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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기독교 문화 개관
2007-10-25 19:22:21   read : 3701

중세 기독교 문화 개관

 

들어가며 -학문과 사상 -중세 대학 -중세 건축과 미술 -중세 문학 -참고문헌

 

들어가며

중세 유럽의 문화가 처음 활력을 되찾은 것은 9세기 초 찰스 대제(Charles the Great: Charlemagne)가 소위 '카롤링 왕조의 르네상스'를 이룩한 때였다. 그러나 중세 문화의 전성기는 중세사회가 기독교와 봉건제라는 새로운 체제에서 안정과 번영을 누렸던 12-14세기였다. 이 시기에는 상공업과 도시가 발달하고 왕령지가 확대되는 등 군주의 권한이 강화되기 시작한 때로 정치적 안정과 함께 경제적 여유가 생겨 학문과 예술분야에서 새로운 활기와 면모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기간 동안 고대 로마문화의 전통 위에 기독교가 융합되어 독특한 중세문화가 창출되었다. 특히 기독교가 지배적인 역할을 하여 중세문화는 기독교교리와 가치관에 의해 지배된 문화였다.

중세인의 생활에 있어서 교회, 장원, 길드 등 사회적 통합이 개인을 구속하는 힘이 강하여 개인적 창의력의 발달을 저해하였다. 따라서 중세문화는 고정적이며 정체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인간중심의 자유로운 감정의 분출이 아닌 전통에 충실히 순응하는 문화였다. 모든 것이 전통과 신에 의해 통제되었기 때문에 중세인은 사회와 자연에 대하여 무력하였고, 인간계와 자연계의 모든 현상이 신의 섭리에 의해 설명된 신중심의 문화였다 1)

학문과 사상

중세의 철학사상은 기독교교리의 기초 위에 이론화되고 합리화되었다. 중세의 가장 지배적인 학문은 신학으로 이 시대에는 철학을 '신학의 시녀 '라고 하였으며 , 단순히 철학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사상과 학문에 기독교가 지배적인 권위를 갖고 있었다.

중세 철학의 발전은 크게 두 시기, 즉 10세기까지의 교부 철학의 시기와 11-13세기의 스콜라 철학시기로 나눌 수 있다. 교부철학의 시기는 기독교 교의와 권위가 확립되어 초월적인 세계관과 교회의 우월성이 주장된 시기로 2-4세기 사이에 걸쳐 로마교회를 지도하였으며, 그 대표적 인물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신국론)에서 원죄설, 은총설, 예정설 등을 기독교 교의의 확립이라는 차원에서 설명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역사의 과정을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의 대립으로 보았으며, 말세는 지상의 세속적 역사 과정 속에 투영된 것이며, 인간 역사의 과정이 곧 신의 섭리의 실현이라고 주장하였다.

중세 신학의 제2단계를 형성한 스콜라 철학시기는 11세기 이후 신앙과 이성, 실재론과 명목론의 사상적 대립을 통하여 서서히 확립되었다. 이러한 철학적 대립은 그리스 철학이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도입됨으로써 야기되었으며, 논리와 철학이 어떻게 신앙과 조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즉 대립된 우주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가 중세 사상가들이 직면한 문제였다.

이러한 대립된 주장은 중세철학자들의 보편논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보편 논쟁'이란 보편적 관념의 실재 여부에 관한 대립된 주장으로서 두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실재론(realism)이며, 다른 하나는 명목론(nominalism)이었다.

이두 견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의견차이로 파악될 수 있었다. 11세기 후반 캔터베리 대주교인 안셀무스는 실재론을 대표하며, 신은 보편적인 실재이며 모든 개체는 보편적인 실재의 반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11세기 말 로스켈리누스는 명목론을 대변하였는데 그는 보편은 개별적인 사물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실재하며 , 따라서 보편적 교회는 없고 다만 수천 개의 개별적 교회가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스콜라 철학의 대립된 견해를 조화, 통일시켜 집대성한 사람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로 저서인「신학대전]은 카톨릭 세계관을 체계화한 것으로 그의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철학상의 이성적 인식과 초 이성적인 신앙의 교의는 다 같이 신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결코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이성이 정당한 원리에서 출발하고 정당한 방법을 따른다면 결코 신앙과 모순되는 결론에는 도달하지 않으며, 삼위일체 최후심판 등의 교의는 이성으로 증명되지 않지만 유추에 의해 해명될 수 있다고 하였다.

아퀴나스는 이성과 신앙, 철학과 신학을 구별하면서도 그 한계를 지적하여 신의 인간에 대한 우월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진리는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고 기독교의 교의를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복잡한 윤리로서 기독교 신앙을 이성과 조화시켜 신학의 과학성을 강조하였다.

14세기에 들어 봉건사회의 붕괴와 국왕의 권력집중, 정치 권력의 재편 과정이 진행되면서 신과 기독교에 부여되었던 정치성은 급속히 약화되었으며, 기독교 신앙이 신흥시민 층 개개인의 마음속에 새로이 내면화되고 순화되어 이성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기에서 신과 신앙의 과학화는 시대적 의의를 잃고, 과학과 신앙의 조화와 화합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3)

일반적으로 서양 중세에는 자연과학이 범람하지 못하였지만 과학적 연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2세기에는 그리스와 아라비아의 과학 서적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수학, 기하학, 천문학, 지리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분야의 연구가 상당한 진전을 보게 되었다. 중세 자연 과학의 산실은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으로 이곳에서는 플라톤 철학에 입각하여 수학이 연구되고, 또한 아라비아 과학의 영향을 받아 실증적 방법을 통한 과학 실험이 행하여졌다.

수도성직자로서 옥스퍼드대학의 수학자였던 로버트 크로셋트의 제자인 로저 베이컨은 수학의 중요성과 더불어 실험과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로저 베이컨은 '모든 것은 경험에 의존한다'고 설명하고 '추리만으로는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여 300년 후 프란시스 베이컨으로 이어지는 과학적 전통의 기초가 되었다.

중세 대학4)

중세의 유일한 지식계급은 성직자였으므로 자연히 교회와 수도원은 신앙의 장소인 동시에 학문과 교육의 기관이 되었다. 특히 수도원은 고전 연구와 필사 등 문화 전승자로서의 역할을 하여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교회와 수도원만으로는 12세기 이후 학문의 발전과 교육의 진흥을 효과적으로 활발해지자 전문적인 학문 연구기관이 필요하게 되어, 대학이라는 새로운 제도가 발달하게 되었다.

대학은 I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 일종의 길드라 할 수 있는 학생 조합 혹은 교수조합에서 시작되었다. 대학을 영어로 유니버시티(university)라고 하는데, 이 말은 라틴어의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에서 유래 된 말로 '전체 '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공동의 목적을 가진 협동하는 집단을 의미하였다.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알려진 곳은 법학으로 명성을 얻은 볼로냐 대학과 신학으로 유명한 파리대학이었다. 볼로냐 대학에서는 법학에 스콜라적 방법을 원용하여 12세기 로마법학의 부흥을 꾀하였고, 후에 남유럽형 대학의 원형이 되었는데 이탈리아의 살레르노 대학, 스페인의 세빌라 대학을 비롯한 시칠리아 스위스 등이 대학의 모형이 되었다.

노트르담 성당 학교로부터 출발한 파리대학은 정치적 중심지인 파리에 위치해 있는 유리한 입지 조건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당시 파리대학은 뛰어난 신학자 아벨라르와 이탈리아 출신 파리주교인 롬바르와 같은 유명한 학자들의 활동에 힙입어 신학의 본거지가 되었다. 12세기에 출발한 파리대학은 스콜라철학의 발전과 쇠퇴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교황 이노센트 3세, 알베르투스, 토마스 아퀴나스, 스코투스, 베이컨 등은 모두 파리대학에서 수학하거나 교수로 생활을 하였다.

파리대학은 북방 지역의 대학인 영국의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오스트리아의 빈대학의 모형이 되었다. 1400년까지 유럽의 대학은 50여 개에 이르렀고 중세 말에는 약 80개로 증가하여 학문과 연구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으며 , 현대 대학의 근원적 형태와 제도를 마련해 놓았다.

모든 대학은 세속 군주나 교회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치권을 얻기 위하여 오랜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이런 투쟁에 의해 교수나 학생은 통상적인 시민적 의무, 즉 병역이나 도시 사법권으로부터 자유로웠고, 대학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는 길드에 대한 감독권 등도 대학이 가지게 되었다.

대학은 또한 주교의 간섭을 벗어나 자유로웠으며, 교수단에게 학생 징벌권이 위임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주장되는 '대학의 자치 '와 학문과 사상의 자유는 이러한 중세대학에서 연유된 것이다. 대학의 교과과정은 그리스 이래의 7교양 학과로 문법 , 수사, 논리의 3교과와 산수, 기하, 천문, 음악의 4교과로 구성되었다.

신학은 가장정통성이 있고 이수하기 어려운 학문이었으며 어떤 다른 학위보다 명망이 높았다. 5) 대학은 일반인 이외에도 귀족이나 성직자들도 등록을 하였고, 공식어로 라틴어를 사용하였다 학생조합의 역할이 강했던 볼로냐와 같은 대학의 학생들은 교수들에게 '무단휴강 금지 ', '수업시간 엄수' ,'강의 철저 '와 같은 요구 사항을 내걸었는데, 당시는 아직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일일이 손으로 써서 훌륭한 강의를 들으며 스스로 필기하는 방법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학생들은 대개 고향을 멀리 떠나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학자금의 조달이 어려웠으며 교통이 불편하여 졸업할 때까지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오늘날 단과대학을 가리키는 칼리지(college)는 이처럼 가난한 학생들을 위하여 부유한 독지가가 기숙사를 설립해 준 것에서 유래되었다. 이런 기숙사에서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무료 혹은 아주 싼값으로 숙식을 제공하였으며, 교사가 함께 생활하면서 학습을 도와 주었다.

칼리지 중에 유명한 것은 1258년 파리의 부유한 상인 로베르 드 소르봉이 세운 소르본 대학, 영국의 주교 머튼의 월터가 세운 머튼 칼리지 등을 들 수 있다. 졸업자는 전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직업에 종사할 수 있었고, 문학 석사는 교사나 행정가로, 법학 박사는 법률가나 관리로, 신학박사는 교수나 고이 성직자로 활약하였다. '중세문화의 꽃'인 대학은 자유정신을 고취시켜 게르만의 침입이래 정체된 중세 문화를 일으키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중세 건축과 미술6)

학문과 교육의 분야와 함께 중세 기독교 이념이 가장 뚜렷하게 표현된 것은 건축, 조각, 그림 등의 미술분야였다. 중세에는 자연이나 인체의 미를 표현하는 미술은 발달하지 못하였지만, 교회와 수도원과 같은 종교적 건축을 중심으로 함 미술은 발달하였다.

중세건축의 양식은 전기의 로마네스크양식과 후기의 고딕양식으로 나눌 수 있다. 10-12세기에 걸친 교회의 건축양식은 대체로 로마식 아치를 갖춘 장중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남부유럽, 특히 이탈리아에서 발달하였으며, 이탈리아의 피사성당, 밀라노성당, 보르시오 교회가 그 대표적 건축물이다.

이 건축의 특징은 평면도가 장십자 형이며, 천장은 반원형의 무거운 돌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상층부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하여 큰 기둥을 세우고, 벽을 두텁게 하였으며, 창문을 되도록 작게 해야 했으므로 내부가 어두운 것이 단점이었다.

12-15세기에 발달한 고딕 양식은 북부유럽,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는데, 이것은 기둥이 가늘고 지붕이 높고 뾰족한 첨탑을 채용하였으며, 벽은 얇고 창문이 많으며 색 유리창(stained glass)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로마네스크양식과 달리 고딕양식은 밝고 명랑한 인상을 주며, 천장이 하늘높이 솟아오른 첨탑은 지상에서 천국을 바라보는 중세인의 종교적 동경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대표적 건축은 프랑스의 노트르담 성당, 아미엥 교회, 그리고 독일의 쾰른 대성당과 이탈리아의 시에나 성당 등이 있다.

중 세 문 학7)

중세문학은 크게 라틴어 문학과 각국어 문학으로 양분되는데, 라틴어는 사회상류층의 공통어로 주로 교회의 예배나 설교. 대학의 강의나 저술 등에 사용되었다. 각국어는 당시 라틴어에 대해 속어라고 불렀고, 그것은 유럽의 일반 대중이 사용하는 언어로 각 지역의 지방어를 일컬었다.

라틴 문학은 일반적으로 산문이나 시에 있어서 좀더 격식을 갖춘 주제를 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라틴 문학은 설화나 소설과 같은 순수 문예작품보다는 역사, 연대기 , 교회 기록문, 서간 등에 주로 이루어졌다. 그레고리의 (프랑크사), 베네라빌리스의 (영국교회사) , 히스팔렌시스의 (어원)등이 이에 속한다.

라틴 문학은 주로 종교적이며 교훈적, 사상적, 공식적인 면이 많아서 그 영향력이 극히 제한된 반면, 속어 문학은 주제가 다양하고 당시의 생활과 풍습을 묘사한 것이 많아 일반 대중에게 큰 호소력이 있었다.

속어 문학을 대표하는 것은 기사 문학으로, 기사문학은 그 주제 , 내용, 형식에 있어 풍부하고 다양하게 발달되어 중세 문학의 정수라 할 수 있다.

기사문학의 주제는 그리스-로마의 신화나 전설 뿐 만 아니라 각국의 민족설화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동시에 기사의 무용과 사랑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것은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발생하여 그후 유럽 각지에 전파되었다. 프랑스의 무훈시로 기사 정신을 노래한 [롤랑의노래] 독일의 민족적 서사시라 불리는 (니벨룽겐의 노래) , 영국의 전설상의 지배자 (아더왕의 이야기 )는 기사들의 충성심과 영웅담을 담은 기사 문학의 대표작이다.

기사문학의 또 다른 형태는 서정시이다. 주로 영웅 서사시가 쓰여진 북부 프랑스와는 달리 남부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에서는 아름다운 여인과 기사들의 사랑을 표현한 서정시가 만들어졌다. 서정 시인들을 프랑스에서는 트루바두르, 독일에서는 니네징어라고 불렀다. 이들은 대다수가 귀족출신으로 봉건 영주들의 궁정을 돌아다니며 귀부인에 대한 기사들의 사랑이야기를 노래하였다.

일종의 로망스라 할 수 있는 서정시는 초기 기사문학에서 나타난 기사들의 무훈, 종교적 윤리성 그리고 충성심과는 달리. 감상적이며 낭만적인 경향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중세기사들이 기독교적 윤리관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적이며 이교도적인 생활 습관에 젖어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세인들의 세속적이며 이교도적인 생활습관은 농민과 도시민들의 생활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표출되고 있다. 중세농민들의 생활은 빈궁하고 무식하였으며, 좀처럼 여가의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종교는 대부분 경건치 못하고 이교도적인 관습까지도 섞여있었다. 예컨대 북부 프랑스의 '당나귀 축제'에서는 모의 미사를 행하면서 향로에 구두를 태우는가 하면, 영국의 '바보축제'에서는 창녀를 주교 席에 앉히는 일까지 있었다.

또한 축제시 무절제하게 폭음하며 광란스럽게 춤을 추거나, 난투극을 벌여 힘를 겨루거나 도박을 즐기기도 하였다. 서민들은 문자를 읽고 쓸 줄 몰랐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작품을 남길 수 없었는데, 14세기에 쓰여진 (로빈후드)나 (피어즈 플라우먼의 이야기) 등은 극소수의 예외에 불과하였다.

도시민들도 마찬가지로 생활이 안정되고 부가 축적되자 내세에 대한 관심보다도 현세적 향락에 더욱 고나심을 갖게 되었으며, 인간사의 경험, 사회적 풍자나 해학이 담긴 통속적인 문학, 즉 동물 이야기나 우화 등이 이들에게는 인기가 있었다. 중세 도시문학으로 통속적인 내용을 담고있는 대표작으로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과 초오서의 (캔터베리 이야기)가 있는데, 이중 초오서의 작품은 성 베케트의 묘지를 찾아가는 순례 행렬의 이야기로 14세기 영국의 생활 관습 사상이 잘 묘사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중세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며 근대적 감각과 사상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참고문헌>

'중세대학에서의 자유의 문제', 이광주, (서양사론)

'중세 문화의 이중 구조성과 문화의 세속화', 임명방 (인하대 인문과학 연구소 논문집)

'중세 대학의 기원', 구룬트만, 이광주 역 (탐구당)

'서양 중세사 연구', 타이어니, 박은구 외 역 (탐구당)

'중세사회는 어떠하였는가?', 페인터, 홍성표 역 (청년사)

각주

1) 중세문화의 이중구조성과 문화의 세속화, 임명방 (인하대 인문과학 연구소 논문집)

2) 중세 철학 입문, 길손, 강영계 역 (서광사)

3) 중세 사회는 어떠하였는가? 페인터 . 홍성표 역 (청년사)

4) 중세 대학의 기원, 구룬트만 이광주 역 (탐구당)

5) 중세대학에서의 자유의 문제, 이광주 (서양사론)

6) 서양 중세사 연구 타이어니, 박은구 외 역 (탐구당)

7) 서양 중세사 연구 타이어니, 박은구 외 역 (탐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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