 광범위한 주제로 빠져들기 쉽다는 것을 여러분은 벌써 생각했을 것이다. 액튼과 죠지 클라크 경 사이의 의견대립은 이 두 주장간의 시대차이에서 오는, 사회를 바라다보는 전체적 시각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액튼은 빅토리아여왕 후기시대의 적극적인 신념과 명석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며 죠지 클라크 경은 짓밟힌 세대의 당혹함과 혼란한 회의주의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린가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하려고 하면, 그 대답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우리들의 시대적 위치를 반영하게 되고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견해를 갖고 있는가 하는 더 광범위한 질문에 대한 답변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주제가 자세히 검토해보면 사소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하지 않는다. 단지 이와 같이 광대하고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이 아닌가 하고 걱정될 뿐이다.

  19세기는 사실을 탐구하는 위대한 시기였다. 서적 어려운 시절 에서 그래드라인드 씨는 말하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만이 인생에서 필요하다." 19세기의 역사가는 대체로 그러한 생각이었다. 랑케는 1830년대에 도덕적 역사학에 대해 근거있는 항의를 하며 역사가의 임무는 "단지 실제로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별로 신통하지 못한 이 경구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근 90년 동안 독일과 영국 심지어는 프랑스의 역사가들까지 이 마력적인 말 "단지 실제로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을 주문처럼 외치며 진군하였는데, 대부분의 주문이 그런 것처럼 이 주문은 스스로 생각하는 지겨운 의무로부터 그들을 구제하려는 것이었다. 과학으로서의 역사를 열렬히 주장하던 실증주의자들도 이 사실학파들에게 자기들의 영향력을 보태어 주었다. 실증주의자들은 말했다. 먼저 사실을 탐구하라, 그리고 그 사실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라. 영국에서는 이러한 역사관이 록크로부터 버트란드 러셀에 이르기까지 영국 철학의 큰 줄기를 이루는 경험론적 전통과 완전히 일치하였다. 지식의 경험론적 이론은 주체와 객체사이의 완벽한 분리를 전제조건으로 한다. 사실이란 감각적 인상과 마찬가지로 외부로부터 관찰자에게 부딪쳐 오는 것이며, 그의 의식과는 별개의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과정은 수동적인 것이다. 자료를 받아들여야만 그는 그 자료에 반응한다. 「옥스포드 영어 소사전」은 유용하기는 하지만 경험학파의 영향력이 스며 있는 사전인데, 사실을 "결론과는 별개인 경험의 자료"라고 정의하여 두 과정이 서로 별개의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이 소위 상식적인 역사관이다. 역사는 검증된 사실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사실이란 생선장수의 널판지 위에 놓인 생선처럼, 문서나 비문이나 기타 등등으로부터 역사가들에게 제공된다. 역사가는 그것을 수집하여 집으로 가지고 가서 요리를 하여 자기 마음에 드는 방식대로 대접하는 것이다. 식성이 까다로웠던 액튼은 그것을 평범하게 대접하기를 원했다. 초판「케임브리지현대사」의 기고가들에게 보내는 지시 서한에서 액튼은 요구사항을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워털루 전투를 기술한 것이 프랑스, 영국, 독일 그리고 화란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저자들의 명단을 점검하지 않고는 아무도 옥스포드 주교가 어디서 붓을 놓았고 페어베언, 가스켓, 리버만 또는 해리슨이 어디서 그 붓을 계속했는지를 모르게 해야 한다. " 액튼의 태도에 비판적이었던 죠지 클라크 경조차도 역사에 있어 "사실이라는 딱딱한 씨"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해석이라는 의심스러운 과육을 대조하였다. 아마도 그는 과일의 과육 부분이 딱딱한 씨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듯하다. 먼저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나서 해석이라는 움직이는 모래 속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라-이것이 경험론적 상식적 역사학파의 궁극적 견해였다. 이것은 위대한 자유주의적 언론가였던 C.P. 스코트의 유명한 문구를 연상시킨다. "사실은 신성하고 의견은 제멋대로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이제 분명히 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과거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본질에 관하여 철학적 토론을 벌이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의 목적을 위하여 시저가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사실과 방 한가운데 탁자가 있다는 사실을 같거나 유사한 사실이라고 가정하자. 이 두 사실은 같거나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들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동일한 객관적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이 대담하고 별로 그럴 듯하지 않은 가정에서조차도 우리의 주장은 곧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된다. 즉 과거에 대한 모든 사실이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며 또 역사가가 그렇게 취급해 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실 중에서 역사적 사실을 구분해내는 기준은 무엇인가?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가 좀더 면밀하게 살펴 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상식적 견해에 따르면, 모든 역사가가 동일하게 취급하고, 말하자면 역사의 중추를 이루는 기본적인 사실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헤스팅스 전투는 1066년에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두 가지의 고찰을 요구한다. 먼저 역사가가 일차적으로 관심이 있는 것은 이와같은 사실들이 아니다. 그 유명한 전투가 1065년이 나 1067년이 아니고 1066년에 벌어졌으며 이스트번이나 브라이튼이 아니고 헤스팅스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중요하다. 역사가는 이러한 사실을 틀려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문제가 제기될 때 나는 "정확은 의무이지 미덕이 아니다"라는 하우스만의 말을 상기하게 된다. 정확하다고 해서 역사가를 칭찬하는 것은, 집을 짓는데 건축기사가 잘'말린 나무를 썼다거나 잘 반죽된 콘크리트를 사용했다고 칭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의 작업상 필요한 조건일 뿐이지 본질적 기능은 아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역사가는 역사학의 "보조학문"인 고고학, 금석문학, 고전학, 연대학 따위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도자기나 대리석파편의 출처와 연대를 결정하고, 불분명한 비문을 해독하고, 정밀한 천문학적 계산을 하여 정확한 날짜를 확립하는 전문가적인 특별한 기술을 역사가는 가질 필요가 없다. 모든 역사가에게 동일한 소위 기본적인 사실이라는 것은 역사가가 사용하는 가공되지 않은 재료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지 역사 그 자체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고찰은 이러한 기본적 사실을 확립해야 하는 필요는, 사실 그 자체의 성질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내리는 선험적인 결정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C.P. 스코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모든 언론인들은 언론에 영향을 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적절한 사실의 선택과 배열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이 스스로 말한다고 얘기된 적도 있었다. 물론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역사가들이 사실을 찾아줄 때에만 사실은 발언한다. 어떤 순서로, 또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실에 발언권을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역사가인 것이다. 사실이란 자루와 같아서 그 안에 무엇을 넣기 전에는 서지 않는다- 라고 말한 사람은 피란델로의 작중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헤스팅스 전투가1066년에 벌어졌다는 것을 알고자 하는 유일한 이유는 역사가가 그것을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시저가 루비콘이라는 작은 강을 건넜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결정한다. 한편 그전 또는 그후 수백만의 사람이 루비콘 강을 건넜어도 그것은 아무런 흥미도 끌지 못한다. 여러분이 30분전에 걸어서 혹은 자전거를 타고 혹은 차를 타고 이 건물에 도착한 사실은 시저가 루비론 강을 건넜던 것처럼 과거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아마도 역사가에 의해 무시될 것이다. 탤코트 파슨스 교수는 과학을 "실재에 대한 인식방향의 선택적 체계"라고 말했다. 이것은 아마도 좀더 쉽게 표현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역사는 다른 학문들보다도 선택적인 학문이다. 역사가는 선택적이 될 수밖에 없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딱딱한 씨는 역사가의 해석과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은 앞뒤가 맞지 않는 오류이지만 이 오류를 뿌리뽑기는 매우 어렵다.

  과거의 단순한 사실이 역사적 사실로 바뀌는 과정을 살펴보자. 1850년 스탤리브릿지 웨이크스라
는 곳에서 한 생강빵장수가 사소한 말다툼 끝에 성난 군중에 의해 의도적으로 밟혀 죽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가? 일년 전이라면 나는 주저 없이 "아니다." 라고 했을 것이다. 이 사건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회고록 속에서 목격자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이 역사가에 의해 가치있다고 판단 되리라곤 예상하지 않았었다. 일년 전에 키트슨 클라크 박사가 옥스포드 대학의 포드기념강연에서 이 사실을 인용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 되는가? 아직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재의 상태는, 내 생각으로, 역사적 사실이라는 고급 클럽의 회원 후보로 추천된 셈이다. 그것은 지금 지지자와 후원자를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앞으로 수 년 동안 이 사실이 19세기 영국에 대한 책자나 기사에, 처음에는 각주에 나오다가 다음에는 본문에 나을 것이다. 20~30년 내에는 이 사실이 잘 확립된 역사적 사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아무도 이 사실을 거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과거에 대한 비역사적 사실로서 망각에 빠져버릴 텐데, 키트슨 클라크 박사가 용감하게 그것을 그 망각으로부터 구출해 내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경우 중에 어떤 경우가 발생될 것이라고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생각으로는, 키트슨 클라크 박사가 이 사건을 인용한 논문이나 해석이 다른 역사가들에 의해 타당하고 중요하다고 받아들여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지위는 해석이라는 문제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 해석의 문제가 모든 역사적 사실에 개입한다. 개인적인 추억담을 얘기하려는데 너그러이 이해해주기 바란다. 수년 전에 내가 이 대학에서 고대사를 공부하고 있을 때 나는 "페르샤 전쟁 시대의 그리스" 라는 특별 주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나는 서가에다 15~20권의 책을 수집하여 놓고 나서 나의 주제에 관련된 사실이 이 책들 속에 다 기록되어 있으리라고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그 책들이 그 당시에 알려져 있고 알 수 있었던 모든 사실을 포함하였다- 하는 것은 아주 사실에 가까운 것인데 -고 가정하자. 어떤 경로와 마멸과정을 거쳐서, 누구에게인가 알려져 있던 수많은 사실 중에서 이 자세하게 수집된 사실이 살아 남아서 역사적 사실이 되었는가를 조사해 볼 생각은 나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날에 조차도 고대사와 중세사의 매력은 우리가 처분 가능한 범위 내에 모든 사실이 있다는 환상을 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알려져 있는 몇 개 안되는 사실이 모두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과거의 사실을 구분하는 귀찮은 일이 사라져 버린다. 두 시대의 역사를 모두 연구한 뷰리가 말했듯이," 고대사와중세사의 기록은 탈락된 부분으로 점철되어 있다." 역사는 탈락된 부분이 많은 거대한 그림맞추기 놀이라고 불리워져 왔다. 그러나 가장 골치 거리는 탈락된 부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서기 전 5세기 시대의 그리스에 대한 그림은, 일차적으로 많은 조각 그림이 우연히 손실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대체로 보아, 당시 아테네시에 살고 있던 소수의 사람에 의해 그 그림이 그려졌기 때문에 결함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5세기 당시의 아테네 주민들에게 보이던 그리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다. 그러나 그것이 페르시아 사람이나, 노예나, 아테네의 시민이 아닌 사람들은 차치하고라도 스파르타 사람이나, 코린트사람, 또는 테베사람 에게는 어떻게 보였는지 거의 아는 것이 없다. 우리들의 그림은, 우연이라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견해와 그 견해를 뒷받침 하는 사실만이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미리 선택되고 결정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세에 대한 요사이의 역사책에서 중세 사람들은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읽을 때, 나는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이것이 사실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우리가 중세사의 역사적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거의모두가 수세대에 걸친 연대기작가에 의해 선택되었다. 그들은 종교의 이론과 실천에 전문적으로 종사했던 사람으로서 종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므로 그에 관한 것이라면 모두 기록하고 그 이외의 것은 별로 많이 기록하지 않았다. 독실하게 신앙이 깊은 러시아 농민의 모습은 1917년의 혁명에 의해 파괴되었다. 독실하게 신앙심 깊은 중세 사람의 모습은, 사실이든 아니든, 파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세 사람에 관해 알려져 있는 거의 모든 사실이, 자기도 그렇다고 믿고 남들도 그렇게 믿기를 바라는 사람들에 의해서 사전에 선택이 되었고, 그와는 반대되는 증거를 찾아볼 수도 있는 많은 사실들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지나간 세대의 역사가, 필경사, 연대기작가의 죽은 손이 반박할 수 없게끔 과거의 모습을 결정해버렸다. 그 자신이 중세사가로 훈련을 받았던 바라클로우 교수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우리가 읽고 있는 역사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전혀 실제의 사실은 아니고 일련의 받아들여진 판단인 것이다. 이제 다르기는 하지만 똑같이 심각한 현대 역사가의 곤경에 주의를 돌려 보자. 고대사나 중세사를 다루는 역사가는 그가 처리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의 덩어리를 수년에 걸쳐 만들어낸 광범위한 선택과정을 감사해 할 것이다. 리튼 스트래치가 장난스럽게 말했듯이, "무지함이 역사가의 첫번째 필수요건이다. 그 무지함이란 단순하게 하고 명백하게 하고, 선택하고 생략하는 것이다.

" 가끔 고대사나 중세사를 쓰고 있는 동료들의 남다른 자신감을 부러워하지만 그들이 그와 같이 자신에 넘치는 것은 대체로 그들이 다루는 주제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면 위안을 얻는다. 현대사를 다루는 역사가는 이와 같이 미리 정해진 무지의 혜택을 전혀 볼 수 없다. 그는 스스로 이 필요한 무지를 개발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는 그가 살고 있는 시대에 가까이 오게 된다. 그는 몇 개 되지 않는 중대한 사실을 발견하여 역사적 사실을 만들고 또 중요하지 않은 많은 사건을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버리는 두 가지의 임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란 최대한으로 많은 숫자의 반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의 편집이라고 주장하던 19세기 이단설의 정반대인 것이다. 이러한 이단설에 굴복하는 사람은, 역사를 신통찰은 것으로 포기하고 우표수집이나 기타 고물수집을 하거나 또는 정신병원에 가거나 둘 중의 하나를 해야된다. 이 이단설은 지나간 백년 동안 현대 역사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독일, 영국, 그리고 미국에서는 무미건조하게 사실만을 중시하며 미세한 부분을 전공한 역사가, 더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사실 더 아는 것이 없는, 사실이라는 바다 속에 흔적도 없이 가라앉는 자칭역사가들이 수도 없이 대량으로 생산된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역사가 액튼을 좌절시킨 것은-자유주의와 가톨릭 사이의 충성심의 갈등이라기보다는-이러한 이단설 이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초기 논문에서 그는 스승인 될링거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불완전한 자료를 가지고는 쓰지를 않았으며 그에게 있어서 자료는 언제나 불완전했다. " 액튼은 여기서 분명하게 자기 자신에 대한 예언적인 판결을 하였다. 것은 이 대학 역사 이래 현대사에서 가장 훌륭한 흠정교수라고 많은 사람에 의해 인정되면서도 역사책을 쓰지 않았던 역사가의 이상스런 현상에 대한 판결이었다. 액튼은 그가 죽고 난 직후에 발간된 「케임브리지 현대사」제 1권의 서문에다 그 자신의 묘비명 같은 문구를 써넣었다. 그는 역사가를 강박하는 요구사항이 "그 자신을 문필가에서 백과전서 편집자로 변신시킬 것을 강요하고 있다"고 슬퍼하였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잘못된 것은 이 끈질기고 끝도 없는 사실의 축적이 역사의 근본이라는 신념-사실이 스스로 말하고 아무리 많은 사실이 있어도 늘 부족하다는 그 신념에 있었다. 이 신념은 그 당시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어떤 역사가도-오늘날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자기 자신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세기의 사실숭배주의는 문서숭배주의로 완성되고 정당화되었다. 문서는 사실이라는 사원에서 성스러운 계율이었다. 경건한 역사가는 고개를 숙이고 문서에 접근하였으며 두려운 목소리로 그것을 말했다. 문서에 그렇게 쐬어 있으면 그렇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볼 경우, 이 문서들-법령, 조약, 지세대장, 청서, 공식서한, 사신, 일기 -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인가?

어떠한 문서도 그 문서의 저자가 생각한 것 이상을 우리에게 말할 수는 없다-그가 발생하였다고 생각한 것, 발생해야 마땅하거나 발생하리라고 생각한 것, 또는 남들이 자기가 생각한 대로 생각하기를 바라는 것, 그가 생각하였다고 생각한 것 이상을 말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역사가가 그것을 연구하여 해독할 때까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실들이 문서에 기재되어 있건 없건 간에 역사가는 그것들을 가공해야만 비로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역사가가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은(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가공하는 과정인 것이다. 내가 잘 아는 예를 들어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겠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상이었던 구스타프 스트레제만이 1929년에 죽었을 때, 그는 외상 임기 6년 동안에 관련된 거의 모든 공식문서, 준공식문서, 사신 등-300상자 가득히-방대한 분량의 문서를 남겼다. 그의 친지와 친척들은 이와 같이 위대한 사람을 기억하기 위하여 당연히 기념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충실한 비서였던 베른하르트가 작업에 착수했다.

3년만에 300상자로부터 추려진 문서가 각 권약 600페이지씩 3권의 방대한 책으로 나왔는데 「스트레제만의 유산」이라는 인상적인 제목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 문서들은 지하실이나 다락에서 썩다가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아니면 아마도 한 백년쫌 있다가 호기심 많은 어떤 학자가 그것을 발견하고 베른하르트의 책과 비교해 볼 것이다. 실제로 발생했던 것은 휠씬 더 극적이다. 1345년에 그 문서는 영국과 미국 정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양국 정부는 그 문서를 사진으로 찍어서 복사사진을 런던의 기록보관소와 워싱톤의 국립문서 보관소에 비치하고 학자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충분히 끈기 있고 호기 심 이 강하다면 우리는 베른하르트가 해놓은 것을 정확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가 해놓은 것은 매우 이상하다거나 매우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스트레제만이 죽었을 때, 그의 서방정책은 일련의 빛나는 성공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르카르노조약, 독일의 국제연맹 가입, 도오즈 안과 영 안, 미국의 차관, 연합국 점령군의 라인랜드로부터의 철수 둥이 그것이다.

이것은 스트레제만 외교정책의 중요하고 값어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점들이 베른하르트의 문서 선택에 있어서 지나치게 강조되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얼다. 한편, 스트래재만의 동방정책, 즉 소련과의 관계는 특별한 소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소한 결과를 낳았던 협상에 대한 방대한 문서는 흥미도 없었을 뿐더러 스트레제만의 명성에 아무것도 보태어 주지 못하였으므로, 선택의 과정은 보다 더 엄격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스테래제만은 소련과의 관계에 보다 더 지속적이고 초조하게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 대소관계는 베른하르트가 선별한 문서집의 독자가 상상하는 것보다 그의 전체 외교정책에 휠씬 더 큰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베른하르트의 책은 일반 역사가들이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많은 출판된 문서집 보다는 나은 편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이 내 얘기의 끝은 아니다. 베른하르트의 책이 출간된 직후에 히틀러가 집권하였다. 스트레제만의 이름이 독일에서는 잊혀졌고 그 책들은 유포 중지되었다. 그 책들은 수도 없이 아마도 거의 전부가 파기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스트래제만의 유산」은 다소 희귀한 책이다. 그러나 서방세계에서는 스트레제만의 명성이 높았다. 1935년에 한 영국의 출판사가 베른하르트 책의 축소판을 내놓았다. 베른하르트의 책에서 다시 추린 것인데 아마도 3분의 1정도가 생략되었을 것이다. 유명한 독일어 번역가인 사튼이 그 일을 적절하게 잘 해내었다. 그는 서문에서 설명하기를 영문판은 "약간 축소가 되었는데, 별것 아닌 부분 일부와 영국의 독자나 학생들에게 흥미가 없을 부분만 생략되었다. "이것 또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피 결과는, 이미 베른하르트의 책에서 지나치게 무시되어 있던 스트레제만의 동방정책이 더욱 더 고려에서 멀어져서, 소련은 사튼의 책에서는 스트레제만의 서방 중심 외교정책 속에 가끔 그리고 반갑지 않게 끼어드는 침입자 같이 비쳐지고 있는 꼴이 되었다. 그러니 소수의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스트레제만의 진정한 목소리를 서방세계에 대표하고 있는 사람은 베른하르트도 아니고, 문서 그 자체는 더욱 아니며, 결국은 사튼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1945년 폭격에 의해 원문서가 없어졌거나 남아 있던 베른하르트의 책이 사라졌더라면 사튼의 신빙성과 권위는 의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원본이 없기 때문에 역사가들에 의해 감사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많은 인쇄본 문서집도 이 이상의 안전한 근거 위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를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다. 베른하르트와 사튼은 잊어버리자. 현대유럽사의 중요한 사건에 지도자로 참여했던 사람의 문서를 우리가 필요하다면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 그 문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무엇보다도 그 문서는 베를린 주재 소련 대사와의 수백회에 걸친 스트레제만의 대화, 그리고 치체린과의 20회 이상의 대화를 기록으로 담고 있다. 이 기록은 공통되는 특성이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스트레제만이 대화를 주도하고 그의 주장을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펼친 반면, 그의 상대자는 말이 적고 앞뒤가 안맞으며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모든 외교적 대화에는 이와 같은 낯익은 특징이 있다.

그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제만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것, 그가 다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기를 원했던 것, 또는 그 자신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기를 바랬던 것 등만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선택의 과정을 시작했던 것은 사튼이 나 베른하르트가 아니 고 스트레제만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 동일한 대화들에 대한 치체린의 기록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고것으로부터 치체린이 생각했던 것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발생했던 것은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재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사실과 문서는 역사가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숭배하지는 말라. 그것 자체가 역사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넌더리 나는 질문에 즉석에서 대답을 하여주지는 않는다.

  이 시점에서 나는 왜 19세기 역사가들이 일반적으로 역사철학에 무관심하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하고자 한다. 역사철학이라는 용어는 볼테르가 만들어 낸 말인데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내가 그 말을 사용한다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겠다. 서유럽의 지성인에게 있어서 19세기는 자신감과 낙관론을 안겨 주는 편안한 시대였다. 사실들은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사실에 대한 곤란한 질문을 묻고 답변하려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랑케는 사실만 잘 간수하면 신성하고 성스러운 하느님께서 역사의 의미를 보살펴 주시리라고 경건하게 믿었다. 부르크하르트는 보다 더 현대화된 냉소주의의 기미를 내보이며 "우리는 영원한 지혜의 목적을 주도할 수 없다." 고 말하였다.

1931년경의 버터필드 교수는 아주 만족스럽게" 역사가들은 사물의 성질과 자기가 다루고 있는 주제의 성질조차도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라고 기술했다. 그러나 이 강연에서 나의 선임자인 A.L. 로우즈 박사는 제 1차 세계대전을 다룬 윈스턴 처칠의 「세계의 위기」라는 책에 대해서 아주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며 비판하였다. 이 책은 개성, 명석함, 생동감 등에서는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에 버금가지만 그것은 단 한 가지"역사철학이 없다"는 점에서 부족하다고 하였다. 영국의 역사가들은 역사가 무의미하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 의미가 묵시적이고 자명하다고 믿기 때문에,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끌려들어가기를 거부하였다. 자유주의적인 19세기 역사관은 세계를 평화롭고 자신에 차서 바라다보는 사상의 산물인 자유방임의 경제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다. 모든 사람이 그 자신의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하게 하라.

그러면 감추어진 손이 우주의 질서를 관장하리라.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보다 더 높은 것을 향한 자비롭고 무한한 발전이 존재한다는 지고한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순진한 시대였다. 역사가들은 역사의 신 앞에서 알몸인 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들을 가려 줄 한오라기의 철학도 없이 에덴동산을 거닐었다. 그때 이후 우리는 죄를 알고 타락을 경험했다. 오늘날 역사철학이 없어도 괜찮은 척하는 역사가들은 단지 헛되이, 반쯤은 의식적으로 나체촌의 회원처럼 자기들의 정원이 있는 교외에서 에덴동산을 재창조하려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 그 난처한 질문은 더이상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나간 50년 동안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많은 진지한 작업이 진행되었다. 역사적 사실은 우월하고 자율적이라는 원칙에 대하여 첫 번째 도전이 1880년대와 1890년대에 독일에서 일어났다. 독일은 19세기 자유주의의 안락한 지배를 온통 뒤흔들어 놓은 나라가 된다. 도전을 제기했던 철학자들은 지금은 이름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 딜타이가 그 중에 유일한 사람으로서 영국에서 때늦은 인정을 받고 있다. 금세기가 시작되기 전, 이 나라에서는 아직도 번영과 자신감이 넘쳐날 정도로 컸기 때문에 사실 예찬을 공격하는 이단자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금세기 초에 그 횃불이 이태리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크로체가 독일인 스승들의 영향을 받은 역사철학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라고 크로체는 선언했다.

이것은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과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주된 임무는 기록이 아니라 평가라는 것을 의미했다. 역사가가 평가하지  않는다면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1910년에 미국의 철학자 칼 베커가 고의적으로 도전하는 듯할 언어로 "역사적인 사실은 역사가가 그것을 창조할 때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이 도전은 그 당시 별로 주목을 끌지 못했다. 크로체가 프랑스와 영국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도1920년 이후의 일이었다. 이것은 크로체가 자기의 독일인 선배들보다 심오한 사상가이거나 더 나은 문장가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세계 1차대전 이후에 사실들은 1914년의 이전 시대보다는 상서롭게 보이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우리가 사실들의 권위를 감소시키는 철학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로체는 옥스포드 철학자이며 금세기의 역사철학에 중대한 기여를 한 유일한 영국사상가요 역사가인 콜링우드에게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콜링우드는 자신이 계획했던 체계적인 논문을 쓸 만큼 오래 살지는 못했다. 그의 사후에 발표 또는 미발표된 논문들이 "역사의 이상"이라는 책속에 묶여져 1945년에 간행되었다.  콜링우드의 견해는 아래와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역사철학은 "과거 그 자체"나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생각 그 자체"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양자의 상관관계"와 관련이 있다. (이 용어는 "역사"라는 용어의 두 가지 의미, 즉 역사가의 연구와 그가 연구하는 일련의 과거 사실을 반영한다. ) "역사가가 연구하는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고 어떤 의미로 볼 때 현재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과거이다." 역사가가 과거의 행동 뒤에 숨어 있는 생각을 이해할 수 없으면 과거의 행동은 역사가에게는 죽은, 즉 무의미한 것이다. 이리하여 "모든 역사는 생각의 역사"이며 "역사란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그가 연구하는 역사에 대한 생각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역사가가 마음속에 과거를 재구성하려면 경험적 근거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재구성 과정은 그 자체가 경험적 과정이 아니며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재구성이라는 과정은 사실을 선택하고 해석하는 것을 관장한다. 이 재구성 과정이야말로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만드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콜링우드와 가까운 입장에 있는 오우크스쇼트교수는 말한다. "역사란 역사가의 경험이다. 그것은 역사가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다. 역사책을 쓴다는 것만이 역사를 만드는 유일한 길인 것 이다."

  이 탐구적인 비평은 몇 가지 중대한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무시되었던 진리를 살아나게 하였다.
  먼저 역사적 사실은 "순수한 상태"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순수한 상태로는 존재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기록자의 마음속에서 굴절된다. 당연히 우리가 역사책을 집어들 때 첫 번째 관심은 거기에 포함된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쓴 역사가에게 있다. 하나의 예로서, 그의 명예와 이름을 기념하여 이 강연이 마련된 저 위대한 역사가를 들어 보자. 자서전에 쓰여 있는 바와같이 트레벨리안은 "다소 휘그적인 전통이 강한 가정에서 자랐다. " 내가 그를 휘그 전통에 입각한 마지막 위대한 영국의 자유주의 역사가라고 해도 그는 이 묘사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휘그 전통의 위대한 역사가인 죠지 오토 트레벨리안으로부터 비교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가장 위대한 휘그 역사가인 머콜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가계를 되짚어간 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니었다. 트레벨리안 박사의 가장 훌륭하고 원숙한 저서인 「앤 여왕하의 영국」은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읽혀져야만 독자는 그 풍성한 의미와 중요성을 알게 된다. 실제로 저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하고 있다.

탐정소설 애독자가 하는 방식을 따라서 그 책의 마지막 부분을 먼저 읽어 보라. 당신은재 3권의 마지막 몇 페이지에 오늘날 이야기하는 역사의 휘그적 해석에 대한 가장 좋은 요약(내가 판단하기로는)이 들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트레벨리안이 시도하는 것은 휘그 전통의 기원과 발전을 탐구하고 휘그의 창시자인 월리엄 3세 사후 수년 동안에 공명정대하게 휘그전통을 비호하자는 것임을 당신은 알 수 있게 된다. 비록 이 저서가 앤 여왕 치세시의 사건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유일한 해석은 아닐지라도 이 저서는 타당한 해석을 하고 있으며 트레벨리안의 손을 빌어 유용한 해석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저서를 액면 그대로 감상하려면 그 역사가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콜링우드가 말한 대로 역사가가 그의 극중인물의 마음속에 있던 것을 생각속에 재구성한 것처럼, 독자도 그의 차례로 역사가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재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연구하기에 앞서 역사가를 연구하라. 따지고 보면 이것은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것은 똑똑한 학부학생이라면 벌써 행하고 있는 일이다. 세인트 쥬드 대학의 위대한 학자인 죤스의 저서를 읽으라고 추천을 받으면 그 학부학생은 세인트 쥬드 대학에 있는 친구에게로 가서 죤스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골몰하여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물어 본다. 역사책을 읽을 때면 거기에서 울리는 소리에 항상 귀를 기울이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면 당신이 음치이거나 그 역사가가 재미없는 녀석이다. 사실이란 정말로 생선장사의 널판지 위에 놓인 생선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때로는 접근할 수 없는 대양에서 혜엄치는 고기와 같은 것이다. 역사가가 사실을 건져 올리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우연에 의존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가 고기를 잡고자 하는 곳이 대양의 어느 부분이며 그가 사용하는 수법이 어떤 것인가에 달려 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물론 역사가가 잡고자 하는 고기의 종류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대체로 역사가는 그가 원하는 종류의 사실을 얻게 될 것이다. 역사는 해석을 의미한다. 만일 내가 죠지 클라크 경의 말을 거꾸로 말하여 역사를 "의심스러운 사실이라는 과육에 둘러싸인 해석이라는 딱딱한 씨" 라고 말하면 나의 말은 틀림없이 일방적이고 오해를 일으킬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원래의 말보다 더 일방적이고 오해를 일으킨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두번째 요점은 보다 낯익은 것으로서 역사가는 자기가 다루는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행동 뒤에 숨어 있는 생각을 상상력이 풍부하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상상력이 풍부한 이해" 라고 하였지 "동정"이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동정이라고 하면 동의를 내포하는 것 같이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세기는 중세가 약했다. 왜냐하면 19세기는 중세의 미신적 신념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야만성에 환멸을 느껴 중세 사람들에 대하여 상상력이 풍부하게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는 30년 전쟁에 대한 부르크하르트의 비난하는 말투를 예로 들어 보자. "구교건 신교건 종교적 신념의 구제를 국가의 안전보다 우선하게 한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살인을 하는 것은 옳바르고 찬상할 일이지만 종교를 수호하기 위해 살인하는 것은 사악하고 잘못된 생각이라고 교육을 받은 19세기의 자유주의 역사가가 30년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이 어려움은 내가 지금 작업을 하고 있는 분야에서는 더욱 뚜렷하다. 지나간 10년 동안에 영어권의 나라에서 소련에 관해 쓰여진 대부분의 자료와 소련에서 영어권의 나라에 대해 쓰여진 자료의 대부분은 가치가 손상되었는데, 서로 상대방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상상력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안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서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은 반드시 사악하고 무의미하고 또는 위선적이라고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역사가가 쓰고자하는 사람의 마음과 접촉을 이를 수 없다면 역사는 쓰여질 수 없다.

  세번째 요점은 우리가 현재의 눈을 통하여서만 과거를 볼 수 있고 과거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가는 그 시대의 사람이고 인간이 존재하는데 부수되는 여러 조건에 의해 그 시대에 매이게 된다. 그가 사용하는 말들- 민주주의, 제국, 전쟁, 혁명 같은- 도 그가 헤어질 수 없는 현재의 시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사 역사가들은 이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도시나 평민 같은 원어를 사용했다. 이렇게 하여도 그들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들도 또한 현재에 살고 있으며 낯설은 또는 폐어가 된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그들이 클라미스나 토가를 걸치고 강의를 한다고 해서 더 나은 그리스사나 로마사의 역사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역대의 프랑스 역사가들이 프랑스 혁명에서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한 파리시의 군중을 부르는 말들-과격공화파, 대중(민중), 하층계급, 헐벗은 일꾼-은 그 말들의 내용을 잘 아는 사람이 본다면 모두 정치적 결연과 특정한 해석을 밝혀주는 말들이다. 그러나 역사가는 선택해야만 한다. 언어의 사용은 역사가가 중립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단어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100년 동안 유럽에서 세력의 균형이 바뀌자 영국역사가들이 프레데릭 대제를 쳐다보는 태도가 일변했다. 구교와 신교의 교회내에서 세력의 균형이 바뀌어 로욜라, 루터 그리고 크롬웰 같은 인물에 대한 영국 역사가들의 태도를 심원하게 변하게 했다. 지나간 40년 동안의 프랑스 역사가들의 작업에 대해 피상적으로나마 알고 있으면 그것이 얼마나 1917년의 러시아혁명에 의해 영향 받았는가를 알 수 있다. 역사가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속해 있다. 트레보- 로퍼 교수는 역사가는 "과거를 사랑해야 한다. "고 말한다. 이것은 의심스러운 명령이다. 과거를 사랑한다는 것은 늙은 사람이나 늙은 사회가 가지고 있는 향수 어린 낭만주의를 손쉽게 표시하는 것이고 현재나 미래에 대한 믿음과 흥미를 상실하였다는 증상이다. 진부한 말에는 진부한 말로 대답하겠는데 나는 오히려 "과거의 죽은 손"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역사가를 좋아한다. 역사가의 기능은 과거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도 아니다. 역사가의 기능은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로서 과거를 지배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상이 콜링우드 역사관의 통찰력 있는 부분이라면 이제 그 위험을 고려해야 할 때다. 역사를 만드는 데 있어서 역사가의 기능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그 논리적 결론으로서 객관적인 역사를 전적으로 배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는 역사가가 만드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콜링우드도 실제로 어느 순간에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듯 보인다. 그의 편집자가 인용한 미발표 노트를 보면.

  성 오거스틴은 초기 기독교도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았다', 띨르몽은 17세기 프랑스 사람의 관점에서 보았다. 기본은 18세기 영국 사람의 관점에서, 그리고 몸젠은 19세기 독일 사람의 관점에서 보았다. 어떤 것이 옳은 관점인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각각의 관점이 그것을 선택한 사람에게는 유일한 관점이었다.

  이것은 전적인 회의주의에 빠지는 것인데 프루드의 "역사란 우리가 좋아하는 말을 뽑아낼 수 있는 어린애들의 글자 맞추기 판이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콜링우드는 "가위와 풀로 오려 붙이는 역사", 즉사실의 단순한 편집이라는 역사관에 반발하여 위험스럽게도 역사를 인간의 머리에서 뽑아낸 어떤 것이라고 취급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내가 앞에서 인용한 죠지 클라크 경의 문장에서 언급된 결론, 즉 "'객관적인'역사적 진리는 없다." 라는 결론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 무의미하다는 이론 대신에 우리는 역사가 무한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이론을 제시받는데, 어느 것도 더 옳다고 할 수 없으며-결국은 같은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후자의 이론도 전자의 이론과 같이 지지할 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하나의 산이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달라 보인다고 해서 무한한 모습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다. 해석이 역사적 사실의 확립에 필요한 역할을 하고 기존의 해석이 전적으로 객관적이지 않다고 해서, 하나의 해석이 다른 해석과 마찬가지로 훌륭하고 나아가 역사적 사실이 원칙에 있어서 객관적인 해석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중에 역사에 있어서 객관성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콜링우드의 가설에는 보다 더 큰 위험이 숨어 있다. 역사가가 연구하는 역사의 시대를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과거의 문제를 현재의 문제에 대한 열쇠로서 연구한다면, 역사가는 순전히 실용주의적인 관점으로 사실에 접근하게 되고 또 올바른 해석의 기준은 현재의 목적과 부합하는 정도에 따른다 라고 생각하게 되지는 않을까? 이러한 가설 하에서는 역사적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고 해석만이 전부가 된다. 니체는 이미 이러한 원칙을 언명했다. "틀린 의견을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생명을 보존해주고 종족을 보존해주고 더 나아가서는 종족을 창조해주느냐 하는 것이다." 미국의 실용주의자도 니체만큼 분명하고 열렬하지는 않지만 같은 노선을 걸어갔다. 지식이란 어떤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다. 지식의 타당성은 목적의 타당성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이 언명되지 않은 곳에서조차도 이와 같은 이론의 실천은 종종 적지 않은 불안을 주었다. 나의 전공분야에서도 과도한 해석이 사실을 억누르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나는 이 위험한 현실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료편집에 있어서 소비에트 학파와 반 소비에트 학파의 과도한 작업 결과를 읽다 보면 종종 저 공상적인 19세기의 순수사실 역사라는 안식처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20세기의 중간에 있어서 우리는 어떻게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의무를 규정해야 할 것인가? 근년에 나는 문서를 찾아다니고 정독하고 또 역사를 기술할 때 각주가 달린 사실로 채우기 위하여 상당한 시간을 소비했다. 그래서 사실파 문서를 너무 소홀하게 다룬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었다. 사실을 존중해야 하는 역사가의 의무는 사실이 정확한지를 살펴 보았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루고 있는 주제나 재기하려고 하는 해석과 이런저런 의미로 관련이 있는 모든 알려진 또는 알려질 수 있는 사실을 주제의 구도속으로 가져오도록 추구해 한다. 만일 그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국인을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으로 묘사하고자 한다면 그는 1850년에 스탤리브릿지 웨이크스에서 벌어진 일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에는 그가 역사의 가장 요체인 해석을 제거할 수 있다고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외한들은-즉, 학문과 관계없는 친구들이나 또는 다른 학문에 종사하는 친구들-나에게 역사가가 역사책을 쓸 때에는 어떻게 작업하느냐고 묻는다. 가장 흔한 상상은 역사가는 작업을 2개의 뚜렷하게 구분될 수 있는 단계 또는 시기로 나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먼저 그는 자료를 읽고 공책에 사실들을 적어 넣는 긴 예비 시간을 보낸다. 이것이 끝나면 그는 자료를 치워 두고 공책을 꺼내어 들고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써 나간다. 이것은 나에게는 설득력도 없고 그럴 듯 하지도 않은 모습이다. 나로서는 주된 자료라고 생각되는 것이 몇개 입수되자마자 쓰고 싶은 충동이 너무 강해서 반드시 처음부터가 아니라 어디서부터건 써 나가기 시작한다. 그 후에 읽기와 쓰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읽기를 계속하면서 써놓은 것을 더하거나, 빼거나, 형태를 바꾸거나 취소하거나 한다. 읽기는 쓰기에 의해서 안내되고 지도되고 결실을 맺는다. 내가 쓰면 쓸수록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더 잘 알게 되고 내가 발견한 것의 의미와 연관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어떤 역사가들은 이와 같은 예비 집필은 펜, 종이, 또는 타자기로 하지 않고 머리속에서 다 해버리는데 마치 어떤 사람이 장기의 판이나 알이 없이도 머리로 장기를 둘 수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은 내가 부러워하는 재능인데 나는 그것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러나 이름있는 역사가에게 있어서는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입력"과 "출력"의 두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는데 실제에 있어서는 단일과정의 부분들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이것들을 떼어놓으려고 하거나 우선 순위를 매기려고 한다면 두 가지 이단설 중의 하나에 빠지게 된다. 의미도 뜻도 없는 가위와 풀로 오려붙이는 역사를 쓰거나, 또는 선전문구나 역사소설을 쓰면서 단지 과거의 사실을 이용하여 역사와는 관계가 없는 것을 쓰게 될 뿐이다.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고찰은 우리들을 분명히 불확실한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다. 우리들의 입장은 미묘하게도 두 위험지점의 사이에 있다. 즉 역사를 객관적인 편집이라 보고 해석보다는 사실이 무조건 우위에 있다는 타당치 못한 역사이론의 위험지점과, 역사는 역사적 사실을 확립하고 해석과정을 통하여 이를 지배하는 역사가의 마음의 주관적 산물이라고 보는 역시 타당치 못한 위험지점이 그것이다. 또한 우리의 입장은 중심을 과거에 두는 역사관과 중심을 현재에 두는 역사관과의 사이에 놓여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은 보기보다는 덜 불안정하다. 우리는 이 강연의 나중 부분에서 또 다른 형태로 사실과 해석의 동일한 이분법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특수와 일반, 경험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의 이분법이다. 역사가의 곤경이란 인간의 본성을 반영한 것이다 인간은 아주 어린 때와 아주 늙은 때를 제외하고는 환경에 전적으로 몰입하지도 않으며 또 그것에 무조건 굴복하지도 않는다. 한편 인간은 환경으로부터 전적으로 독립되어 있지도 않으며 또 환경의 절대적 지배자도 아니다. 인간의 환경과의 관계는 역사가와 그가 다루는 주제와의 관계이다. 역사가는 그가 다루는 사실의 공손한 노예도 아니고 횡포한 주인도 아니다. 역사가와 사실과의 관계는 동등한, 주고 받는 관계이다. 그가 생각하고 쓰는 도중에 그가 하고 있는 것을 잠시 반성하여 본다면 어느 현역 역사가도 알고 있듯이, 역사가는 그의 해석을 사실에 맞추는 끊임없는 과정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해석과 사실 중 어느 것에다가 우위를 부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가는 그 자신이나 남들이 선택해 놓은 것을 참고하여 잠정적인 사실 선택과 잠정적인 해석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가 작업해 나감에 따라, 사실의 해석과 사실의 선택과 정돈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여 미묘하고, 부분적으로는 무의식적인 변화를 하게 된다. 이 상호작용은 현재와 과거의 상호작용을 포함하기도 하는데 역사가는 현재의 한 부분인 한편 사실은 과거에 속하는 것이다.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이다. 사실의 도움 없는 역사가는 뿌리 없고 쓸모가 없다. 역사가가 없이는 사실은 생명이 없고 무의미하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간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사회와 개인

  사회가 먼저인가 개인이 먼저인가 하는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와 같다. 그것을 논리적인 문제로 논하든, 아니면 역사적인 문제로 논하든 간에, 그것에 대해서 언급을 하게 되면 이렇게든 저렇게든 반대되면서 똑같이 일방적인 언급에 의해 수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와 개인은 불가분의 것이다. 이것들은 서로 필요하고 상호 보완하는 것이지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단의 유명한 말이 있다. "아무도 그 자체로 완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일부이며 본토의 한 부분이다." 이것은 진리의 일면이다. 한편 고전적인 개인주의자 J.S. 밀의 말을 인용해보자. "사람은 한군데 모아 놓았다고 해서 다른 종류의 실체로 변하지는 않는다 " 물론 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데 모여지기" 전에 인간이 존재했고 또 어떤 중류의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류인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세계는 우리에게 작용하기 시작하고 우리들을 단순한 생물적 단위에서 사회적 단위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역사의 모든 단계 또는 선사시대 에서도 모든 인간은 사회 속으로 태어나고 또 아주 어린 나이에서부터 사회에 의해 틀이 만들어진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개인적 유산이 아니라 그가 성장한 집단에서 얻은 사회적 획득물이다. 언어와 환경이 그의 생각내용을 결정하는 데 돕게 된다. 그의 아주 어릴 적 생각은 다른 사람에게서 온 것이다. 이미 잘 언급되었듯이 사회에서 동떨어진 개인은 말이 없고 생각이 없다. 로빈슨 크루소라는 신화의 계속되는 흥미는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개인을 상상하는 노력에 있는 것이다. 그 노력은 실패하고 만다. 로빈슨은 추상적 개인이 아니라 뉴요크에서 온 영국 사람이다. 그는 성경책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종족의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였다. 그 신화에 의하면 그는 부하인 프라이데이를 재빠르게 하사받는다. 그래서 새로운 사회의 구축이 시작되었다. 또 다른 관련된 신화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속의 인물인 키릴로프인데 그는 완벽한 자유를 증명하기 위하여 자살한다. 자살은 개인적인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으로서는 유일하게 완벽하고 자유로운 행동이다. 그 외의 토든 행동은 이렇게 또는 저렇게 그가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미개인은 문명인에 비하여 덜 개인적인 반면, 더욱더 완벽하게 사회에 의하여 만들어진다고 인류학자들은 흔히 말한다. 이것은 일리가 있다. 단순한 사회는 더 획일적인데, 복잡하고 발전된 사회보다 개인의 기술이나 직업의 다양성을 덜 필요로 하고 그런 기회가 적기도 하다는 의미로 볼 때, 더 획일적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증대되는 개인화 현상은 현대의 발전된 사회에 필수적인 결과이며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사회의 모든 행동에 스며져 있다. 그러나 이 개인화의 과정과 사회의 증가하는 힘과 결합력 사이에 대립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다. 사회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병행하는 것이며 서로 조정하는 것이다. 정말로 복잡하거나 또는 발전된 사회란, 개인간의 상호의존이 발전되고 복잡한 양상을 띠는 사회이다. 현대 국가사회가, 그 개개인의 구성원의 성격과 생각을 형성하고 그 구성원간에 어느 정도의 단합성이나 통일성을 만들어 내는 힘이 원시 부족사회보다 미약하다고 가상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국민적 성격을 생물학적 차이에 근거를 둔 구개념은 오래전부터 파괴되었다. 그러나 국민적 성격의 차이가 사회나 교육의 상이한 국민적 배경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인간성"이라는 포착하기 어려운 실체는 나라에 파라 그리고 세기에 따라 너무나도 변화하기 때문에, 것은 지배적인 사회조건이나 인습에 의해 형성된 역사적 현상이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미국인이나, 소련인이나, 인도인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 중의 어떤, 아니 가장 중요한 차이는개인들 간에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에 대하여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가 구성되는 방법에 대하여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로서의 미국, 소련, 인도의 사회간의 차이를 연구하는 것은 개개인의 미국인, 소련인, 인도인의 차이를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된다. 문명인도 미개인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의해서 효과적으로 형성되는데 이것은 사회가 개인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과 같다. 닭이 없이 달걀이 없는 것은 달걀 없이는 닭이 없는 것과 같다.
  이러한 매우 명백한 진리들이 서방세계가 이제 막 빠져나오고 있는 저 경이롭고 예외적인 역사적 시대 때문에 우리들에게 인식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러한 매우 분명한 진리들을 곰곰이 생각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개인주의의 예찬은 가장 만연되어 있는 현대의 역사적 신화 중의 하나이다.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에 있어서의 르네상스문화」의 제 2부는 개인의 발전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유명한 성명에 따르면 개인의 예찬은 르네상스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고 시대에 이르러서 여태까지 "자기 자신을 종족, 사람, 집단, 가족, 또는 단체의 일원으로만 인식하던" 인간이 마침내는 "정신을 가진 개인이 되었고 또 그렇게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 이러한 개인 예찬은 후에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이 생겨나는 것과 관련되고 산업혁명의 시작과 자유방임의 원칙과 관련된다. 프랑스 혁명에 의해 선포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는 개인의 권리였다. 개인주의는 19세기의 위대한 철학인 공리주의의 바탕이 되었다. 몰리의 논문 "타협론"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자유주의를 묘사한 특색을 쓴 문서인데 개인주의와 공리주의를 "인간의 행복과 복지의 종교"라고 하였다. "거친 개인주의"가 인류의 진보의 기본이 되었다. 이것은 특정한 역사적 시대의 이상을 아주 건전하고 타당하게 분석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해두고자 하는 점은 현대 세계의 도래에 수반하여 늘어난 개인화 현상은 발전해 가는 문명의 정상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혁명으로 인해 새로운 사회단체가 권력의 자리를 잡게 되었다. 사회적 혁명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개인을 통해서 그리고 개인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 함으로써 운영되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초기 단계에 생산과 분배의 단위가 대체로 개인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질서의 이상론은, 그 사회 질서 내에서 개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역사적 발전 단계에 있어서 특정한 단계를 나타내는 하나의 사회적 과정이었고, 사회에 대한 개인의 반항 또는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개인이 해방된다는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발전과 이상의 중심이 되는 서방세계에서조차도 이와 같은 역사의 시대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징조가 많이 나타났다. 나는 여기서 소위 대중 민주주의가 발생되었다거나 경제적 생산 및 조직이 개인 위주에서 집단 위주로 점차적으로 대치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길고도 풍요로운 이 시대에 생겨난 이 이상은 여전히 서유럽과 영어권 국가에서는 지배적인 힘이다. 우리가 추상적인 말로 자유와 평등 사이의 긴장 또는 개인적 자유와 사회정의 간의 긴장을 말할 때 싸움은 추상적인 생각 사이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잊어버린다. 싸움이란 개인과 개인간의, 또는 사회와 사회간의 싸움이아니라 사회속에 있는 집단화된 개인간의 싸움이다. 각기의 단체는 자기에게 유리한 사회정책을 추진하려고 하고 적대되는 사회정책은 좌절시키려고 노력한다. 위대한 사회운동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간의 그릇된 대립이라는 의미 때문에 개인주의는 오늘날 이해집단이 내거는 하나의 슬로건이 되었다. 문제성이 많은 개인주의의 본질은 우리가 세계의 움직임을 이해하는데 장애물이 되었다. 개인을 수단으로, 사회나 국가를 목적으로 취급하는 그릇된 생각에 항의하는 표시로서 개인이 예찬 되는데 대해서는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사회 밖에 서 있는 추상적인 개인의 개념을 가지고 시작하려 든다면 우리는 과거나 현재에 대하여 참다운 이해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빗나가버린 내 이야기의 요점을 말하게 되었다. 상식적인 역사관은 역사란 개인이 개인에 대하여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견해는 19세기 자유주의적 역사가들이 받아들이고 격려한 것인데 본질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너무 단순화되고 적당치 못한 것 같아서 좀더 깊이 탐구해볼 필요가 있다. 역사가의 지식은 그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 소유물이 아니다 아마도 수많은 세대의, 그리고 다른 많은 나라들의 사람들이 그 지식을 축적시켜 왔다. 역사가의 연구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진공에서 활약한 고립된 개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나간 사회의 상황과 충동 속에서 행동하였다. 지난번 강연에서 나는 역사란 현재의 역사가와 과거의 사실간의 대화이며 상호작용의 과정이라고 묘사했다. 나는 지금 방정식의 양쪽에 있는 개인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의 상대적 무게를 알아보고자 한다. 역사가란 어느 정도까지 개인이며 어느 정도까지 사회와 시대의산물인가? 역사적 사실은 어디까지가 개인에 대한 사실이며 어디까지가 사회적 사실인가?

  역사가는 개인적인 인간이다. 다른 개인과 마찬가지로 그도 또한 사회적 현상이며 그가 속해 있는 사회의 산물로서 의식을 하든 않하든 간에 그 사회의 대변인이다. 이러한 자격으로 그는 역사적 과거의 사실에 접근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역사의 과정은 "움직이는 행렬"이라고 말한다. 이 비유는 매우 적절하나, 역사가를 외로운 암벽에서 그 행렬을 내려다보는 독수리라거나 또는 사열대 위의 요인이라고 생각하게끔 유혹하지는 말아야 한다. 독수리나 요인이라니 당치도 않다! 역사가는 그 행렬의 한 부분에서 뚜벅뚜벅 걷고 있는 하나의 희미한 존재다. 그 행렬이 굽이쳐서 혹은 오른쪽으로 혹은 왼쪽으로 돌고 때로는 거꾸로 되돌아와서 그 행렬의 다른 부분들이 상대적으로 위치가 항상 바꿔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오늘날의 우리가 1세기 전의우리들 선조보다 더 가까이 중세에 접하고, 또는 시저의 시대가 단테의 시대보다 더 우리들 가까이에 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완전히 사리에 맞는지도 모른다. 행렬이 움직이고 그와 함께 역사가도 움직인다. 이에 따라 새로운 조망과 새로운 시각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역사가는 역자의 한 부분이다. 행렬 속의 역사가가 위치해 있는 지점이 과거를 쳐다보는 그의 시각을 결정한다.

  역사가가 연구하는 시대가 그의 당대와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도 이 이치는 여전히 통용된다. 내가 고대사를 연구하던 시절 그 주제에 대한 고전은-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지만- 그로트의 「그리스사」와 몸젠의 「로마사」였다. 식견 있는 급진적인 은행가였던 그로트는 1840년대에 문필생활을 했는데, 이제 막 피어나는 정치적으로 진보된 영국 중산계급의 열망을 아테네 민주주의라는 이상적인 구도 속에 구현했다. 그 구도 속에서 페리클레스는 벤담주의적인 개혁가로 모습을 드러냈으며 아테네는 방심한 김에 하나의 제국을 획득한 것이었다. 그로트가 아테네의 노예제도라는 문제를 무시한 것은, 그가 소속한 집단이 영국의 공장근로자 계급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사실을 반영한다고 말해도 엉뚱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몸젠은 독일의 자유주의자였는데 1848~1849년의 독일혁명의 굴욕적이고도 혼란스러운 실패에 환멸을 느꼈다. 현실정치라는 단어와 개념이 생겨난 시기였던 1850년대에 글을 쓰면서 몸젠은 독일 국민들이 정치적인 열망을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빛어진 그 혼란을 정리할 강력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그토록 시저를 이상화한 것도 독일을 폐허로부터 구할 강력한 인물에 대한 동경의 소산이고, 법률가이며 정치가인 키케로가 소설가요, 끈적끈적하고 결단력 없는 인간으로 묘사된 것도 1848년 프랑크푸르트의 바울교회의 의회 토의장으로부터 방금 걸어나온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몸젠 역사의 진면목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정말로 그로트의 「그리스사」는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 민주주의에 관한 것뿐 아니라 1840년대 영국의 급진주의적인 철학가의 사상을 말하고 있다 해도 지나친 억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1848년의 독일혁명의 실패가 독일 자유주의자에게 미친 영향을 이해하고자하는 사람은 몸젠의 「로마사」를 교재의 하나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 때문에 이 저작들이 위대한 역사서라는 위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뷰리가 그의 취임연설에서 몸젠의 위대함은 로마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문에 대한 집대성과 로마헌법에 대한 업적에 있다고 말한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된 것에 대하여 나는 참을 수 없다. 이것은 역사를 편집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역사가의 과거에 대한 안목이 현재의 문제에 대한 통찰력으로 밝혀지는 바로 그때에 위대한 역사는 쓰여지는 것이다. 몸젠이 공화국 붕괴 이후의 역사를 계속해서 쓰지 못한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종종 놀라움을 표명했다. 그에게 시간이나, 기회, 또는 지식이 모자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몸젠이 역사책을 쓰고 있었을 매 강력한 지도자가 독일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활발히 활동하는 동안에 강력한 지도자가 국정을 주관했더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문제는 여전히 현실이 아니었다. 어떤 것도 몸젠으로 하여금 이 문제를 로마라는 무대에다 투영하도록 유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제국의 역사는 쓰여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현대의 역사가들 중에서 이러한 현상의 실례를 찾아보는 젓은 용이하다. 지난번 강의에서 트레벨리안 박사의 「앤 여왕하의 영국」이 그가 성장한 휘그 전통에 대한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찬사를 표한 바 있다. 이제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학계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영국의 역사가라고 간주되는 루이스 네이미어 경의 당당하고 중요한 업적을 고려하여 보자. 네이미어는 참다온 보수주의자였다. 그는 역경에 처하면 75퍼센트쯤은 자유주의자가 되는 전형적인 영국 보수주의자가 아니 라 영국 역사가들 중에는 100년 이상이나 볼 수 없었던 그러한 보수주의자였다. 지난 세기의 중반부터 1914년 사이에 영국 역사가는 역사적 변화란 발전을 위한 변화라고 생각하였고 달리 생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1920년대는 변화란 미래에 대한 공포로 연상되는 시기가 되어 가고 있었고 변화라고 하면 더 나쁜 것으로의 변화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보수주의적 사고가 다시 태어난 시기였다. 액튼의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네이미어의 보수주의는 대륙적 배경에 뿌리를 둔 데에서 그 힘과 심오함이 유래되었다. 릭셔나 토인비와는 달리 네이미어는 19세기 자유주의에 뿌리가 없었으며 그것에 대한 향수 어린 후회 문에 고통받지 않았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피다 만 평화는 자유주의의 파산을 드러내었으며 그에 대한 반발은 두 가지 형태 중의 하나로 나타났는데, 사회주의와 보수주의가 그것이다. 네이미어는 보수주의적 역사가로 등장했다. 그는 두 가지 선택된 분야에서 일했는데 그 두 가지 선택은 의미심장하였다. 영국사를 파악하는 대 있어서 그는, 지배계급이 질서는 있으나 대체로 정체된 사회에서 권세와 지위를 합리적으로 추구하던 바로 전 시대로 들어갔던 것이다. 네이미어가 역사로부터 마음을 제거했다고 비난하는 이도 있다. 이렇게 비난하는 말은 매우 적당한 것은 아니나 그 비난했던 사람이 보여주고자 했던 논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죠지 3세의 등극시에도 정치는 아직 열광적인 이상과는 관련이 없었으며, 진보에 대한 열광적인 믿음과도 관계가 없었다. 진보란 개념은 프랑스혁명 이후 세상에 선보인 것이며 의기양양한 자유주의의 세기를 초래했다. 이상도 없고 혁명도 없고 자유주의도 없는 시대, 즉 네이미어는 비록 짧은 동안이긴 하지만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그러한 시대의 나는 초상을 우리에게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러나 네이미어의 두번째 주제의 선택도 똑같이 의미심장하다. 네이미어는 현대의 위대한 혁명, 즉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혁명 -그는 이 혁명들에 대해서는 내용이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은 무시해 버리고 1848년의 유럽혁명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우리에게 보여주기로 선택했다. 실패로 끝난 1848년의 혁명은 솟아오르는 유럽의 자유주의의 희망을 좌절시켰으며 군대의 무력 앞에서 이상이 란 공허하고 군인들과 대치 한 민주주의자들이 란 힘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정치라는 심각한 사업에 이상이 끼어든다는 것은 쓸데없고 위험한 것이었다. 네이미어는 이 굴욕적인 실패를 "지성인의 혁명"이라고 부르면서 도덕감을 되풀이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결론은 단지 추측만의 문제가 아니다. 네이미어는 역사철학에 대하여 체계적인 저술을 한 적은 없지만 수년 전에 발간된 논문에서 예의 그 분명하고 날카로운 어조로 자기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기술했다. "그러므로 사람의 자유로운 마음이 정치적인 원칙과 독단 따위에 말려들지 않을수록 그의 사고는 더 좋아진다. "그리고 그가 역사에서 마음을 제거했다는 비난에 언급하면서 이를 부정하지는 않은 채로 계속해서 기술했다.

  어떤 정치철학가는 현재 이 나라에 일반정치에 대한 주장이 "따분한 침체"에 빠져서 없다고 불평한다. 양당은 정강과 이상은 망각한 채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방안만 모색하고 있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러한 태도가 보다 더 위대한 국가적 성숙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이것이 정치철학의 책동에 방해받지 않고서 오랫동안 계속되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나는 지금 이 견해에 문제의 초점을 맞추자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나중의 강연으로 미루기로 하겠다. 여기에서 나의 목적은 단지 두 가지 중요한 진실을 설명하는 데 있다. 첫, 역사에 접근하는 역사가의 관점을 먼저 파악하지 않으면 그 역사가의 저작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감상할 수가 얼다. 둘째, 역사가의 관점 자체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에 뿌리를 박고 있다. 마르크스가 언젠가 말한 바 있듯이 교육자 그 자신이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현대적 용어로 말한다면 세뇌시키는 사람의 머리 그 자체가 세뇌되어야 한다. 역사가는 역사책을 쓰기 전부터 역사의 산물인 것이다.

  내가 방금 언급한 역사가들-그로트와 몸젠, 트레벨리안과 네이미어-은 말하자면 각자가 단일한 사회적, 정치적 틀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들의 초기 저작과 후기 저작 사이에는 현저한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급변하는 시대에 처한 어떤 역사가들은 그들의 저작에서 단일한 사회나 단일한 사회구조가 아니고 일련의 상이한 질서를 반영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로서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좋은 실례는 위대한 독일의 역사가인 마이네케이다. 그의 수명과 저작 활동시기는 이례적으로 길었는데 그동안 그의 조국의 운명은 혁명적일 정도로 격변하는 일련의 변화로 점철되었다. 여기에 실제로 우리는 세명의 상이한 마이네케를 볼 수 있는데 각기 상이한 역사적 시대를 대변하고 있으며 3권의 주요 저작을 통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1907년에 발간된 「세계시민주의와 민족국가」를 쓸 당시의 마이네케는 자신있게 비스마르크 제국에서 독일의 국가적 이상이 실현되었다고 보고 있으며-마찌니 이후의 많은 19세기 사상가들처럼 -국가주의를 가장 지고한 형태의 보편주의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 시대를 뒤이은 기이한 빌헬름시대의 산물이다. 1925년에 간행된 「국가적 이성의 개념」을 쓸 당시의 마이네케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분열되고 혼란된 마음으로 말하고 있다. 정치의 세계란 국가적 이성과 도덕감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갈등하는 싸움터가 되었는데 도덕감이란 정치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서 결국에는 국가의 생명과 안전보다 위에 있을 수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찌의 물결이 그의 학자적 명예를 앗아버린 1936년에 발간된 「역사주의의 성립」을 쓰고 있는 마이네케는 절망적인 비명을 지르며, 현존하는 것은 옳은 것이라고 인식하는 역사주의를 거부하고 역사적 상대성과 초이성적 절대성 사이에서 불안하게 뒤척이고 있다. 최후로 노년의 마이네케는 조국이 1918년의 패배보다 훨씬 파괴적인 군사적 패배에 굴복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마이네케는1946년에 발간된 「독일의 파국」에서 맹목적이고 무자비한 변화에 역사란 무력하다는 신념 속으로 맥없이 빠져들었던 것이다. 심리학자나 전기작가들은 마이네케의 개인적 발전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역사가의 흥미를 끄는 것은 마이네케가 세 번씩이나-심지어는 네 번씩이나-연속적으로 날카롭게 대립되는 현재의 시대를 역사적 과거로 반영시킨 방법에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가까이에서 훌륭한 실례를 들어보자. 자유당이 영국 정치에서 가졌던 막강한 힘이 이제 막 소멸되었던 우상파괴의 1930년대 에버터필드 교수는 「휘그적인 역사해석」이라는 책을 써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럴 만한 값어치가 있었다. 그것은 여러가지 점에서 특색있는 책이었다. 내가 색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찾아낸 범위 내에서 이 책은 약 130페이지 이상에 걸쳐 휘그적 해석을 공격하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역사가가 아닌 폭스를 제외하고는 단 한 사람의 휘그도 거명하지 않았고, 휘그가 아니었던 액튼을 제외하고는 단 한 사란의 역사가도 거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특색있다. 그런데 이 책이 세부사항이나 자세함에 있어서 부촉한 것이 있다면 불꽃 튀는 독설이 그것을 보상했다. 휘그적 해석이 나쁘다는 점을 역설하여 독자는 그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휘그적 해석에 대한 비난 중의 하나는 그것이 "현재와 관련하여 과거를 연구한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 버터필드 교수는 엄격하고 단호하다.

  말하자면 한 눈을 현재에 두고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역사학에 있어서 모든 죄악과 궤변의 원천이다, 그것은 "비역사적"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로 그것이다.

  12년이 흘렀다. 우상파괴의 유행은 지나갔다. 버터필드 교수의 조국은 휘그적인 전통에 구체화되어 있는 헌법상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운다고 하는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고, "말하자면 한 눈을 현재에 둔 채 과거를 계속하여 생각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지휘했다. 1944년에 출간된 「영국인과 그의 역사」라는 소책자에서 버터필드 교수는 역사의 휘그적 해석이 "영국적"해석이라고 단정할 뿐만 아니라 "영국인의 역사와의 유대"와 "과거와 현재간의 결연"을 열광적으로 언급했다. 이와 같은 견해의 변화에 주목한다고 애서 동료답지 못한 비평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제 1의 버터필드를 제 2의 버터필드를 가지고 반박하거나 술취한 버터필드 교수를 술깬 버터필드 교수와 대면시키는 것은 나의 목적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전쟁 전, 중간, 후에 내가 쓴 저작의 일부를 정독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면 그는 어려움 없이 내가 남에게서 지적한 것과 같이 뚜렷한 나의 모순과 불일치를 지적하리라는 것을 잘 안다. 정말로 지나간 50년 동안 지구를 뒤흔든 사건을 겪어오면서 자기의 견해가 파격적으로 수정되지 않은 역사가가 있다면 그를 부러워해야 할지 확실치 않다. 내가 목적하는 바는 단지 역사가의 저작이 얼마나 밀접하게 그가 활동하는 사회를 반영하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변화하는 것은 단지 사건만이 아니다. 역사가 그 자신도 변화하는 것이다. 역사서를 꺼내들 때, 표지에서 저자의 이름만을 찾아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간행된 또는 저작된 날짜도 찾아보라. 그것이 어떤 때는 보다 많은 것을 드러내준다. 우리가 시간상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뛰어들 수 없다는 철학자의 말이 맞는다면, 마찬가지 이유로 같은 역사가에 의해 동일한 두 권의 책이 쓰여질 수는 없는 것이다.
  잠시동안 개인적인 역사가로부터 세칭 역사적 서술의 일반적 경향이라는 것으로 화제를 옮겨본다면 역사가는 사회의 산물이라는 의미가 점점 더 명백해진다. 19세기에 영국의 역사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역사의 진행이란 진보원리를 입증한다고 간주했다. 그들은 두드러지게 급격한 진보라는 조건이 사회의 이상이라고 표현했다. 역사가 바라는 대로만 흘러가 주는 한, 역사는 영국 역사가가 보기엔 의미가 가득했다. 역사가 방향을 잘못 들자 역사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이단시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토인비는 역사의 직선적 진보라는 이론을 순환적 변화라는 이론으로 대치하려고 필사적인 시도를 하였는데 그것은 몰락하는 사회에서 특별히 나타나는 이상론이었다. 토인비가 실패한 이후에 영국 역사가들은 대부분 손을 들고 말았고 역사에는 일반적인 유형이 전혀 있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취지로 피셔가 말한 것이 진부하긴 했지만 지나간 세기의 랑케가 말한 경우만큼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지나간 30년 동안의 영국 역사가들은 심오한 개인적 성찰과 자신의 다락방에서 밤늦게 공부한 결과로 이와 같이 변심하게 되었다고 누군가 나에게 말한다면 그 사실을 반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은 개인적 성찰과 공부를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간주할 것인데 이는 1914년 이래 우리 사회의 성격과 견해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표시하는 산물인 것이다. 그 사회에서 썩는 혹은 썩지 않는 역사서의 종류만큼 특정 사회의 성격을 의미심장하게 가리켜주는 지표는 없다. 화란의 역사가인 가일은 「나폴레옹, 찬성과 반대」라는 제목으로 영역된 재미있는 논문에서, 19세기의 프랑스 역사가들이 나폴레옹에게 내린 누차의 평가가 19세기를 통해서 변화와 투쟁 과정을 거친 프랑스의 정치적 생활과 사상의 모습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역사가의 생각은 시간과 장소라는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 이러한 진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액튼은 이러한 진실로부터의 도피처를 역사 그 자체에서 추구하였다.

  역사는 다른 시대의 부당한 영향뿐만 아니라 우리들 시대의 부당한 영향, 환경의 횡포와 우리가 숨쉬는 공기의 압박에�

admin



프린트하기 독자한마디


이전으로

 | Home | 사이트구조 | 내용검색 | 전체내용보기 | 내용올리기 |
경남 하동군 금남면 덕천리 1431-5 (전화055-883-4843)   Contact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