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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근본적 비폭력
2006-05-18 19:06:47   read : 1809

기독교의 근본적 비폭력



김준우 교수(감신대학교)

“학교 근처 미군초소를 폭파하겠다며 자살폭탄 특공대를 지원한 이라크의 아홉 살짜리 소년,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 고아원 아이들을 살해하여 그 장기를 매매하는 인간 도살자들 그리고 국제적인 인신매매 상인들….” 《타임》지가 최근 보도한 세계화 시대의 뒷골목의 모습들이다. 또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암살을 공개적으로 요청한 미국의 대표적인 설교자 팻 로버트슨, 공산품 수출을 구실로 제3세계 농민들에게 가해지는 시장의 폭력과 청소년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게임의 폭력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세계화 시대에 기독교 근본주의가 뒷받침하는 전쟁경제체제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을 기아와 전쟁으로 죽게 하고, 온 생태계와 지구 자체를 살해하는 체제이다. 이처럼 인간의 짐승화와 생태계의 파멸을 촉진시키는 폭력적 체제를 기독교 근본주의가 뒷받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기독교인들이 비신자들보다 더욱 폭력적인가?

로널드 사이더(Ronald J. Sider)의 신간 《왜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사는가?(Why Are Christians Living Just Like The Rest of the World?: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 2005)》에서 ‘거듭난 신자들(born-again Christians)’, 즉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의 불신자들과 똑같이 아내를 많이 구타하며, 이혼을 더욱 많이 하고, 비신자들보다 더 인종차별적이라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으로 기독교인들의 신앙 양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미국 중남부의 성경지대(Bible Belt)라는 보수적 지역은 전국 평균보다 50%나 더 높은 이혼율을 나타냈으며(Brad Wilcox 조사, 2001), 인종차별주의, 곧 흑인 이웃을 거부하는 비율이 가톨릭과 일반인들은 11%인데 비하여, 주류 개신교인들은 16%, 침례교인과 복음주의자들은 17%, 남침례교인은 20%로 나타났다(1989년, George Gallup 조사).

또한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예일대학교 교수인 스티픈 켈러트의 설문조사(1987) 결과에 따르면, 교회 예배에 자주 참석하는 기독교인일수록 동물들에 대해 정복자적인 입장을 취하는 반면, 비기독교인일수록 생태학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거듭나고 예배에 자주 참석하는 기독교인일수록 가정폭력과 이혼, 인종차별주의,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비신자들보다 더욱 폭력적이며 반(反)생명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대형교회 설교자는 냉전적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강정구 교수의 ‘통일전쟁’ 발언에 대한 정치권과 검찰, 그리고 일반 시민들의 분열된 태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보수/진보 이념논쟁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이것은 군사독재가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이념논쟁을 억제하기 위해 강화시켰던 혈연 중심의 씨족주의 및 부족주의의 생존논리인 지역주의가 해체되고, 참여정부시대에 들어서 권위주의도 해체되고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한국교회 역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로 분열되어 있다. 한국교회를 분열시키는 중요 문제들은 1) 북핵문제를 포함한 대북한 정책과 대미정책, 2)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 3) 사형제 폐지 문제이다. 대형교회 설교자들이 냉전적 보수주의에 입각하여, 마치 조선일보 사설을 대변하는 듯한 설교를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과거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경험과 레드 콤플렉스도 큰 역할을 끼치고 있지만, 현재 설교자의 성경 해석을 거의 결정짓는 것은 설교자의 사회경제적 계급의식이며, 대형교회 설교자들의 계급의식이 한국 사회의 중·상류층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념논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설교자가 기억할 것은, 역사학자 최상천의 지적대로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가 된 때부터 1987년 6월 혁명으로 ‘조폭국가’를 무너뜨린 때까지 77년 동안의 ‘짐승시대’를 살았으며, 지금 그 짐승시대의 잔재를 극복하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설교자가 사회정치적 문제에 관해 발언할 때 자신의 입장이 적어도 어느 계급을 대변하는 것인지를 반성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천민들조차도 “온 천하보다 귀한” 인간 대접을 받는 하늘나라의 질서를 이 땅 위에 실현하고자 했던 예수님의 정신을 반영한 것인지 아니면 그런 평등주의적이며 탈지배적인 하나님의 질서를 지배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여 처형하는 데 앞장섰던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것인지를 반성해야만 한다.

설교자는 왜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을 능멸하는가?

지난 연말 동남아에 닥친 쓰나미와 금년 여름 미국 남부에 닥친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낸 자연재앙에 대해 어느 대형교회 목사가 비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하였다. 어느 신학대학교 총장 역시 “모든 재난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며, 심판이고 징벌”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루 아침에 부모와 처자식을 잃고 삶의 터전을 잃어 슬픔과 절망에 휩싸인 이들을 위로하기는커녕 그들의 희생이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결국 “천벌에 의한 마땅한 희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재앙의 원인을 “신의 뜻”으로 깔끔하게 해명하려는 서투른 노력이기는 하지만 그 희생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마저 저버린 언어폭력이며, 그 유가족들에게는 자연재앙에 버금가는 종교적 재앙이다.

이런 폭력적 주장을 하는 설교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예수님이 고백한 하나님이 아니다. 예수님이 고백한 하나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마 5:45) 하나님, 곧 선인/악인에 대한 차별없이 무차별적으로 은총을 내려주시는 ‘아빠’와 같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복음주의적 설교자들이 믿는 하나님이 무차별적으로 비신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멸망시키는 하나님처럼 보이는 것은, 그런 설교자들의 하나님이 고대 이스라엘의 부족주의와 기독교 신학의 타락/속량 도식에 포로가 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을 이처럼 저주와 파멸의 원흉으로 둔갑시키면서, 이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명분으로 합리화시키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의 논리와 똑같다.

즉 문둥병에 걸린 사람을 비롯해서 여러 불행을 겪고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가르쳤던 성전 제사장들은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협박을 통해 성전의 재정적 수입을 늘리던 종교 장사꾼들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르친 무차별적 은총과 사랑의 하나님을 ‘율법주의적인 심판의 하나님’으로 둔갑시켜 하나님을 능멸하면서도 이를 ‘복음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학적 넌센스가 아닌가?

기독교가 역사상 가장 잔인한 종교가 된 신학적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원수사랑’에서 출발한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여성 억압, 십자군 전쟁, 유태인 박해와 학살, 마녀사냥, 종교전쟁, 노예제도 승인, 제3세계 민중 학살 등 가장 폭력적이며 잔인한 종교로 둔갑하게 된 정치적 이유는, 기독교가 4세기에 로마제국의 종교가 된 이래 지배자의 종교, 그 체제 유지의 종교가 되어 세속권력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종교가 된 때문이다.

즉 예수님은 한편으로는 당시의 지배체제, 곧 로마제국의 억압과 성전체제의 착취에 맞서서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의 질서에 정반대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르쳤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례 요한의 “묵시종말적 희망을 현재의 사랑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강권적인 “미래에 대한 기대를 현재의 치유와 해방으로 바꾸는” 하나님 나라를 실행하여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하지만 제국의 기독교는 그 하나님 나라를 또다시 신자들이 죽은 다음에 가는 천당으로서의 탈역사화한 내세, 혹은 믿음으로 가는 나라로서의 탈정치화한 내면적 평안의 세계에 대한 가르침으로 둔갑시킴으로써, 역사와 정치의 영역을 세속 권력자들의 정치적 야심에 맡겨 버렸던 것이다.

한편 그 신학적 이유는 첫째로, 기독교의 전통적인 초자연적 유신론은 하나님을 “전능하사 하고자 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극도의 임의성과 강제성을 지닌 전제군주와 같은 분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을 섬기는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고 믿고 하나님의 전능을 모방하여,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가로막는 자들에 대한 폭력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할 수 있었다. 농민전쟁에 대한 루터의 입장이 그 좋은 사례이다.

둘째로, 기독교가 성경 속에 고대 이스라엘의 부족주의와 생존 논리가 만들어 낸 증오와 편견의 본문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하나님을 제국주의와 가부장주의를 뒷받침하는 폭군으로 둔갑시킨 때문이다(참고로 기독교가 성경에 입각하여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 본문들은 Jack Nelson-Pallmeyer, Jesus Against Christianity: Reclaiming the Missing Jesus, 2001; John Shelby Spong, The Sins of Scripture: Exposing the Bible's Texts of Hate to Reveal the God of Love, 2005에 잘 분석되어 있다).

셋째로, 그리스도는 어둠이 전혀 없는 빛만의 존재이며 그런 그리스도의 은총을 입은 구원받은 신자들 역시 전혀 어둠이 없는 존재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어둠과 죄악을 악마의 탓으로 돌리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악마를 멸절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하게 된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의 잘못된 신학이 메시아를 죽였듯이, 기독교의 잘못된 신학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구원하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이 세상의 약자들을 죽이는 ‘나쁜 소식’이 될 따름이다.

하나님의 평화전략은 무엇인가?

성경의 하나님은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으로서, 죽임과 저주의 세상을 생명과 축복의 세상으로 바꾸어 나가도록 하기 위해 믿음의 조상들을 부르셨다. 인류 역사상 가장 폭력적이며 반생명적인 체제는 노예제도와 전리품 약탈에 근거한 제국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역사는 특히 반제국주의운동으로 나타났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제국 등 제국주의적 폭력과 착취에 맞선 하나님의 반제국주의적 평화운동에 대한 고백이다.

하나님의 평화전략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이 세상의 지배체제가 주입시키는 질서와는 전혀 상반된 대안적 질서를 이루어 나가는 대항적 공동체 운동 전략이다.

그 대항적 공동체는 아무나 참석하는 밥상공동체운동과 치유운동을 통해, 지배체제의 억압과 착취와 계급구조에 맞서는 섬김과 나눔의 평등주의적 공동체운동이며, 사회적 차별과 배제에 맞서는 하나님의 무차별적 은총과 포용의 공동체운동이며, 약자들에게 굴종과 체념을 주입시키는 억압적 논리에 맞서서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일깨우는 민중해방적 공동체운동이다.

성전 엘리트들의 ‘거룩의 정치학’에 맞서는 ‘함께 아파하는 삶의 정치학’을 실천하는 긍휼과 용서, 사랑의 공동체운동이다. 팍스 로마나의 폭력과 거짓에 맞서는 팍스 크리스티의 비폭력 진리운동이며 헌신운동이다. 스퐁 감독의 지적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진화 역사상 처음으로 생존투쟁과 안전을 위한 온갖 혈연적 및 사회적 장벽들을 타파하심으로써, 하나님의 평화전략을 극명하게 보여 주신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평화전략은 특히 제국의 종교가 그 지배체제를 확대재생산하기 위해 가르치는 폭력의 신화들, 즉 지배체제의 폭력은 태초부터 존재했던 신의 섭리이며 구원의 길은 그 체제에 순종하는 길이며 종교는 정치경제 문제에는 신경을 쓰지 말고 오직 개인의 영혼구원에만 신경을 써야 한다는 신화를 벗겨 내는 작업부터 시작된다.

나가는 말

오늘날 전쟁경제체제를 뒷받침하는 기독교 근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제국의 종교이다. 제국의 종교에 의해 기득권을 얻게 된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미칠 듯 분통터지는 목소리”(도날드 메서)를 듣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전세계적인 교회의 몰락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 즉 모든 만물이 한 분 하나님에 의해 지음받은 형제 자매라는 신앙과 예수님의 원수사랑이라는 기독교의 근본적 비폭력운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시급한 이유이다. 설교자의 뒤에 걸린 십자가는 우리의 세계가 얼마나 폭력적인 세계인지를 상기시키며, 설교자가 제시할 방향이 어디인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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